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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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해방 직후 황해도 신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기독교계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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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07 ㅣ No.1073

해방 직후 황해도 신천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기독교계의 대응*

 

 

국문 초록

 

이 글은 해방 직후 북한 지방 사회의 변화와 기독교계의 대응을 황해도 신천 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살피는 연구이다. 북한 지역사와 교회사의 상호절충 보완을 시도하는 연구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신천의 기독교계는 토지개혁이라는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이는 당시 토지개혁이 대지주층을 기반으로 한 남북한의 정당사회단체조차도 부인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는데 기독교계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를 둘러싸고 신탁통치 파동이 전개될 때 개신교계 특히 장로교 측은 노골적으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다.

 

소련군과 북한 당국은 기독교도연맹 창설을 통해 개신교회를 정권에 우호적인 조직 하에 망라했다. 반면 노골적인 반공주의를 보이지 않았던 천주교회에 대해서는 교회 활동을 대체로 인정하면서 포섭하고자 했다. 1946년 10월 기독교도연맹 창설 이후 1948년경까지 신천의 기독교계와 북한 정권은 외형상 우호적인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한계는 곧 드러났다. 북한은 기독교계를 지속적으로 의심, 적발, 처단했다. 특히 1949년 38선 군사 충돌이 격화되었을 때 북한에서는 정치범이 양산되었고, 교회가 일차적인 억압 대상이 되었다.

 

 

1. 머리말

 

황해도 신천은 한국전쟁 중 한반도 최대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지역이다. 3만5천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진 ‘황해도 신천 사건’은 북한에서 ‘미군의 신천 대학살’로, 남한에서 ‘10·13 반공의거’라고 명명되었고 각각의 체제 유지에 활용되었다. 신천 사건은 해방 직후 북한 사회의 변화와 갈등이 한 요인이 되어 발생했지만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소산이었다. 전황의 변화와 우연적이면서도 구조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1) 하지만 소설 《손님》에서 신천 사건은 서구에서 들어온 ‘기독교’와 ‘사회주의’라는 이념 사이에서 발생한 - 손님마마에 걸린 - 동족 학살로 묘사되었고, 이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진실’로 받아들여졌으며 많은 파장을 낳았다.2) 신천 사건은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었지만, 이미 예견되어 있던 것처럼 즉 결정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인식될 위험이 있다. 해방 직후 신천의 기독교계가 어떠한 변화를 겪었는지, 당시 신천 지역의 변화와 맞물려 어떠한 역할이나 대응을 했는지, 과연 ‘미래의’ 신천 사건을 결정지을 정도로 사회주의 계열과 심각한 이념 갈등 관계에 있었는지, 갈등이 있었다면 그 양상은 어떠했는지 등을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해방 직후 신천 지역의 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북한의 지역사, 남북 분단의 역사라는 시각을 갖고 접근할 때 그 변화 과정과 의미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북한의 기독교 정책 및 기독교계의 동향은 종교 문제만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해방 직후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이 자치위원회를 구성·주도했다가 1946년 봄 이후 자치위원회에서 배제되었던 점, 1949년 남북한의 군사 충돌이 격화되었을 때 일차적으로 기독교계 인사들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일들은 신천 기독교계가 지역사회에 미치던 영향력을 방증하며, 당시 정세 변화와 상호 조응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신천의 기독교계에 대한 연구는 해방 직후 북한 사회의 변화와 갈등 양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신천 지역의 기독교계에 대한 연구는 교회사적인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신천 지역은 1898년 4월 빌렘 신부가 청계동에 정착함으로써 황해도의 두 번째 본당이 설립되었던 곳이고, 안중근이 성장한 곳으로서 천주교와 지역사회, 그리고 독립운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시사하는 지역이다. 1935년에는 라리보 주교가 신천읍을 황해도 천주교회의 중심지로 삼고자 구상했던 곳이기도 하다.3) 그리고 1949년 2월 구천우 신부의 월남으로 신천 본당이 폐쇄되어 지금에 이른다. 개신교회사적으로도 의의가 있는데, 개신교부흥운동의 대표자이자 북조선기독교도연맹을 주도한 김익두 목사의 활동 근거지가 바로 신천이었다. 이와 같이 신천은 황해도 천주교 · 개신교의 중심지역으로서 한국 근현대 기독교계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지역이다.

 

이 글은 첫째, 해방 직후 신천 지역사회와 기독교계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일제하 신천의 기독교계가 지역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 주된 특징은 무엇인지 살펴보려 한다. 둘째, 해방 직후 북한의 종교 정책 및 정세 변화에 대한 기독교계의 대응을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유념하면서 살피려 한다. 북한의 기독교계 인식과 정책, 기독교계의 반공적 태도 양상, 기독교도연맹 참여 문제 등 기독교계와 북한 정권 간 관계의 미묘한 변화를 파악할 것이다. 셋째, 1949년 구천우 신부의 월남의 배경을 더욱 종합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반공 사건 ‘날조’ · ‘음모’로 인한 월남으로만 설명되었는데,4) 1949년 천주교계에 대한 북한 정권의 억압이 본격화된 배경을 남북 분단 상황과 북한 지역 교회의 역할이라는 면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황해도 신천 지역의 사례를 검토함으로써, 교회사와 북한사 연구의 상호 소통과 보완에 기여하고자 한다.5)

 

이를 위해, 일제식민지기 통치 · 지방 · 신문자료와6)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노획한 북한문서,7) 교회자료, 월남민의 증언이 수록된 자료들,8) 부분적이지만 러시아 문서9) 등을 수집하여 교차 분석할 것이다.

 

 

2. 일제하 신천 지역의 기독교와 민족운동


1) 기독교 교세의 확장과 독립운동

 

신천군은 황해남도의 서북부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재령군, 북쪽으로는 안악군, 서쪽 송화군과 은율군, 남쪽 해주군 및 벽성군과 접하였다. 신천 동북쪽의 신천 평야는 황해도 곡창지대의 일부였고, 서북쪽의 산악은 구월산 권역에 속했다. 도로망도 발달하여 인근 지역들과의 교통·교류가 용이했다.10) 이는 신천 지역이 인근 지역과 지리적, 사회경제적, 역사문화적으로 많은 공유가 있었음을 의미했다. 신천군은 남북 분단 경계선과도 가까웠는데, 위도상으로 남단 38도 12분, 북단 38도 31분에 해당하며, 38도선이 관통하던 해주와는 48㎞ 거리였다.

 

일제식민지기 신천군의 특징은 황해도의 어느 지역보다 지주제와 기독교가 동시에 발달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우선, 농업이 산업의 중추를 이루면서 지주제가 발달했는데, 1934년 말 신천의 답(畓) 면적이 황해도의 9.7%를 차지했고,11) 미곡 수확고는 연백군과 해주군에 이어 세 번째로 황해도 전체 수확고의 11.8%를 차지했다.12) 그런데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한 것은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인 대지주였다. 신천 전 세대의 79.2%가 농업에 참여했지만, 자작 겸 소작 17.5%, 자작 10.1%에 불과하고 소작농이 68.1%을 차지했다.13) 소작농의 비중은 황해도 평균 59%에 비해서도 약 10%를 상회하는 비율로서, 토지 소유의 편중이 극심했다. 때문에 토지를 둘러싼 갈등은 주로 일본인 대지주 대 조선인 소작인 간에 벌어졌다. 동양척식회사와 사이토 농장[齋藤農場] 등의 일본인 대지주 농장의 토지 소유 확대와 소작료 증가 및 소작권 박탈 등이 주 이유였다.14) 신천 지역의 소작료는 수확량을 웃돌았고, 소작인의 생활은 열악했다.15) 신천 지역에서의 주된 갈등은 동양척식회사 및 일본인 대지주 농장 대 한국인 소작인 사이에서 민족 · 계급 갈등이 중첩되어 발생하였다.

 

신천은 황해도의 여타 지역에 비해서도 기독교세가 크게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이 심각하게 전개된 적도 있었다. 1862년 신천 출신 첫 신자가 나온 이래, 1898년 4월 빌렘 신부가 청계동에 정착함으로써 황해도의 두 번째 본당이 설립되었고, 1913년 다시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1930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16) 1925년 신천의 천주교 신자는 580명 정도였고,17) 황해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신천읍이 그 철도가 경유하는 역이 되자 인구가 급증했고 신천읍 내 천주교 신자 역시 급증했다. 1937년 신천 천주교회의 총 교세는 1,218명에 달했다. 주교관은 성당이 위치한 척서리를 비롯한 신천 지역에 연간 소출이 300석이 되는 농토를 매입하여 신자들에게 소작을 주었다.18)

 

신천의 기독교는 개신교 특히 장로교가 그 주축이 되었다. 1897년 재령군 신환포를 시작으로 개신교가 포교를 시작하면서 개신교의 영향력이 천주교를 압도해갔다.19) 황해도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지(개신교 최초의 자생교회인 소래교회)이자 평안도 지방과 함께 사실상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했다. 이 중에서도 장로교가 황해도 특히 신천, 재령, 안악, 장연 등지의 기독교의 주축이 되었다.

