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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윤형중 신부의 순교정신과 순교자 현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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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07 ㅣ No.1072

윤형중 신부의 순교정신과 순교자 현양회

 

 

국문 초록

 

일제시기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하였던 윤형중 신부는 가톨릭 교리의 전파를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그는 《가톨릭靑年》의 창간부터 시작하여 《경향잡지》 · 《경향신문》 등 가톨릭의 언론 창달과 저술 활동뿐만 아니라 순교자에 대한 현양에 열성을 다했다. 윤형중 신부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윤자호의 후손으로, 그의 집안은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다. 그의 오촌 당숙은 한국 가톨릭교회 최초의 장편소설 《은화》의 저자 윤의병 신부이다. 때문에 그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직자의 길을 결심하였다. 윤형중 신부는 사제서품을 받은 후 경성대목구의 출판부 보좌로 전근되어 1933년 《가톨릭靑年》을 창간하였다. 편집위원은 윤형중 신부를 중심으로 장면, 장발, 정지용 등이었다. 이들과 함께 당시 문학계·예술계를 통틀어 수준 높은 가톨릭 잡지를 출간하였던 것이다. 이후 《경향잡지》의 편집장과 경성대목구 출판부 부장에 임명되었고《경향신문》의 창간까지 그의 언론 활동은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언론 활동과 더불어 윤형중 신부가 주력하였던 것으로 순교자 현양이 있다. 그는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이 매우 두터웠다. 그는 순교의 의미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가톨릭 교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알리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 순교란 곧 ‘가톨릭 진리의 증명’이었다. 즉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죽음을 당하는 것은 ‘천주의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윤형중 신부는 ‘순교정신’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때 그의 순교정신은 한국사회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적용되는 한계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일제의 전시체제기와 함께 순교정신은 더욱더 강조되었다. 순교자를 현양하는 것은 곧 ‘보국’을 위한 길이 되었던 것이다. 순교정신은 해방을 전후로 하여 가톨릭교회의 반공사상을 확립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순교정신을 가지고 반공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윤형중 신부는 ‘순교자 현양회’를 통해 그의 순교정신을 실현시켰다.

 

1939년에 설립되었던 순교자 현양회는 발족하기 직전, 일제 당국에 의해 중단되었다. 이는 해방 후 최초의 한국인 신부였던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에 맞추어 다시 발족되었다. 순교자 현양회는 순교자에 대한 현양과 존숭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강화시키고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그 활동 내용 중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일은 박해시기의 유물 수집과 순교지의 확보였다. 윤형중 신부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전반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전 생애를 언론 활동에 매진하였고 순교자 현양에 대한 필요성을 제창하였다. 때문에 윤형중 신부는 많은 저서와 글을 남겼고 이를 통해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머리말

 

윤형중 신부의 이름이 일반 사회에 드러나게 된 것은 1957년 무교회주의자 함석헌과 벌인 ‘사상계 논쟁’이다.1) 이후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윤형중 신부의 이름은 여러 번 거론이 되었다. 1974년 11월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위해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상임 대표위원으로 윤형중 신부가 선임되었고 이듬해 8월 김지하의 양심선언문이 세상에 공표될 때 이를 돕기도 하였다.2)

 

그러나 윤형중 신부는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제로서는 전무후무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가톨릭 교리를 사회적으로 널리 펴는 데에 앞장섰다. 윤형중 신부는 《가톨릭靑年》의 창간부터 시작해 《경향잡지》의 주 집필진, 《경향신문》의 사장을 역임하였고 그의 가톨릭 교리강좌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만 해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

 

윤형중 신부가 교회 내에서 언론 및 저술 활동과 함께 강조하였던 것으로 순교자 현양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제시기부터 해방 전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에 집중하였다. 이는 곧 ‘순교자 현양회’라는 보다 구체적인 사업으로 발현되었고 이는 오늘날 한국 가톨릭교회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형중 신부에 대해 단독으로 살펴본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이루고자 노력했던 순교자 현양회와 관련하거나 《경향잡지》 · 《경향신문》 등 언론지와 관련하여 단순히 윤형중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의 연구만이 있을 뿐이다.3)

 

이는 가톨릭교회 내에서 개개 인물 자체에 대한 연구의 희소성 때문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의 인물 연구는 주로 주교, 교구장 등의 고위성직자 위주의 연구가 진행되었다.4) 그 이유는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교계제도란 2천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여러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상황과 함께 변화·발전된 제도로써,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체제의 기본이며 교회 조직 내의 제도적인 질서이다.5) 이러한 교회의 조직질서에 의해 개개인의 목소리보다는 고위성직자의 의견이 곧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었다.

 

가톨릭 인물사의 또 다른 연구 경향으로는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가 있다. 이는 주로 초창기 조선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순교자 연구,6) 일제시기부터 해방 전후의 특정 인물과 관련한 연구7)가 있다.

 

이와 같은 기존의 연구들은 계급적 혹은 특정 시기 · 인물로 한정되어 있다는 한계가 있다. 고위성직자들의 입장은 곧 가톨릭교회의 입장으로 대변되었으며 박해시대 순교자들의 희생에 초점을 두고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 경향과 한계를 바탕으로 하여, 본 연구는 윤형중 신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윤형중 신부는 시기적으로 일제시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전반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전 생애를 언론 활동에 매진하였고 순교자 현양에 대한 필요성을 제창하였다. 때문에 윤형중 신부는 많은 저서와 글을 남겼는데 이를 통해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를 위한 주 사료로는 《경향잡지》를 참고하였고 그 시기는 1937년 1월부터 1959년 6월로 한정하였다.8) 그 이유는 1936년 12월 《가톨릭靑年》이 자진 폐간된 후 1937년 1월부터 윤형중 신부는 《경향잡지》의 주 집필자가 되어 1959년 6월 미리내로 전임될 때까지 잡지의 편집부터 내용 구성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9) 또한 윤형중 신부는 그가 특히 강조하였던 순교자 현양과 관련된 기사 및 현양회 사업의 경과와 보고 등을 모두 《경향잡지》를 통해 보고하였다.10) 따라서 《경향잡지》에 실린 기사를 통해 윤형중 신부의 순교정신과 순교자 현양회를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부족한 부분은 윤형중 신부의 유고록11)과 저서들12)을 참고하였다.

 

윤형중 신부의 생애와 순교자 현양을 알아보기 위해, 본문의 2장에서는 먼저 그의 생애와 언론 활동을 살펴보았다. 이어서 3장에서는 그가 생애의 전반을 몰두하였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였던 순교정신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4장에서는 그의 순교정신을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는 순교자 현양회의 건립 과정과 사업 내용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본 연구를 통해 윤형중 신부라는 한 인물의 삶과 영성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생애와 언론 활동

 

윤형중 신부는 1903년 4월 29일 충북 진천군 백곡면에서 윤관병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5대째 가톨릭 교인의 집안으로, 1868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윤자호(尹滋鎬)13)의 후손이다. 윤형중 신부에 의하면 넉넉했던 형편 탓에 강도가 자주 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일상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윤형중 신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08년에 안성 읍내로 이사하였다. 일반 가톨릭 교인은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항상 이동하여 살거나 마을에 숨어서 궁핍하게 살았던 것에 비하면 그의 집안은 다소 여유로웠던 듯하다.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던 만큼 그의 부모님은 자녀들의 가톨릭적 교육을 중요시 여겼다. 때문에 윤관병은 아이들에게 직접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가르쳤다고 한다.14)

 

보통학교가 설립되던 당시, 안성에는 가톨릭교회의 본당 신부였던 공(R. Antoine Gombert, 孔安國, 1875~1950) 신부가 세운 안법(安法)학교가 있었다.15) 안성의 안(安), 법국(프랑스) 법(法)자를 따 만든 학교로, 전교상의 이유보다는 가톨릭 교인의 아이들을 보통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라고 윤형중 신부는 후에 짐작하였다.16) 윤형중 신부는 이 안법학교에 1910년 8세에 입학하였다. 이후 어머니의 뜻에 따라 1917년 9월 15일 15세의 나이에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가톨릭 신학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그의 오촌 당숙인 윤의병(尹義炳)17)이 신학생이었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어머니와 형의 신심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생각한다. 어머니와 형은 원래 교회의 길을 걸으려고 했으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8) 이 신학교에서 윤형중은 ‘세속선생’인 조원환(曺元煥), 장면(張勉)과 조우하였고, 노기남(盧基南) · 양기섭(梁基涉) 신부 등이 그의 동기였다.

