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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 기쁨과 희망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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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0-02 ㅣ No.519

[신앙의 해] 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2)


제2부 몇 가지 긴급 과제

서론

사목헌장은 방대한 문헌이다.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 폐막되었는데, 사목헌장은 1965년 12월 7일 최종 표결을 거쳐서 참석교부 97%의 찬성을 얻어서 채택되었다. 폐막을 하루 앞두고 채택된 사목헌장은 내용면에 있어서 일관성이 부족하다. 그리고 온갖 현실 문제를 다루려고 하다 보니 깊이도 모자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목헌장은 현대세계를 향해 교회가 보내는 구원의 메시지이자, 교회가 인류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2항에서 사목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인류를 향해 말하며, 온갖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변혁되고 완성될 것이다.”

사목헌장 제1부는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완성된 모습을 나자렛 사람 예수 안에서 찾고 있다. 사목은 인류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안에서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사목헌장 제1부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묵시 22,13)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사목헌장 제2부는 현대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갖가지 현실적인 문제를 다룬다. 인간 개개인과 공동체가 당면한 문제들을 복음의 빛 안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 특별히 혼인과 가정, 인간 문화, 경제 사회 문제, 정치 문제, 국제정치와 평화의 문제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서 해답을 얻고자 노력한다.

사목헌장 제2부는 5장으로 구성되어있다. 제1장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 제2장 문화 발전의 촉진, 제3장 경제 사회 생활, 제4장 정치 공동체 생활, 제5장 평화 증진과 국제 공동체, 맺음말.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제1장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은 47항부터 52항까지 인데, 각 항의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
 
현대 세계의 혼인과 가정(47), 혼인과 가정의 거룩함(48), 부부 사랑(49), 혼인의 풍성한 열매(50), 부부 사랑
과 인간 생명의 존중(51), 혼인과 가정의 행복을 도모하여야 할 모든 사람의 의무(52). 이 소제목들만 살펴보아도 사목헌장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개인의 행복, 사회와 교회의 안녕은 부부가 이루는 가정 공동체의 행복과 직결된다. 부부가 이루는 가정 공동체는 생명이 태어나는 자리이기도 하고, 모든 공동체의 근본이 되는 기초 공동체이기도 하다.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건물 전체는 흔들리기 마련이다. 한편 기초가 튼튼하면 어지간한 외풍이나 비바람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마태 7,25-27).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은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중혼, 이혼, 자유연애, 동성혼 등으로 혼인의 존엄성이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가정 공동체는 부부의 이기주의, 향락주의, 부당한 출산 거부 등으로 오염되어 있다. 또한 정치, 경제, 사회심리, 급격한 인구증가, 노령화, 환경 등의 생활조건은 혼인제도의 존엄성과 가정 공동체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 [2013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제1장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
 
공의회는 현대세계의 갖가지 위험에 노출된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과 신성한 가치를 복음의 빛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호하고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혼인은 인간들이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제정하시고 당신의 법칙으로 안배하신 제도이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사랑과 신의를 바탕으로 인격적인 합의로 계약을 맺어서 부부가 된다. 혼인계약으로 ‘둘이 아니라 한 몸’(마태 19,6)이 된 부부는 가정 안에서 자신들의 사랑과 일치를 완성시켜 나간다. 자녀의 출산은 부부 사랑의 월계관이다. 가정은 자녀 교육을 위한 일차적인 학교이며, 부부는 가장 훌륭한 교사다.

교회를 세우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치신 그 사랑으로 부부도 사랑과 신의로 일치를 이루어 거룩한 가정을 이루도록 혼인을 성사로 들어 높이신다. 혼인성사로 축성된 부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정을 따뜻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로 가꾸고, 서로 더욱 깊이 사랑하고 일치를 이루어 부부로서 자신들을 완성시켜가게 된다.

혼인성사로 탄생하게 된 가정은 작은 교회이다. 자녀들 앞에 기도의 모범을 보이는 부부는 자녀들의 인격완성과 구원과 성화의 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키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다.

부부의 기도와 사랑으로 교육받은 자녀들은 부모에 대한 애정과 효성과 신뢰로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보답하는 효성 깊은 자녀가 된다. 사랑과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혼인성사로 탄생하게 된 가정은 그리스도의 생생한 현존과 교회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된다.

