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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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이국승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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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32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이국승 베드로

 

 

순조 원년인 정유년 5월 22일은 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한꺼번에 사형결안이 내려진 하루였다. 이날 강완숙, 문영인 등 다섯 명의 여교우와 김현우 등 네 명의 남자교우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고, 다른 여러 건의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들은 '압송원적관정법'의 방침에 따라 각각 그들의 출생지로 이송되어 처형당했다. 이는 그들의 처형을 봄으로써 지방 주민들에게 겁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날 선고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이국승(1771-1801년)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성겸'이라고 불리었는데 충청도 음성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충주로 이사한 뒤에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더 분명히 알고자 서울로 가서, 그 무렵 경기도 양근의 명문가 권일신, 철신 형제에게 교리를 배웠다. 그는 교리를 공부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이 움직임을 느끼고 곧 교회의 본분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의 변화를 보고, 은총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그는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진산사건이 일어나고 지방 박해가 시작되자 이국승 베드로의 신앙생활이 알려져 관아에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너무나 긴장하고 두려워하여 배교의 말을 하고 풀려났다. 그는 너무도 나약하여 쉽게 배교했지만, 곧 뉘우쳤다. 이국승은 자신의 나약함을 이겨보려고 열심히 기도하고 자주 단식하며 보속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삶을 잘 알지 못한 부모는 자식을 결혼시켜 세속의 일상적 삶 속에서 여생을 지내게 하려 했다. 이국승은 결혼하여 아내를 갖고 자녀를 두게 되면 더욱 계명을 지키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한 차례 배교를 경험한 그는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고자 하여 부모의 결혼 권유를 끈질기게 거절하였다.

 

그는 부모의 끊임없는 결혼 재촉을 피하려고 마침내 집을 떠나 서울로 가서 살았다. 그는 서울에서 독신생활을 하며 집안일에 마음 둘 일이 없어 온전히 착한 일을 하는 데만 정성을 다할 수 있었다. 그의 독실한 삶을 보고 차츰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는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며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의 어려운 일에 헌신하였다. 교우들은 그의 모범을 보고 따랐으며, 외교인들 가운데 그의 행실을 보고 천주교를 신봉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나 행복했던 기간은 짧게 끝이 났다. 순조 원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이 최초의 전국적인 대박해 때 그는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이국승은 일찍이 충주 본관에 체포되어 악형을 당하고 배교했던 때를 회상하며 몸서리쳤다. 그런 때 그가 옥에 들어서면서 금방 옥고를 이기지 못하여 배교한 한 교우를 보게 되었다. 이국승은 순간 자신의 배교와 그 동안의 회한의 삶을 생각하며 뜨거운 연민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그는 배교자에게 "뉘우쳐 회개하라."고 외쳤다. 뜻밖의 외침에 놀란 배교자는 낯선 충고자를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 배교자가 바로 고광성이었다.

 

고광성은 황해도 평산지방의 양민 출신으로 손인원이라는 교우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입교한 뒤 천주교 서적을 열심히 읽고 계명을 지키며 본분을 행하고자,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곧 체포되어 관아에 투옥되었으나 배교하지 않아 서울로 이송되었다. 그는 포청으로 이송된 뒤 더 가혹한 형벌을 견디지 못해 그만 순간적으로 배교하고 말았다. 그때 이국승 베드로가 포청으로 오게 되어 이렇게 옥중에서 만났던 것이다.

 

이국승은 고광성의 배교에 피를 토하듯 열렬히 권면하며 취소하도록 하였다. 그는 준엄하게 꾸짖고 간절히 호소하였다. "그대가 배교한 것은, 자네 자신이 아니고 마귀가 자네를 속여서 말하게 한 것이라고 포장에게 이야기하게."

 

여러 차례 권고를 받고 고광성은 마침내 배교한 것을 철회한 뒤 다시 용감히 신앙을 고백했고, 더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가해지는 혹독한 형벌을 달게 받으며, 더욱 굳게 신앙을 고백하는 영웅적 모습을 보였다. 신앙심을 버리는 말 한마디도 받아내지 못한 형리는 고광성을 형조로 옮겨 사형선고를 받게 했다. 조정에서는 그를 평산으로 옮겨 1801년 7월 2일 처형하였다. 지방민을 위협하려는 조정의 법에 따라 그는 고향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도끼로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아버지의 장렬한 순교를 본 고광성의 어린 딸은 아버지의 순교 신앙을 이어받아 1839년 12월 29일 순교하였다. 그분이 103위 한국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고순이 바르바라 성녀이다.

 

이국승 베드로는 이렇게 열절한 신앙으로, 배교한 신자를 권면하여 순교의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하는 데 기여했다. 오래지 않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동료를 옥중에서 격려하여 순교하게 한 그 자신은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하는 나약함을 보였다. 관원은 즉시 고문을 중지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를 석방하려 했다. 그때 이국승은 갑자기 뉘우치는 마음이 생겨 "지금 나를 풀어주기만 하면 나는 곧 전처럼 천주교를 신봉하겠소." 하고 외쳤다. 관원은 이 어이없는 태도에 놀라기도 하고, 한편 감정이 크게 상해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이국승은 자신의 나약했던 의지를 뉘우치며 어금니를 깨물고 형벌을 견뎌내려 하였다. 그러나 참혹한 형벌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고,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선혈이 튀는 곤장에 뼈가 으스러졌다. 인간의 의지는 잔학한 고문 앞에 너무도 약한 것이었다. 그는 다시 주님을 배반했다. 고문을 중단하고 관원이 배교를 확인한 뒤 그를 풀어주려 하였다. 이국승은 거듭 자신의 배교를 철회했고 이렇게 배교와 취소가 거듭되었다.

 

그의 인간적인 나약함은 여러 번 주님을 배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배반하고 또 뉘우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교리를 생의 의미와 가치의 지표로 승화시키고,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에 기대려던 열정을 바꾸어 겸손하게 주님의 은총에 의지해 갔다.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못난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당신 종이 일체의 교만과 과신을 버리고 겸허하게 의지해 왔을 때 그에게 순교의 영광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가 형장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그대들이 나를 동정하지만, 참으로 불쌍한 것은 주님 은총에 의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요." 였다.

 

그때 그의 나이 30세였으며, 그의 시신은 조카들이 공주에 묻었다.

 

[경향잡지, 2000년 5월호, 김길수 요한(전 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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