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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희년] 하느님 나라의 삐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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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56

하느님 나라의 ‘삐끼’들

 

 

필자와 자주 만나는 수사님이 한 분 있다. IMF 체제 이후 실직자를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실업 급여 문제나 직업 훈련, 일용직 정보 안내와 휴식 공간, 점심 제공 등의 일을 하고 있다. 하루는 벽보용 광고를 붙이고 돌아서는데 초등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풀도 안 마른 광고지를 뜯어 내고 있더란다. “너, 왜 금방 붙여 놓은 광고지를 뜯는 거냐?” 하니까, 깜짝 놀란 아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금새 눈물을 글썽이더니, “우리 아빠가 직장에 못 나가게 되어서 집에만 계시는데 이걸 보여 드리려구요.” 하더라는 것이다.

 

화려한 쇼 윈도와 단란주점들의 찬란한 네온사인은 여전히 번쩍이고, 해외 여행객도 다시 늘어나고, 골프장의 예약도 여전하다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가 환란이라는 경제 위기 속에서 실직의 고통으로 흐느끼는 눈물이 강물져 흐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1. 가난한 이들에게는 무엇이 복음인가?

 

1) 희년과 희년 정신

 

내년이면 서기 2000년을 맞는다. ‘희년’(禧年 : 과거에는 ‘성년’으로 불렀다)이 50년마다 선포되는 것이니, 2000년에는 세기와 천년기가 동시에 바뀌면서 예수님 탄생 마흔 번째의 ‘희년’을 맞게 된다. 서울대교구 각 본당에는 지난해 교구에서 일괄 제작하여 공급한 현수막이 펄렁이고 있다. ‘은총의 대희년!’ 또한 교황의 회칙, [제삼천년기]를 비롯하여 ‘대희년’에 대한 각종 자료들이 제공되고, 교회 간행물마다 특집을 다루고 있다. 교회가 대희년을 유달리 앞서 홍보하는 이유는 내년 대희년의 정신과 시대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실천하려 함일 것이다. 

‘희년’이란 선포다. 단순한 선포가 아니라 주 하느님의 요청에서 오는 선포이기 때문에 ‘현실화’를 뜻한다. 하느님 말씀은 그 자체로 창조 행위다. 지상의 모든 창조가 하느님의 선포 하나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희년 선포는 정신만으로는 부족하며, 무엇인가 세상적 물성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2) 함께, 다시 시작하는 새로움

 

천지 창조와 더불어 노동의 기쁨을 마련하신 하느님께서는 “6일 동안 애써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은 쉬어야 한다.”고 하셨다. 노동에 관계하는 모든 대상이 쉬어야 하기 때문에, “여종, 남종, 식객과 가축까지도 일하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이다. 하루를 푹 쉬고 즐기면서 6일 동안 노동하여 얻은 결실에 감사하고, 그래서 다가오는 한 주간도 기쁨으로 노동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이 날을 ‘안식일’이라 한다. 생산하는 노동을 ‘시간성’으로 말한 것이 안식일이라면, 생산하는 땅에 적용한 것이 안식년이다. 7년째 되는 해에는 농업과 목축의 생산 토대인 땅도 쉬게 했던 것이다.

 

본래의 시작에는 모두 같은 조건이었으므로 소유의 차이가 없었으나, 사람마다 그 능력과 기회와 효율에 따른 차이가 있기 마련이어서 생산 결과와 축적의 격차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자를 받고 빌려 주는 빚과 저당이 생기고, 합법적 거래로 소유의 집중이 이루어졌다. 소유의 격차로 계급과 인격의 차별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그것은 창조의 뜻에 어긋난 것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50년에 한 번 정도는 자기 소유로 삼고 있던 남의 토지와 노예와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원상 복귀시키고, 빚을 탕감해 주어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시작하도록 명령했던 것이 바로 ‘희년’이다. 이스라엘의 임금에게는 희년을 선포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3)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인가?

