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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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거룩함(성덕)에 대한 오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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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02 ㅣ No.1381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거룩함(성덕)에 대한 오해들

 

 

관습적이고 정형화된 거룩함

 

거룩한 삶, 성덕의 삶, 성화의 삶. 우리가 그 무엇이라 부르던 간에 우리는 흔히 그런 삶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삶은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엄숙한 모습이고, 때로는 딱딱하고 건조한 모습의 삶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으로 채우기 때문에 자아의 내밀한 특성과 개성을 상실하는 모습이라고 흔히들 생각합니다. 영성적인 표현 방식을 빌리면, 성화의 삶은 자아(自我)를 버리고 무아(無我)의 경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느님만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나의 개성과 존엄성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왜곡되고 삿된 것들을 정화한다는 뜻이지, 나의 고유성을 버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으로 충만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생생하고 더 주체적이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성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활력과 생기, 기쁨을 앗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여러분은 아버지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시며 염두에 두시니 그대로 되면서도 여러분의 가장 내밀한 자아에 충실하게 될 것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32항)

 

또 한편으로 우리는 흔히 성덕의 삶은 신적인 것, 초월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들과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는 오해입니다. 이런 선입견 때문에 우리는 성덕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것들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지, 인간 자체의 고유한 특성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오랫동안 우리는 거룩함을 금욕, 고행, 엄격주의 등의 외형적인 거룩함으로 좁혀서 이해해온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거룩함을 초월적인 것들과 자꾸만 결부시켰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경시가 은연중에 배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하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가장 신적인(거룩한) 것이 가장 인간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강생의 신비를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성덕은 여러분을 덜 인간답게 만들지 않습니다. 성덕은 여러분의 나약함이 은총의 힘과 만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33항) 거룩한 사람은 관습적이고 정형화된 사람이 아니라, 더 생생하고 더 인간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권위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거룩함

 

“한 사람의 완덕은 그가 지닌 정보나 지식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깊이로 가늠된다는 사실이 교회의 오랜 역사에 걸쳐 점점 더 분명해졌습니다.”(37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안에는 “교리나 규율의 안정성”만을 강조하는 권위적인 엘리트주의자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교회 안의 이러한 권위주의자들은 “복음화 하는 대신에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은총의 문을 열기보다는 검열하고 검증하는 데에 자신의 힘을 소진해버립니다.”(35항)

 

이들은 “특정한 경험이나 일련의 추론과 지식에만 관심을 두어 결국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는 사람들입니다.(36항) 또한 이들은 “복잡한 특정 교리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추상적인 개념들”을 사용해서 소박한 신앙인들을 주눅 들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37항) 이들은 “자신들의 설명으로 신앙과 복음 전체를 완벽히 이해하게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절대화”합니다. 또 한편으로 이들은 자신이 지닌 지적 권위와 지위적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생각과 확신을 일상의 신앙인들에게 강요하기도 합니다.

 

“모든 물음에 척척 대답하는 사람이 있을 때, 이는 그가 올바른 길에 있지 않다는 표지입니다.”(41항) 거룩함은 교만함에 있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에 있습니다. 거룩함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정직한 겸손에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 있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그가 거룩하고 완전한 사람이며 무지한 대중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45항) 그것은 “위험스런 착란”입니다. 신앙의 앎(지식)은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기여야 합니다.(45항) 사랑의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앎은 그저 위선과 교만에 불과합니다.

 

또 한편으로 신앙의 진리를 이해하고 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삶을 엄격히 감독할 권한”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43항) 엘리트적인 권위의식으로 타인을 규정하고 판단하고 검증하고 검열하는 모습은 거룩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타인과 하느님과의 관계를 자신이 추측하고 판단하고 추론하는 것은 엄청난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의 삶이 완전히 좌초되어 우리 눈에도 악습이나 중독 때문에 실패한 삶처럼 보일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그의 삶 안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42항)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며, 함부로 남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교조적이고 율법적인 거룩함

 

“교회 안에는 교리와 그리스도교 생활의 수많은 측면들을 해석하는 서로 다른 길들이 정당하게 공존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자 합니다.”(43항) 거룩함은 풍요로운 다양성 안에서 더욱 빛납니다. “복음의 단순성”과 “단일한 교리”는 뉘앙스가 조금 다릅니다. 복음의 생생함은 지식과 교리로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46항) 교리는 복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교리가 복음을 다 포함할 수는 없습니다. 교리는 복음의 은총을 이해하려는 교회의 노력입니다. 교회의 노력은 늘 쇄신되어 넓고 풍요로워져야 합니다. 때때로 이 풍요로운 다양성이 혼란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추론보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길 때”(42항) 교리의 풍요로운 표현들 속에서 복음의 생생함을 더욱 맛보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인간의 질문과 의심을 배제하고 배척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은총은 인간적 질문들에 늘 열려있습니다. 신앙과 복음의 은총을 이해하려는 교회의 노력으로서의 교리 역시, 교회 구성원들의 숱한 질문들과 열린 대화와 토론과 합의의 산물입니다. 교회의 교리가 확립되던 초기 교회의 공의회의 역사가 이를 웅변합니다. 교리는 획일성의 닫힌 체계가 아니라 언제나 열린 체계입니다. “교리는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교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표현은 물음과 의혹과 질문을 낳는 역동적인 힘이 없는 닫힌 체계가 아닙니다.”(44항) 물론 교회 공동체의 교리적 합의에는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삼위일체의 성령께서는 언제나 다양성 속의 일치를 지향합니다.

 

교리와 규범은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교리와 규범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교리와 규범은 그리스도교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리스도교 지혜가 이웃을 향한 자비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46항), 교리와 규범은 사랑의 실천을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교리와 규범 그 자체의 엄격한 준수와 적용만으로 거룩함으로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없는, 교리와 규범의 경직된 적용만을 강조하는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권위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닮은 사람입니다. 아마도 거룩한 사람은 경직되고 폐쇄적인 사람이 아니라 유연하고 열린 사람일 것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0년 3월호, 정희완 사도요한 신부(안동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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