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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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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3세: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한 개혁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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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2-09 ㅣ No.92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 교황편 (6) 바오로 3세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한 “개혁교황”

 

 

1545년부터 1563년까지 18년동안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현재 Trento)에서는 세리판도(G. Seripando) 소토(Dominicus de Soto) 라이네스(D. Lainez) 살메론(A Salmeron)등 당대 저명한 신학자들이 대거 참여한 가운데 교회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공의회가 열렸다.

 

트린엔트 공의회라 불려지는 이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종교개혁에 대해 교회의 교도직으로 응답한 최고의 대답』이었다는 예딘(H. Jedin)의 말처럼 프로테스탄트가 제기한 문제를 수렴,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대한 입장을 확고히 함으로써 당시 혼란스러워진 가톨릭 교의(敎義)를 바로잡는데 큰 역할을 했고 또한 교회 내부 개혁 추진의 기초를 놓았다.

 

공의회를 소집한 바오로 3세(1534~1549)는 트린엔트 공의회를 통해 교회 역사안에서 「개혁 교황」이라는 칭호와 함께 반 종교 개혁의 첫 번째 교황, 또 처음으로 개혁을 진지하게 시도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바오로 3세의 본 이름은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 카니노 지역의 명문가 출신인 그는 로마와 피렌체에서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는데 특히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과 연관을 맺으며 공부를 함으로써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된 조만지 데 메디치와도 친분을 가졌다. 로마 교회의 재산 관리자를 거쳐 1493년 부제 추기경으로 임명됐던 그는 1509년 교황 율리오 2세로부터 파르마의 주교로 임명됐다.

 

율리오 2세,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글레멘스 7세 등 4명의 교황을 겪으면서 추기경단 의장으로도 활약했던 바오로 3세는 1534년 교황 글레멘스 7세가 선종하자 67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경험과 재치를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교황직에 올랐다.

 

바오로 3세의 업적은 대체로 교회개혁, 학문과 예술의 진흥,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 등 크게 세가지 분야에서 두드러 지고 있다는 평가다.

 

교회 개혁 문제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과 맞물려진다. 중세 말기에 들어서면서 교회내 폐해가 컸고 실제로 여러 부분에서 폐해가 많았기 때문에 교회 개혁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교회와 교황직이 당면한 최대 화두는 「개혁」으로 모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가들이 지적하고 있듯 그 시대 교황들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교황직에 임하는 근본 자세였다. 성직매매 족벌주의 등 알렉산델 6세를 비롯한 대다수 교황들의 윤리적 부족함은 차치하더라도 존경받기에 불완전한 추기경단을 임명, 그들이 비슷한 성향의 교황을 선출하고 또 그로부터 추기경단이 임명되는 악순환이 계속됐던 결과는 결국 추기경을 임명한 교황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루터의 교회 개혁도 그같은 상황에서 빚어졌다. 그러나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의 행동을 단순한 수도자 언쟁으로 처리하는 등 사태의 심각성을 과소 평가했고 교황직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았다.

 

교황직은 점점 더 불완전해졌고 칼 5세 황제 등이 문제 해결을 위해 공의회 개최가 시급하다는 제안을 하기에 이르지만 한편 교황들은 정치적으로 황제와 대립돼 있었기 때문에 그같은 요청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오로 3세의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은 바로 그러한 면에서 교회와 시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라 할 수 있다.

 

추기경단 개혁부터 교황직에 오르면서 추기경단 개혁을 시작으로 교회 쇄신의 고삐를 죄었던 바오로 3세는 개혁과 쇄신에 앞장 설 수 있다고 판단되는 인물들로 추기경을 임명하고 개혁위원회도 구성, 이들로부터 개혁안을 작성케 했다. 이 안건들은 후에 트리엔트 공의회 의안으로 채택됐다. 그같은 노력들은 『로마 성직자들이 쇄신되지 않으면 다른 그리스도교 국가들 역시 쇄신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이와함께 바오로 3세는 수도회 쇄신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주교의 상주의무를 강화시켰다.

 

황제와 왕들의 대립으로 개회 전부터 어려움을 겪었던 트리엔트 공의회는 겨우 1명의 교부와 3명의 교황 특사가 참여한 가운데 개회식을 가질 만큼 우여곡절을 드러낸 공의회 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가톨릭 교회 근세사에 있어서 최대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대외적으로 가톨릭 신앙 교의을 천명한 기회였으며 내부적으로는 뼈아픈 자각의 시간이었고 참된 종교 개혁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자리를 통해 「신앙 규범으로서의 성서의 역할」 「정경(政經)」 「의화」 「성사」 「원죄교의」 등이 확정됐고 개혁 규범 등도 선포됐다. 공의회를 통한 신앙고백은 공의회 폐막 1년후인 1564년 「트리엔트 신앙고백」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났고 그외 공의회 문서들은 후임 교황들에 의해 차례로 발표됐다.

 

 

문학과 예술에도 관심

 

바오로 3세는 문학과 예술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재임 기간중 로마대학을 복원하고 바티칸 도서관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공로를 남겼는데 특별히 화가 건축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켈란젤로에게 「최후의 심판」 벽화를 그리게한 장본인이었으며 이외에 성베드로 성당 설계도를 완성토록 하고 천사의 성을 프레스코화 장식으로 변신시킨 업적도 지니고 있다.

 

족벌주의 등으로 개혁파와 프로테스탄트로부터 비난을 받을 만큼 부족함도 남겼었지만 바오로 3세는 그같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역사 안에서 「최초로 교회의 개혁에 힘쓴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면서 교회 개혁의 많은 부분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공로 때문이다.

 

그는 로마에 종교재판소를 세웠고 금서 판매자들에게 엄격한 벌을 세우기도 했으며 예수회, 우르술라회를 인준했다. 세계 역사속 주요 이야기꺼리로도 자주 등장하는 영국의 헨리 8세 국왕의 파문 사건과도 밀접하다. 즉 1538년 헨리 8세가 자신을 「영국교회 수장」이라고 선언한데 대해 파문 조치를 내렸던 것도 교황 바오로 3세였다.

 

[가톨릭신문, 2004년 2월 15일, 이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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