 

신천은 재령의 개신교에 비해서는 교회나 신도 수가 적었지만,20) 그것은 ‘기독교(개신교) 천하’로21) 불린 재령군과의 상대적인 것일 뿐 황해도의 다른 지역에 비하면 개신교의 영향력이 매우 큰 지역이었다. 신천 지역에는 노월면 정례리의 성미교회(1885)를 시작으로 문화면 문화교회(1901), 신천읍 서부교회(1903) 등을 비롯해 수십 개의 교회가 설립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22) 또 《북한교회사》에 수록된 교회 목록에 의하면, 신천군의 교회는 성결교 계통의 두 개를 제외하고 모두 장로교에 해당할 정도로,23) 개신교 중에서도 장로교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신천의 개신교 확장에는 1920~30년대 개신교부흥운동의 원형을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김익두의 역할이 주요했다. 1874년 11월 3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난 김익두는 1910년 평양장로교신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신천교회에서 시무 위임을 받았다. 이후 그의 활동 중심지는 신천이 되었다. 그는 황해도 지역 교회부흥운동을 이끌었고, 전국에 걸쳐 부흥회를 열었다.24) 신천군 용문면 복우리 복양리교회, 신천읍 척서리 서부교회 등도 그가 설립한 것이었다.25)

 

김익두는 신천의 개신교 확장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신천 지역 개신교 내 갈등의 중심축이기도 했다. 1925년부터 시작된 신천교회 분규가 1934년까지 계속되었는데, 분쟁의 중심인물이 김익두였다. 특히 1933년 1월 신천교회 목사 불신임운동이 벌어지면서 신천교회의 전 교인 수백여 명이 김익두 목사 배척을 둘러싸고 옹호파와 배척파로 나뉘어 예배도 각각 여는 등 갈등이 심각했다. 1933년 5월 황해노회는 합동(合同)을 권고했지만, 결국 1934년 11월 분립되었다.26)

 

신천군에는 개신교의 확산과 더불어 그 세가 쇠하긴 했지만, 천주교의 영향력도 상당했다. 1944년 통계에 의하면, 황해도 천주교회의 본당 수가 14개에 신자가 12,853명이었는데,27) 그중에 신천 천주교회 본당 신자 수가 1,046명으로, 장연 · 은율 · 해주 · 사리원 · 곡산 등과 같이 1천 명 이상을 기록하였다.28) 신천의 천주교는 신자의 수적으로만이 아니라, 민족운동과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을 배출했다. 안중근도 고향은 해주이나, 유년시기 신천군 두라면 청계리에서 자라고 천주교 세례도 받았다.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자, 105인 사건의 발단이 되었던 ‘안악 사건’을 주도했던 안명근도 신천 출생의 천주교도였다.29)

 

신천군은 다양한 독립운동 계열의 연고지였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곳이다.30) 앞서 언급했던 안명근은 독립운동을 무장운동의 형태로 진행하고자 했다. 1910년 그는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황해도에서 군자금을 모금했다. 그는 신천의 한순직과 안악의 원행섭 등의 천주교 신도의 집에 유숙하면서31) 송화 신석효에게 3천 원, 신천의 이완식에게 6천 원 등 군자금을 조달하다가 체포되었다. 일제는 안악 사건을 확대하여 황해도 일대의 민족주의자들을 검거할 계획을 세웠고, 이 과정에서 신천의 이완식, 박만준, 신백서, 이학구, 유원봉, 유문형, 이승조, 박제윤, 최중호 등이 체포되었다.32)

 

무관학교 건립은 좌절되었지만, 안명근과 함께 체포되었던 적지 않은 천주교 신도들이 일제에 대한 무력저항을 추진했다는 면에서 주목된다. 안명근은 1926년 가출옥으로 석방되어서도 신천 청계동에서 천주교 관계 일을 거들다가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했다.33)

 

한편, 해주가 고향이었던 김구는 신천에 처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상해 망명 전까지 구월산 일대에서 동학과 3·1운동에 참여했으며, 신천 · 안악 · 장연 등지에서 교육활동을 전개하여 주민들로부터 많은 신망을 얻었다.34) 망명 후에도 김구는 신천 출신의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중국 하남성 개봉지구에서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지하공작을 했던 박태례, 황해도 및 국내에 조선총독 암살 등을 목적으로 파견되었다가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한 이덕주 모두 신천 출신이었다.35)

 

신천의 민족주의적 성향은 1919년 3·1운동에서도 드러난다. 1919년 신천의 총 시위 건수(23)는 해주(24)에 이어 황해도 시·군 중에서 제일 많았고,36) 이때 기독교인이 운동 주체가 된 경우가 절반 정도에 해당했으며, 그 시위 한 건 당 참여 인원도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달했다.37)

 

2) 기독교계 학교 설립과 농민운동

 

신천의 기독교는 교육에 관심을 갖고 학교 설립을 중심으로 한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신천의 기독교계 학교들로는 경신학교, 경신유치원, 기독교여자청년회, 기독교회 경영 여자야학, 일신학교, 미화유치원 등이 대표적이었으며,38) 기독교 부속 서당도 적지 않았다. 이 중에서 일신학교와 미화유치원은 천주교가 설립했고, 경신학교는 1900년대 초 김익두 등이 설립한 장로교계 학교로서39) 신천의 대지주였던 왕재덕 집안이 후원하는 등 지역사회의 많은 관심을 받았던 사립학교였다. 신천은 물론이고 황해도에는 평안도 다음으로 기독교계 학교가 많았고, 이 학교들은 관공립학교들에 비하여 일제 당국의 감독을 벗어나 상대적으로 독자적으로 운영되었다.40)

 

기독교계의 학교 설립이나 운영은 지역사회의 유지급 인사들의 후원 및 협조 등이 있어야 가능했다. 신천 천주교회 임충신 신부가 설립한 미화유치원의 경우, 1936년 4월 개원식에 신천읍 내 각급 기관장과 유지들이 초청되었다. 원장으로는 신천군수를 역임하고 수리조합 이사직을 맡고 있던 김종석이 추대되었고, 신천군 현직 군수, 농감이자 신천 본당 회장이었던 최광옥 등이 유치원 기물과 성금을 기탁했다.41) 신천농업학교도 왕재덕과 이계천에 의해 설립되었지만, 신천의 지주들이 재단 이사나 교장을 맡았다. 학교재단의 이사이자 1932년 교장이었던 이운방은 이계천과 함께 신천면 상하동의 오십여 노동자를 모아 흥풍회를 창립하고 색의장려와 농사개량 등을 지도한 바 있으며, 1943년 신천읍 의원 후보자로 추천되기도 한 인물이었다.42) 신천농업학교가 1934년과 1939년 각각 3년제, 5년제(갑종)로 승격될 때는 일본인이 교장을 맡기도 했다.43) 이렇듯 신천의 기독교계 학교들은 단순한 종교계 사립학교가 아니라, 지역의 대지주·수리조합장, 사립학교 교장 또는 이사장 등의 유지급 인사들이 결합된, 그들의 지역사회와 교육에 대한 관심이나 운동이 반영된 공간이자 조직적 기반이었다.

 

신천 지역의 기독교와 사립 교육, 그리고 민족운동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왕재덕(王在德, 1857~1934)이다. 그녀는 신천군 지부면 서호리에서 수천석 추수를 했던 부호 왕시권의 딸이었다. 왕재덕은 17세에 신천면 송오리의 이영식과 결혼했으나, 29세에 남편이 사망했다. 2남 1녀(이승조, 이수극, 이정서)를 둔 그녀는 1만 석을 추수하는 50만 원 상당의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되었다.

 

왕재덕의 장남 이승조는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은 후 병사했다. 딸 이정서는 안정근(안중근의 동생)과 결혼했고, 왕재덕은 이정서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다. 왕재덕은 빈민구제를 위해 식량 · 금전 등을 기부했고, 소작인에게 무이자로 대출하기도 했다. 왕재덕은 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는 학교 설립·운영이나 기독교계 학교 후원 등으로 나타났다. 신천농민학교를 설립할 때 안정근과 의논했다고 하며,44) 자신의 토지 10만 평(당시 3만 원 상당)과 현금 1만 원을 내어 학교를 설립했고(1930), 다시 6만 원을 내어 교사를 중축했다. 또 20여 칸 가옥을 경신유치원의 교사로 기증한 바도 있었다. 그녀는 장로교계통의 경신학교와 경신유치원, 부인야학교에도 후원했고, 온천교회에도 상당한 건축비용을 기부했다.45)

 

왕재덕의 이러한 활동은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의 지향과 가까웠고, 신천 지역 내외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왕재덕은 딸 이정서와 사위 안정근과 같이 천주교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었지만 개신교계와도 폭넓게 교류했다.46) 그녀는 이승훈 · 이광수 · 조만식 · 송병준 등과 교류했으며, 인근 지역인 은율읍교회 목사 김경하(왕재덕의 손녀 이숙경의 남편)와 안악기독교청년회 회장 김선량 등과도 왕래했다.47) 7일간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왕재덕의 장례식에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는데, 그녀의 영결식에는 황해도지사 및 황해도 경찰부장과 사회단체의 인사들을 비롯해 2만 명이 참석했다. 이광수 · 조만식 · 주요한 · 김성수 등은 조문을 보냈다.48)

 

왕재덕의 사상이나 활동은 종교적 차원의 복음주의와 실력 양성 운동 차원의 농민·농촌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왕재덕이 조만식과 교류했으나, 기독교사회주의로 이어지는 빈민구원의 사회복음주의 실천관에49) 대한 지향이 분명했는지는 현재로서는 단언하기 어렵다. 다만, 왕재덕의 소작농이나 빈민에 대한 태도는 일본인 농장의 조선인 소작농에 대한 극심한 횡포와는 달랐다. 나아가 그녀는 조선인에 대한 교육과 실력양성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에 대한 후원은 물론이고 직접 농업학교를 세우고 투자하는 데로 이어졌다. 시점으로 보았을 때 왕재덕은 3·1운동이 제기한 큰 이슈 중의 하나인 농촌 문제와 민족생존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1920~30년대 신천에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50)

 