 

창조는 원초적 생명력이다. 인간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이란 원초적 생명력을 복원함이다. 안식일과 안식년, 희년 설정의 근본 목적은 생명력의 회생이며 동시에 공동체가 '함께 시작하는 새로움'이다. 노동의 삶이 역겹게 느껴진다는 것은 노동이 상품으로 전락되어 생명력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한다.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인간도 자연도 휴식을 통한 자정(自淨)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휴식만으로 안 되는 것이 소유권 이전 관계다. 그래서 인간의 구체적 삶의 요소인 채권, 채무의 관계를 포함시킨 것이 ‘희년’이라는 장치다.

 

분명히 이해해 둘 것은 안식년이나 희년은 주인과 채권자, 곧 가진 자를 대상으로 한 법이라는 것이다. 희년은 경제적인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과 경제 문제 때문에 비인간화된 사회적 질서를 원점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 생겼다. 그러니까 ‘희년’이란 성서나 종교적인 언어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우선 경제적 언어이며, 사회적 실천 행위이다. 그렇다면 희년이 선포되었을 때는 분명히 가진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이와 빚을 탕감받고 해방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기에 희년 선포가 기쁜 소식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다.

 

 

2.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

 

1) 실천되지 않은 희년

 

사회 문제를 고뇌하면서 성서를 읽다 보면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가장 빛나는 언어가 ‘희년’임을 느낄 것이다. 희년이라는 놀라운 제도적 장치가 있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환희에 찬 일이다. 그래서 ‘희년’(禧年)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禧)의 해(年)일 수밖에 없다. 빈곤은 상대적이어서 하나의 규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처지의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들로 규정할 수 있는가? 정신적 가난, 영적인 가난, 물질적 가난, 비참한 처지의 가난, 규정하는 기준과 각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성서에 나타난 희년 선포의 대상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음을 알 수 있다. 희년이 성서에 명기될 시대의 가난한 이는 분명히 경제적 해방이 필요한 이들이었다. 전답을 빼앗긴 것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자식과 아내를 저당 잡히고 노비로 전락한 문제도 채권/채무의 관계, 곧 경제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희년이 그토록 감동적인 제도이며, 하느님이 아니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환희에 차고 빛나는 법일진대 구약성서 어디를 봐도 희년의 선포가 현실화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출애굽 사건도 희년의 일종이고, 바빌론 포로 석방도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억지 춘향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희년에 대한 근거와 성서를 인용하지만 딱히 선포가 주도된 사건이나 주인공의 이름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 희년을 선포하며 등장하신 예수님

 

그 희년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사건이 역사적 인물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게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에 입신하시면서 가장 먼저 나자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함’이 당신의 천명임을 선언하시게 된다. 그런데 구약의 희년 선포가 경제 사회적 해방이었는데 비해 나자렛 예수님의 희년 선포는 소외된 이를 해방하는 차이를 드러낸다. 이사야 예언서 61장을 인용한 희년 선포는 가난한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그것은 감옥에 갇힌 이를 석방하는 것, 질병과 불구의 고통에서 치유하는 것이 골자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감옥에 갇힌 이를 직접 석방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시대가 변하여 그럴 만한 힘은 세속 권력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갈릴래아 활동에서 두 가지 성격의 일을 하시는데, 하나는 불치의 질병과 불구자들을 치유하시는 행위요, 또 하나는 마귀 들린 자들에게 악령을 추방하시는 구마(救魔) 행위였다. 치유와 구마, 이 두 가지가 예수님 기적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그 공통점은 가정으로부터 격리되어 소외된 사람들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낸다는 점이다. 구약의 가난한 이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억압받는 사람들이었다면, 갈릴래아의 가난한 이들은 인간 사회에서 소외당한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 기적의 수혜자들이, 일부 사건들을 제외한다면(가령 백부장의 하인, 회당장의 딸의 치유 등) 한결같이 빈민들임을 알게 된다. 당시에도 의료 사업이 있었기에 부자들은 예수님께 치유를 바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이들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경제적 이유를 포괄하는 ‘소외된 자’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3)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식별

