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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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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5 ㅣ No.55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상)

 

 

창립자 성 빈센트 드 뽈과 루이즈 드 마리약. 수녀회의 영성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한다.

 

 

창립과 영성

 

「하느님 섭리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께 봉사함」을 목표로 1841년 3월 25일 독일 파데르본(Paderborn)에서 설립된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는 「자비의 삶」이 기본 영성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주님이시고 스승』이라 가르치셨고 『이것이 존경심과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봉사해야 하는 이유이며 가난한 이들을 찾아갈 때는 겸손과 소박과 사랑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한 성 빈센트 드 뽈(St. Vincent de Paul). 그리고 그에게서 영적 지도를 받았던 성녀 루이즈 드 마리약(St. Luise de Marillac)의 정신과 가르침이 그 영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는 발원지였던 독일 파데르본이 19세기 들어 신흥 공업지대로 급부상 하게 되자 병든 노동자 극빈자 층이 발생했고 그들과 같은 소외계층에 관심을 보이던 프리드리히 클레멘스 프라이헤르 주교가 병원 사도직 필요성을 절감 하면서 태동됐다.

 

비슷한 시기 수도생활에 뜻을 가진 국립병원 간호사 몇 명이 프라이헤르 주교를 찾아와 수녀회 입회를 표명하고 프라이헤르 주교는 이를 계기로 독일 프랑스 국경에 위치한 스트라부르의 성 빈센트 수녀회에 양성을 의뢰하게 된다.

 

수련과정을 마치고 착복식을 한 이들은 자신들의 근무지였던 국립 병원 일부를 모원으로 하여 마침내 「파데르본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를 설립했다.

 

수녀회 영성의 모범과 정신이 되고 있는 성 빈센트 드 뽈은 1581년 남프랑스 푸이(Pouy) 지방 농촌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농부들의 일과 가난을 알게 되었고, 농부들의 삶과 가난이라는 두가지 사실은 그의 삶에 중요한 척도가 됐다.

 

가난을 통해 그리스도를 섬겼던 빈센트 성인의 모범과 정신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 해서 19세기 무렵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한 취지로 시작된 수도 공동체들에 영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 눈앞에서 흘리는 땀과 희생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라고 한 말은 그가 남긴 유명한 금언들 중 하나.

 

그만큼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 안에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정신으로 이루어 나갔고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사랑, 관상과 활동을 더 이상 분리된 두 개념이 아닌 하나로 조화시켰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의 주님」으로 즐겨 표현했던 성인은 이 말대로 실천하며 살았고 또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쳤다. 또한 성인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공경심과 섬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애덕의 정신을 이어받은 회원들은 활동의 근본 동기를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또한 예수를 섬기고 공경하는 것을 활동 목적으로 삼아 교회와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며 가난한 이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고자 노력한다.

 

빈센트 드 뽈과 루이즈 드 마리약이 남긴 것은 「주님을 뒤따르는 삶을 살아간 것」이다. 주님을 뒤따르는데 있어 이들은 언제나 하느님 뜻이 무엇인가 알려고 노력했고 궁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자신들의 과제를 찾았다. 예수의 구원사업을 계속해서 수행해 나가고 곤궁한 사람들의 처지를 돕는 것이 이들이 행한 모든 일들의 바탕에 있었다.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모토로 하면서 이같은 빈센트 성인의 영성, 즉 가난하고 불쌍한 환자 임종자 극빈자 수인 고아 미혼모 노약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자비」를 핵심적 생활 지침으로 삼고 사랑과 봉사로 복음적 권고를 따르는 생활을 통해 자신들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1월 1일, 이주연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하)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은 크게 의료.사회 복지 사업으로 나눠지는데, 창설자 성 빈센트의 영성에 따라 곳곳에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국진출과 사도직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의 한국 진출은 초대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의 초청으로 이루어졌다.

 

수녀회가 진출하던 1960년경 한국 사회는 전쟁 복구 처리만 마무리 한채 식량과 약품및 물자 대부분을 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수원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병원은 고사하고 진료소조차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1963년경 윤공희 주교는 보다 원활한 선교를 위한 병원 사도직 수도회 필요성을 절감하고 주로 독일에서만 활동 중이던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에 한국 진출 의사를 타진했다.

 

선교사업을 모색 중이던 수녀회 측에서도 윤주교의 초청을 쉽게 승낙하게 됐고 마침내 1964년 수녀회는 수원시 팔달구 지동 93번지 일대 수녀회 부지를 매입한 후 지원자를 모집 그해 11월 6일 9명의 첫 한국인 지원자들이 양성을 위해 독일 모원으로 떠났다.

 

또한 1965년에는 독일에서 세명 수녀가 입국, 수원지역에 자선병동을 갖춘 병원을 짓기로 결정했고 이로써 성 빈센트 병원이 세워지게 됐다.

 

1971년 한국 지부로 승격된 수녀회는 관구 제도가 없는 독일 모원으로 부터 독립, 1990년 「수원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로 교황청인가를 얻었으며 설립 총회를 열어 교구 설립 수녀회로 성장하게 됐다.

 

수녀회의 사도직 활동은 크게 의료 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으로 나눠진다.

 

대표적인 의료사업으로서는 1967년 개원한 성빈센트 병원을 운영하는 것으로 이 병원은 수녀회가 한국 안에서 빈센트 성인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제일 먼저 시작한 사도직이다.

 

가톨릭대학교 제5 부속병원인 성빈센트 병원은 가톨릭 중앙의료원 산하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개원 당시에는 자선의료를 실시했으나 1977년 전 국민의료보험이 시작되면서 무료진료는 감소, 이 보다는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환자들의 경제적 기타 어려움들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다.

 

1999년 신축 병동이 마련되면서 호스피스 제도를 마련한 성빈센트 병원에는 현재 50여명 수녀가 봉사하고 있다.

 

사회복지 사업으로는 양로 복지시설인 「성녀 루이제의 집」, 「사강 보금자리」, 「성녀 안나의 집」과 미혼모 시설인 「생명의 집」, 청소년 사도직 「성빈센트 청소년회」 운영 등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들어 빈센트 성인의 자비 정신을 좀 더 폭넓게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모색하던 수녀회는 1992년 경기도 화성에 「성녀 루이제의 집」을 열었고 이어서 「사강 보금자리」 운영을 맡게됐다.

 

「생명의 집」은 낙태 위험에 처한 미혼모와 임산부를 아무 조건없이 받아들여 한 생명이라도 살려보려는 뜻으로 마련됐고 성빈센트 병원과 연계, 임산부들의 산전 산후 관리 및 출산 후 간호, 어린이 입양문제까지 주선하고 있다.

 

「성 빈센트 청소년회」는 청소년 사도직 수행을 목표로 수녀회가 창단한 조직. 중고등 학생 대상의 이 청소년회는 성 빈센트 영성을 갖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 및 단체와 지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와함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는 수원교구 무료급식소인 「사랑의 집」과 재소자들을 위한 교정사목, 교구 사회복음화국에 수녀들을 파견하고 있고, 군종교구에서도 사도직을 맡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3년 1월 5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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