왕재덕의 장손 이계천도 비슷했다. 안악 사건 때 부친 이승조를 잃은 그는 1920~30년대 ‘청년유지’로서 신천 일대 대지주들로부터 신망을 얻었고 신천수리조합의 위원장을 역임(1929~1931)했다.51) 《동아일보》 신천지국장이자 경영인이었고, 고문도 역임했듯이,52) 《동아일보》라는 당시 최대 유력언론을 통해 신천 지역의 현황을 파악하고 기사화했고, 기독교라는 종교조직과도 연계되어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이계천이 조모 왕재덕의 유지를 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조모와 같이 농촌사회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특히 교육을 중시했다. 장로교계통의 경신학교와 경신유치원 후원은 물론이고 도서관 건축 기증, 유학생 위로회 개최 등 주로 교육과 관련된 후원을 계속했다.53) 왕재덕의 사망 후에도 신천농민학교에 대한 투자를 계속하여 재단법인 수속을 완료하고 갑종학교 인가를 받았다.54)

 

이계천의 이러한 행적들은 그가 신천에서 1920~1930년대 중반 실력양성운동과 농촌계몽운동을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의 학교와 도서관에의 기부·투자 등은 당시 일제가 추진하던 ‘조선농촌진흥운동’이나 ‘농촌문고운동’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고,55) 일제와의 타협 내지는 개량화의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56) 1940년 이계천이 조선총독부로부터 민간공적자로서 표창을 받았던 것은 그의 교육 관련 사회사업 또는 농촌계몽운동이 내재한 한계를 보여준다.57)

 

신천의 조선인 대지주와 기독교계의 동향과 성격을 왕재덕과 그의 집안 사례로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인 대지주이자 천주교 · 개신교계 모두와 긴밀히 교류한 기독교도였으며, 민족주의적 계몽운동을 전개했던 왕재덕의 활동은 신천 내부는 물론 전 사회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는 일제하 신천 지역의 특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인 소작농 간의 첨예한 민족적·계급적 갈등과 다양한 계열의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사회운동들이 존재하는 가운데, 왕재덕 집안은 신천 지역사회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신천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막대했던 기독교는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동아일보》 계열이나 조선인 유지의 지역사회 활동의 조직적 바탕이 되었다.

 

 

3. 해방 직후 북한의 기독교 정책과 신천 지역 기독교계의 대응


1) 지역 세력 재편과 개신교계의 반공 정책지지

 

1945년 8·15 해방 이후 신천에서는 정치조직 체계가 재편되고 사회경제개혁이 진행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 신천군회로 시작된 신천의 자치위원회는 소련군의 명령으로 임시정치위원회로 개칭되었고, 1945년 9월 30일 우익 계열과 좌익 계열의 합작으로 신천군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신천군위원회에는 소련군의 영향이 미치고 사회주의자가 포함되기는 했으나, 초대 위원장 이계천, 부위원장 신정균, 보안서장 이제렴 등 일제하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58) 이계천은 물론이고, 신정균과 이제렴은59) 일제하 《동아일보》 신천지국 기자로 활동한 바 있었고, 1929~30년에는 신천수리조합 반대 입장을 견지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신천 지역의 자치위원회를 주도하여 구성하고 활동했다. 소련군은 신천 지역사회의 세력 불균형, 즉 사회주의 세력의 취약과 민족주의 세력의 막강한 영향력을 인정하고 활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련군이 처음 평양에서 조만식 계열의 민족주의자들과 우호적 관계를 설정하려 했던 것과 비슷하다.

 

이와 같이 우익 계열이 중심이었던 신천군위원회는 1946년 봄 이후 재편되었다. 그 계기는 소련군의 양곡(糧穀) 반출 및 행패, 신탁통치 파동 등이었다. 해방 직후부터 신천 등지에 주둔한 소련군은 폭행과 절취를 일삼았고, 이는 1946년 여름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토지개혁 이후에도 소련군이 수확한 모든 것을 가져갈 것이라는 소문들이 돌았고,60)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폭행과 물품 절취 등 지역 주민과의 마찰이 계속 발생했다.61) 때문에 소련군의 양곡 반출 정책 및 행태는 신천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서도 심각한 불만 사항이었고, 이에 대한 불만은 주로 우익 계열에서 표출되었다. 이러한 불만과 갈등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좌우익의 찬반 및 갈등과 결부되어 전개되었다. 1946년 4월 신천 사법기관의 보고에 의하면, 이계천은 상급기관 명령 불복종 및 정책 집행 문제 등의 이유로 비판받았다. 신천군위원회는 사회단체 각층 각파를 총망라하여 구성되는 등62) 그동안 신천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갖고 있던 우익 계열은 약화되었다.63) 반면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은 타 지역(함경도)에서 파견된 간부들과 신천 출신 소외계급·계층이었다. 1946년 봄 토지개혁은 신천의 토지 소유 관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는데, 최소 70% 이상의 농민이 혜택을 입었고 그들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을 지지하고 조선공산당원이 되어갔다.64)

 

신천의 개신교계는 북한 당국의 정책 및 정세의 변화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황해도에서 재령군 다음으로 개신교 교회나 신도 수가 많았고 지역적 영향력이 강했던 신천군이었기에 북한 중앙의 정책이 신천에 미친 충격은 매우 컸다.

 

신천을 비롯한 황해도 인근 지역에서는 1946년 봄부터 북한 당국과 개신교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갈등의 원인은 토지개혁에 있지 않았다. 신천과 인근 지역의 사법기관들이 토지개혁에 대한 지주들의 ‘무반항’에 대해 주목했듯이,65) 신천에서는 토지개혁 반대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이는 일제하에서부터 토지개혁이 민족적·계급적 당면 과제로 제시되고 있었기에, 기독교·지주를 기반으로 한 조만식 계열의 조선민주당과 남한의 한국민주당조차도 토지개혁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못하던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천주교회와 개신교회 역시 지주로서 신자들에게 소작을 주었던 토지가 몰수되었으므로 그에 대한 불만이나 반대 의사는 있었겠지만, 노골적으로 토지개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토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판단된다.

 

기독교계는 토지개혁이라는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아래 신천 사법기관의 보고는 신천 지역 기독교계의 교세와 남북한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예수교 신자로 千人. 표면적으로 반동성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음. 내심으로는 민족반역자 김구 이승만의 독재정권획득을 몽상 갈망하는 자들이며 진보적 민주주의에 충실한 신도는 극소수라고 간주됨.66)

 

위의 자료에 의하면, 1946년 4월 현재 신천의 기독교 신자는 1천 명으로, 이는 1925년 기준 기독교 신자 3,280명(개신교 2,700명, 천주교 580명)의 30%에 불과했다. 이는 사법 당국에 의해 파악된 신도수로서, 주로 교회 내 집회와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신천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여러 이유로 교회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고, 기존의 3분의 1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교회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기독교계는 신도수의 급감을 위기로 인식했고, 그만큼 그들은 결집했고 반공적 의사를 표면적으로 드러냈다. 기독교계 중에서도 장로교 측의 반공적인 태도는 노골적이었고 그들은 남한의 김구와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었다. 북한 당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극히 일부였다. 신천과 인근 지역의 사법기관은 북한에 적대적인 장로교의 동향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예의주시했다.

 

신천 인근의 안악이나 재령의 사정도 비슷했다. 안악의 “장로교는 極盛을 呈하고”, “일부 신자들은 38이남을 맹신하며 반동적 언사를 弄”했고, 재령의 기독교는 공산당과 임시인민위원회의 정치 노선에 반대했다.67) 흥미로운 점은 안악과 재령의 천주교나 천도교는 공산당이나 임시인민위원회에 적극성을 보이지는 않아도, 장로교만큼 노골적으로 반공적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공명하는 점도 있었다고 한다.68) 1946년 봄의 시점에서 천주교와 개신교의 북한 당국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천과 인근 지역에서 북한 정권에 노골적인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은 개신교계였으며, 감찰기관이 촉각을 세웠던 종교계도 개신교였다.

 

개신교 중에서도 장로교회가 결성한 연합노회는 남한의 미군정 · 김구 · 이승만을 지지하고, 그들과 연락을 시도했다. 연합노회는 북한교회를 대표하는 사절단을 비밀리에 남한에 파견하고 나아가 남한교회와 연락하여 이승만 · 김구를 예방하고자 했다.69) 한독당에 가입한 인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때, 한독당의 거점은 교회를 중심으로 마련되었고, 핵심인물들도 개신교인들이었다.70) 특히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황해도에서 평안도에 이르는 서북 지역에 “매 10리에 교회 하나”씩 있다는 점을 활용하면, 교회를 중심으로 한 연락망을 통해 1주일이면 전 지역이 연결되고, “2주간이면 천지를 전복할” 수 있다고도 보았었다.71) 이는 개신교계가 교회를 북한 정권에 대한 저항의 조직적 기반으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개신교계의 김구와 이승만 지지는 북한 당국에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는 단순히 개신교의 동향 정도로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신천과 인근 지역 사법 당국의 보고서가 작성되었던 1946년 봄은 남한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동아일보》의 오보(1946.12.27) 이후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넘어 심각한 좌우갈등과 반소 · 반공주의의 확산으로 나아가던 때였다. 김구는 임정법통론에 입각한 정부수립운동(임정봉대론)을 바탕으로 한 반탁운동을 벌였고, 이승만도 “찬탁은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며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반대했으며, 여기에 친일세력이 결합하여 삼상회의 결정을 찬성한 좌익을 비난했다. 반탁운동은 당시 한반도의 핵심적인 가치였던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통일 정부 수립의 문제를 단번에 반소 · 반공주의로 전환시켰다.72) 이러한 남한의 반소·반공주의가 신천 등지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황해도 일대에서의 김구의 활동과 영향력이라는 역사적 배경도 작용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김구는 1900년대 교육 활동을 통해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었고 이는 일제하 독립운동에도 반영되었던 바가 있다. 반면 소련과 북한은 김구와 이승만에 대해 삼상회의 결정을 반대하고 미군정 밑에 조선을 다시 예속화하려 한다고 비난했다.73) 따라서 신천과 인근 지역의 개신교계가 북한의 정책과 선전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일제하 신천 지역의 분위기가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이며, 해방 직후 기존의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자치위원회를 주도했었다는 점, 그들이 북한 내에서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지지했고, 남한의 반소 · 반공주의로 이어지는 반탁 우익 세력을 지지하는 매우 정치적인 사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동향에 대해 북한 당국은 반공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한 억압책을 취하면서도 종교 억압 금지 정책을 표방했다. 보안국장은 “종교단체에 대하여 강압적 태도를 버려야 하며 종교에 있어서는 반동적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철저히 취급할 수 있으나 종교 신앙의 자유인 원칙에 입각해야 할 것이다.”고 주의를 주었다.74) 종교단체 책임자를 체포할 때에도 체포 전에 미리 소속책임자와 연락할 것, 종교억압이 위반행위라는 점 등을 주의하라고 강조했다.75) 북한 당국은 종교 자유를 중요한 원칙으로 표방했고, 실질적으로도 지역사회에 상당한 세력과 조직적 기반을 가진 기독교계를 인정하고 종교시설 내에서의 집회와 종교의식을 허용하면서, 그들을 포섭 활용하려 했다.