 

1930년 10월 26일 윤형중 신부는 28세의 나이에 성품성사를 받고 신부가 되어 서울 중림동 약현 성당의 보좌로 임명되었다. 1933년 1월에는 출판부 보좌로 전근되어 그해 5월 월간잡지 《가톨릭靑年》을 창간하였다.19) 편집위원은 장면, 장발, 정지용, 이동구로, 윤형중 신부와 장면은 종교 · 철학면을 맡았고 이동구는 문학·논문·평론, 장발은 미술·편집을 맡았다.20) 당시 윤형중 신부를 제외한 위원들은 모두 고등학교 교사들이었다. 이들의 편집회의는 저녁을 먹은 다음 그의 방에서 열렸다. 원고료도 없었고 교통비도 모두 자비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흥미를 가지고 헌신적으로 임했다고 한다. 장면은 호교론적인 글을 많이 실었고 장발은 유명한 미술작품을 원색 그대로 한 페이지씩 내보냈다. 정지용은 이상, 김기림 등의 시를 곧잘 받아왔다고 한다. 윤형중 신부의 회고에 의하면 매월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3개의 가톨릭 학교만 세웠던 가톨릭교회의 사업상황을 볼 때, 가톨릭 교리를 사회 전반에 선전하였던 《가톨릭靑年》의 공은 매우 컸다.

 

윤형중 신부는 1933년 출판부 보좌로 전근되었을 때부터 당시 가톨릭 교회 내의 유일한 잡지였던 《경향잡지》의 편집을 도맡아 하였다. 1936년 12월 《가톨릭靑年》이 자진 폐간되자, 1937년에는 《경향잡지》의 편집장에 취임하여 많은 논설과 호교론을 발표하였다. 이후 1939년에는 경성대목구(현 서울대교구) 출판부 부장에 임명되었다. 그에 의하면 《경향잡지》는 일종의 공보(公報)로서 ‘한국 가톨릭 자체의 소리’21)였으며 때문에 윤형중 신부는 인생의 전반을 《경향잡지》의 편집에 몰두하였다.

 

윤형중 신부는 기해년(1839) 대박해의 100주년을 현양하기 위한 목적으로 1937년부터 순교기념탑을 계획하였고 이는 1939년 순교자 현양회로 발현되었다. 창립위원으로 신부는 김윤근 신부, 이기준 신부, 노기남 신부, 평신도로는 장면, 조종국, 박병래, 박대영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경성대목구와 전주지목구를 제외한 대구 · 원산 · 평양 · 연길 대목구의 외국인 주교들의 반대와 일제의 방해로 인해 무산되었다.22)

 

순교자 현양회는 해방 후 1946년 9월 16일 다시 발족되었고 중앙위원은 이전 1939년도 순교자 현양회의 창립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중앙위원장 윤형중 신부, 서기 이완성 신부 그 외에 장금구, 조종국, 장면, 박병래, 박대영이 중앙위원이었다.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라리보(Adrien Joseph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주교, 대구대목구장 주재용 신부, 전주지목구장 김현배 주교도 입회하였고 이후 번(Patrick J. Byrne, 方溢恩, 1888~1950) 주교도 입회하였다.23)

 

해방과 함께 자유스러운 물결이 일자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일간 신문을 발행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 경성대목구가 정판사를 불허 받아 이를 대건인쇄소로 재개명하면서 신문 발행에 대한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신문 발행에 대한 의견은 계속해서 부결되었고 노기남 주교 또한 번번이 반대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이때 윤형중 신부는 신문 발행 부결에 반박하였고24) 그의 끈질긴 설득으로 1946년 10월 마침내 《경향신문》이 창간되었다. 사장은 양기섭 신부, 부사장으로 윤형중 신부가 자리에 앉았다. 이때 친일파 청산과 단정 수립 반대를 주장했던 정지용과 편집국장 염상섭이 함께하였다. 1년 후인 1947년 도미한 양기섭 신부를 대신하여 윤형중 신부는 사장직을 맡았고 부사장으로 한창우를 선임하였다.25)

 

윤형중 신부는 1954년에 가톨릭대학 의예과 과장을 맡았다. 이는 유을준 의사의 입김이 컸는데 이때 윤형중 신부의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입지로 인해 단순히 이름만 넣은 격이었다.

 

이후 그는 병인년 대박해(1866)의 100주년을 현양하기 위해 1958년부터 순교기념관의 건립을 계획하였고 이를 《경향잡지》 기사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였다. 기념관의 장소, 내용, 위임관리 등 구체적인 계획을 잡지에 실어 적극 홍보하였고 일반 신부들과 평신도들의 넘치는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갑작스러운 전근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윤형중 신부는 1959년 6월 2일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미리내)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이와 함께 그가 맡고 있던 《경향잡지》와 순교자 현양회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넘어갔고 자동적으로 순교자 현양회 중앙위원장 및 중앙위원 자리에서 탈락되었다.26) 또한 매주 그가 하던 교리강좌는 모두 취소되거나 다른 신부의 역할로 넘어갔다. 윤형중 신부는 본인의 그러한 처지에 대해 ‘귀양’ 당했으며 이는 ‘경성대목구의 자살행위’라고 하였다.27) 그가 이러한 처분을 받은 것은 해방 이후부터 계속되었던 노기남 주교와의 갈등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윤형중 신부와 노기남 주교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첫 번째 일은 가톨릭대학 의학부와 관련한 일이었다. 대목구의 재정을 의학부에 쓰는 문제에 대해 그들의 의견이 충돌한 것이다. 크고 작은 문제로 인해 점점 쌓이던 갈등은 《경향신문》의 기사 게재를 통해 폭발하였다. 윤형중 신부는 당시 이승만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신문은 사회의 여론을 반영할 의무가 있다.”28) 하여 사회 여론을 그대로 싣고자 하였다. 그러나 노기남 주교는 이를 일방적으로 삭제하였다. 윤형중 신부는 곧바로 반박하였으나 다음 날 사장직에서 파면되었다.

 

1961년 1월 중순 윤형중 신부는 서울 청파동 복자수녀원의 경당 신부로 착임되었다. 그동안 그는 교리강좌를 계속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구대목구와 복자수녀원에 적을 두고자 하였으나 이는 번번이 노기남 주교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복자수녀원에 착임이 되었다. 또한 동년 6월 초순 《경향신문》의 사장으로 재발령을 받았지만 다음해 1962년 1월 상순 사장직을 사임 ‘당한다’.29)

 

1966년 은퇴 후 윤형중 신부는 투병 중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부름에 응하고자 했다. 1960년대 말부터 한국 가톨릭교회는 민주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하였다.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의 기소를 시작으로 정부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가톨릭 사제들은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을 결성하여 전면 대응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윤형중 신부는 1974년 11월 각계 인사가 망라되어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천주교 대표로 상임대표를 맡았던 것이다.30)

 

지병이었던 폐암으로 선종하기 전 윤형중 신부는 1967년 성모병원의 중앙 안은행(眼銀行)에 최초로 헌안을 등록하였다. 1979년 선종 후 그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치되었다.

