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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11: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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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9-17 ㅣ No.517

[신앙의 해 특집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 (11)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교회를 본연에서 바라보면서 그 위치와 역할을 세상 안에서 재고(再考)하고자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또다른 두드러진 특징으로 ‘교회일치운동(oecumenismus, 이하 ‘일치운동’)’에 대한 우호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작용으로 소집된 16세기 트렌토 공의회를 거치면서 ‘열교(裂敎)’내지 ‘이단(異端)’으로만 배척되던 개신교회와 동방교회를 비롯한 ‘갈라진 교회들’과의 관계를 ‘근원으로부터’ 재고하고자 한 공의회의 노력에서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는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던 ‘그리스도’ 앞에서 교회의 과오와 부족함에 대한 교회 스스로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으로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보인 변화는 교회 자신의 쇄신과 함께 ‘갈라진 교회들’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끄시는 ‘성령’의 선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공의회 역사를 살펴보면, 요한 23세 교황이 로마의 성 바오로 성당에서 공의회의 ‘전격적’ 소집을 발표한 날(1959년 1월 25일)과 장소가 다름 아닌 ‘바오로 개종축일’이자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8일 기도)’ 마무리를 위해 모인 ‘기도의 시간과 장소’와 일치합니다. 이런 ‘교회일치’에 대한 열망과 함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1)
 

1.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 일치운동에 대한 교령

가톨릭교회 안에서 ‘교회일치’ 문제에 대한 관심은 19세기부터 태동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레오 13세 교황(1878~1903) 이전까지 ‘(가톨릭)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들’은 ‘열교자’ 내지 ‘이단자’로 내몰리는 경우가 빈번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레오 13세 교황은 역사 안에서 이들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처음으로 이들을 ‘갈라진 이(형제들)’로 부르면서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한 기도 주간’을 출범시켰습니다. 이런 점으로 인해 그는 현대 가톨릭교회 일치운동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받습니다. 레오 13세 교황을 이은 후임 교황들은 그가 다져놓은 토대 위에서 일치운동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발전은 결정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한 요한 23세 교황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 때 ‘교회 일치’ 문제는 ‘교회 당국자’ 에 국한되지 않고 ‘교회 전체’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로 공식화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주요과제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23세 교황의 이런 관심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사를 보면 공의회 안에서 이 주제가 초안으로 작성되는 시작부터 열렬한 찬반토론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대체로 세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일치운동이 자칫 ‘종교 무차별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우려한 가톨릭 교리에 대한 한치의 양보도 불가하다는 ‘절대주의적 입장’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좀 더 개방적이고 대담해야 한다는 ‘상대적이고 포괄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입장은 교회분열에서 가톨릭교회의 책임 또한 인정하고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에게만 분열의 역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음을 인정할 것을 표명한, 즉 ‘일치 문제’를 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공의회의 회기를 거치면서 토론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있었지만 이 주제는 1964년 11월 19일에 이르러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19개 부분이 수정되어, 몇몇 교부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20일, 21일 이틀에 걸친 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토론이 마무리되면서 ‘일치의 재건(Unitatis redintegratio, UR)’ - 일치운동에 대한 교령(이하 일치교령)이 최종 선포되기에 이릅니다.

이 교령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치교령이 일치운동에서 갖는 ‘의의(意義)’는 우선 ‘탕자의 귀향’과 같이 가톨릭교회로 돌아오는 것으로써 일치운동의 개념을 지양(止揚)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일치’를 회복하는 것으로 새롭게 교회 일치운동을 ‘쇄신된 교회론과 함께’ 정의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2. 일치교령 2항에서 말하는 교회일치 - 교회일치에 대한 가톨릭 원칙