 

2) 북한의 기독교도연맹 창설과 천주교 · 개신교계의 참여 문제

 

‘일요 선거’ 문제는 개신교계와 공산주의 계열의 갈등이 표면화된 상태에서 발생했다.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일(1946.11.3)이 일요일이었는데, 평안도의 교회를 비롯해 이북5도연합노회가 이 선거를 거부했다.76) 소련군 및 공산주의 계열은 일요 선거에 대한 개신교계의 반발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북한은 인민민주주의 체제로서 ‘통일전선’을 중시하며 종교의 존재 및 활동 인정을 중시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대신 개신교계를 북한의 사회주의 진영에 우호적으로 재편하면서 통제하는 태도를 취했다. 쉬띄꼬프는 선거 일주일 전인 10월 25일 김익두 등을 만나 당국에 우호적인 기독교 단체를 결성할 것을 제안했고, 1946년 11월 28일 강양욱을 중심으로 한 북조선기독교도연맹 창립대회가 열렸다.77) 기독교도연맹은 북한의 노동당과 인민위원회의 정책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는데, 이는 그에 동의하지 않으며 비판적이었던 기독교계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도연맹에의 가입 여부는 북한 정권에 대한 지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평양 중앙에서 처음 조직된 기독교도연맹은 지부를 확대해갔는데, 지부 중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곳이 황해도, 그다음이 함경도였다. 가장 먼저 지부가 조직된 황해도였지만 기독교도연맹에 심한 거부감을 보인 경우가 많았고 가입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이 심각했다. 반면 함경도의 개신교 교직자들은 현실적 불가피론을 가지고 모두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했다.78)

 

황해도 신천에서 연맹 가입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김익두였다. 이후 그는 1949년 2월 기독교도연맹 총회 결성 시 총회장, 1950년 3월 북조선장로교 총회 조직 시 총회장을 맡았다.79) 일제식민지기 신천을 중심으로 각지의 교회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김익두는 기독교도연맹의 결성 및 확대를 주도하는 등 북한 개신교계의 재편의 상징적·실질적인 역할을 했다. 황해도의 거의 모든 개신교직자가 기독교도연맹에 가입80)했을 뿐 아니라 북한 당국에 대한 우호조직 하에 망라되었다. 외형상 개신교계는 북한정권을 지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도연맹 창설과 가입은 신천에서 개신교계 내부의 갈등을 낳았고 이는 중장기적으로 사회주의 계열과 개신교계 간의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겼다. 개신교회는 노회와 연맹으로 분열되었고 북한 당국 및 정책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한 심각한 내부 갈등을 겪었다. 이들은 어용파, 거부파, 현실적 불가피파로 분열되었다. 황해도에서는 연맹에 가입하는 자는 기독교의 입장을 버린 어용 교직자로 인식되었고, 연맹을 무조건 거부했던 교직자는 순교자에 속하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연맹 가입 거부를 주도한 이들은 일제하 신사참배 거부의 전통을 계승한 재건파였는데, 그들은 공산주의와의 일체의 타협은 물론 선거·기독교도연맹·공민증 거부를 내세우며 순교나 월남의 길을 택했다.81)

 

반면 천주교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되지 않았다. 이는 천주교회의 특징 즉 어떤 성직자라도 장상(長上)인 소속 교구장, 나아가서는 교황의 공식적인 사목 교시가 없이는 개인 나름대로 어떤 주요 문제 특히 정치 문제에 해석을 내릴 수 없는 통일 체계 때문이었다. 특히 황해도 천주교회는 서울교구에 속해있었기에, 해방과 분단 이후 교구청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82) 때문에 개신교계와는 달리 천주교 내부에서 기독교도연맹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나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신천을 포함하여 북한의 천주교회가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천주교회가 북한 당국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83) 하지만, 신천 천주교회는 소련군이나 인민위원회·노동당과 긴장감을 갖고는 있었으나 1948년까지는 교회를 운영할 수 있었다. 신천 주둔 소련군과 구천우 신부의 면담에서도 신천 천주교회의 연혁과 교세, 외국인 주교·신부들과의 관계 등이 조사된 것이 전부였다. 1946년 교회 소유 토지에서 200석의 벼를 수확했고, 그것을 처분하여 성당 개축 공사도 완공하고 종각도 세워 훌륭한 성당으로 변모시켰다. 1948년에는 성모 승천 대축일과 복자 축일을 기념한 연극 공연은 허가되지 않았지만, 어렵게나마 성탄절 연극과 자정미사 등을 마치는 등 “즐겁게 성탄 축일을 보냈다. 그리고서 아무 후환도 없었다.”84) 이는 신천 천주교회가 소련군이나 북한 당국과 긴장 관계는 있었다 하더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소련군이나 북조선노동당도 천주교 신부들을 포섭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85) 때문에 “해방 후 1~2년간은 각 본당의 신심 활동이 다소 자유로웠다.”는86) 기술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황해도 천주교회에 대해 공산당 노선에 냉담하면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고 평가되는 것도87)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의 천주교에 대한 기본적인 정책이 탄압으로 변화한 것은 1949년이다.

 

3) 1949년 38선 충돌과 북한의 천주교계 억압

 

기독교계에 대한 북한의 감시, 적발, 처단은 실재했고, 점차 심화되었다. 기독교계는 합법적으로 별도의 공간과 집회를 갖는 집단이었지만, 북한 당국은 그러한 만큼 신천을 포함한 황해도 지역에서 종교단체에 주의를 기울였다. 북한은 공식적인 종교 자유 정책을 의식하고 종교단체나 타 정당 및 사회단체에 대한 감시나 처단이 탄압 혹은 인권유린으로 비취질 것에 대해 우려하면서도88) 종교단체 특히 기독교도들에 대해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기독교인들은 지주, 자본가, 친일파 등과 같은 선상에서 감찰되었다.89)

 

당시 북한에서 ‘종교 관계’는 ‘이남 관계’와 더불어 한 인물의 신임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 사항이었다. 설령 친척 중에 기독교 신자가 있는 경우에는 ‘적과 타협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인식되었다. 달천중학교 교무주임 우태순은 노동당원이었는데, 그에 대한 문의서에는 “이남 관계, 종교 관계는 없다(외삼촌이 과거 기독교 신자).”고 명시되었다.90) 가산중학교 교장 리상준은 1945년 겨울 조선공산당 황해도 신천군당부에 입당했고, 1946년 1월 신천군당부 조직부원, 1947년 신천중학교 교원 등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해 간부시각(幹部視學)은 “부친의 성분이 목사로서 가정환경은 좋지 못하나 형과 동생이 로동당원이며 이남 관계는 없으나 종교 관계에 있어서 장모(동거)가 아직 기독교 신자이며 좋지 못한 환경이다. 사상적으로는 계급적 각성이 부족하다. 단적으로 동거 중에 있는 장모가 종교 관계에 있음은 신비적 사상을 아직 퇴치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며 적과에 타협할 수 있는 조건으로 된다. 이는 자기가 목사의 자식이라는 성분상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그는 조직적으로 중요 간부로 있었고 또 실지 단련된 데서 정치적으로 신임할 수 있다고 본다.”고 의견을 냈다.91) 리상준은 해방 직후 입당한 이래 여러 간부직을 수행하여 정치적으로 신임할 수 있다고 평가되었지만, 목사였던 사망한 부친의 자식이라는 점에서 성분상 문제가 지적되었고, 기독교 신자인 장모와 동거 중이라는 점에서 ‘적과 타협 가능한 조건’이라는 점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 활동이 제약받을 뿐 아니라, 자신이 늘 감시당한다고 느꼈다. 그들은 “기독교 가정은 항상 요주의 인물”이었으며, “주일날 학교 나오라.”면서 기독교와 학교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고 구술했다.92)

 

1949년부터는 신부 체포 등 천주교에 대한 억압이 본격화되었다. 신천 본당의 구천우 신부가 ‘반공 삐라’ 제작 살포 혐의로 신천 내무서에 연행되었다가 탈출, 월남한 것이 1949년 2월이었다. 해주 본당의 한윤승 신부 역시 1949년 5월 ‘반공 삐라’ 사건으로 해주 인민재판소에서 15년형을 언도받고 신의주 방면으로 이송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북한 최대의 천주교 수도원인 원산교구의 덕원 수도원이 완전히 폐쇄된 것도 1949년 5월이었다.93)

