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모카테키스타회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27 ㅣ No.68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모카테키스타회 (상)

 

 

성모카테키스타회 창립자 게마인더 신부가 회원교육을 하고 있다.

 

 

창립과 영성

 

 

재속회는 사제 혹은 평신도들이 세상 안에서 복음을 전파할 목적으로 회헌에 따라 혼자 혹은 가족, 형제적 공동체와 함께 일정한 조건을 가지고 생활하는 수도회를 말한다.

 

1947년 교황 비오 12세가 사도적 헌장 「섭리의 어머니이신 교회(Provida Mater ecclesia)」를 반포, 수도 생활 범위를 수도회 사도직회 뿐만 아니라 재속회까지 확대시키면서 교회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게된 재속회는 법적 인가를 받은 비교적 자유롭고 새로운 형태의 수도 단체라 할 수 있다.

 

2차 대전후 창설

 

「동정으로 어머니 되신 성마리아의 카테키스타회」. 「성모 카테키스타회」라는 약칭이 익숙한 이 재속회는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 중이던 게오르그 게마인더 신부(Georg. J. Gemeinder. S.V.D 신언회)가 제2차 세계대전후 극심한 혼란기를 겪으며 재건의 움직임 속에 있던 일본 사회를 경험하면서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고 세상 속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며 세상을 그 내부에서 복음화 하는 재속회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설립했다. 

 

전교지역에서 창설된 최초의 재속회로 알려진 성모카테키스타회는 명칭이 뜻하는 대로 「성자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그분의 뜻대로 생애를 바치신 동정 마리아를 봉헌 생활의 모범으로 하고, 깊은 모성애로 성자 그리스도와 형제들에게 봉사하며 자신을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치신 성모 마리아를 사도직 거울로 삼아 그분의 보호를 청한다」는 기본 영성을 드러내고 있다.

 

창립자 게마인더 신부는 1921년 말씀의 선교 수도회(신언회)에 입회, 1929년 5월 사제서품후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고베에서 1년 동안 생활한 후 아끼다에서 활동하다 젊은 여성들의 수양(修養) 모임인 『성모 자매회』를 결성, 교회에서 봉사할 지도자들을 양성하였는데 이것이 성모카테키스타회 창립의 계기가 됐다.

 

1941년 브라질에 부임했다가 1948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게마인더 신부는 본격적으로 성모카테키스타회 설립 계획을 진행시켰는데 때마침 비오 12세 교황이 1947년 2월 재속회에 관한 교령 「Probida Mater Eccl esia(섭리의 어머이신 교회)」를 반포하게 되면서 재속회 창립이 하느님 섭리와 시대에 적합한 판단이라는 의지를 갖게 됐고 교령에 맞는 재속회 설립 준비에 들어갔다. 

 

50년 교리신학원 개교

 

그는 1950년 4월 성모 카테키스타 학원인 교리신학원을 개교했으며 1954년 2월 11일 나고야 교구장 승인을 받고 정식 재속 수도회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후 1955년 3월 25일 6명의 첫서원자 탄생를 탄생시켰고 1962년 제1회 총회를 개최, 최초 총장과 4명의 평의원 선출 및 관구 지구를 설립했다.

 

게마인더 신부는 1979년 8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선교 열의를 인정 받아 「성 십자가 훈장(Pro Ecclesia et Pondifice)」을 수여받았다.

 

성모 카테키스타회는 1982년 4월 20일 김수환 추기경의 초청으로 시모츠지 미호꼬, 나리따 도모꼬 두 수녀가 파견됨으로써 한국 교회에 첫 발을 디뎠다.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10일, 이주연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모카테키스타회 (하)

 

 

아시아 재속회 모임을 다녀온 성모 카테키스타회 회원들이 모임 결과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사도직 활동

 

「당신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생명체의 두 가지 강한 힘으로부터 은총을 얻어 어느 신비적인 합류점에서 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신자의 특성인 재속성안에서 살며 그 재속성은 실로 하느님께 봉헌된 것입니다. 봉헌된 당신들은 정신적이며 종말적인 가치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자로서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1972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재속회 총장에게 주신 말씀).

 

성모카테키스타회는 「주님의 복음이 만민의 것이 되기를」이라는 이상을 가지고 사도직을 행한다. 특히 교회가 아직 뿌리를 깊이 뻗고 있지 않는 사회나 국가, 즉 포교지에서의 선교, 사목에 협력하는 것을 그 사명으로 받아들인다. 

 

재속회 성격을 지닌 성모카테키스타회는 일반 수도회와 달리 「회」(會)의 입장에서 활동을 벌이지는 않는다.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공소, 학교, 유치원, 사회복지 관계, 사무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즉 자신의 전문직을 가지고 사회와 관계를 가지며 활동하고 있다. 

 

그렇게 사회가 필요로 하는데 따라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활동일지라도 「세상을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바꾼다」는 카테키스타(교리교사)의 사명으로 활동한다. 

 

회원들은 그리스도안에 특별한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를 이루어 활동하며 생활 현장과 조건에 따라 혼자 생활을 하느냐 혹은 다른 회원과 함께 공동 생활을 하느냐가 결정된다.

 

복음적 권고에 따라 정결, 청빈, 순명의 서원과 사도직에 전 생애를 봉헌할 것을 서약하는 이들은 또한 세속에 살면서 누룩과 소금과 같이, 세상이 내면에서부터 그리스도적인 쇄신이 되어가도록 노력한다.

 

한국에서 성모카테키스타회 진출이 이뤄진 배경에는 몇몇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창립자 게마인더 신부는 진작부터 한국에서 성모카테키스타회 회원이 탄생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당시 회가 운영 중이던 교리신학원에는 한국 유학생도 있었고 또한 독일에서 유학중인 일본 회원 기숙사에도 한국 유학생들이 몇명 있었다. 

 

그 회원들은 한국 유학생들과 생활하는 동안 매우 인상적인 일을 경험했다. 1974년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희생됐을 때 그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 학생들이 『우리들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며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며, 『한일간의 역사 앞에 자기는 어떻게 처신을 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그 회원들에게 육영수 여사의 암살 사건은 한국을 보다 더 가까운 나라로 느끼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 교리신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졸업생들로부터 한국에서도 재속회가 해야할 활동이 많을 것이라는 권유를 받게되었다. 

 

이런 일들과 김수환 추기경 초청으로 인해 1982년부터 한국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성모카테키스타회는 1986년 5월 4명의 한국 자매가 첫서원하는 결실을 맺었고 1994년 2월에는 3명의 회원이 종신서원식을 가졌다.

 

지난해 4월 한국진출 2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했던 성모카테키스타회 한국지구는 2003년 1월말 현재 4명의 기초양성기간자, 17명의 영구봉헌자(종신서원)를 두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8월 17일, 이주연 기자]



781 1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