 

그렇다면 우리 시대, 현대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시대의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첫째는 경제적 약자로서 부익부 빈익빈의 순환 속에서 좌절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둘째는 재물과 소비주의에 매몰되어 인간성에서 스스로를 소외시킨 이들이다. 그들은 소비를 부추기는 상품 광고에 의식을 박탈당하고 편의적 삶에 길들여진 이들로서 현대 기술 문명과 편의주의의 노예가 되어 생명력과 같은 환경 적응 능력을 잃고 개인주의와 이기심, 탐욕으로 병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기에 경제적 약자보다 더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이다. 자아에게 소외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다. 

 

과거의 억압이 독재 권력에서 오는 정치적 억압이었다면, 오늘날의 억압은 탐욕과 이기심에서 온다. 가령 IMF 체제 이후 퇴출, 빅딜 기업의 노동자들의 단체 행동이나 개혁 법안에 반대하는 교원들, 사법고시 증원을 반대하는 변호사 등을 보자. 대학 시절 자신의 동료들이 민주화를 위해 싸우며 무자비하게 끌려가고 감옥에 갈 때, 조소하고 과격하다며 외면하고 비난했던 이들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서민들이 밀린 은행 이자를 내지 못해 집달관의 습격을 받고 거리로 내몰릴 때, 연리 2%의 특혜 대출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돈놀이를 하고 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즈음에야 수천 명씩 머리띠를 두르고 학생들보다 더 과격하게 결사 항전을 외치고 있지 아니한가? 이내 해결되는 내용은 퇴직금 몇 개월 분을 더 받는 것으로 합의하는 것이다. 서너 달 급료를 더 받아 내기 위해서 그런 결사 항전에 나설 수 있는 이들이 왜 부정 부패와 독재 권력 앞에서는 그토록 점잖았단 말인가? 기득권을 누리고자 개혁을 반대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참으로 무서운 이기심과 탐욕의 얼굴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이들이야말로 의식으로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도 희년이 선포되어 새로운 인생관과 세계관으로 해방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4) 빈자들이 기다리는 기쁜 소식

 

경제적 약자에게 기쁜 소식은 부자들이 모두 망해 버리거나, 그들이 가진 것을 몰수하여 무상으로 나누어 받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어떤 요령으로 돈을 벌었건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이상 거룩한 노동을 상품만으로 계산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정 부패의 부당한 수단으로 선의의 경쟁자들을 격퇴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정경 유착으로 자금을 독식하면서도 시장 논리의 합법성을 내세우며 중소 기업을 삼켜 치우는 식인 문어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필요할 때는 ‘가족처럼’이라더니 ‘정리 해고’의 칼자루를 휘두르지 말라는 것, 단체 행동권을 질서라는 이름의 폭력으로 진압하는 비인간적인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정의로운 경쟁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이 인정받고 정당하게 일어설 수 있는 사회 환경이 바로 기쁜 소식인 것이다. 기업하는 목적이 종업원들과 함께 나눠 먹고 공존하는 데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용자가 골프를 칠 때, 노동자들이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포근한 저녁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3. 종탑 위로 오르는 2000년 아침의 햇살

 

1) 다시 대희년을 생각하며

 

사회적으로 저명한 이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보면 종종 망자의 약력 소개가 있다. 그의 출생일이 1899년 이전이었다면, 고령이었구나 하는 생각에 앞서 “18세기와 19세기를 동시에 살았구나!” 하는 일종의 경외심을 갖게 된다. ‘삼일운동도 목격했고, 정신대와 징용의 일정 치하도 살았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변동의 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서 그 역사적 삶에 경외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가 살아온 인생 여정에서 지녀 온 역할에 대한 신뢰이기도 하다. 세기가 바뀌는 역사를 목격하며 살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자체로 소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과 같다. 