 

반공 사건 연루를 이유로 한 천주교에 대한 억압이 공공연했던 1949년은 38선에서 남북의 군사 충돌이 정점에 달했을 때였다. 38선 충돌의 규모나 양상이 1948년까지는 소규모의 총격전이었다면, 1949년은 연대급이 동원될 정도로 대규모의 충돌로 격화되었고, 38선 일대의 상대지역에 대한 공격과 테러가 난무했다. 1948년 남북한에서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자, 1948년 12월 북한에서 소련군이 철수했고, 1949년 1월부터 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어 6월 완료되었다. 38선을 사이로 경계를 맡은 상호 적대적인 남북한은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군사 충돌을 벌였다.94)

 

신천의 남쪽에 접한 해주는 38선 충돌의 핵심지역이었고, 해주의 반공사건은 때로 신천이나 남한과 연결되어 발생했다. 1949년 1월 해주에서 공작 사건이 발생했는데, 남한은 해주에서 ‘의거’가 일어났다고 보도했지만, 남한의 이범석과 특수공작기관의 공모로 발생한 대북 테러였다. 해주사건은 해주의 특수조직이 신천에 본거지를 둔 청사회 및 황해도 교원 중심의 신우회와 공동으로 일으킨 반공 사건이었다.95)

 

1949년 38선 충돌의 한 양상은 수많은 ‘반공 삐라’의 살포였고, 신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9년 7월 18일 신천군(신천면, 양장리, 원암리, 대말리, 동양리 북부 등지) 상공에는 남한의 비행기가 뿌리는 ‘삐라’ 약 4,500매가 산포되었다. ‘삐라’ 내용은 인민군의 월남을 권유하고 인민군의 패전과 죽음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일부 주민들은 전쟁위협을 느꼈다.96) 1949~50년에는 해주 등지에서도 ‘삐라’ 산포가 잦았다. ‘삐라’의 내용은 강원도 인제군을 비롯한 북한 전역의 청년들이 “애국적 의거운동에 총궐기”하고 있다는 것, 청년들의 규합과 무장봉기, 공산당원들에 대한 조사 및 기억, 즉시 처단 등을 선동하는 것이었다.97) 신천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에 뿌려진 ‘삐라’는 북한 정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서는 반공 궐기를 선동했고, 북한 정권에 협조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위협했다.

 

이와 같은 ‘반공 삐라’가 산포되었을 때 천주교회는 일차적인 의심의 대상이 되었다. 성당은 ‘삐라’ 등사가 가능한 공간이었고, 월남민의 기착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황해도 천주교회사》에 의하면, 1949년 신천에 뿌려진 ‘삐라’는 구천우 신부도 모르게 신부 방에 있던 등사기를 이용해 등사된 것이었고, 구천우 신부는 월남 도움을 요청하는 학생들에게 “그들을 동정하여 그 길을 알려주었을 뿐이었다.”98)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이 해주의 천주교회에서도 벌어졌다. 이에 대해 《황해도 천주교회사》는 공산주의자들의 혐의 날조, 천주교 신부 체포 · 제거 음모로 보았다.99) 이는 신천의 천주교회가 반공 활동에 적극 나서거나 주도했다기보다는 반공 우익 인사들의 활동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8선 충돌은 인근 지역에서만이 아니라 남북한 사회의 갈등과 경직화에 영향을 주었다. 1948~49년 군사 반란 및 진압과 민간인 학살(여순 사건), 1949년 6월 국가기구인 반민특위를 경찰이 습격한 사건(반민특위 습격 사건), 남한의 대표적인 정치지도자 중 한 명인 김구 암살 등은 당시 남한사회가 내전과도 같은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북한에서는 수많은 정치범이 발생했다. 소련대사 쉬띄꼬프가 1949년 상반기의 정치범 발생에 주목하고 그 원인을 소련군 철수 후 ‘불순분자’들의 행동이 과감해지고 증가된 것과 더불어 남한이 스파이 요원들을 북한으로 파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100) 1949년 정치범이 양산되었고, 그 중에 천주교회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나아가 1950년에는 형법(1950.5.5 채택)에 “제21장 관리질서 침해에 관한 죄, 제258조 종교단체에 행정적 행위를 한 자는 1년 이하의 교화노동에 처한다, 제259조 종교단체에 기부를 강요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여 종교의 재정적 기반과 사실상의 종교 행사를 금지시켰다.101)

 

해방 직후 북한의 기독교 정책은 기본적으로 포섭, 감시, 억압이었지만, 개신교와 천주교 양자의 대응에는 차이가 있었다. 1946년 10월 기독교도연맹을 창설하고 개신교계와 천주교계 모두를 가입시키려 했지만, 개신교계만이 여기에 가입했다. 기독교도연맹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고 이에 가입한 개신교계 역시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반공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개신교계 인사들은 월남했다. 반면 천주교계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1948년까지는 소련군 및 북한 당국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1949년 남북 갈등 및 군사 충돌이 격심해졌을 때 각종 ‘반공 삐라’ 산포 사건들이 발생하고 여기에 천주교계가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면서 신부 체포 등 천주교에 대한 억압이 본격화되었다.

 

1949년 북한의 천주교계 억압과 구천우 신부의 월남은 바로 이러한 정세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38선 충돌의 영향은 인근 지역인 신천 등지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시 ‘삐라’ 산포는 북한 내 반공적 인사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저항이었고, 북한은 이러한 사건을 천주교회 억압의 계기로 삼았다. 1949년 시점에서 기독교계와 북한 당국 간에 전면적인 갈등이 존재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북한의 감찰기관은 천주교 신부를 직접 겨냥했고, 실제로 신부의 검거나 월남은 사실상 천주교회의 폐쇄 등으로 이어졌다.

 

 

4. 맺음말

 

일제하 지주제와 기독교가 발달한 신천 지역에는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인 소작농 간의 첨예한 민족적·계급적 갈등과 다양한 계열의 민족주의적 독립운동 · 사회운동들이 존재했다. 신천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막대했던 기독교는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동아일보》 계열의 인사들이나 조선인 유지의 지역사회 활동의 조직적 토대를 제공했다. 기독교계 학교는 신천 지역 유지들의 농촌계몽운동의 공간이자 조직적 기반이었다.

 

해방 직후 신천군위원회를 구성하고 주도했던 인물들도 일제하 우익 계열이었다.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던 왕재덕의 장손이었던 이계천 등 《동아일보》 계열의 인사들이 그 중심이었다. 하지만 신천군위원회는 신탁통치 파동과 좌우익 갈등, 1946년 봄 양곡 반출 문제 등을 계기로 재편되었다. 이는 해방 직후 신천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던 기독교 우익 계열의 약화를 의미했다.

 

정세 변화에 개신교계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천과 인근 지역의 기독교계는 토지개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토지개혁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독교계는 경제적인 문제보다는 정치적인 이슈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신도가 급감한 기독교계, 특히 장로교 측의 반공적인 태도는 노골적이었으며 남한의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드러냈다. 이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소련과 북한의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매우 정치적인 사안이었다. 소련군과 북한의 지도부는 기독교계를 사회주의진영에 우호적으로 재편 · 통제하는 정책을 취했고, 이는 기독교도연맹의 창설로 나타났다.

 

황해도 신천에서 기독교도연맹 가입을 주도한 것은 일제하 개신교회 부흥운동의 대표자 김익두였다. 신천과 황해도 개신교회의 기독교도연맹 가입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한편 신천의 천주교계는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북한 당국과의 갈등도 심각하지 않았다. 이는 해방 직후 북한에서 기독교계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기독교도연맹이 창설된 1946년 10월 이후 1948년경까지는 신천의 기독교계는 외형상 북한 정권과 우호적인 긴장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노골적으로 반공 정책을 지지했던 개신교계는 기독교도연맹 가입을 통해서, 천주교회는 연맹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북한 당국과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교회를 운영했다. 북한 정권도 이러한 방식으로 종교의 자유 정책을 대내외에 드러내고 신천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기독교계를 정권에 우호세력으로 포섭·편입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곧 한계를 드러냈다. 기독교계의 북한 당국에 대한 불만은 잠복되었고 개신교 내부의 갈등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북한 당국도 기독교계를 지주·민족반역자와 같은 세력으로 인식했고 언제든지 남한과 연결될 수 있는 잠재세력이자 조직으로 의심, 적발, 처단했다. 일제하 신천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이 지역 유지들이 나름의 사회운동을 펼칠 수 있는 조직적 공간이었듯이, 해방 후에도 지역의 반공적 인사나 활동의 기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1949년 38선에서의 남북한 군사 충돌의 격화는 북한에서 정치범을 양산했고, 이때 교회가 억압의 일차적인 대상이 되었다. 해방 직후부터 1949년까지 기독교계 인사들은 북한에 대한 불만과 탄압을 피해 월남했고, 그들은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북한을 점령하자 신천 등지에 파견되어 반공주의를 선전했다.102) 이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종교 정책이 훨씬 경직화되는 빌미를 제공했다.

 

* 이 연구는 2010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NRF2010-361-A00017)을 받아 수행되었다. 해방 前後 북한지역의 개신교회사에 대한 선행연구와 뜻깊은 조언으로 이 논문을 진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신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의 이만열, 윤경로, 김흥수, 이재근 선생님과 천주교회사 등에 대한 중요하고 세심한 제언을 해주신 익명의 심사자 세 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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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사편찬위원회, 《천주교 평양교구사》, 1981.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원산수녀원사》, 1988.