이런 맥락에서 일치교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언급한 교회론’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이에 대해서는 앞서 보았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해하기」 (2)-(3)과 (8)-(9)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일치교령은 교회헌장의 흐름과 같이 ‘교회’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하느님’의 계획에서 출발하면서 이것을 원형으로 여긴 교회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교령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의 교회를 세우셨음을 지적하고 ‘교회 일치의 최고 표본이자 최고 원리’ 역시 친교의 원형이신 ‘삼위의 일치, 곧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일치’(UR 2)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이 부분은 (다른 문헌에서 그러하듯이) 간과되기 쉬운 것으로 교회의 일치는 인간의 힘만으로 추구되어서 이뤄질 ‘법적이고 가시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회 본연의 모습처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안에서 그분의 ‘주도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임을, 바로 ‘하느님 중심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원리’로 이해해야 함을 밝히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일치교령 1항에서는 “세기(시간)의 주님”이라고 우리의 시간 안에 교회를 이끄시는 주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원칙에 따라 일치교령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함께 작용하시는 단일하고 유일한 하느님의 구원섭리를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면서 교회 안의 분열현상들을 직시합니다. “이 단일 유일한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초기부터 분열이 생겼던 것이며 … 후세기에 와서는 더 많은 불화가 생겨, 적지 않은 단체들이 ‘가톨릭교회’와의 완전한 일치에서 갈라지게 되었으며 때로는 양쪽 사람들에게 탓이 있었다.”(UR 3) 이 부분을 단편적으로 이해할 경우 어느 쪽에나 분열의 책임이 있기에 양측 모두 변해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쇄신되어 이해한 ‘교회의 자기 이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가톨릭)교회도 그 구성원의 부족함으로 인해 ‘구원 받고 있는 대상’으로 드러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히려 ‘이런 교회’ 안에서부터 세상에 ‘하느님의 구원섭리’를 드러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의 근원에는 부족한 인간모습 안에서 그것을 감수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교회의 믿음이 놓여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여지고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한 하느님의 구원섭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능가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우리 믿음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충만한 구원의 수단인 유일한 당신의 교회를 통해서, 바로 그 안에서 지켜지고 전해진 유일한 ‘성경’과 그것을 살아가고 드러내주는 ‘구체적인 성사들’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세상에 전해주기를 ‘그치지 않고’ 계시기에, 모든 인간은 그 충만함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일치교령’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공의회가 ‘성사들’을 지닌 가톨릭교회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언급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 우리의 구원이 있음을, 그 안에서 교회의 일치는 시작될 수 있음을 밝힌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갈라져 나간 이들이 가톨릭교회와 교리나 규율 또는 교회 조직과 관련해 여러 차이를 보여 일치를 이루는데 장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 장애를 넘어 동일한 세례의 은총을 통해서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구원섭리’를 바라보도록 모두가 쇄신하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일치운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령은 가톨릭교회의 법적인 울타리 밖에도 교회에 생명을 주고 ‘교회’를 더 풍성하게 해주는 탁월한 것들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UR 3)
 

3. 일치운동의 실천 방향과 그 구체적인 모습

일치교령은 위와 같은 일치에 관한 기본 입장표명에 이어 일치운동의 몇 가지 실천 방향(UR 5-12)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갈라진 형제들의 상황을 공정하고 진실하게 반영하지 못하여 그들과 상호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말과 판단과 행동을 삼가는 모든 노력”과 함께, 다음으로 여러 교회나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인들이 각각 자기 교파의 교리를 깊이 설명하고 그 특성을 제시하는 ‘대화’를 언급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실천방향으로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요구하는 대로 공동선을 위해 교파들이 더욱 폭넓은 협력을 추구하고 가능한 곳에서는 함께 모여 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고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교회에 관한 그리스도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지 스스로 성찰하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마땅히 요청되는 쇄신과 개혁 활동을 줄기차게 추진할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일치교령은 가톨릭 원칙과 실천 방향에 이어서 동방교회와 서구의 갈라진 교회와 교단과의 관계에 대해서 13항에서 24항에 걸쳐 밝히고 있습니다.(이 부분은 지면상 다루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19항에서 24항 부분은 읽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월간빛, 2013년 9월호, 최석환 요셉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대신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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