 

바로 우리들, 1999년도 이전에 태어난 이들은 20세기와 21세기, 그리고 1000년대와 2000년대를 동시에 살아간 역사의 목격 증인들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 자신과 교회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두 세기에 걸쳐 살았다는 점은 은총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연히 태어난 시간이 아니라 은총의 삶이 되기 위해서는 시대적 소명의 삶이 반영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를 살아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희년의 해방을 선포했는지? 아니면 과거의 희년마다 그렇게 해 왔듯이 그럭저럭 행사로 지나갔는지 어딘가에는 기록될 것이다. 다만 매스콤의 발달로 왁자지껄한 점만은 확실히 다르겠지만 말이다. 역사는 언제나 위대한 판관이다. 교회가 대희년을 정말 은총의 해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 시대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지금 교회가 할 수 있는 구체적 해방의 내용을 찾아야 할 것이다. 

 

2) 기득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가 

 

희년은 경제적 문제로 발생한 사회적 불평등의 해방이었고, 그것은 가진 이들의 포기를 전제한 것이었음을 살펴본 바 있다. 다음으로는 소외된 이들을 복귀시킴으로써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해방이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은 나자렛 예수님의 가난한 이에 대한 애정과 투신의 삶에서 온 것이었다. 교회가 대희년을 맞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서는 첫째,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어떤 것들이 불평등한 상황인가?’에 대한 인식이 앞서야 한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못한 상황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가령 분배의 불평등, 소유와 빈부의 격차,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 지역 갈등, 신자유주의 경제 문제 등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아보는 것이다. 

 

둘째, ‘가진 이들이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이다. 희년의 주체는 경제적 소유자와 권력의 지배자들이다. 그들에게는 희년을 현실화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가진 이들의 포기 없이는, 희년은 공염불과 일회성 행사에 불과하고 만다. 권력을 가진 이들, 경제적 힘을 가진 이들, 사회적 지위와 고급 라이센스를 가진 이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대의 개혁에 동의할 것인가? 교회는 경영자의 지위를 양보하고 복음 정신을 고수하는 파수꾼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중산층에게 포기하는 희년을 살도록 강권할 수 있는가? 교회는 정작 다가오는 대희년에 희년을 선포할 각오는 하고 있는가? 

 

3) 가난한 이에 대한 교회의 실천들

 

희년 선포의 대상이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에서 소외된 이들로, 그리고 이기심과 탐욕에 포박당한 이들에 대한 해방의 관점으로 변동되어 왔음을 본 바 있다. 우리 시대의 희년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교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비유할 때 ‘어머니와 교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기에 예수님의 삶을 핵심적으로 정리해 추가한다면 ‘소외된 자의 벗’이다. 첫째, ‘어머니’란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 실존적 처지에서 위로 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교회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이며 가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교사’란 이기주의와 탐욕에 눈먼 이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선생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벗’이란 소외된 이들, 빈곤과 무지, 환경과 신체적 장애로 무능력한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살려 주는 친구여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는 이미 이런 역할과 기능의 일부를 열심히 해 왔다.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한다는 것은 사회 복지 활동을 강화한다는 말이 된다. 교사로서의 기능에 더욱 진보한다는 것은 이기주의와 물질주의, 소비주의에 매몰된 이들을 의식화로 일깨우고, 부정 부패한 정치 사회적 상황에 도덕적 압력자로서 민주주의와 인권, 사회 정의의 구현과 민족 통일 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노동자, 도시 빈민, 재소자 등 특수 사목에 파견되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교회의 활동 가운데 가장 중심적 가치가 되어야 할 것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다. 

