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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토착화와 세속화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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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8-16 ㅣ No.502

[세상 속 신앙 읽기] 토착화와 세속화의 차이


천주교는 세속화된 이단?

대부분의 개신교가 가톨릭교회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부 개신교 학자들은 가톨릭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예수님께서 세우신 초대교회의 모습을 왜곡하고 변질시킨 교회라는 비난을 하곤 한다.

개신교 역사 이해에서 보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의 역사가 초대교회 정신을 잃고 세속적 질서를 탐닉하여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잘못된 교리들을 만들어낸 이단적 교회라는 비난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사실 이런 비난에 대해 보통의 가톨릭 신자들은 ‘장자의식’을 갖고 있어서 개신교의 비판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가톨릭의 전통을 옹호하려는 입장에 선다.

하지만 가톨릭교회가 중세 역사 안에서 걸어온 오욕의 역사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태도는 아니다. 당시 가톨릭교회가 초대교회 정신을 잃고 세속의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종교적 가치를 세속적 가치로 둔갑시켰던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만, 제도교회의 타락 이면에 순수한 신앙 전통을 지켜온 수많은 성인성녀들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믿음의 순수성을 지켜온 신앙인들, 그리고 침묵 가운데에서 영성의 깊이를 간직해 온 수도회 전통과 영성들이 있었기에 가톨릭의 정신이 교도권의 타락 이면에서도 굳건하게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가톨릭 비판은 종교 개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반석 위에 세우시고(마태 16,18) 사도단에게 위임한 교회의 권위와 질서가 로마제국 안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은 밀라노 칙령(313년) 이후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가 로마제국의 박해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국가의 지원을 받아 포교에 힘을 얻게 된 사건이 과연 교회가 초대교회 정신을 잃고 세속적 질서와 결탁한 세속화의 과정이냐, 아니면 교회가 역사 속에서 로마라는 이교도 문명과 문화의 옷을 입고 토착화된 것이냐는 질문이다.


세속화에 대한 오해와 본질

중요한 점은 우리가 ‘세속화’와 ‘토착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개신교가 비판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속화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위임하고 선포한 교회의 모습은 결코 로마제국이라는 이교도 문명과 결탁할 수 없는 순수한 복음적 실천을 따르지 않은 결과라는 비판이다.

흔히 말하듯 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제국교회 이후 로마의 이교도적 종교문화와 결탁하여 교회의 외적인 형태는 물론이고, 성직자들의 권위와 사제직, 전례와 축제의 풍습들을 로마의 이교도 전통으로부터 습합(習合)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했고, 초대 유다-그리스도교 전통과는 괴리된 우상숭배와 이교도 문화의 수용을 통한 세속화의 결과였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교회가 선포해 온 복음이 특정한 역사적 삶의 자리와 문화의 형태 없이 순수한 복음으로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계시가 유다 문명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적 맥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생하였듯이,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복음을 선포할 때 그 복음이 전해지고 수용되는 특정한 문화적 맥락과 무관하게 선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세속화(secularization)’란 거룩함의 종교적 영역이 세속적 질서나 가치 기준으로 둔갑하여 본래의 종교적 의미를 상실하는 것을 지칭한다. 무릇 모든 종교는 ‘거룩함’ 또는 ‘성스러움’의 체험을 통하여 세상의 속됨 속에서 거룩함에로 부름 받은 인간의 영적 충만을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인간이 갈망하는 ‘신적 거룩함’ 또는 ‘성스러움’에로의 부르심이 세속적인 욕망과 가치들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는 시대임을 누구나 공감한다.

인간이 희망하는 종교적 가치들, 사랑,기쁨, 평화, 인내, 온유, 신의, 기쁨, 정의 등의 가치들이 신적인 거룩함에서 나오지 않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왜곡될 때 세속화는 종교적 삶을 방해하는 큰 위기가 된다.


가톨릭교회가 말하는 토착화의 길

가톨릭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화 이후 이러한 세속화의 길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가 저지른 일부의 죄과가 보편적인 교회의 완전한 세속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세속의 질서 속에서 자신의 복음 선포의 소명을 실현해 나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를 지키고자 시대와 문화의 형태나 문명의 이기들을 회피하거나 배타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화가 인간에게 끼치는 지대한 영향력을 인정하면서 그 문화를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로 변용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온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교회는 ‘토착화(inculturation)’라고 부른다. 토착화는 복음이 선포되는 맥락(context)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구원의 섭리를 유다 사회의 종교적 문명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삶의 자리에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의 ‘육화(incarnation)’로 나자렛 예수님을 통한 그리스도 신앙을 일으키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이 온전한 인간 완성에로 나아가는 궁극적 관심을 일으키는 문화의 형태 안에서 선포된다. 복음의 순수성과 절대적 가치는 손상되지 않으면서도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문화적 구조와 형태들을 복음 이해와 선포의 중요한 맥락으로 이해한다는 말이다.

그 결과 2천 년의 가톨릭교회 역사는 세속화의 위협 속에서도 복음적 진리와 가치의 순수함을 지키고 보존하며 증언해 온 복음의 ‘토착화’ 과정을 거쳤다.

로마 문명의 종교적 신심과 예배 행위들을 교회적 형태로 수용하여 복음적 형태로 변용했고, 그리스 문명과의 만남 속에서는 그리스 철학의 언어와 사상들을 통하여 그리스도 사건과 복음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해명하였으며, 중세에는 세속적 권력과 가치들을 그리스도교의 신적 질서에 종속시키면서 이성에 대한 신앙의 우위를 강조하거나, 세속적 권력이 신적 권위에 봉사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켜왔다.


공의회 정신과 토착화의 과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는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문명의 충돌과 세속화의 도전에 맞서서 그리스도의 복음적 진리를 지켜온 토착화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그래서 교회가 시대의 문화와 맞서 배타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자세를 버리고 현대 문화와 대화하면서 이에 적응(aggiornamento)하려는 포용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다. 문화는 복음이 펼쳐지는 인간의 장이자 종교적 삶이 그 안에 녹아들어 가야 하는 토착화의 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오늘날 다양한 문화들이 복음을 전달하는 미디어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걸림돌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보시니 좋았다.”(창세 1,10) 하신 하느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죽음의 문화를 식별하고 복음의 기쁜 소식과 생명을 전하는 복음적 문화의 고양을 위해 파견되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현대사회와 호흡을 함께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한국적 토양에 맞게 계승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교리와 사목, 전례, 신심 행위들 안에서 꾸준히 찾아오고 있지만, 최근 냉담교우의 증가와 교회에 대한 매력을 상실하는 현실 속에서, 문화의 복음화와 토착화를 위한 교회의 노력을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찾아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송용민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강화본당 주임으로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이다. 1997년 사제품을 받고, 2003년 독일 본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상 속 신앙 읽기」, 「신학, 이해를 찾는 신앙」 등을 썼고, 다음카페 ‘신학하는 즐거움’을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8월호, 글 송용민 · 그림 최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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