부부의 사랑은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사랑이다. 타인을 지향하는 이 사랑은 인간 전체의 행복을 포괄한다. 예수님께서 이 사랑을 특별한 은총으로 채워주시고 고쳐주시고 높여주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자유의사로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이 사랑은 부부생활에 스며들어 부부를 인격체로 완성시켜 온전히 한몸이 되게 한다.

이 사랑을 바탕으로 한 부부관계는 자신을 상대방에게 내어줌으로써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고 서로 풍요롭게 만든다. 부부의 육체적인 결합은 혼인의 단일성을 나타낼 뿐 아니라, 부부가 서로 신의를 지키고 사랑을 키워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따라서 부부는 기도와 거룩한 생활로 덕을 쌓아가야 하고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과 희생정신으로 부부관계를 완성시켜야 한다.

혼인과 부부 사랑은 본질상 자녀 출산과 교육을 지향한다. 혼인제도와 부부 사랑은 그 자체로 존엄성과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자녀의 출산과 교육은 혼인제도와 부부 사랑을 더 아름답고 존귀하게 만든다.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에게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라.”(창세 1,28) 하고 축복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부부는 사랑을 바탕으로 자녀들에게 생명을 전달하고 교육할 의무를 진다. 이를 통해서 부부는 하느님 사랑에 동참하고 창조의 협력자가 된다. 부부는 자신들과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건강, 경제적인 여건, 교육환경, 생활환경 등을 고려하여 자녀수를 결정하는 것은 부부의 책임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부부가 사랑과 책임감으로 자녀를 출산하고 그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임무를 다하게 될 때, 창조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되고, 부부는 완덕으로 나아가게 된다. [2013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군인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교회는 가정 공동체와 부부의 혼인생활을 위태롭게 하는 현대사회의 위험한 환경과 여건을 잘 알고 있다.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부부와 가정은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일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인간 생명은 그 어떤 가치보다 앞선다. 그러므로 수태(受胎)되는 순간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특별히 낙태와 유아살해는 생명을 침해하는 죄악이므로 피해야 한다. 부부의 성생활은 사랑과 신의를 바탕으로 하는 전인격적인 자기 내어줌인 동시에 생명 전달의 길이므로 경의로 존중받아야 한다. 교회는 산아조절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부는 교회의 교도권이 배척하는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모든 사람은 혼인의 존엄성과 가정의 고귀함을 지켜서 행복을 증진해야 할 책무가 있다. 가정은 인간성을 풍요롭게 하는 학교이다. 신의를 바탕으로 한 부부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화목한 가정 안에서, 자녀들은 부모의 모범을 따라서 교육받고 성장하여 또 다른 가정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부부는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고 도덕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한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이다. 국가는 혼인과 가정을 보호하고 향상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 국가는 혼인으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서 교육할 부모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또한, 국가는 가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고아와 노인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생활의 증언으로 모든 사람과 협력하여 혼인과 가정의 가치와 존엄성을 증진시켜야 하고, 복음의 힘으로 현대사회의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혼인과 가정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지식인들과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은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을 수호하고 특별히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찾는데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사목자들도 가정 문제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갖추고 부부들이 당면하는 어려움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목을 펼쳐야 한다. 가정이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어서 생명을 수호하고 복음 선포의 자리가 될 수 있도록 부부들을 돕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끝으로 부부 자신들도 신의와 사랑으로 한 몸을 이루고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부부로서의 소명을 다 하여 주님 사랑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제2장 문화 발전의 촉진은 서론과 제1절 현대 세계의 문화 상황. 제2절 올바른 문화 발전의 원리. 제3절 문화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몇 가지 긴박한 임무로 구성되어 있다.

53항 서론에서는 문화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사목헌장은 문화(文化 Cultura)를 이렇게 정의한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다양한 자질을 연마하고 발전시키는 모든 수단을 문화라고 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것들, 곧 지식, 학문, 노동, 예술, 관습, 제도 등을 모두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화 속에는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종교적, 환경적 요소들이 담기게 마련이다. 따라서 문화는 다양성, 다원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문화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성취하고 행복을 찾으며 동시에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인간 삶의 질을 풍요롭게 만든다. [2013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제2장 문화 발전의 촉진
 
제1절 현대 세계의 문화 상황은 54항부터 56항까지이다.
 
