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강론자료

2015-0510.....부활 제6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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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15-05-09 ㅣ No.1773

부활 제6주일 (나해)

사도행전 10,25-26.34-35.44-48          1요한 4,7-10           요한 15,9-17

2015. 5. 10. 이태원

주제 : 하느님께서 알려주시는 사랑

너 자신을 알라(!)’고 고대그리스의 철학자가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설명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한두 번쯤은 사용했을 유명한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기억하는 유명한 말을 우리가 사용할 때, 긍정의 표현보다는 부정의 표현으로, 내가 달라지겠다는 변화의 모습보다는 다른 사람이 더 먼저 변화돼야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면서, 하느님의 뜻을 사랑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산다는 우리가 주일에 성당에 와서, 일정한 순서에 맞춰 우리의 삶을 돌이켜볼 때, 그렇게 돌이키는 마음이 편하고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위하여 준비해주신 영광에 내가 참여할 수 있도록 기뻐하고 즐겁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사람으로서 내 삶이 올바른 목표를 향해서 가는지 돌아볼 것을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이, 이러한 불협화음을 제대로 돌려놓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은 부활제6주일입니다. 특정한 시기를 정하고 지내면서, 그 기간을 셈하는 일에 큰 의미는 없다고 전에 말씀드린 일은 있습니다만, 예수님의 승천까지 계속되는 부활시기는 7주간까지 있으니, 부활을 먼저 생각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방법을 찾는 것도 끝에 가까워졌습니다.


일정한 시기의 끝이 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또 새로운 일의 시작이 가까웠다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맞이할 새로운 일의 시작은 시간이 가면 자동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지만, 특별한 자세를 갖추고 올바른 자세를 준비할 때 더 나은 효과가 있다는 소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대하는 내용이 하도 많아서, 그 간단한 일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별을 앞두고, 정성을 담아서 하고 싶었던 일을 짧은 말마디로 요약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하도 많이 들어서, 귀에 못이 박혔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많이 강조하면 우리가 좀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는 말입니다.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할, 우리가 잘 안다고 말할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떻게 행동하면 내가 사랑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된다고 하겠습니까? 안다는 것으로 충분한 일은 아니지만, 일단 아는 것이 앞서야 우리네의 행동이 올바른 목표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아주 어렵지 않게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세상살이에서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일도 쉽지 않은데, ‘친구나 남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 일이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 일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먼저 셈하는 것이 우리들의 태도일 테지만, 우리가 앞뒤를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은 우리의 발걸음을 무겁게 할 수도 있습니다.


주종(主從)관계가 엄격하던 세상에서 그 관계를 벗어나 친구가 된다는 일은 아직 현실은 되지 않은 이론에 버금갈 일입니다. 현실로 똑같이 드러나는 것이 생각보다는 힘들다는 일입니다. 그것이 현실을 대하는 우리의 이론이지만, 그 상황을 달리 보게 해주고, 달리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면 우리가 도전해볼만하고 반드시 도전해야만 하는 일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사랑의 힘이 어떤지 그것을 이론으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쉽지 않지만, 말로 설명하고 그 말을 알아들었다고 해서 실제로 내가 행동하는 것과 똑같은 결과로 삶에 다가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서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행동하신 일의 결과로서 인류는 다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은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유대인에게만 머물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데에는 아무런 제한도 없다고 베드로사도는 코르넬리우스를 만난 경험을 통해서 설명하지만,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제대로 드러날 상황이라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식으로는 그렇게 놀라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지식이 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뛰어나고 놀랍고도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하느님의 힘이라도 내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 사랑이신 하느님을 올바른 자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좋은 것을 볼 수 없을뿐더러, 좋은 일에 함께 참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실현되어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묵상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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