하종필, 《북한의 종교문화》, 선인, 200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원산교구 연대기》,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함경도 천주교회사》, 1995.

황석영, 《손님》, 창작과비평사, 2001.

 

3. 논문

 

강은지, <황석영 장편소설 《손님》 실제 모델 유태영 목사, “미군의 신천 민간인 학살 부정한 적 없다”>, 《민족21》 6, 2001.

강인철, <현대 북한종교사의 재인식>, 김흥수 엮음, 《해방후 북한교회사》, 다산글방, 1992.

강정구·김종회, <종교문화적인 갈등으로 바라본 신천 학살 사건 :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론>, 《외국문학연구》 42,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11.

김남석, <일제시대 농촌문고에 관한 연구>, 《도서관학논집》 24, 1996.

김성은, 〈1930년대 황애덕의 농촌사업과 여성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35, 2011.

박원홍, <북조선 인민위원회 선거(1946. 11. 3)와 북한 개신교의 대응>,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09.

사와 마사히코,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의 기독교>, 김흥수 엮음, 《해방후 북한‌ 교회사》, 다산글방, 1992.

윤덕영, <일제하·해방직후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과 국가건설노선>,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이경남, <황석영 소설 《손님》의 파장과 신천 ‘학살박물관’의 허구> 상·중·하, 《한국 발전 리뷰》 105~107호, 한국발전연구소, 2001.

정용욱, <1945년 말 19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 《역사비평》 6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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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무, <1900년대 김구의 황해도 장련·문화·안악 이주와 계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5, 2013.

_____, <일제 강점기 왕재덕의 농촌교육사업과 신천농민학교>, 《숭실사학》 36, 2016.

한모니까, <‘봉기’와 ‘학살’의 간극 : 황해도 신천 사건>, 《이화사학연구》 46, 2013.

 

…………………………………………………………………

 

1)‌ 신천 사건에 대한 남북한의 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신천 사건의 전개에 대해서는 한모니까, 〈‘봉기’와 ‘학살’의 간극 : 황해도 신천 사건〉, 《이화사학연구》 46, 2013 참조.

 

2)‌ 황석영, 《손님》, 창작과비평사, 2001 ; 이경남, 〈황석영 소설 《손님》의 파장과 신천 ‘학살 박물관’의 허구〉 상ㆍ중ㆍ하, 《한국발전 리뷰》 105~107, 2001 ; 강정구ㆍ김종회, 〈종교문화적인 갈등으로 바라본 신천 학살 사건 : 황석영의 장편소설 《손님》론〉, 《외국문학연구》 2011년 여름호. 반면 소설의 모델이자 모티브를 제공했던 유태영 목사는 자신은 미군의 학살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강은지, 〈황석영 장편소설 《손님》의 실제 모델 유태영 목사, “미군의 신천 민간인 학살 부정한 적 없다”〉, 《민족21》 2001년 6월호).

 

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451쪽.

4) 위의 책, 138~139쪽ㆍ459쪽.

 

5) 이 글은 해방 직후 신천 지역 기독교계의 동향이라는 하나의 사례를 다루지만, 교회사와 북한사의 상호 보완을 제안하고 시도하는 연구이다. 북한의 기독교사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통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 왔으며 특히 북한 지역의 천주교회사 연구는 《천주교 평양교구사》, 천주교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1981 ; 《황해도 천주교회사》,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사업위원회, 1984 ; 《원산수녀원사》,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1988 ; 《원산교구 연대기》,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 《함경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외에는 거의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물론 이 연구들은 천주교회의 문헌 자료들과 증언들을 망라하여 정리한 연구들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으나, 기초자료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교회사를 당대의 정세 변화는 물론 지역사회의 변화에 더욱 밀착시켜 연구한다면, 지역사회와 호흡했던 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 지역사 연구에 교회사적 시각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북한사 연구는 북한 중앙의 변화를 해명하는 데 중점이 있었으며, 특히 지주제와 토지개혁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어 왔다. 일제하에서의 근본 모순이 식민지 지주제였다는 점과 해방 직후 남북한의 체제경쟁이 토지/농지개혁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는 아주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그럼에도 해방 직후 북한 사회의 변화를 토지개혁 등의 경제적 변화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은 기독교의 영향이 매우 컸던 지역으로서, 해방 직후 이들 지역의 변화에서 기독교계의 역할은 반드시 해명될 문제이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으로는 교회사를 남북분단의 역사에 더욱 밀착시키는 한편 북한 지역사 연구에 교회사적 시각을 도입함으로써, 상호 이해와 연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6) 일제식민지기의 신문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http://www.koreanhistory.or.kr/과 NAVER 뉴스 라이브러리 http://dna.naver.com/search/searchByDate.nhn을 활용했다.

 

7) ‌한국전쟁 중에 미군은 북한 점령 지역에서 북한문서를 노획했는데, 이 자료들은 미국 국립공문서관에 해외 노획문서군(Record Group 242, National Archives Collection of the Seized Documents)으로 분류 · 관리 · 보관되고 있다. 이 연구는 미군 노획 북한문서 중에서 신천을 비롯한 황해도 일대의 감찰 관계 서류와 신천 지역의 교원 이력 서류 등을 활용했다.

 

8)‌ 신천군지 편찬위원회, 《신천군지》, 황해도 신천군민회, 1984 ; 북한연구소, 《북한민주통일운동사》(황해도 편), 북한연구소, 1990 ;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망각의 전쟁 : 황해도 신천 사건〉 “MBC 특별기획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서울 : 문화방송 시사제작국, 방송영상(2002.6 방영)과 제작보고서, 2002(이하 ‘지역 구술자명’으로 간략히 인용함).

 

9)‌ 《쉬띄꼬프일기》(1946~1948), 국사편찬위원회, 2004 ; 이재훈 역, 《러시아문서 번역집 26: 러시아연방 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 선인, 2017.

 

10)‌ 황해선 철도, 재령-안악노선의 국도, 해주 · 재령 · 안악 · 은율 · 송화 노선의 지방도 모두 신천을 경유했다(신천군지 편찬위원회, 앞의 책, 215~216쪽).

 

11)‌ 《黃海道 道勢一斑》, 黃海道, 1935, 32~33쪽 · 37쪽.

12)‌ 위의 책, 38~39쪽.

13)‌ 위의 책, 10~12쪽 · 32~33쪽 · 34~35쪽 · 36~37쪽.

 

14)‌ 〈殘忍惡毒에 極한 東洋拓殖會社〉, 《독립신문》 1922년 9월 20일 자 ; 〈소작료 증가로, 신천군 齋藤 농장의 사십여 농민 대불안, 매두락 이 관씩 올려〉, 《조선중앙일보》 1933년 4월 28일 자.

 

15)‌ 〈전 수확이 소작료도 부족, 회사측과의 교섭도 무효, 신천 일대의 참상〉, 《조선중앙일보》 1933년 11월 25일 자 ; 〈年收는 말아닌데 소작료는 불변동, 작인들은 먹을 것이 없어, 신천군 하의 참상〉, 《조선중앙일보》 1933년 12월 12일 자.

 

16) ‌1913년 청계동 본당의 빌렘 신부가 황해도 해주에 본당을 창설하고 전임된 후 청계동은 공소로 격하되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446~448쪽).

 

17)‌ 車相瓚 · 朴達成, 〈黃海道 踏査記〉, 《개벽》, 제60호, 1925(이하 〈黃海道 踏査記〉), 66쪽.

18)‌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449~450쪽.

19)‌ 黃海道, 《黃海道學事及宗敎(1938)》, 1939, 119~120쪽.

 

20)‌ 1925년 현재, 신천군의 각 종교별 신도 수는 개신교 2,700명(교회 15개소), 천주교 580명, 천도교 350명, 시천교 1,000명, 불교 150명 등이었다. 재령군의 경우 개신교 4,000명(교회 24개소)이었다(〈黃海道 踏査記〉, 66쪽).

 

21) ‌위의 책, 62쪽.

22) 박성겸 편저, 《황해노회 100회사》, 황해노회 100회사 편찬위원회 간행, 1971, 57~61쪽.

23)‌ 북한교회사집필위원회, 〈부록 : 해방 이전 북한 지역에 설립된 교회〉, 《북한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24)‌ 위의 책, 141~142쪽.

25)‌ 북한교회사집필위원회, 〈부록 : 해방 이전 북한 지역에 설립된 교회〉.

 

26)‌ <信川敎會牧師 不信任運動〉, 《중앙일보》 1933년 1월 3일 자 ; <신천장로교회, 분규 거익확대>, 《중앙일보》 1933년 2월 4일 자 ; 〈信川敎會紛爭 老會에 告訴〉, 《동아일보》 1933년 1월 29일자 ; 〈紛糾의 信川敎會 三個月만에 合同 黃海老會의 勸告로〉, 《동아일보》 1933년 5월 20일자 ; 〈一時 解決되엇든 信川敎會 또 分裂 각각 달라저 예배를 보아〉, 《동아일보》 1933년 6월 11일자 ; 〈長老 執事等 免職處分 斷行, 黃海老會別委員會에서 信川敎會紛糾事件〉, 《동아일보》 1933년 7월 12일 자 ; 〈川敎會問題解决〉, 《조선중앙일보》 1933년 5월 22일 자 ; 〈황해 노회의 분규는 미해결〉,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8일 자.

 

27)‌ 황해도 천주교회는 서울교구 소속이었는데, 신자 수는 서울교구 총신자 수 66,083명의 19.5%, 본당(신부 주재 본당) 수는 14개로 서울교구 전체 본당 수 51개의 27.5%를 차지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134쪽).

 

28)‌ 위의 책, 134쪽.