자연, 인문, 사회 과학의 진보와 발달, 교통수단의 발달, 정보통신 기술의 첨단화는 현대인들의 생활양식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행동 양식, 새로운 생활 방식, 새로운 여가 활용 방법이 생겨나고 있다. 교통수단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민족과 국가, 사회 집단 사이, 개인과 개인 사이의 교류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 보화를 서로 공유할 수 있게 한다. 혁신적인 교통수단의 발달과 첨단화된 정보통신 기술은 인류를 더욱 가깝게 하나로 묶어줄 뿐 아니라, 보편적 형태의 인간 문화를 창출할 바탕이 되어준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문화 창조와 창출의 주체는 인간이다. 정신적 도덕적으로 성숙한 인간이 진리와 정의를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할 때, 새로운 인본주의 문화가 탄생하게 된다. 인류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이 투철한 인간성을 갖춘 사람들이 인류를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문화를 창출할 수 있다.

교류와 소통을 통한 보편적 형태의 문화 창출은 전통적인 공동체 생활의 파괴, 선조들의 지혜 망실(亡失), 고유한 민족성의 상실 등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또한, 현세적 인본주의 문화가 종교와 신앙생활 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새로운 문화 창조가 전통문화 유산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길은 무엇일까? 인본주의 문화가 종교와 신앙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는 없을까? 현대 세계의 문화 발달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는 문화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야 할 소명이 있다. 복음화된 문화 안에서 온 인류가 한 가족 한 형제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제2절 올바른 문화 발전의 원리는 57항부터 59항까지이다. 각 항의 제목은 이렇다. 57 신앙과 문화. 58 그리스도의 복음과 인간 문화의 복합적 관계. 59 다양한 문화 형태의 조화.

각 항의 소제목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제2절에서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문화의 관계를 살펴본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인간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인류는 풍요롭게 발전된 문화를 다 함께 향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면서 이 땅에서 나그네살이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의 현실 곧 문화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땅의 지배(창세 1,28)와 창조의 완성이라는 이중 소명을 주셨다. 또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 바쳐 하느님을 사랑하고(신명 6,5)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는 이중 계명을 주셨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중 소명과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이중 계명은 이 땅 위에서 실천해야 한다. 이 땅은 문화가 꽃피는 자리이다. 현실 세계 속에서 문화의 창달을 통해서 이중 소명과 사랑의 이중 계명을 바르게 실천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현실 세계의 문화 창달(暢達)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3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일 ? 전교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이 되시어 인류 문화를 참 빛으로 비추고 재창조하신다. “참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한 1,9) 과학기술과 문화의 발달은 인류의 이중 소명과 사랑의 이중계명 실천을 위한 바탕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질문명과 과학기술이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위험을 안고 있다. 따라서 신앙은 인간이 물질과 과학기술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진리에 대한 엄정한 충실성, 기술 혁신의 공동 노력, 국제적 연대,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책임의식, 문화 혜택의 양극화 해소 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인간문화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시대 환경과 민족문화 환경에 맞도록 당신 자신을 계시啓示하셨다. 교회도 시대 환경과 민족 문화 환경에 맞추어서 복음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에 걸맞은 전례를 거행하고 신앙 공동체의 생활을 이끌어왔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여러 형태의 문화와 교류하면서 복음의 빛으로 민족들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었고, 교회 자체도 풍요롭게 되었다.

교회는 복음의 빛으로 인간의 생활과 문화를 쇄신하고 오류와 악을 극복함으로써 민족들의 도덕을 정화하고 승화시켜왔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의 문화적, 정신적 특성과 자질을 천상적재화로 풍요롭게 하고 강화함으로써 교회의 임무를 수행해왔다.

문화는 인간의 전인적인 완성과 인류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반인륜적, 반사회적, 반도덕적, 반종교적, 반윤리적 문화가 확산되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인간 완성과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의식 계발이 우선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 발전을 위한 정당한 자유와 자율 행동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한다.