 

윤형중 신부는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가톨릭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하였다. 그 방법 중의 일환으로 그는 여러 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저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를 정의하고 우주와 영혼의 존재를 증명한 《종교의 근본문제》(1952)의 출간을 시작으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비판서인 《한 시간의 파적》(1954), 가톨릭사와 교리를 함께 살펴 본 《진리의 증언》(1959)을 통해 진정한 가톨릭의 교리를 가르치고자 하였다. 또한 윤형중 신부가 경성대목구 출판부장에 있을 당시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1866~1928) 신부가 저술하고 뮈텔(Gustave Charles Marie 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가 감수하였던 《회장직분》31)을 《한국가톨릭지도서》(1954)로 제목을 바꾸어 재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가 1954년에 쓰기 시작해 1959년에 완성한 《상해 천주교 요리》 상·중·하가 있다. 이것은 가톨릭 신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을 압축하여 펴낸 것으로, 이 책의 저술 동기에 대해 윤형중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필자는 몇 해 전부터 가톨릭을 연구하려는 인사들에게 교리를 설명하여왔다. 먼저 하느님의 존재, 영혼의 불멸성, 예수 그리스도의 神性을 논증하고 곧 《천주교 요리 문답》을 설명하여 나갔다. 그럴 때마다 이런 이들이 내게 올 것 없이 스스로 공부하여 배울 만한 책이 있어야겠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생각하니 이 필요는 전국적이어서 모든 지방 교회에도 그러할 것은 물론이었다. 이것이 이 책을 쓰게 된 주된 동기이다.32)

 

이처럼 윤형중 신부는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신학에 대해 스스로 연구할 수 있는 교리서의 필요성을 느꼈다. 때문에 처음에는 외국의 좋은 교리서나 요리문답 해설서를 번역하려고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 현재 사용하는 요리문답과 친숙하게 되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천주교 요리 문답》의 주해(註解)를 시작하였다고 하였다.33) 《상해 천주교 요리》는 상권 〈믿을 교리〉, 중권 〈지킬 계명〉과 하권 〈은총을 얻는 방법〉 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사말의 노래》(1953), 《천주교 요리 문답》(1959), 《천주성교공과》(1959) 등을 펴내었다.

 

이상으로 윤형중 신부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그는 전 생애를 걸쳐 가톨릭 교리를 안팎으로 전파하고자 하였고 자신의 신념과 철학에 대한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순교신심에 특별했다. 무엇보다 그는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아버지 윤관병의 독실한 순교신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순교신심에 각별했던 그의 당숙 윤의병 신부의 영향도 있었다. 이를 본받은 윤형중 신부는 그가 도맡아서 편집했던 《경향잡지》에 윤의병 신부의 소설 《은화》를 계속해서 실었다. 그가 말하길 “나는 잡지의 내용물 중 《은화》를 최우선으로 대우하였다.”라고도 할 만큼 순교신심에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이다.

 

 

3. 순교정신과 사상적 조류

 

윤형중 신부는 순교의 의미에 대해 표면적 그리고 내면적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에 의하면 표면적인 의미의 순교는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잡혀가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이는 단순히 역사에 묻혀있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내면적인 의미로써의 순교는 가톨릭 진리로 인하여 배교한다는 한마디를 하지 않아 재산의 몰수를 당하고 온갖 고초를 감내한 후 결국은 시체로 넘어지는 것으로, 이러한 행위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감격을 주는 것이다.34)

 

순교 자체의 본질을 깊이 생각해볼 때 이것은 세상의 이치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다. 고통과 괴로움을 피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생명과 행복을 위한 욕망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억제하여 목숨을 희생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윤형중 신부는 이를 인간의 능력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 원인을 인간 본성의 주재자, 즉 천주의 도움을 들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35)

 

순교의 근본적인 이유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보다도 천주를 사랑함에 있다. 인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이다. 이때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여 죽음을 당하는 것은 인간의 그 어떠한 선행보다도 천주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천주의 사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순교는 인간의 가장 큰 완덕의 행동이 되는 것이다.36)

 

순교자들의 완덕은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숨은 신덕(信德) · 망덕(望德) · 애덕(愛德), 즉 삼덕(三德)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곧 향주덕(向主德)으로 가톨릭교도들의 윤리적 행위의 기초가 된다. 신덕은 천주가 계시(啓示)하신 것으로 성교회에 맡기신 모든 진리를, 천주의 진실하심으로 인해 확실히 믿는 덕이다. 망덕은 천주께서 예수의 공로를 보시고 허락하신 천당의 영복을 바라고 그 복을 얻을 수 있는 모든 은총을, 천주의 성실하심과 자비하심으로 바라는 덕이다. 애덕은 아름다우신 천주를, 그 더할 나위 없는 최고선으로 인하여 모든 존재 위에 사랑하며 또 천주를 위해 남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는 덕이다.37)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과연 가톨릭의 진리가 무엇이기에, 그것이 얼마나 진리이기에 자신의 신앙을 죽음으로 증명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윤형중은 역으로 순교를 통해 가톨릭의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 가톨릭교가 참종교임을 증명하는 길은 여러 가지 있으니 혹은 교리 자체의 참됨을 열어 밝힘으로써 증명하기도 하고 혹은 역사적으로 올라가 우리 교회의 창립자는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보임으로써 증명하기도 하고 혹은 우리 교회가 가진 특징이나 그가 맺어놓는 열매를 밝히 보여줌으로써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언짢은 나무는 언짢은 열매를 맺으므로 그 열매를 보고서 그 나무의 어떠함을 알 수 있다는 원리를 이용하여 증명하기도 하는데 이 중에는 오직 우리 천주교회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순교-치명이 한 자리를 잡고 있다.38)

 

즉 가톨릭이 참종교임을 증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하나로 순교정신을 들었다. 순교는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을 토대로 하는 것이므로 다른 종류의 증명보다 일반인에게 더욱 힘 있는 증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가 아닌 거짓신념이 인간 본성 그 자체를 모순 시키는 순교를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의 교리가 절대적인 진리이기에 그 신앙의 위력이 순교로 나타났다. 가톨릭의 순교는 세기와 국가를 초월하여 존재하였고,39) 순교자의 수는 수천만 명에 이른다. 윤형중 신부가 보기에 이들이 순교하였던 이유는 단 하나, 즉 가톨릭의 진리 때문이었다.40)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던 순교자들이 품은 그 진리가 바로 가톨릭의 영원한 진리라는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가톨릭의 순교정신은 시대에 따라 혹은 당시 사회상황에 따라 여러 형태로 접목시켜 그 의미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윤형중 신부는 가톨릭의 순교정신에 대해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언제나 필요한 것”41)이라고 하였다. 그 순교정신을 이어받기 위해서도 우리는 순교자들을 현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제시기의 순교정신은 1930년대 말 전시체제기가 시작되면서 더욱더 강조되었다. 윤형중 신부는 《경향잡지》에 계속해서 당시 국가의 안위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말하는 기사를 실었다. 1939년 11월 27일 자 기사 〈순교정신을 배우라!(一)〉에서 “지금 우리에게는 순교를 할 기회는 없지만 그 정신, 즉 천주의 진리와 의덕을 위해 생명까지 버리는 그 순교정신만은 가지고 있어야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순교의 정신은 특히 “현대에 있어서 개인의 구령과 교회의 발전과 국가의 안태를 위하여 극히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때 말하는 ‘국가의 안태’에서 국가란 어떤 국가인가. 이는 다음의 기사에서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전번에 순교의 기초는 천주사랑임을 말하였다. 그리고 천주의 사랑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까지 하는 순교 행동은 인간의 가장 큰 완덕의 행동으로서 이를 위해서는 용맹한 마음과 인내한 마음이 필요함을 대략 설명하였다. … 제 1선에서 격전하고 있는 황군을 본받으라! 탄환이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비록 그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을지언정 한걸음 - 얼마 안 되는 한걸음이라도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이 혹은 진지를 사수하고 혹은 돌격을 감행하여 용맹히 나가지 않는가. 그리고 황군의 이 정신 앞에는 세계에 적이 업고 현대의 예리한 적의 과학적 병기가 무색하다 하지 않는가!