29)‌ 안악 사건에 대해서는 윤경로, 《105인 사건과 신민회 연구》, 한성대학교 출판부, 2012, 참조.

 

30)‌ 신천군을 포함하여 인근 지역은 1905년 을사강제조약 전후 의병항쟁을 시작으로, 3·1운동, 독립군의 조직·훈련과 의열단 방식의 운동 그리고 신교육·신문화 운동이라는 실력 양성 운동 등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었다.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투탄 의거를 했던 의열단원 나석주는 재령 명신학교 출신으로, 간도의 무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뒤 황해도 송림 겸이포에서 상업을 하며 항일공작원 활동을 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는 등 정미업을 하며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기도 했었다. 이승만의 고향이 황해도 평산임은 잘 알려진 바와 같다.

 

31)‌ 경허전기편찬위원회, 《안악 사건과 3·1운동과 나 -경허 최명식 선생 약전과 자서-》, 1970, 39~40쪽(조광, 〈일제하 무장 독립 투쟁과 조선 천주교회〉, 《한국 근현대 천주교사 연구》, 2010, 158쪽 재인용).

 

32)‌ 이찬영 편, 《황해도 교회사》, 황해도 교회사 발간위원회, 1995, 254~258쪽.

33)‌ 조광, 앞의 글, 159쪽.

34)‌ 한규무, 〈1900년대 김구의 황해도 장련 · 문화 · 안악 이주와 계몽운동〉,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45, 2013.

 

35) 〈박태례〉와 〈이덕주〉,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List.do?goTocode=20001.

 

36)‌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인포그래픽 ‘황해도’.

37)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신천군’, http://db.history.go.kr/samil/home/demons/select_demons_detail.do.

38)‌ 〈黃海道 踏査記〉, 66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118쪽ㆍ453~454쪽.

 

39)‌ 경신학교의 설립 주체 및 연도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상이하다. 1901년 김익두 설립(《중외일보 1928년 4월 8일 자), 1905년(〈黃海道 踏査記〉), 1909년 김익두 설립(《동아일보》 1923년 11월 19일 자), 일반교인 공동 창립(《동아일보》 1923년 7월 16일 자) 등의 기록이 보인다.

 

40)‌ 황해도, 《黃海道學事及宗敎(1938)》, 1939, 2쪽.

 

41)‌ 〈林神父의 獨擔으로 幼稚園을 新設 信川에 喜消息〉, 《조선중앙일보》 1935년 7월 29일 자 ; 〈미화유치원 탄생, 임충신씨 特志로〉, 《조선중앙일보》 1936월 4월 22일 자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453~454쪽.

 

42)‌ 〈五十勞働者의 新春運動盛况〉, 《중앙일보》 1933년 2월 12일 자 ; 〈各地의 府,邑,面議員 選擧戰〉, 《매일신보》 1943년 4월 27일 자.

 

43) 신천군지 편찬위원회, 앞의 책, 230쪽.

44)‌ 한규무, 〈일제 강점기 왕재덕의 농촌교육사업과 신천농민학교〉, 《숭실사학》 36, 2016, 210쪽.

 

45)‌ 조동걸 · 박용옥, 〈인물약전편 : 왕재덕〉, 《대중운동》(민족운동총서 9),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2, 512~514쪽 ; 한규무, 위의 글, 204쪽.

 

46)‌ 한국교회사연구소는 왕재덕이 천주교 신자로서 1934년 6월 6일 신천 본당 신부에게서 종부성사를 받고 사망했다고 보는 반면(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450쪽), 왕재덕이 천주교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고 보는 연구도 있다(한규무, 위의 글, 208~209쪽). 그런데 왕재덕 1주기를 기념하여 천주교회 측은 한국은 물론 로마, 중국 등지에서 미사를 거행했다(〈世界各地 天主敎堂에서 王在德女史 週忌에 冥福祈禱〉, 《동아일보》 1935년 7월 26일 자).

 

47)‌ 한규무, 위의 글, 211쪽.

48)‌ 위의 글, 206쪽.

 

49)‌ 1920~30년대 기독교 농촌운동 및 예수촌 건설 사상에 대해서는 방기중, 《배민수의 농촌운동과 기독교 사상》, 〈제2장 1920년대 기독교 농촌운동과 기독주의 사상〉 및 〈제3장 1930년대 농촌운동 사상의 확립과 장로교 농촌운동〉,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9 참조.

 

50) ‌감리교계 여성 지식인의 사례이지만, 황해도 수안의 농촌운동을 주도했던 황애덕과 김노득의 경우도 참고가 된다(김성은, 〈1930년대 황애덕의 농촌사업과 여성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35, 2011 ; 하희정, 〈3·1운동 이후 기독교의 사회적 실천과 여성 농촌운동〉, 《한국기독교와 역사》 48, 2018).

 

51)‌ 이계천은 세 번의 위원장 선거 끝에 당선되었다. 민규식(閔奎植)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창립인가를 받은 후 사임하고, 재령 출신의 민병덕(閔丙德)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가 공사대행 계약을 성립하고 다시 선거를 진행한 결과 1929년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에 대해 《매일신보》는 신천수리조합의 “대지주일 뿐 아니라 청년유지로 동 조합에 있어서 매우 적임자”라 평했다(〈信川水組 委員長 第三次改選〉, 《매일신보》 1929년 9월 11일 자). 그러나 이계천은 1929년 신천수리조합 위원장 취임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고 결국 1931년 4월 도 당국에 사표를 제출했다(〈信川組合 組合長辭任〉, 《동아일보》 1931년 4월 12일 자).

1929~30년에 일본인이나 군(郡) 당국이 추진하던 수리조합 설립에 대해 조선인 지주들은 수리조합 설립의 타당성, 사업비 증가와 지주·농민의 부담 증가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이계천의 신천수리조합장 거부는 이러한 맥락에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황해수리조합은 당연히 해산하라(1~3)〉, 《동아일보》 1930년 10월 23~26일 자 ; 〈문제의 소화 수조 과거, 현재와 장래 전망〉, 《동아일보》 1934년 1월 1일 자(전집 편찬위원회 편, 오기영 저, 《3면 기자의 취재》, 모시는사람들, 2019) ; 〈信川水組 反對期成會〉, 《매일신보》 1929년 6월 23일 자.

 

52)‌ 〈信川支局 變更, 支局長 李宰均 記者 柳漢鍾 顧問 李繼天 柳昌萬〉, 《동아일보》 1927년 1월 2일자 ; 〈도서관 건설, 신천 명륜회 사업〉, 《중외일보》 1927년 5월 22일 자.

 

53)‌ 〈儆信校에 五百圓, 李繼天氏의 寄附〉, 《동아일보》 1927년 2월 28일 자 ; 〈李繼天氏 三百圓寄贈, 도서관 建築에〉, 1927년 5월 21일 자 ; 〈외지유학생위로회〉, 《동아일보》 1928년 1월 7일자 ; 〈경신유치원 후원회조직〉, 《동아일보》 1929년 2월 10일 자 ; 〈모친회간기념으로 토지와 금전 희사, 신천경신교와 유치원에, 이계천 씨의 특지〉, 《중앙일보》 1932년 3월 25일 자.

 

54) 〈교육열의 고조, 信川농민학교에 5만 원을 희사, 20만 원 재단의 甲種農校운동, 李修克, 李繼天 兩氏〉, 《조선중앙일보》 1936년 2월 23일 자 ; 〈故王女史의 遺業 信川農民學校〉, 《조선중앙일보》 1936년 7월 6일 자 ; 〈卅萬財團完成코 甲種昇格을 運動 故王女史長孫李繼天氏壯擧로 信川農民校의 曙光〉, 《조선중앙일보》 1936년 8월 30일 자 ; 〈信川農民學校에 十五萬圓喜捨 祖母遺志 繼承한 李繼天氏 誠意 甲種農校로 昇格運動〉, 《동아일보》 1937년 7월 15일 자 ; 〈信川農校과 李繼天氏의 特志〉, 《동아일보》 1937년 7월 17일 자 ; 《신천군지》에 의하면, 신천농업학교는 1934년 학교재단 인가를 받고 3년제로 승격되면서 일본인이 교장을 맡았다(신천군지 편찬위원회, 앞의 책, 230쪽).

 

55)‌ 일제하 도서관 도입과 독서운동의 전개에 대해서는 김남석, 〈일제 시대 농촌문고에 관한 연구〉, 《도서관학논집》 24, 1996 ; 홍승표, 〈일제하 한국 기독교의 독서운동과 근대 도서관의 도입〉,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62회 학술발표회(2017년 12월 2일), 3~5쪽 참조.

 

56)‌ 일제하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과 그 한계에 대해서는 윤덕영, 《일제하 · 해방직후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운동과 국가건설노선》 중 제3장과 제4장,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참조.

 

57)‌ 〈榮譽의 表彰者-九千六百六十七名-民間功勞者名簿〉, 《매일신보》 1940년 10월 2일 자.

 

58) ‌신천군지 편찬위원회, 앞의 책, 135쪽. 이제렴의 종교는 확인할 수 없으나, 신정균은 개신교인이었다(〈검속자 전부 석방, 10일씩 구류당코, 신천교회 분규 후문〉, 《중외일보》 1930년 8월 9일 자).

 

59)‌ 이제렴은 동아일보 신천지국 기자, 1926년 신천군 기자단 조직, 1929년 신천수리조합 설립 반대를 주도했던 인물이다(〈신천기자단창립〉, 《매일신보》 1926년 9월 27일 자 ; 〈信川水組 反對期成會〉, 《매일신보》 1929년 6월 23일 자 ; 〈信川支局 : 記者 申禎均 黃斗秀 就任〉, 《동아일보》 1930년 3월 13일 자).