신앙과 이성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예술과 학문 분야 뿐 아니라 모든 문화의 고유한 원리와 방법의 정당한 자유를 인정하고 그 자율성을 존중한다. 도덕 질서와 공익을 지키는 한,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하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고 전파하며 예술을 연마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히 공권력은 문화형태의 성격을 규정하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 특히 소수 민족이나 계층들도 자기 고유한 문화를 증진시키고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고, 문화가 정치권력이나 경제세력에 예속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제3절은 문화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몇 가지 긴박한 임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60항부터 62항까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류가 인종, 성별, 국적, 종교, 사회적 신분의 차별 없이 인간 존엄에 부합하는 문화를 향유하고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그 재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경험과 지식, 경제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문화생활의 발전을 위해서 봉사해야 할 책무가 있다. [2013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문맹이나 열악한 노동환경, 나쁜 생활조건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 소외계층, 농민과 노동자, 여성과 노약자들은 문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도 문화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경제적, 사회적 생활환경,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문화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깨닫도록 노력해야 하고, 동시에 각자가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계발하여 다른 사람들이 문화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책임도 있다.

현대인들은 각자 전공분야가 다를 뿐 아니라, 문화 분야도 세분화(細分化)되어 있어서, 전공분야나 관심분야에는 깊은 소양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전인적인 소양과 성품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지성, 의지, 양심, 형제애, 예절 등 전인격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전인교육이 필수적이다.

전인교육을 담당할 기초적인 학교는 가정이다. 건강하고 따듯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양육(養育)되고 교육받은 사람들은 건전한 문화인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쉽게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서적의 보급과 독서운동, 휴식을 위한 여가선용, 자유로운 연구 활동, 지역과 풍토, 전통과 관습 등을 익힐 수 있는 여행과 관광, 끈끈한 정과 연대를 이어주고 몸과 마음을 다 함께 건강하게 하는 스포츠 활동 등이 전인교육을 위한 방편이 될 수 있다.

교회는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지만 동시에 발전된 문화로부터 자극을 받는다. 과학, 역사, 철학의 새로운 발견과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은 복음선포와 교리전달의 방법을 새롭게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신앙의 진리는 불변하지만, 그 진리를 전달하고 교육하는 방법은 문화나 환경에 따라서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목자들도 현대 신앙인들이 더 순수하고 원숙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문화환경에 걸맞은 사목활동을 펼쳐야 한다.

문학과 예술은 인간 본연의 특성, 인간의 문제와 경험, 인간의 불행과 기쁨, 욕망과 능력을 표출하고 묘사하면서 인간 생활을 풍요롭게 만든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문학 예술인들은 민족과 지역, 시대 특성에 맞는 예술 형태와 적절한 표현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을 하느님께 드높여 주는 문학예술 활동을 펼쳐가기를 기대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실천과 도덕 정신이 새롭게 진보하는 과학 기술과 문학예술, 문화 활동을 비추어서 발전의 바탕이 되기를 소망한다.

신학교나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거나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지식인들, 문화 예술인들, 과학자들과 교류와 협력을 통하여 동시대인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기꺼이 또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평신도들도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전문가의 역할을 기꺼이 담당해야 한다. [2013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제3장 경제 사회생활

제3장 경제 사회생활은 서론으로 경제생활의 몇 가지 측면과 제1절 경제발전. 제2절 경제 사회 생활 전체를 지배하는 몇 가지 원칙을 이야기한다.

제3장의 서론인 63항은 경제생활의 몇 가지 측면, 곧 공의회가 염력하고 걱정하는 점들을 이야기한다.

경제 사회 생활의 목표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增進)시키고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데 있다. 인간은 경제 사회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召命)을 완성시키고 인류 공동체의 선익(善益)을 증진시키기를 원한다.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생활의 주체(主體)이며 중심(中心)이며 목표(目標)이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사목헌장에서 경제에 대한 교조적(敎條的) 지침이나 규범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공산주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따위의 경제이론이나 경제운용과 관련된 정책 또는 정치를 제시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제3장의 제목 경제 사회 생활(De Vita Oeconomica-Sociali)이 말하는 바와 같이 공의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 소명의 완성, 그리고 인간 삶이 담긴 사회 전체의 선익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경제 활동을 통해서 현대인들은 자연과 환경을 더욱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지배한다.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민족,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든다. 당연히 경제와 정치활동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첩되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정치권력이 경제활동을 간섭하거나 통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대 경제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고도로 발달한 생산방법이나 재화와 서비스의 교류는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적절한 수단이다. 반면 경제적으로 발전한 지역에서 경제만능주의에 빠져 인간이 경제에 지배당하거나 예속되는 경향도 나타난다. 경제 활동을 통해서 인간을 노예화하거나 착취하기도 하고, 생산을 빙자하여 자연과 환경을 파괴하고 착취하기도 한다.