 

가톨릭자는 모름지기 이러한 정신으로 천주의 진리를 굳게 지키고 … 이 순교정신은 특별히 우리 조선 교중에게, 특별히 현금시대에 필요하다. 금년같은 한재에, 금번같은 사변에, 현금처럼 복잡하고 위험한 시대에 - 42)

 

위 기사에서 윤형중 신부는 순교의 기초는 천주에 대한 사랑임을 역설하면서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순교행동에는 “용맹한 마음과 인내한 마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이어서 “용맹한 정신을 가지고 1선에서 격전하고 있는 황군을 본받아 우리도 순교정신을 가지고 천주의 진리를 굳게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볼 때 윤형중 신부가 말하는 국가란 식민지 조선이 아닌 일제 당국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안태에 대해서는 순교자 현양회 건립의 필요성을 제창하면서도 언급하였다. 순교자 현양을 통해 안으로는 가톨릭 신앙을 강화시키고 밖으로는 가톨릭의 진리를 선전할 수 있는데, 이러한 현양회를 건립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영혼뿐만 아니라 교회를 발전시킬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보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또한 훌륭한 보국운동이 됨을 우리는 확신하는 바이니 현금 제국에서는 흥아대업을 목표로 하고 나아가는 비상시국에 처하여, 빛나는 성공을 볼 때까지 모든 국민에게 괴로움과 가난을 참아 받아가며 각자 자기 직무에 충실하여 총후국민의 본분을 철저히 지키기를 극력으로 권고하고 장려하는 이때 우리는 진리, 정의 의무를 위해서는 양심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는 〈순교정신〉을 체득하고 실행함보다 더 효력 있는 〈종교보국〉을 생각할 수 없다.43)

 

위의 기사를 보면 윤형중 신부는 순교정신이 훌륭한 보국운동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였다.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는 무엇보다도 순교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이행하여 ‘총후국민의 본분’을 철저히 지킴으로서 순교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러한 순교정신을 가진다면 결국은 종교보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교정신은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그대로 연결되어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1939년 11월 12일 자의 사설 〈조선 가톨릭대중의 조흔 특중은 무엇이뇨?(二)〉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우리 복자를 특별한 열심히 공경하여야 된다는 것은 초성한 이유 위에 본성적 정당한 이유를 함께 겸한 것으로서 … 근년 당국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조선(祖先) 숭배의 정신에 일치하야 시대의 조류(潮流)에 적합 하는 바이니 과연 자기 위대한 조선들을 특별히 공경할 필요는 아무리 우몽한 백성이 잇다 할지라도 능히 쉽게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것으로서 일반 민중의 정신개발 정도 여하를 의론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44)

 

위의 기사가 1939년 11월 자 기사인 점, 그리고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당국에서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조선 숭배의 정신’은 당시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을 수용하였던 가톨릭교회와의 의견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일제의 신사정책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1936년 4월 12일 자 《경향잡지》를 통해 공식적으로 허용함을 천명하였다.45) 일제는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식민지 조선 내의 종교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가톨릭교회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일제는 그간의 준전시체제를 전시체제로 바꾸었는데 1939년 4월 8일 법률 제77호로 『종교단체법』을 제정하여 전시체제 구축을 위한 종교단체의 통제를 완전히 이룩하였다.

 

일제시기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순교정신을 위시로 한 순교자 현양회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1939년 9월 24일을 발회식으로 하여 결성된 순교자 현양회는 윤형중 신부가 중심이 되어 중앙위원진을 구성하였다. 중앙위원 9인은 윤형중 신부를 포함한 신부 5인, 평신도 4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중 신부 3인, 평신도 4인 모두는 일제가 황국신민화 정책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결성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1938) ·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대목구연맹(1939) · 국민총력천주교경성대목구연맹(1940)의 담당자로 각각 선임되었던 것이다.46)

 

이상과 같은 순교정신은 해방 이후에는 좌우익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공을 기치로 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더욱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가톨릭교회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공산주의를 무신론적인 반종교 세력으로 규정하였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 이후 공산당의 선전에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부터 교황청은 반공주의적 입장을 담은 칙서들을 공포하였다.47) 한국 가톨릭교회의 경우, 해방 후 미군정의 진주와 함께 반공주의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노기남 주교는 “해방이 되자 유물 공산주의자들은 한국 적화 운동을 공공연히 하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민심을 교란시키며 민족의 분열을 일삼고 있으므로, 한국을 완전한 민주국가로 건설하기 위해서는 적색 마수의 공세를 분쇄해야 한다.”고 하며, 일반 교도들에게 ‘순교정신’을 가지고 반공 투쟁에 나서야한다고 호소하였다.48)

 

반공사상과 순교정신은 점차 결합하여갔다. 더욱이 공교롭게도 해방 이듬해인 1946년은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고 1950년은 ‘한국 순교복자 79위의 시복(諡福) 25주년’이 되는 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를 전후로 하여 순교정신은 자연스럽게 반공사상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49)

 

이는 《경향잡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윤형중 신부는 1949년 6월 1일자 1면에 교황대사 번 주교의 글을 실었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귀회에서 발행한 이런 순교 사실을 소개하는 역사적 문헌에 따르는 가치는, 오늘날 더욱 증가되고 있나니, 곧 이것은 국민 생활에 사실상 큰 중대성을 가지고 있느니라. 한국의 완전하고 통일된 주권을 신속히 성취 못하는 유일한 큰 장애물은, 공산주의자들이 이 나라를 무신론화(無神論化)하여서 자기들의 국민노예제도의 기초를 삼고저하는 그들의 노력과 계획이 곧 그것이니라. … 조물주 천주를 위하고 자기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현세 생명을 티끌처럼 버리기를 주저하지 않은 저 모든 치명자들의 장렬 누비한 순교 앞에는, 공산주의자들의 무신론적 사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온 세상에 폭로되느니라. 과연 세계 모든 비공산주의 각국에서는, 저 치명자들을 그리스도의 무적병사(無敵兵士)로서, 영원한 진리와 지혜에 자기 생명을 용맹하게 화합시킨 자로 공경하느니라. … 이 나라 치명자들의 공적을 보사 그들의 순교정신으로 우리들의 가톨릭적 생활을 더욱 견고케 하실지며, 진정한 민주주의의 주권 안에 온 국토와 국민이 들어오도록 강복하실지어다.50)

 

즉 순교정신을 이룩한 순교자들을 우리의 무적병사로 삼고 용맹한 정신으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곧 순교정신으로 단결하여 공산주의를 물리쳐 통일을 이루자는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와의 입장과 일치하였다.

 

동년 9월 1일 자의 사설 〈복자첨례는 한국민족의 큰 첨례!〉에는 복자 첨례를 기념하는 글을 싣고 있는데 같은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 북한과 중국 일부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종교박해를 언급하며 “만약 우리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순교자들의 자취를 따라야함”51)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곧 그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으므로 우리는 “순교정신으로 튼튼히 무장해야하고 이를 위해서도 순교복자 현양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52)라고 하여 순교자 현양에 대한 중요성을 주창하였다.

 

이상으로 《경향잡지》를 통한 윤형중 신부의 순교정신을 살펴보았다. 윤형중 신부는 순교정신을 통해 가톨릭의 절대적 진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하였다. 가톨릭 교리가 진리가 아니라 거짓신념에 불과하다면 순교자들을 낳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순교정신은 당시 시대상황의 기반, 즉 일제시기에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해방 이후에는 반공사상을 보다 더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윤형중 신부의 순교정신은 순교자 현양회로 실현되었다.

 

 

4. 순교자 현양회의 건립 과정과 내용

 

윤형중 신부의 순교자 현양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의 집안이 순교자 집안이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는 신학생 때부터 순교자 현양의 청사진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순교정신을 보급시키는 것이고, 일반인에게는 가톨릭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53) 때문에 윤형중 신부는 그가 《경향잡지》의 편집장이 된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현양회에 대한 건립을 구상하였다. 2년 후인 1939년은 기해 대박해(1839)의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54)

 

윤형중 신부는 곧바로 당시 경성대목구장이었던 라리보 주교에게 현양회 건립에 대한 허락을 얻어냈고 다른 여러 신부들의 협력 또한 얻고자 하였다. 당시 모든 주교뿐만 아니라 대목구 내에도 현양회를 선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윤형중 신부는 모든 주교가 찬성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경성대목구와 전주지목구를 제외한 기타 대목구55)는 모두 반대의 손을 들었다. 그 이유로는 “일반의 생활난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56)이었다. 윤형중 신부는 이를 인정할 수 없음을 토로하였다. “1939년이 살기 어려운 형편이면 현양회는 세계 종말이 올 때까지도 불가능한 일일 것”57)이며 다른 어떤 일도 아닌 순교자를 현양하는 일에 있어서 일반의 생활난을 이유로 들며 반대하는 기타 대목구장들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였다. 그러나 “주교들은 반대하였을지언정 대목구 내에서 개개인으로 입회하는 것을 대목구장이 막을 수는 없다.”58)고 하며 현양회의 결성을 계획대로 진행해나갔다.

