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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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국 천주교 창립의 주역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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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3

한국 천주교 창립의 주역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51-1792년)는 광암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삼대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삼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던 양근 땅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의 명문가인 권씨 가문 5형제 중 셋째였다.

 

권일신은 가학을 이어가며 형과 함께 성호 이익에게 사사하였고 뒷날 실학자 안정복의 문인으로 들어가 그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 무렵 광암 이벽은 당대 거유인 이가환과 사흘 밤낮을 토론하여 천주교의 옳음을 밝혔으나 그가 천주교를 믿을 뜻이 없음을 알았고, 복음을 더욱 올바르게 전하려고 학식과 덕망으로 존경받는 양근 땅 감호의 권씨 형제를 찾았다. 지우인 이벽의 열의에 찬 강설을 듣고 크게 감동한 권씨 형제 가운데 권일신이 먼저 입교하여 이벽의 기대를 훨씬 넘어선 활약을 보여주었다.

 

1784년 9월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을 때 권일신은 이미 복음전파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수호자로 모시기로 하고 그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가족 전부를 가르쳐 신자가 되게 하였다. 그의 명성과 학식, 덕행은 주변의 친지들에게 그리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내포 출신으로 형의 제자였던 이존창에게 천주교를 알려주고 중요한 믿을 교리와 신자로서의 본분과 실천방법을 자세히 일러주었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전교하게 하였다. 이존창은 크게 감복하여 루도비코 곤자가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고, 충청도 내포로 내려가 전교활동에 투신해 내포지방의 사도가 되었다.

 

또 전라도 전주 초남에 덕망이 높고 재산이 많아 세력이 컸던 유항검 또한 권씨 형제를 따랐는데, 권일신은 그도 전교하여 그를 한국 초대교회의 전라도 사도로 남게 하였다. 이렇게 권일신의 덕망과 인품으로 한국교회는 서울에서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퍼져나가게 되었고,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이들이 속속 입교하였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가진 정기적인 종교집회가 한국 천주교 복음 선포의 기점이 되는데, 권일신은 정약용 형제, 이벽과 함께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집회는 우연한 기회에 형조의 나졸들에게 발각되어, 이른바 '을사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면서 중지되었고, 김범우만이 형조에 투옥되었다. 이때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 김하진에게 가서 성상을 돌려주고 김범우를 석방하든지, 아니면 함께 처벌해 달라고 용감히 말했다. 그러나 그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벽은 집 안에 감금되고 김범우는 유배형을 받았으며 지도층 교우들은 흩어졌다. 그는 교회 재건을 다짐하며 조동섬과 함께 양근에 있던 용문사에 들어갔다.

 

1787년 박해가 진정되자 권일신은 교회를 떠났다가 뉘우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이승훈,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등과 함께 조용히 교회재건운동을 벌였다. 이때 한국교회의 터전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스스로 신부처럼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성사, 고해성사, 견진성사 등을 집행하기로 하였다. 아직 성품성사와 성직제도, 전례에 대한 교리 지식이 부족했던 그때, 오직 교회재건의 열의에 불탔던 이들은 이른바 '가성직 제도'를 수립하여 평신도로서 성사를 집행했다. 이 평신도에 의한 임시성사 집행은 약 2년 동안 계속되었다.

 

권일신과 동료 10여 명은 대단한 열성으로 엄격하게 재를 지키며 성사와 전례를 거행하였다. 그러나 교회서적을 공부하면서 그들의 이러한 행위가 교리에 위배되고 독성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곧 북경 주교에게 밀서를 보내 문의하였다. 당시 밀사로 윤유일이 선정되어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 북경을 다녀왔는데, 권일신은 그 첫번째 파견 때 북경으로 서한을 보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서 천주교 교리와 윤리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함부로 성사를 집행한 사실에 대한 엄한 책망을 들었다. 주교는 회답에서 일체 성사를 거행할 수 없음을 설명하고 다만 교우들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비신자들을 입교시키는 일은 기쁘고 좋은 일이니 꾸준히 계속할 것을 당부하면서 신부를 보내줄 것을 약속하였다. 주교의 편지를 받은 권일신 등은 모든 신자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될 난처한 입장임에도 교회에 순명하는 자세로 곧 성직수행을 멈추고, 오직 신입교우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며 전교하는 일에만 전심전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 주교의 회신 가운데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하는 내용도 있어 많은 양반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었는데,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제사문제로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는 박해가 일어났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 때 이미 그 신원이 드러났던 권일신은 1791년의 이 '진산사건'으로 홍낙안, 목만중 등에게 천주교 교주로 지목받아 고발당하기 시작했고, 그해 11월에 체포되어 형조에 넘겨졌다.

 

권일신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형리들 앞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께 대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웅변하였다.

 

당시 정조 임금은 권일신의 덕망과 자질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데, 형조의 보고를 듣고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그를 설복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곤욕을 치르면서도 권일신의 신앙고백은 한결같았고, 어떤 유혹과 형벌도 그를 꺾을 수 없었다. 그는 '배교'란 말만 나오면 무섭게 화를 내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권일신을 사형에 처하고 싶지 않았던 정조는 그를 제주도로 귀양가게 하였다.

 

유배지로 떠나기 전 누이동생인 이윤하의 집에 머물던 그에게 충신을 희생시키지 않으려 애쓰던 정조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80세의 노모를 생각하게 하였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착잡해진 권일신의 심정을 이용하여 배교가 아니라 임금께 조금만 양보하는 뜻을 쓰게 하였고, 이를 권일신의 굴복으로 임금께 보고하였다. 그렇게 해서 유배지가 노모가 계시는 예산으로 바뀌었으나 그는 이미 모진 형벌로 기진하여 귀양지에 가던 길에 한 주막에서 객사하였다. 신앙 때문에 당한 그의 고독한 죽음은 민족의 구원사에 더 깊은 인상으로 남게 되었다.

 

[경향잡지, 2000년 6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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