착취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가난한 사람들은 경제활동을 통해서 자신들의 욕구와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혁명의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동시에 착취와 파괴로 질서가 무너진 자연과 환경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방법으로 보복을 가하기도 한다. 인류는 공해로 건강과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되고, 지구 온난화와 기상이변으로 자연재해를 받게 된다. 욕망의 충족과 이익 추구의 무분별한 경제운용은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災殃)을 몰고 올 위험이 있다.

양극화(兩極化) 현상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경제활동을 통해서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저 개발 지역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생활필수품의 부족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가운데서도 소수의 사람들은 사치와 낭비를 일삼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결정권을 행사하는 동안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책임 있게 결정하지 못하는 가운데 비인간적인 노동조건과 생활환경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한 국가 안에서도 농업과 공업, 서비스 등 산업 간의 경제적 불균형, 북반구와 남반구,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경제적 불균형과 대립은 세계 평화의 위협 요인이 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경제 사회생활의 양면성, 곧 양극화와 불균형, 불평등을 치유하고 해소하기 위해서 첨단 기술력과 경제력이 사용되어야 한다. 경제 사회 생활의 개혁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곧 경제나 과학 기술력이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를 뛰어넘어서 양극화와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공의회는 인류가 당면한 경제 사회 생활의 문제와 실상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인간 이성과 양심이 요구하는 정의와 평등의 실현을 위해서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013년 11월 10일 연중 제32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제1절 경제 발전은 64. 인간에게 봉사하는 경제 발전 65.경제 발전에 대한 인간의 통제 66.제거되어야 할 엄청난 경제 사회적 격차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경제활동은 인간을 위한 활동이다. 당연히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인간의 소망과 욕망의 증대에 걸맞도록 농업과 공업의 생산증대, 서비스의 향상, 기술의 발전을 도모해야 마땅하다. 경제활동은 인간의 물질적 필요와 지성적, 도덕적, 정신적, 종교적 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전인적인 봉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경제활동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 될 수 있도록 도덕질서의 울타리 안에서 경제 고유의 방법과 법칙에 따라서 운용되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존재의지’와 ‘소유의지’를 지니고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특별히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은 ‘존재의지’를 가지고 있다. ‘존재의지’는 ‘소유의지’를 통해서 뒷받침 되는데, 인간은 경제활동을 통해서 ‘소유의지’를 관철시킨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빈곤, 기아, 질병, 고통에 시달리면서 존엄한 인간으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경제활동을 통해서 물질적 금전적 여유를 가지게 되면 빈곤, 기아, 질병, 고통에서 해방되어서 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곧 소유가 존재를 뒷받침하는 측면이 있다.

