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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미술ㅣ교회건축

교회 공동체의 집: 신앙의 자유 선언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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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5 ㅣ No.75

[전례 상식 / 교회 건축] 교회 공동체의 집 : 신앙의 자유 선언 이전

 

 

1. ‘교회’(Ecclesia)

 

‘교회’라고 번역하고 있는 ‘에끌레시아’(Ecclesia)라는 말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집회’ ‘회중’ 즉 ‘같은 신앙을 지닌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다. 이러한 일차적인 뜻에서 파생된 이차적 의미로 이 용어는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 공동체 장소’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교회가 공동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교회가 성전을 가리키기도 하는 둘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가 성립된다. 그래서 예배를 위한 장소와 전례를 거행하는 공동체는 동일한 개념의 두 표현이 된다. 사실 전례의 기능은 신앙의 신비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영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전례의 거행이 이루고자 하는 영적인 이익은 예배의 장소에서 실현된다. 이 장소는 전례 거행을 통하여 교회의 일치를 촉진한다.

 

이처럼 ‘에끌레시아’라는 말은 공동체와 장소를 모두 가리키는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건축학에서는 교회를 장소로 국한해서 알아듣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교회’라는 용어는 예배를 위한 건물, 그리스도 공동체가 모여 함께 기도하고 전례를 거행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2. 예배를 위한 건물의 기원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해 성전이 기술적이고 전례적인 측면에서 어떤 일정한 형태로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초, 콘스탄티누스 황제로부터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난 후부터였다. 우리는 그 이전의 성전의 형태에 관해서는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전의 그리스도 공동체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 왔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예배를 위한 첫 장소는 윗 층에 있다고 해서 소위 ‘윗 방’(upper room)이라고 불렸던 다락방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에 마리아와 제자들은 기도하기 위해 그곳에 모였었다(사도 1,13-14). 이와 비슷하게 주일의 집회를 위해 사용되었던 일시적인 장소들도 있었다. 그러한 근거를 우리는 사도행전과 바오로 서간들 안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도 20,7-9; 1고린 16,19; 로마 16,3-5; 골로 4,15; 필레 1,2-3). 이러한 집회에 관한 정보는 디다케(4,14; 14,1) 안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2세기 중엽의 성 유스띠노는 그의 호교론(제1호교론, 65-67)에서 세례당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정화(목욕)를 위한 장소와 함께 집회의 장소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장소가 한 곳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모이기 좋고 모임이 가능한 곳에서 집회가 이루어졌다는 다른 암시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밖에 죽은 이를 공경하는 예식을 거행하기 위해 묘지에서도 모였다.

 

2세기말에는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거룩한 장소를 가리키기 위해 ‘성소’(sacraria)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이곳은 아직은 후기적인 의미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예배의 기능만을 수행하기 위한 장소로 지정된 곳이었다. 그곳이 어떠한 형태이든지 어디에 있든지 그곳은 예배만을 위한 ‘교회 공동체의 집’(domus ecclesiae)이었다. 이처럼 예배를 위한 항구한 장소의 확보는 전례 용품들을 그 안에 배치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교 건축물이 지닌 기능의 폭을 훨씬 넓혀 주는 결과를 낳는다. 그 이후 4세기의 한 문헌(Recognitiones Clementinae, 10,71)이 전해 주는 바에 의하면, 테오필로라는 사람이 자기 집을 교회의 이름으로 축성하여 성전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동방의 어느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라면, 이제 로마와 아프리카에서도 같은 상황들이 펼쳐지게 된다.

 

바실리카 이전의 예배 장소는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통상적인 주거의 공간을 예배를 목적으로 다소 개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역사적인 문헌에 근거한 것이고, 첫 두 세기 동안의 예배 공간의 형태를 보여 주는 건축물로서의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후기에 나타나는 바실리카들이 그 이전의 초기 집회실의 형태를 얼마나 반영하고 얼마나 발전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로마에서 행해진 여러 발굴 작업의 결과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에는 일정한 형태의 성전 건축 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몇 개의 예를 살펴보면 각기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천장과 평면의 구성 그리고 창문의 형태에 있어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건축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소위 ‘교회 공동체의 집’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 바실리카의 초기 형태로 간주된다. 그 형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미숙한 상태에서 경험과 상징적 의미를 지닌 완숙한 건축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보여 준다. 일정한 형태를 향하여 가는 과정에서 전례의 수호자요 고객인 사제와, 예술의 수호자요 창시자인 건축가 사이에 갈등이 야기되었다. 사제는 전례의 필수 불가결한 요구들을 내놓고, 건축가는 미와 형태의 조화, 수공의 세련됨과 생동감 등을 강조하는 데에 치중하려 했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 추가로 작용했는데, 그것은 바로 경제적인 요인이다.

 

이러한 문제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겪어야 하는 문제로 건축 자재의 선택이나 경제적 요인과 표현미의 조화를 위해 고객과 예술가의 심사 숙고한 검토를 필요로 했다.

 

건축 자재의 선택은 지역적 특성이 크게 고려되었다. 점토가 풍부한 로마에서는 벽돌을 썼고, 화강암이 많은 시리아 같은 곳에서는 석재로 담을 쌓았다. 어떤 곳에서는 목재, 또 다른 곳에서는 대리석이 쓰이기도 했다. 이러한 자재의 선택은 경제성뿐만 아니라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의 자유 선언 이후 로마와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교회 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4~5세기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급속한 발전에 보조를 맞추어 활발한 건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이다. 이때의 교황들로는 율리오 1세(337~352년), 리베리오(352~366년) 그리고 특히 다마소(366~384년)를 들 수 있다. 다른 지역들에서도 그 지역 주교들의 적극적인 관심하에 교회 건축이 활발하게 진행된다.

 

* 김종수 요한 신부는 1954년 서울에서 나서 1982년 가톨릭 대학을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교황청 성 안셀모 대학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공덕동본당 주임을 거쳐 현재 주교회의 천주교용어위원회와 교육위원회 총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차장과 본지 주간으로 있다.

 

[경향잡지, 1995년 1월호, 김종수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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