 

이렇게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는 결성되었다. 중앙위원장으로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의 김윤근 신부, 경리로 종현 성당(현 명동 성당)의 정원진 신부, 서기로 윤형중 신부 그리고 이완성 신부, 노기남 신부가 임명되었고 평신도였던 조종국(종현 성당 청년회 회장), 장면(동성상업학교 교장), 박병래(성모병원 원장), 박대영(약현 성당 청년회 회장)을 선임하였다.59) 신부를 제외한 평신도 4인은 당시의 명망가들로서, 특히 가장 큰 영향력이 있었던 청년회 회장들을 선임한 것은 순교자 현양회의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60)

 

적극적으로 진행되어가던 현양회는 발족하기 하루 전날인 1939년 9월 24일,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중지하라는 지시에 따라 급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동년 9월 28일 자 《경향잡지》에는 〈공시〉란에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발회식도 그 후 다시 당국의 지시를 받게 되어 이를 중지하게 되었다”61)라고 짧게 명시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대일본 제국이 전쟁 중에 있는데 국민의 마음을 그런 것에로 분산시킬 수 없다는 것”62)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로는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것은 황국 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즉 “천황 폐하의 명령에도 생명을 내걸고서 불복할 우려가 있기”63) 때문이었다.

 

이때 중단되었던 순교자 현양회 사업은 해방 후 1946년에 와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은 최초의 한국인 신부였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 100주년이었다. 이에 맞추어 윤형중 신부는 현양회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인준을 받았고 동년 9월 16일 순교자 현양회는 성대한 발회식을 가졌다.

 

현양회의 중앙위원으로는 윤형중 신부 외에 경리 정원진 신부, 서기 이완성 신부, 장금구 신부, 평신도로서는 조종국, 장면, 박병래, 박대영이 선임되었다. 이들은 모두 1939년 현양회가 창립될 당시 의논하고 계획하였던 창립위원들로 윤형중 신부를 필두로 하여 구성되었다.64)

 

이때 위원은 중앙위원과 지방위원으로 나누고 중앙위원은 주교의 지명으로 선정하였다. 중앙위원장은 중앙위원들이 선출해서 주교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선출은 중앙위원들이 하는 것이며 주교가 임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현양회는 주교의 직속 기관 혹은 주교의 사업이 아니기 때문이었다.65) 중앙위원의 임기는 4년으로 제한하였고 서울 내에 거주하는 자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환경의 변전 무쌍한 변화가 불의에 새로운 사태를 자아낼지라도 그에 대한 현양회의 행동은 언제나 활발하고 민속하도록 속전속결을 꾀함”66)을 위한 것으로 중앙위원 회의가 급속히 소집될 필요성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67) 또한 지방위원 신부들을 직접 중앙위원회와 연결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목구나 도·군의 구별을 초월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68)

 

회원은 통상(通常)회원 · 특별(特別)회원 · 유공(有功)회원 세 가지로 구별하였는데, 통상회원과 특별회원은 매년 회비를 내야 하고 유공회원은 전액을 한 번에 내는 것으로 정하였다. 회비는 중앙위원회에서 때에 따라 규정하고 발표하였다. 이들은 매일 본회의 경문을 암송하고 매년 회비를 납부하여 가톨릭신앙을 보급할 의무가 있었다.69)

 

현양회는 순교자에 대한 현양과 존숭(尊崇)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강화시키고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현양회의 활동 내용으로는 순교자 현양을 본위로 하는 사업 및 행사를 관리하고 후원하는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순교자의 전기(傳記)를 출판함

2. 조선 천주교 순교사 편집에 관한 일체의 연구를 장려하고 후원하여 장내 완전한 조선 천주교사의 출판을 기함

3. 순교자의 유물군란시대의 사적 참고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함

4. 순교자의 분묘를 조사하고 보존함

5. 순교자를 현양하는 강연회를 개최하며 성화기념패 등을 제작 반포함

6. 순교기념지 또는 조선가톨릭사적기념지는 형편이 허하는 대로 이를 매수 · 보존함70)

 

이와 함께 순교자 현양회는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중 가장 최우선적이고 중점적으로 추진된 일은 박해 때의 유물 수집과 순교지 확보였다.71) 윤형중 신부는 《경향잡지》에 〈순교자 현양회 페이지〉라는 란을 따로 만들어 수집되어지는 박해 유물, 즉 서적, 패 묵주, 십자가상 등에 대한 사진과 유래를 실었다.72) 또한 ‘새남터’와 ‘절두산’ 성지에 대한 확보과정 및 비용, 그 활용방안들을 《경향잡지》에 매번 실어 독자들에게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알렸다.73)

 

이상이 순교자 현양회에서 이행했던 사업내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윤형중 신부가 이루고자 했던 순교자 현양의 방향과 교회의 방향은 의견차이가 있기도 하였다.

 

우선 1939년 순교자 현양회 발족 당시 교회는 기념성당이나 기념병원 등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윤형중 신부는 반대하였다. 이유는 단순히 성당만 짓는 것은 순교자들의 이름만 이용하는 것일 뿐, 순교 100주년이라는 것은 그 명성에 걸맞게 순교자 본위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74) 이를 위해서 윤형중 신부는 순교 기념탑을 계획하였다. 기념탑은 명동성당 입구 쪽에 세워야 하는데, 그곳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면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볼 것이고 이는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체적인 계획을 윤형중 신부는 《경향잡지》에 명시하였고 의연금을 모금하였다.75) 그러나 교회는 그의 계획에 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충북 제천의 토지를 매입하였고 해방 이후 이를 팔아 새남터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형중 신부는 “주최자의 의사를 무시하였다.”76) 하여 비난의 어조를 감추지 않았다.

 

윤형중 신부의 또 다른 계획으로는 해방 후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순교기념관의 건립이 있다. 장소는 서소문 사거리로, 이곳은 수많은 가톨릭 교인들이 순교한 곳이었다. 기념관의 내부는 19세기 당시의 한국문화, 가톨릭 박해시기의 정경, 각종 형구, 박해를 받는 교인들의 광경을 차례대로 설치하고 박해 당시 시대의 유물과 서적을 진열하는데, 마지막 구역에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발전상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를 통해 윤형중 신부는 가톨릭교회의 참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리고 기념관의 관리는 한국복자수녀원에 위임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윤형중 신부는 이러한 순교 기념관의 계획을 《경향잡지》에 그대로 실었다.77) 당시 순교자 현양 문제에 있어서 윤형중 신부는 일반 신부들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인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순교기념탑 건립에 대해 계속해서 호소하였고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의연금을 모았다. 그러나 이 계획 또한 윤형중 신부의 갑작스러운 전근으로 인해 무산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윤형중 신부는 “나의 확실한 설계를 번번이 방해한 것은 두 번 다 경성대목구이며 서소문 사거리의 터를 잡지 못한 것은 경성대목구의 크나큰 수치”78)라고 하며 비판하였다.

 

윤형중 신부가 미리내로 전임된 후 순교자 현양회는 서울대목구 소속이 아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로 넘어갔다. 이후 윤형중 신부는 시복식이 시행되는 1968년, 순교자 현양회의 재건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39년 현양회의 건립 당시 창립위원이었던 이기준 신부, 박병래, 박대영이 아직 서울에서 거주하고 있었기에 윤형중 신부는 이들과 함께 현양회의 재건을 구상하였던 것이다. 기존에 정한 현양회의 규정을 현대에 맞게 수정한 후79) 주교의 인준을 받기 위해 윤형중 신부는 당시 서울대교구의 김수환(金壽煥, 1922~2009) 주교에게 제출하였다.

 

중앙위원장은 윤형중 신부, 부위원장으로는 오기선 신부가 지명되었다. 현양회의 정신과 조직은 모두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달라진 점은 본회의 소속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윤형중 신부의 재건 계획은 결국 무산으로 돌아갔다.80) 이에 대해 그는 “우리는 완전한 종교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지금 역사의 첫머리에 서 있다. 이후 대대손손 나아갈 방향을 지시해 주어야 한다.”81)고 하여 순교정신을 현양하는 것은 바로 지금 시기라고 역설하였다.

 

이상으로 윤형중 신부의 순교자 현양회에 대한 노력을 살펴보았다. 윤형중 신부는 그의 순교정신을 현양회라는 사업으로 구체화하였다. 순교자 현양회의 중앙위원 선정과 규정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을 만큼 윤형중 신부는 열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지향은 교회와 다소 어긋나는 경향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형중 신부는 순교정신을 현양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계속해서 주창하였다.