한편, 인간의 과도한 욕망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더욱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소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분별한 이익 추구의 경제활동을 하게 되면 인간은 자유와 존엄을 함께 상실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곧 소유의지가 존재의지를 압도하여 인간은 돈과 재물,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익 중심의 경제활동은 노동력 착취와 인간성의 파괴, 자연 질서의 파괴와 환경 착취 현상을 초래하게 되고, 인류와 자연은 비참과 재앙에 직면하게 된다. 공의회가 도덕질서의 울타리 안에서 경제 고유의 방법과 법칙을 주장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의회가 염려하는 것은 경제활동이 생산의 증가 또는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면서 인간을 외면하는 것이다. 나아가 인간이 경제에 예속되는 불행한 사태를 염려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존엄성의 증진과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경제활동은 어떻게 운용되어야 하는가. 경제활동은 인간의 통제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 다수 인간의 통제 아래 이루어져야 마땅한 경제활동이 소수의 재벌財閥이나 정치권력에 좌지우지되면 안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통제(consilium hominis)란 참여(參與)를 말한다. 경제활동이 개인, 단체, 민족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지면, 경제적 민주주의가 성취될 수 있다. 경제적 민주주의가 실현되면 경제가 인간을 지배하는 불합리를 해소할 수 있다. 반면에 소수의 재벌(財閥)이나 정치 단체 또는 몇몇 강대국들이 경제활동을 독점하거나 전제(專制)하게 되면 다수의 예속화와 더불어 경제가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이성과 사랑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경제활동을 통해서 자신과 인류 공동체 그리고 세계와 자연환경의 조화와 일치를 이루고자 한다. 경제활동의 목표는 인류 형제애의 실천과 자연 질서의 보존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재벌이나 정치집단이 경제를 독점하게 되면, 경제활동은 소수의 소유의지와 권력의지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고, 인간의 예속화와 노예화의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도덕질서의 울타리는 경제활동에 있어서도 정의와 평등을 요구한다.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나라와 나라, 북반부와 남반부 사이의 경제적인 불균형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이다. 동시에 산업과 산업의 불균형과 불평등도 해소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사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존엄을 지키면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오히려 재력을 지닌 사람에게 예속되어서 그의 욕망 충족과 안락을 위한 도구가 되기 십상이다. [2013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평신도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제2절은 67. 노동, 노동 조건, 여가, 68. 기업 참여, 세계 경제 구조 참여, 노동쟁의, 69. 모든 사람을 위한 지상 재화, 70. 투자와 통화, 71. 재산취득, 재화의 사적지배, 대토지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곧 경제 전반에 대하여 인간 존엄성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72. 경제사회활동과 그리스도 왕국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공의회는 경제사회생활을 지배하는 첫 번째 원칙으로 인간 노동을 꼽는다. 경제활동 곧 생산활동은 노동, 자본과 금융, 토지, 기계, 조직, 제도 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노동은 경제활동의 다른 요소들보다 훨씬 고귀하다. 다른 요소들은 생산 활동을 위한 도구(道具)나 수단(手段)이지만, 노동은 인간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인간 존엄성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동행위로 자연과 사물에 자신의 모습을 새기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창조 소명을 성취시킨다. 인간은 노동활동으로 자연과 사물을 다스릴 뿐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이웃과 형제들에게 봉사하면서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단순한 생산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목수 생활을 하심으로서 인간노동의 품위를 더 높이셨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 노동자 예수님의 구원활동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 존엄성에 바탕을 둔 노동활동은 창조활동을 뛰어넘어서 구원활동에 참여하는 행위이다.

‘존재의 질서’에 바탕을 둔 노동은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드러내는 활동이기 때문에, 노동을 통해서 노동자는 자신의 능력과 인격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노동은 단순한 생산활동을 뛰어넘어서 인간 계발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

인간 노동이 생산성이나 제품의 질 또는 상품의 양으로만 그 가치가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인간 노동은 단순한 생산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인격에 바탕을 둔 노동활동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인간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노동자는 기본적인 인권으로서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가진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노동자는 경제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서 공동선의 실현에 이바지할 수 있다.

공의회는 재화(財貨)의 공정한 분배에 관심을 기울인다. 분배의 원칙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정의롭고 공정한 분배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든 사람과 민족들이 이용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재화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선물인 재화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간다.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과 궁핍에 시달리는 이웃과 형제들에게 재화를 나누어서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을 함께 나누어 누리는 것이다.

나눔은 물질적인 재화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무형의 재화도 나누어야 한다. 교육과 교육기회, 기술, 문화, 서비스, 물류 등을 나눔으로써 함께 풍요를 누리고 성장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다.

투자와 금융(金融)은 현대경제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살아있는 생명체에 혈액이 흘러야 하듯이, 경제생활에 돈의 흐름은 혈액의 흐름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맑고 건강한 돈의 흐름은 경제 체질을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기업과 노동자 그리고 소비자 모두를 풍요롭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공의회는 부의 분배와 소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경제활동을 통해서 생산된 재화와 부는 하느님의 선물이며 모든 사람이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지키면서 창조활동에 참여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부의 분배와 소유도 이 원칙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

※ 11월 24일 신앙의 해 폐막으로 거룩한 공의회도 마칩니다. 거룩한 공의회를 집필해주신 신부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 왕 대축일(성서주간)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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