 

60) 이재훈 역, 〈1946년 7월 황해도 소련군사령부 대표 및 경무사령부 사업보고〉, 《러시아문서 번역집 26 : 러시아연방 국방부중앙문서보관소》, 선인, 2017, 285쪽.

 

61)‌ 위의 책, 308~312쪽 ; 〈1946년 8월 황해도 소련군사령부 대표 및 경무사령부 사업보고〉, 위의 책, 333~335쪽.

62)‌ 신천인민재판소 · 신천인민검찰소, 〈신천군 정세보고〉(1946.4.9) 《북한관계사료집》 제9권, 167쪽.

 

63)‌ 1947년 7월 상황에 되면, 기독교적 우익 계열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조선민주당 황해도당 위원회 내부도 조선공산당에 우호적인 세력으로 교체되기에 이른다. 다만 황해도의 조선민주당 군당위원회 상당수는 세력 교체가 완료되지 않았고, 8월 이후 군당위원회 사업에 대한 검열 작업이 시작되었다(〈1946년 7월 황해도 소련군사령부 대표 및 경무사령부 사업보고〉, 앞의 책, 289~290쪽).

 

64)‌ 신천인민재판소 · 신천인민검찰소, 〈신천군 정세보고〉(1946.4.9), 앞의 책, 169쪽 ; 1946년 7월 인민위원회는 토지영구사용증서를 교부했다. 신천군에서만 22,631매가 교부되었는데, 이는 황해도의 시군 중에 가장 많은 수였다. 토지증서의 교부는 농민들의 토지개혁에 대한 의구심을 제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1946년 7월 황해도 소련군사령부 대표 및 경무 사령부 사업보고〉, 위의 책, 284쪽ㆍ296쪽). 나아가 토지개혁은 농민들의 북한정권 지지로 이어졌다(은율 정영호 구술).

 

65)‌ 신천인민재판소ㆍ신천인민검찰소, 〈신천군 정세보고〉(1946.4.9), 위의 책, 169쪽 ; 〈安岳人民裁判所長·安岳人民檢察所長→黃海道司法部長 : 地方事情聽取事項 報告의 件〉(1946.4) 《북한관계사료집》 제9권, 163쪽 ; 〈載寧人民裁判所, 司法機關責任者會議 報告書〉(1946.4.10) 《북한관계사료집》 제9권, 184쪽.

 

66) 신천인민재판소 · 신천인민검찰소, 〈신천군 정세보고〉(1946.4.9), 위의 책, 168쪽.

 

67) 〈安岳人民裁判所長·安岳人民檢察所長→黃海道司法部長 : 地方事情聽取事項 報告의 件〉(1946.4), 위의 책, 163쪽 ; 〈載寧人民裁判所, 司法機關責任者會議 報告書〉(1946.4.10), 위의 책, 181쪽.

 

68)‌ 각주 67)과 동일.

 

69)‌ 김양선, 《한국 기독교해방 1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1956 ; 장병욱, 《6·25공산남침과 교회》, 한국교육공사, 1983(강인철, 〈현대 북한종교사의 재인식〉, 김흥수 엮음, 《해방 후 북한교회사》, 다산글방, 1992, 159쪽 재인용).

 

70)‌ 김양선, 앞의 책, 69쪽 ; 장병욱, 위의 책, 51쪽(강인철, 위의 책, 237쪽 재인용).

71)‌ 황은균, 〈38선과 기독청년〉 《부흥》 8, 1948(김흥수 엮음, 앞의 책, 재수록).

72)‌ 신탁통치 파동에 대해서는 정용욱, 〈1945년 말 1946년 초 신탁통치 파동과 미군정〉, 《역사비평》 2003년 봄호 참조.

73) 〈第二回 各道保安部長會議錄〉(1946.7.1~7.3) 《保安處 會議關係書類》 《북한관계사료집》 제9권, 228~229쪽.

 

74)‌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保安局 監察部, 〈第一回 各道 保安部 監察課長會議錄〉(1946.7.16) 《북한관계사료집》 제9권, 274쪽.

 

75)‌ 이러한 정책이 나온 배경은 당시 북한이 공식적으로 신앙, 종교의식 및 활동의 자유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20개 정강〉에도 명시되었으며, 1948년 헌법에도 명문화된 사항이었다. 1948년 8월 채택 헌법 “모든 인민은 종교적인 활동의 자유를 가진다.” 1948년 9월 9일 채택 헌법 제2장 〈공민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 제14조 “모든 인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第二回 各道保安部長會議錄〉(1946.7.1~7.3) 《保安處 會議關係書類》, 위의 책, 257쪽).

 

76)‌ 사와 마사히코, 〈해방 이후 북한 지역의 기독교〉, 김흥수 엮음, 앞의 책, 24~25쪽.

 

77)‌ 《쉬띄꼬프일기》, 1946년 10월 25일, 33쪽 ; 박원홍, 〈북조선 인민위원회 선거(1946.11.3)와 북한 개신교의 대응〉,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2009, 51~54쪽.

 

78)‌ 기독교도연맹은 처음에는 교직자의 가입을 목표로 했으나, 1949년에는 일반 신도까지 각지의 도, 군, 면 단위의 연맹조직 하에 가입하게 하고, ‘기독교도연맹 총회’를 열기도 했다(사와 마사히코, 앞의 글, 33쪽). 《조선중앙연감》에 의하면 가입 맹원 수는 85,118명(1948.9.1 현재)인데, 점차 1950년까지 이북에 잔류했던 교직자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연맹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79)‌ 김익두는 황해도 안악군 대원면에서 출생했으며(1874.11.3),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1910.2), 평양 연합부흥회를 개최했으며(1920.6.31), 기독교도연맹 총회장(1949) 등을 역임했다(박용규, <김익두 전기>, 크리스챤신문사, 1968, 225~233쪽(사와 마사히코, 앞의 글, 32쪽 재인용) ; 북한교회사집필위원회, <북한교회사 연표> 《북한교회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649~651쪽).

 

80)‌ 박원홍, 앞의 글, 57쪽.

81)‌ 사와 마사히코, 앞의 글, 31쪽.

8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137쪽.

 

83) 천주교회가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1949년 재산 몰수 및 성직자 탄압을 받는 등 개신교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는 주장이 있으나(장병욱, 앞의 책, 66~67쪽), 이는 인과관계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84)‌ <구천우 신부의 사목생활 회고 NOTE 상담집>(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457~459쪽 재인용).

85)‌ 노동당 황해도당위원회는 해주 본당의 김철규 신부를 입당시키고자 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위의 책, 348쪽).

86)‌ 위의 책, 138쪽.

87)‌ 위의 책, 137쪽.

 

88)‌ 보안처 감찰부장은 죄의 경중 구별 없이 인권유린이 많이 있었음을 인정했다(保安處 監察部, <第一回 各道 및 鐵道水上隊 監察課長 會議錄>(1947.6.10) 《保安處 會議關係書類》, 앞의 책, 222쪽).

 

89) 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保安局 監察部, <第一回 各道 保安部 監察課長會議錄>(1946.7.16.), 위의 책, 267쪽.

90)‌ 우태순 관련 <간부이력서>, <자서전>, <문의서>(1949.10), 《황해도 신천군 내 중학교 교원 이력서》.

91)‌ 리상준 관련 <간부이력서>와 <문의서>(1949.10.14), 《황해도 신천군 내 중학교 교원이력서》.

92) 신천 김인순 구술.

93)‌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138~139쪽.

 

94)‌ 38선 충돌에 대해서는, 양영조, 《38선 충돌 연구》, 국방군사연구소, 2000 ; 정병준,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 돌베개, 2006 참조.

 

95) ‌정병준, 위의 책, 282~290쪽.

 

96)‌ <북조선로동당 황해도당부 선전선동부장 서필석 → 중앙본부 선전선동부장 : 최근에 수집된 군중들의 일반여론>(1949.6.21) 《최근에 수집된 군중여론 보고》 《북한관계사료집》 제9권, 676~677쪽.

 

97)‌ <북조선로동당 황해도당부 선전선동부장 서필석 → 중앙본부 선전선동부장>(1950.3.16.) 《최근에 수집된 군중여론 보고》, 위의 책, 696쪽·702쪽.

 

98)‌ 위의 책, 459쪽.

99) 위의 책, 350~352쪽 · 459쪽.

100) <쉬띄꼬프→스탈린>(1949.9.15), 《소련 외교문서》 3, 40~41쪽(정병준, 앞의 책, 289~290쪽 재인용).

101) 하종필, 《북한의 종교문화》, 선인, 2003, 62~63쪽.

 

102) 1950년 가을 유엔군이 북한 지역을 점령하자, 기독교계는 전쟁 전에 월남했던 신부와 목사들을 다시 파견했다. 노기남 주교는 1950년 11월 평양을 방문했으며, 신천에는 구천우 신부, 해주에는 김철규 신부, 재령에는 김피득 신부, 송림에는 김정진 신부, 사리원 보좌에는 최익철 신부가 각각 임명되었다. 한편 미군 부대 내에 목사와 신부들로 구성된 채플린 부대는 병사들의 예배를 주관했을 뿐 아니라 ‘반공 · 숭미사상’을 선전했다. 이들은 전세가 역전되면서 남한으로 철수했다. 《노기남 대주교 일기》(1948~1954년) 중 1950년 10월 13일~12월 6일 일기 ; 노기남,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9, 370~371쪽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148~149쪽, 460쪽; 하종필, 앞의 책, 164~165쪽 ; 한모니까, 앞의 글, 122~123쪽.

 

[교회사 연구 제54집, 2019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한모니까(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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