 

 

5. 맺음말

 

윤형중 신부는 일제시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전반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가톨릭靑年》의 창간부터 시작하여 《경향잡지》 · 《경향신문》 등 가톨릭의 언론창달과 저술 활동을 통해 가톨릭 교리의 전파를 위해 전 생애를 바쳤다. 또한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천주교 대표로 상임대표를 맡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윤형중 신부가 특별히 중시했던 것은 순교자 현양이었다. 그가 무엇을 계기로 하여 순교신심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밝힌 바는 없다. 그러나 그의 집안 자체가 병인박해 당시의 순교자 윤자호의 후손이었고, 때문에 자연스럽게 집안 자체가 순교자에 대한 신심이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윤형중 신부가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된 것에는 그의 어머니와 육촌 당숙인 윤의병의 권유가 컸다고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의 아버지 윤관병의 영향 또한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윤관병은 옹기점을 하며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을 돌볼 정도로 순교신심이 두터웠다고 한다. 윤형중 신부가 후에 말하길 그의 아버지는 성직자의 길을 걷겠다는 아들의 결심에 다소 주저하였다고 한다. 아들이 세속에서 출세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윤형중 신부에게 있어서 1933년 출판부 보좌로 전근되었던 것은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그는 《가톨릭靑年》 · 《경향잡지》의 편집을 도맡았고 《경향신문》의 창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러한 언론 창달과 저술 활동을 통해 그는 가톨릭의 진리를 교회 안팎으로 전파하고자 하였다. 그를 위한 방법론의 일환으로 순교자 현양회 또한 건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순교자에 대한 현양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윤형중 신부는 순교자들이 박해 당시 당했던 갖은 악행과 고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순교기념관에 그러한 당시의 박해 상황을 그대로 전시하고자 하였고 순교기념탑을 통해 탑을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순교자들의 희생을 항상 기억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결국 순교자 현양을 통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다. 그가 《경향잡지》를 통해 말했듯이 순교의 기초는 천주에 대한 사랑이며 이 천주의 사랑을 위해 생명을 희생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완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형중 신부는 순교정신을 역설하면서도 정치 이데올로기와의 결합에서는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일제의 전시체제 구축을 위한 황국신민화 정책에 순교정신을 적용하였다. ‘순교정신은 훌륭한 보국운동’이라는 것이 그가 말한 골자였다. 그의 의도는 결국 순교정신을 위시로 한 순교자 현양회로 그대로 드러났는데, 현양회의 중앙위원들은 모두 일제의 정책에 동원되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의 순교정신은 이승만 정권의 존재기반이었던 반공사상과 접목되었다. 이는 일제와의 이해관계에서 해방 후 미국과의 이해관계로 연결된 한국 가톨릭교회의 입장에 의한 것이었다. 미군정과 우익세력의 반공을 기치로 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기 위해서는 순교정신이라는 하나의 매개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상으로 본 연구에서는 윤형중 신부의 생애와 그의 순교정신을 통해 인생 전반에 걸쳐 이루고자 하였던 순교자 현양회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연구는 가톨릭교회 내에서 종교인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시대 상황에 대한 목소리와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했던 한 인물을 살펴보았다는 것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윤형중 신부가 순교자에 대한 현양에 전 생애를 오롯이 바침으로써 그의 신념, 즉 천주에 대한 사랑을 제창한 것은 오늘날 또 다른 모습의 순교가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문헌

 

1. 사료

 

《가톨릭靑年》

《경향신문》

《경향잡지》

 

2. 단행본

 

강인철, 《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

근현대 한국가톨릭연구단,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가톨릭출판사, 2005.

노기남, 《나의 인생관―당신의 뜻대로―》, 휘문출판사, 1989.

노용필, 《한국 근현대 사회와 가톨릭》, 한국사학,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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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___, 《사말의 노래》, 가톨릭출판사, 1953.

_____, 《한 시간의 파적―여호와의 증인 비판서》, 경향잡지사, 1954.

_____, 《18인의 개종전기: 프로테스탄에서 가톨릭에로》, 경향잡지사, 1955.

_____, 《상해 천주교 요리》 상·중·하, 경향신문사, 1957~1959.

_____, 《천주교 요리 문답》, 경향잡지사, 1959.

_____, 《진리의 증언》, 갑진문화사, 1959.

_____, 《천주성교공과》, 경향잡지사, 1959.

_____, 《복자수녀원과 순교자 현양회와 나》, 한국순교복자수녀회, 1972.

_____, 《진실의 빛 속을》, 가톨릭출판사, 1989.

최석우 편, 《한국교회사의 탐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3. 학위논문

 

강석진, 〈한국 천주교 순교자신심과 순교자 현양 운동사 연구〉, 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박경연, 〈해방공간기 한국가톨릭의 신국가건설론〉,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서대원, 〈경상도 지역의 순교자와 현양 운동에 관한 고찰 : 대구대교구 순교자 20위 중심으로〉, 대구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4.

최소미, 〈미군정기 《경향신문》의 창간과 초기운영〉,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4. 연구논문

 

김수태, 〈1930년대천주교서울교구의가톨릭운동 - 《가톨릭靑年》을중심으로〉, 《한국근대사연구》 49, 2009.

김정수, 〈정지용의 가톨리시즘 연구〉, 《한국현대문학연구》 52, 2017.

윤선자, 〈일제전시하 총동원체제와 조선천주교회〉, 《역사학보》 157,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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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56년 《사상계》 1월호에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하여 기독교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이에 윤형중 신부가 《신세계》 9월호에 그에 대한 반박문을 실으면서 논쟁은 시작되었다. 다음 해인 1957년 《사상계》 3월호에 함석헌은 〈할 말이 있다〉라는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에 대해 윤형중 신부는 《사상계》 5월호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로 반박하였다. 이어서 동 잡지 6월호에 함석헌이 〈윤형중 신부에게는 할 말이 없다〉를 실으면서 지상 논쟁은 계속 되었다.

 

2) 김지하는 1975년 2월 《동아일보》에 〈고행 1974〉를 연재하였는데, 이 글에서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것이라고 폭로하자 반공법 위반으로 재수감되었다. 동년 5월 김지하는 옥중에서 양심선언문을 작성하여 이를 윤형중 신부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즉시 영어와 일어로 번역되어 미국 · 일본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3) 최경선, 〈한국 가톨릭 신심과 그 역사적 배경 : 해방과 한국 전쟁 시기〉, 《한국 근현대 100년 속의 가톨릭교회》, 가톨릭출판사, 2005 ; 노용필,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창립과 발전〉, 《한국근현대 사회와 가톨릭》, 한국사학, 2008 ; 최소미, 〈미군정기 《경향신문》의 창간과 초기운영〉, 국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등이 있다.

 

4)‌ 조현범, 〈19세기 중엽 프랑스 천주교 선교사의 조선 인식 - 다블뤼 주교를 중심으로-〉, 《종교연구》 27, 2002 ; 김수자, 〈해방 이후 노기남 주교와 반공주의 : 1945~1954〉, 《교회사연구》 35, 2010 ; 최기영, 〈뮈텔 주교의 한국 인식과 한국 천주교회〉, 《교회사연구》 37, 2011 ; 이석원, 〈제2대 조선 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조선 인식〉, 《교회사학》 9, 2012 ; 장영민, 〈한·미 외교문서로 본 지학순 주교의 민주화운동: 관련 행위자들의 인식과 대응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31, 2014 ; 최선혜, 〈한국 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 2014 등이 있다.

 

5) 손석조,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에 대한 고찰 : 조직구조의 기본변수와 상황 변수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정책학과 석사학위논문, 1995, 18~19쪽.

 

6)‌ 주명준, 〈천주교의 전라도 전래와 그 수용에 관한 연구: 윤지충, 유항검의 가계와 전도 활동을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 이희옥, 〈전라도 천주교 전래와 이순이 루갈다의 순교〉, 전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 김영중, 〈신유박해 동정 순교자들의 삶에 나타난 동정생활 연구 : 2014년 시복된 동정 순교자 9위를 중심으로〉, 인천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등이 있다.

 

7)‌ 노형호, 〈안중근 토마스의 순교에 대한 윤리신학적 고찰 : 신앙과 민족의식의 통합 측면에서〉, 인천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 하정호, 〈안중근의 천주교 신앙 연구〉, 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등이 있다.