 

4) 가난한 이들을 편드는 교회

 

희년은 ‘가난한 이들’이라는 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이미 사회 교리는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가장 큰 원리로 삼고 있다. ‘선택’이라 함은 투명하게 말해서 빈자와 부자의 갈등 가운데서 중립에 서지 말라는 말이다. 중립에 서는 것은 처세의 미덕은 될 수 있을지언정 복음적이지는 않다. 중립에 섰다면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셨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과 인간사에 절대성은 없다. 부자와 빈자의 대립에서 가난한 이들의 주장이 반드시 옳기 때문에 그들 편에 서라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이 부자보다 더 착하거나 정의롭다는 말이 아니다. 부자들은 모두 악하거나 불의하다는 말도 물론 아니다. 빈자들은 배운 것이 없어 부자들보다는 교양도 부족할 수 있다. 시기심과 질투심, 물욕은 더 심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교회가 일단 가난한 이들의 편에 먼저 서라는 것은 오직, 그리고 다만 상대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에 대한 선택은 당파적 편들기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그래도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교회에는 빈민 계층으로 갈수록 신자 비율이 확실하게 낮아지고 있다. 그것은 교회의 시선이 그만큼 중산층 이상의 눈높이에 있음을 반증한다. 도시 사회 본당들의 프로그램들을 관찰하면 그것이 중산층을 겨냥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M.E. 꾸르실료, MBTI, 애니어그램 … 그런 프로그램들에 빈민들이 참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프로그램으로 교육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필요하다. 그러나 두 번 할 때, 한 번 정도는 빈자들의 처지에 맞는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실행하자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고 있지 않은가? 

 

사목자가 중산 계층 교우들과의 친교에서 얻는 기쁨과 재미가 더 큰 것은 부정하지 않겠다. 헌금과 건축 기금 등에서도 도토리 백 번 구르는 것보다야 호박 한 번 구르는 것이 효과적임도 인정한다. 부자를 소외시키는 것이 사목이냐는 반론도 타당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눈높이의 친교는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실이다. 

 

5)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자 

 

필자는 한국 사회 상황의 변동을 지켜보면서 어렵게 이룩한 민주 항쟁의 결과물과 그 좌절이 정치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본성적인 이기주의에서 온다고 판단한다. 집단 이기주의는 없다. 집단적 결속도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한에서 가능할 뿐이다. 교회조차도 중산층화, 개인화되어 가는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젊은이들은 더욱더 소비주의에 연약하고 공동체 의식은 그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새로운 교회의 시작은 젊은이들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먼저 “소비주의 시대에 청년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를 질문으로, 일명 ‘예수살이 운동’을 조용히 시작하고 있다. 소유로부터의 자유, 이웃과 함께 하는 기쁨, 세상의 변혁을 위한 투신을 정신으로 강조한다. 2단계 교육에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를 파견 미사에서 봉헌하자.”는 제안으로 참가자 전원이 ‘장기 기증’을 약속했다. 동시에 “월급의 10분의 1을 가난한 이와 나누겠다.” “부모의 유산을 공익에 사용하겠다.” “‘결혼한 후에는 20평 이하의 주택에서 살겠다.” “사회 운동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겠다.” 등의 약속을 봉헌했다. 

 

교회는 대희년의 현실화를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의 마음, 청년의 가슴으로 돌아가면 대희년은 현실화된다. 우리 시대 주님의 은사는 대희년의 결단에 있다고 확신한다.

 

 

4. 결어:하느님 나라의 ‘삐끼’들

 

희년과 가난한 사람들을 주제로 한 졸고를 마치며 속칭 한마디를 사용하겠다. 그 전에 사목했던 본당의 주변에 단란주점이나 술집이 많은 환락가 골목이 있었다. 술집 건물 주변에는 호객 행위를 하러 쫓아다니는 어린 청소년들이 있다. 어디서 유래한 용어인지는 모르나 이른 바 이들을 ‘삐끼족’이라고 부른다. 가난한 사람들! 그들은 부자를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삐끼들이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열차표가 되는 자선의 기회를 제공하며 예수님의 편이 되게 한다. 환락가의 삐끼를 따라가면 술집과 타락에 이르겠지만, 하느님 나라의 삐끼들을 따라가면 생명과 완덕의 길에 이른다. 그들은 우리 시대의 길잡이로 파견된 도시의 천사들이다.

 

[사목, 1999년 3월호, 박기호(서울대교구 시흥4동 천주교회 주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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