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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하느님 나라,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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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0 ㅣ No.251

[레지오의 영성] 하느님 나라,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여러분은 천당가고 싶습니까? 지옥가고 싶습니까? 지옥가고 싶은 사람은 없겠지요. 모두가 천국에 가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이 바라고 있는 하느님 나라, 그곳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나는 하느님 나라에 분명히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 신자들은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90% 이상 되는 반면, 가톨릭 신자들은 50%도 채 안된다고 한다. 왜 그럴까?

첫 번째 복음사가인 마르코는 자신이 쓰고 있는 복음(기쁜 소식)은 자신에 관한 복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은 어떤 복음인가? 그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복음”(마르 1,14)을 전하였다고 한다. 예수님이 전한 하느님의 복음이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는 선포이다. 사실 마르코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여겼으며(마르 1,38), 하느님 나라가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가까이 왔음을 마귀들린 사람들과 육신의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유시켜 주심으로 확인시켜 주신다(마르 1,21-34). 예수님은 이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운데서 스스로 복음이 되셨다는 것이 마르코 복음사가의 진술이다. 이제 예수님 자신이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셨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당신 제자들을 뽑으셨고, 그들이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배우도록 하고, 그들도 당신과 똑같이 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영육간에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활동을 통해 확인시키라고 파견하신다(마르 3,13-16). 따라서 제자들도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스승을 따라 자신들도 복음이 되라고 하신다.

그렇다! 복음, 즉 기쁜 소식이란 613개 조항에 달하는 율법을 일점일획도 어긋남이 없이 완벽하게 지킴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율법의 엄격한 준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유대교에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같은 특수 계층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하느님 나라는 나와는 거리가 먼 무엇으로 자리매김되어 있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까이에 있지 않고 너무도 멀고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런 나라였을 뿐이다. 포기하고 체념할 수밖에 없고 실현 불가능한 꿈일 뿐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죄인이 되었다고 판단된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병에 걸려 신음하는 사람들은 병도 문제거니와 더 이상 하느님 나라는 꿈도 꾸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가장 괴롭고 비참한 현실이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하신다.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율법을 엄격히 지킴으로써만 들어갈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다. 하느님 나라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 그곳을 향해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게 바로 복음이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다. 불가능하게 보이던 구원과 하느님 나라가 바로 여기에 있다니!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 그렇다면 이 가까이 온 하느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뭘 해야만 할까?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르 1,15)고만 하신다. 회개하는 것과 복음을 믿는 것, 이 두 가지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회개Metanoia, Conversio’는 말은 ‘방향전환’ 또는 ‘마음을 돌림’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회개란 마음의 변화, 시각의 변화를 뜻한다. 내 마음이 저곳을 향하고 있었다면 방향을 전환하여 이곳을 향하도록 하는 것, 내 눈이 저렇게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렇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 회개란 뜻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회개하면, ‘참회’나 ‘보속’이라는 단어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참회나 보속은 회개의 결과로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참회와 보속을 행한다고 꼭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방향전환을 하라는 말일까? 그것은 율법주의에서 사랑의 계명으로, 선민주의에서 만민보편주의로 눈을 돌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톨릭 신자로서 이것을 해야 하고 저것을 실행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하느님 나라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전히 나는 바리사이들이 빠졌던 그 율법주의에 빠지고 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느님 나라와 구원은 나의 노력을 통해서 쟁취,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선물이요 은총이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오히려 이 지상으로 내려왔기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노력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내가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곳으로 방향을 돌리는가 아니면 여전히 율법주의나 윤리주의에 빠져 그곳으로 방향을 돌리지 못하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내려 왔음을, 우리 가운데 현존하게 되었다는 이 기쁜 소식을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율법주의와 윤리주의에 빠지게 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보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여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진’ 이들과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마르 4,11-12) 어리석게도 죄의 용서도 못 받고 영육간의 치유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대조하여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1,9)고도 하시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믿음’ 때문에 치유 받았음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조차 “기적을 일으키실 수가 없었으며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랐다”(마르 6,5-6)고 하신다.

그렇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전해주신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나같이 보잘것없고 죄 많은 인간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 기쁜 소식은 이천년간이나 선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참으로 그 기쁜 소식을 선물로 누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이유는 내가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이 어찌 그런 복을 누릴 수 있을까 의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그분은 말씀하시는데도 말이다. 세리와 창녀들도 그 복을 누렸다. 죄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여겨졌던 마귀들린 사람들이나 불치병자들도 하느님 나라의 복을 누렸다. 그런데 정작 율법을 가장 충실히 잘 지켰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 중에는 그 복을 얻어 누린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놀랍다. 니고데모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같은 사람은 율법주의를 포기함으로써 그 복을 얻어 누린 좋은 예다.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는 말을 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올바로 이해한 어느 율법학자도 그 복을 누렸으리라.

자, 이달에는 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자. 하느님 나라가 이렇게도 가까이 왔는데 아직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눈을 한 번 돌려보자.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만 바라보지 말고 한 번 둘러보자. 하느님 나라가 바로 내 옆에, 내 등 뒤에 있는데도 앞만 바라보고 있으니 요원할 수밖에... 하느님 나라는 그래서 ‘밭에 묻혀 있는 보물’(마태 13,44)과 같다. 바로 그 밭에 보물이 있는데도, 그것을 볼 눈이 없으면 그 밭을 누가 사려고 하겠는가!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1년 7월호,
오상선 바오로 신부(작은형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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