 

8)‌ 《경향잡지》는 초대 편집자인 드망즈 신부 이후 1911년 4월부터 명 요한(Jean M. Georges Meng) 신부가 발행인 겸 주필을 담당하다가 이후 한기근 신부, 윤형중 신부, 조제 신부(Joseph Jaugey, 楊秀春, 1884~1955)가 번갈아 그 책임을 맡았다. 1937년 당시 《경향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은 양수춘 신부로 되어 있지만 편집 및 집필은 윤형중 신부가 도맡아서 했다. 본 잡지는 1945년 5월호를 끝으로 발간이 중단되었다가 1946년 8월호부터 복간되었다. 동년 12월호부터 1961년 10월호까지의 편집 겸 발행인은 윤형중 신부로 바뀐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 1959년 6월까지로 시기를 한정한 것은 1959년 7월 1일부터 잡지의 발행권이 서울대목구에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로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9)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가톨릭출판사, 1989, 156쪽 · 161쪽.

10) 최소미, 앞의 논문, 24쪽.

11)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 현양회와 나》, 한국순교복자수녀회, 1972 ; 《진실의 빛 속을》, 가톨릭출판사, 1989.

 

12)‌ 윤형중, 《종교의 근본문제》, 가톨릭출판사, 1952 ; 《사말의 노래》, 가톨릭출판사, 1953 ; 《한 시간의 파적-여호와의 증인 비판서》, 경향잡지사, 1954 ; 《18인의 개종전기 : 프로테스탄에서 가톨릭에로》, 경향잡지사, 1955 ; 《상해 천주교 요리》 상·중·하, 경향신문사, 1957~59 ; 《천주교 요리문답》, 경향잡지사, 1959 ; 《진리의 증언》, 갑진문화사, 1959 ; 《천주성교공과》, 경향잡지사, 1959 등.

 

13)‌ 윤자호(1809~1868) 바오로는 파평 윤씨 명가의 후손으로 노성에서 성장하였다. 명문대가의 장손임에도 불구하고 수계범절(守誡凡節)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 강경, 충주 등을 거쳐 장사를 하며 신앙을 전파했다. 다블뤼 주교에 의해 전교 회장직에 임명되어 많은 신자들에게 신앙적 도움을 주었고 성직자 영입 운동에도 힘써 많은 성직자들의 입국을 도왔다. 1868년에 병인박해 소식을 듣고 자신도 순교할 때가 되었다고 결심하고 공주 관불산 교우촌으로 떠났다. 체포된 후 수원 유수부로 이송되었는데, “윤자호는 감옥에서도 아름다운 세월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갇힌 교우들에게 권면하였다. 1868년 7월 18일 60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는 수원에서 첫 번째로 순교한 인물로, 현재 제2차 조선왕조 치하 순교자 시복 작업 중에 있는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속한다.

 

14)‌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1~23쪽.

15)‌ 현재 안성 안법 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6)‌ 앞의 책, 27쪽.

 

17)‌ 윤의병(1888~1950) 바오로 신부는 1888년 9월 27일 경기도 안성에서 윤상우의 5남 1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충북 진천 용진동에서 큰아버지 윤상운(尹相雲)이 세운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4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 1920년 9월 18일 뮈텔 주교의 주례로 종현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윤의병 신부는 순교자 집안 출신이었던만큼 순교자에 대한 신심이 두터웠다. 그는 강론의 대부분을 순교사화로 채울 만큼 순교자 현양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군란(窘亂)소설인 《은화》를 저술하였다. 《은화》는 병인박해를 배경으로 한 한국 가톨릭 최초의 장편소설로 《경향잡지》에 1939년 1월호부터 1950년 6월호까지 총 125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50년 6월 24일 6·25전쟁이 발발하기 하루 전날 정치보위부에 연행, 해주로 이송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18)‌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49~50쪽.

 

19) 《가톨릭靑年》의 창간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0년대에 들어서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가톨릭운동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가톨릭교회 내부에서는 교회출판물을 통제하고 가톨릭운동을 위한 새로운 기관지를 만드는 것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기존에 발간하고 있었던 《경향잡지》, 경성대목구의 《별》, 대구대목구의 《천주교회보》 중 《경향잡지》를 제외한 대목구 내의 잡지는 모두 폐간하고 1933년 6월 5대목구 연합의 기관지로 《가톨릭靑年》을 창간하였다. 그러나 형태는 5대목구 연합이었지만 그 운영과 책임은 경성대목구가 전적으로 맡았다(김수태, 〈1930년대 천주교 서울교구의 가톨릭운동 - 《가톨릭靑年》을 중심으로〉, 《한국근대사연구》 49, 2009, 12~15쪽).

 

20)‌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27쪽.

21) 윤형중, 앞의 책, 156쪽.

22) 순교자 현양회에 대해서는 본 연구의 3장에서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23)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 현양회와 나》, 16쪽.

 

24)‌ 윤형중 신부는 《경향신문》 발행의 이유에 대해 첫째, 능력 부족으로 폐간하면 교회 망신이지만 지금 발행하지 못하는 것 또한 망신이고 둘째, 미군정이 가톨릭교회가 공산주의를 막아줄 것으로 믿고 정판사를 불허하였고 또한 종이도 많이 제공하였는데 발행을 중지하는 것은 미군정의 기대에 어긋나기 것이며 셋째, 만약 신문이 적자를 낸다면 인쇄소에서 나올 흑자로 보충이 가능하다고 하였다(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48~149쪽).

 

25)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 현양회와 나》, 36쪽.

26)‌ 순교자 현양회의 규정 제11조 2절 중앙위원은 경성부 내에 거주하는 자로 함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27)‌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65쪽.

28)‌ 윤형중, 앞의 책, 150쪽.

29)‌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71~174쪽.

 

30)‌ ‘민주회복국민회의’는 명동 성당에서 주로 회합을 했는데, 이때 윤형중 신부와 함석헌은 과거 지상논쟁 이후 처음으로 직접 만나기도 하였다. 시대의 부름 앞에서 그들의 신념은 일치하였던 것이다.

 

31) 1923년 발표된 《경성대목구 지도서》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뮈텔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이 알아야 할 부분, 특히 회장에 관한 사항을 따로 묶어 《회장 직분》(1923)으로 편찬하였다. 《회장 직분》의 편찬은 르 장드르 신부가 맡아 1923년 10월 경성대목구 성서활판소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은 뮈텔 주교의 서문에 이어 회장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과 교우들이 알아야 할 제도와 칠성사, 신심단체, 사목방문에 대한 5편의 본문, 월별로 정리한 남녀 세례명을 비롯해 고해 · 영성체에 관한 칙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이송섭, 〈한국 천주교회의 회장에 대한 고찰: 《한국 천주교회 지도서》들을 중심으로〉,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석사학위논문, 2013, 63~65쪽).

 

32) 윤형중, 《상해 천주교 요리》 상권, 4쪽.

33) 윤형중, 《상해 천주교 요리》 상권, 4~5쪽.

34) 〈우리 순교자들을 선전하라〉, 《경향잡지》 1939년 3월 28일 자 121쪽.

35) <우리 순교자의 선혈은 천주교가 참종교임을 증명함(二)〉, 《경향잡지》 1939년 8월 28일 자 362쪽.

36) 〈순교정신을 배우라!(一)〉, 《경향잡지》 1939년 11월 27일 자 514쪽.

37)‌ 향주덕에 대해서는 윤형중, 《상해 천주교 요리》 중권, 230~309쪽을 참고할 수 있다.

38) 〈우리 순교자의 선혈은 천주교가 참종교임을 증명함(一)〉, 《경향잡지》 1939년 8월 12일 자 337쪽.

39) 앞의 책, 340쪽.

40)‌ 〈우리 순교자의 선혈은 천주교가 참종교임을 증명함(二)〉, 《경향잡지》 1939년 8월 28일자 363쪽.

41) 〈김신부 순교 100주년 경축예보〉, 《경향잡지》 1946년 9월 1일 자 17쪽.

42)‌ 〈순교정신을 배우라!(二)〉, 《경향잡지》 1939년 12월 12일 자 537쪽 · 539~540쪽 · 543쪽.

43)‌ 〈조선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 회의 성명〉, 《경향잡지》 1939년 9월 12일 자 387~388쪽.

44) ‌〈조선가톨릭대중의 조흔 특중은 무엇이뇨?(二)〉, 《경향잡지》 1939년 11월 12일 자 491~492쪽.

