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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권상연 야고보: 신주가 어이 조상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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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4

권상연 야고보 - 신주가 어이 조상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진리를 목숨 바쳐 증언한 순교자들은 모두 영웅다운 주인공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함께 순교한 순교자들 가운데 한 사람을 주인공처럼 여기고 다른 이들은 주인공을 따라 부수적으로 순교한 조연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순교자들이 함께 심문을 받고 옥고를 치렀더라도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로 신앙을 고백하고 형벌을 받았으며, 온전히 자신의 자유의지로 목숨까지 바친 주인공들이다.

 

'진산사건'은 1791년 신해박해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버린 사건을 말한다.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을 때 조선교회는 그 존립 기반이 위태로운 지경이 되었다. 아직 선교사도 없이 자치적으로 가졌던 집회는 형조에 의해 해산당하고, 유림의 반발로 탄압을 받는 가운데 제사를 폐하기 어려워 양반신분의 초대교회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에 교회의 사목적 지시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여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폐하여 조정으로부터 사형 결안을 받은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으니 이들이 바로 윤지충과 권상연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진산사건을 말할 때 수기를 남긴 윤지충만을 기억하며 권상연도 함께했다는 정도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권상연 또한 진산사건의 위대한 신앙 증거자로 순교한 주인공이다.

 

권상연 야고보(1750-1791년)는 본래 경상도 안동지방 출신으로 충남 공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는데, 그의 부모는 전라도 진산에 정착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권상연은 고종사촌이 되는 윤지충과 이웃하여 살면서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권상연은 자라면서 당시의 조선 젊은이들처럼 유교적인 학문과 윤리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다. 그러다가 사촌인 윤지충에게 천주교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듣고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여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791년 윤지충 바오로의 어머니이며 자신의 고모인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사촌과 함께 애통해 하며 지극한 정성으로 상례 절차를 행하면서 다만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다. 부족함을 보완하겠다는 입장에서 천주교를 수용했던 학자들은 이 제사 문제에 부딪쳐 학문적 태도를 버리고 교회를 떠났다.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천주교를 수용하려 했던 지도자들도 제사 문제에서 한계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가고 있었다. 지식인, 지도자들이 이렇게 교회를 떠나던 때 권상연과 윤지충은 교회의 이 사목지침을 믿음의 자세로 받아들인 신앙인의 모범을 순교로 보여주었다.

 

체포령이 내려지고 진산군수 신사원이 포졸을 보냈다. 권상연은 재앙을 피하여 몸을 숨겼으나, 포졸들이 윤지충의 삼촌을 대신 잡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곧 진산 관아로 밤새워 걸어가 자수하였다. 권상연은 그해 10월 28일 먼저 자수해 들어와 있던 사촌인 윤지충을 옥중에서 만났다. 그들은 함께 옥고를 치르고 심문을 받으면서 서로 격려하였다.

 

군수는 심문했다.

 

"네가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 사실이냐?"

"저는 결코 이단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천주교를 믿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 그것이 이단이 아니란 말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바른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 대에 걸쳐 동양 성현들이 가르치고 실현한 것이 모두 거짓이란 말이냐?"

"우리 교회의 여러 가지 계명 가운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저는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교할 생각은 없고, 다만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어 진산군수가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유교적 입장에서 길게 설명하자 그는 대답했다.

 

"그 모든 것이 천주교 책에는 쓰여있지 않습니다."

 

북경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릴 때 그 전달 구실을 했던 윤유일이, 조선에서 제사를 폐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주교에게 간절히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 주교는 '성실지도'를 따르라고 하였다. 천주교를 믿으려 하면서 천주교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성실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심문에서 "그것은 천주교의 책에는 쓰여있지 않습니다." 했던 것은, 그들이 천주교를 신봉하는 한 천주교의 명에 순명할 것임을 고백한 대목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진술에서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가난한 이나 일반 서민을 벌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내가 제사를 폐함이 국법을 어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하면서 "내가 제사를 폐한 것을 굳이 문책함은 내가 양반이기 때문이 아닌가. 내가 비록 양반의 법을 어겨 양반에게 죄인이 될지언정 교회의 법을 어겨 하느님 앞에 죄인이 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진산군수는 권상연에게 십계명과 칠극을 외우게 하고 이를 적어서 감사에게 보고한 뒤 그에게 "천주교의 십계명에는 왕과 신민의 관계가 나타나 있지 않다. 이것은 임금이 없다거나 업신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권상연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임금님은 온 나라의 어버이이시고 관장은 그 고을의 어버이입니다. 그러므로 그분들에게는 충성의 본분을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십계명 가운데 제4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공술서에서 이미 제사를 올리지 않게 되었으니 신주가 쓸데없이 되었다고 하면서 신주를 조상처럼 모실 수 없음에 대해 "조상과 부모는 나에게 살과 뼈를 물려주셨지만 신주는 나와 아무 관계가 없는 목수가 만든 나무 조각에 불과한데, 그 신주를 조상이나 부모처럼 모시는 것이 오히려 부모와 나의 지극한 관계를 욕되게 한다."고 그 뜻을 명쾌하게 설명했다.

 

마침내 조정에서 사형을 집행하라는 명이 떨어지고 그들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관리는 마지막으로 배교를 강요하고, 조상의 신주를 공경하라고 요구했다. 권상연은 죽어도 배교할 수 없다고 하면서, 신주를 공경하라는 데에 대해서는 "목수가 다듬은 나무 조각이 어이 조상이겠습니까." 하며 끊임없이 예수님, 성모님을 부르며 순교하니, 때는 1791년 12월 8일 그의 나이 41세였다.

 

[경향잡지, 2001년 7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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