 

45)‌ “이왕에는 신사에 참배하는 것이 종교적 의식인 줄로 알고 대문답에 기재한 바와 같이 금하였더니 그 후로 정부의 발표와 설명에 의하면 신사참배는 종교와는 전연 구별이 있어, 다만 황실의 어조선을 경앙하며 국민정신을 작흥하게 하는 한 국가의 의식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의 신앙은 법률상 자유인만치 만일 신사참배가 종교의 의식과 구별이 없다면 명하지도 않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교황대사와 열위주교는 일반 교우들에게 이 설명을 알려주어 모든 이가 안심하고 참배하게 되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대하여〉 《경향잡지》 1936년 4월 12일 자 218쪽 ;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입장 연구는 정동훈의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회와 신사 참배에 관한 고찰〉(서울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을 참고할 수 있다.

 

46)‌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1939)의 중앙위원은 다음과 같다. 김윤근 신부, 이기준 신부, 노기남 신부, 윤형중 신부, 평신도 조종국, 장면, 박병래, 박대영이 선임되었다(〈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 회의 성명〉, 《경향잡지》 1939년 9월 12일 자 394쪽).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1938)에 천주교회 대표로 선임된 대표자들은 다음과 같다. 대표로는 경성대목구장 라리보 주교, 담당자로는 장면이 선임되었고 각 교회 대표자로 본당 신부 비에모(Villemot, 1869~1950) 신부, 김윤근 신부, 오기선 신부, 서기창 신부와 신자 대표로 조종국, 김은식, 장면, 김동환이 선임되었다(〈국민정신총동원 연맹에 천주교회에서도 참가〉, 《경향잡지》 1938년 7월 15일자 334~335쪽 ; 윤선자, 〈일제전시하 총동원체제와 조선천주교회〉 《역사학보》 157, 1998, 112~113쪽).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대목구연맹(1939)에 이사장으로는 라리보 주교, 이사에 김명제 신부, 김윤근 신부, 신인식 신부, 노기남 신부, 흑천(黑川) 신부가 선임되었고 간사로는 장면, 암곡이랑(岩谷二郞), 박병래, 조종국, 김한수, 정남규, 박대영이 선임되었다(〈국민정신총동원 경성대목구연맹결성〉, 《경향잡지》 1939년 5월 30일 자 235~236쪽).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대목구연맹(1940)에 이사장으로는 노기남 신부, 이사강목대리로 김윤근 신부, 흑천(黑川) 신부, 오기선 신부, 장금구 신부와 유지교우 10인이 선임되었다(〈국민총력천주교경성구연맹 새역원과 제1회 역원회〉, 《경향잡지》 1940년 12월 12일 자 304~305쪽).

이들의 주된 활동은 미사, 기도회, 황군 위문, 시국 인식 강연회, 국방헌금 등의 형태로 전국에서 진행되었다(윤선자, 〈일제전시하 총동원체제와 조선 천주교회〉, 116~9쪽 ;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가입한 경성대목구의 본년도 행사 一〉, 《경향잡지》 1938년 8월 12일 자 378~380쪽).

* 밑줄을 그은 이름은 각 단체에서 중복되는 인물을 표시한 것이다.

 

47)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와 이에 대한 한국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박경연, 〈해방공간기 한국 가톨릭의 신국가건설론〉, 부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23~27쪽을 참고할 수 있다.

 

48) 노기남, 《나의 인생관 - 당신의 뜻대로 -》, 휘문출판사, 1989, 187~188쪽.

49) 강인철, 《전쟁과 종교》, 한신대학교 출판부, 2003, 211~212쪽.

50) 〈조선 천주교회사와 순교자 현양회〉, 《경향잡지》 1949년 6월 1일 자 81~83쪽.

51) 〈복자첨례는 한국민족의 큰 첨례!〉, 《경향잡지》 1949년 9월 1일 자 130~131쪽.

52) 앞의 책, 131쪽.

53)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 현양회와 나》, 129쪽.

54)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34쪽.

55) ‌1939년 당시에는 경성(현 서울) · 대구 · 평양 · 원산 · 연길 대목구와 전주지목구가 있었다.

56)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 현양회와 나》, 113쪽.

57)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32쪽.

58)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 현양회와 나》, 112~113쪽.

59) 〈조선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 회의 성명〉, 《경향잡지》 1939년 9월 12일 자 394쪽.

60) 노용필, 《한국근현대 사회와 가톨릭》, 404쪽.

61) 〈공시〉, 《경향잡지》 1939년 9월 28일 자 417쪽.

62)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32쪽.

63) 윤형중, 앞의 책, 132~133쪽.

64) 윤형중, 《복자수녀원과 순교자 현양회와 나》, 16쪽.

65)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31쪽.

66)‌ 〈조선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발기인회의 성명〉, 《경향잡지》 1939년 9월 12일 자 389~390쪽.

 

67)‌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31쪽 ; 중앙위원에 대한 보다 자세한 규정 내용은 《경향잡지》 1939년 9월호 12일 자 397~402쪽을 참고할 수 있다.

 

68)‌ 그 이유는 1939년 9월 순교자 현양회의 결성 당시, 타 대목구장들의 반대에 대한 해결책으로 개개인의 입회는 가능한 것으로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69) 〈조선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규정〉, 《경향잡지》 1939년 9월 12일 자 397~399쪽.

 

70) 〈조선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규정〉 《경향잡지》 1939년 9월 12일 자 ; 회원의 종류 및 회비, 입회 방법 등은 동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71)‌ 노용필, 《한국근현대 사회와 가톨릭》, 415쪽 ;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공문-1-〉, 《경향잡지》 1948년 3월 1일 자 38~41쪽.

 

72)‌ 주로 조선 시대 박해 때의 유물을 수집하여 소개하였는데 품명, 유래, 헌납자 및 접수일 등 유물에 대한 정보를 매우 자세하게 게재하였다. 〈순교자 현양회 페이지〉란에 소개된 유물은 십자가상, 성경직해, 성패, 김대건 신부의 친필사진, 조선인 교우들의 교황께 보내는 탄원편지 등 그 종류가 다양하였다. 또한 수집유물에 대한 감상을 서술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순교정신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도록 하였다.

 

73)‌ 〈양화진 치명터를 확보하자!〉, 《경향잡지》 1956년 12월 1일 자 430~433쪽; 〈치명자들의 후손은 살아있다〉, 《경향잡지》 1957년 1월 1일 자 8~9쪽 ; 이후 《경향잡지》는 〈한국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 지면〉을 따로 만들어 계속해서 순교자 현양회의 실황을 보고하였다.

 

74)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34쪽.

 

75)‌ 〈1939년을 바라보며 순교비 건립을 재촉함-1-〉, 《경향잡지》 1937년 11월 12일 자 552~553쪽 ; 〈우리 치명자들에 대한 이 열성〉, 《경향잡지》 1938년 1월 12일 자 18~9쪽 ; 〈순교 100주년을 한 달 앞두고〉, 《경향잡지》 1938년 12월 12일자 564~571쪽 ; 〈순교비 건립에 대하여 16만 교형자매께 아뢰는 말씀〉, 《경향잡지》 1938년 12월 28일 자 580~584쪽 ; 〈힘 있게 나가는 순교탑 건립운동〉, 《경향잡지》 1939년 5월 12일 자 211~212쪽 등.

 

76)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35~136쪽.

 

77)‌ 〈복자안드레아김신부 순교100주년〉, 《경향잡지》 1946년 8월 1일 자 2쪽 ;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회의 공문-1-〉, 《경향잡지》 1948년 3월 1일 자 38~41쪽 등.

 

78) 윤형중, 《진실의 빛 속을》, 158~160쪽.

79)‌ 새로 수정한 규정은 윤형중, 《복자수녀회와 순교자 현양회와 나》, 162~165쪽을 참고할 수 있다.

 

80) 윤형중 신부는 순교자 현양회의 재건과 관련하여 일전에 무산되었던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른 의연금의 확보를 위해 당시 김수환 대주교를 통하여 교황청의 도움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교황청에 전해지지 않았고 결국 윤형중의 재건 계획은 무산되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경위는 윤형중, 《복자수녀회와 순교자 현양회와 나》, 158~159, 173~178쪽을 참고할 수 있다).

 

81) 윤형중, 《복자수녀회와 순교자 현양회와 나》, 175쪽.

 

[교회사 연구 제54집, 2019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박경연(부산대학교 사학과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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