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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하느님 이야기6: 모세의 하느님, 야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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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7-09 ㅣ No.446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 (6) 모세의 하느님, 야훼


우리는 모세다, 하느님 자녀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모세라는 위대한 인물을 만난다. 신명기 마지막 장은 모세의 죽음을 전하면서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주님께서 얼굴을 마주 보고 사귀시던 사람이다"(신명 34,10).

 

 

광야, 거룩한 땅

 

모세는 신약성경에도 자주 소개될 만큼 위대한 인물이다. 위대한 모세를 키워낸 것은 8할이 광야였다. 그만큼 모세에게 광야는 거룩한 곳이다. 불타는 가시덤불을 발견한 모세가 호기심에 다가갔을 때,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광야는 모세가 하느님을 만난 곳이다.

 

그는 탄생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모세의 탄생은 천둥 치고 비바람 부는 날 태어난 하루살이 인생과 다르지 않다. 탈출기 2장에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고 돼 있다.

 

아기를 숨겨 기른 것은 파라오가 노예 민족의 성장이 두려워 사내아이를 모두 죽였기 때문이다. 모세는 파라오가 인구조절 정책으로 남아를 제한한 시점에 태어났다. 그의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죽을 뻔했던 모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모세가 살아나는 데 하느님께서 도구로 쓴 사람들은 이상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이 여성들이다. 모세의 어머니, 누나 미리암, 파라오의 딸, 이집트 공주와 산파들이 불운한 어린 생명을 지켜낸다. 탈출기 작가는 한결같이 연약한 여성들을 등장시킨다. 그 상대는 인간 생명을 좌지우지했던 파라오였다.

 

성경은 연약한 여인들을 등장시키고 그 뒤에서 암암리에 작용하시는 하느님이 막강한 파라오의 능력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모세는 '아들'이란 뜻이다. 모세의 출생 이야기에서 특이한 것은 모세가 구약 최대의 인물임에도 그의 이름이 태어난 한참 뒤 이집트 공주에 의해 붙여진다는 점이다. 다른 위대한 인물이 출생 전에 이름이 붙여진 것과 다르다. 왜 그럴까? 여기에 탈출기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이끌어낸 역사적 인물 모세를 설명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글을 읽는 독자를 암시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모세라는 것이다. 모세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기적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가끔 할머니나 어머니가 "얘는 죽다 살았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대 의학은 인간이 수억 대 일의 경쟁을 뚫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줬다. 모든 여성은 사춘기에서 폐경기까지 400번 정도 생명을 잉태할 준비를 한다. 남성의 수억 정자 중 단 하나만이 난자와 만나 생명이 된다. 요즘은 또 다른 파라오들이 명령을 내린다. 남아선호 사상과 산아제한 정책이라는 파라오들이다.

 

인간 몸은 신비 그 자체다. 세포는 60조 개에 이른다. 1초에 숫자 하나씩 100년을 세도 32억 개밖에 못 셀 정도로 60조는 어마어마한 수다. 우리 심장은 450g밖에 안되지만 1초도 쉬지 않고 70~100년을 뛴다. 이에 비해 좋은 자동차 엔진도 출퇴근 때만 사용해도 70~80년을 버티지 못한다.

 

 

인간 존엄의 이유

 

인간은 존엄하다. 인체가 신비해서인가? 유엔 인권헌장이 존엄하다고 해서인가? 프랑스 인권 선언문도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하지만 그 이유는 말하지 못한다. 오직 성경만이 그 이유를 말해준다. 인간은 하느님 모상이고, 하느님을 닮았기 때문에 존엄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기적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모세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 자녀다. "너희는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그를 보호하는 천사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 즉, 인간이면 누구나 하느님 자녀라고 말할 수 있다.

 

모세는 광야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장소에 관계없이 인간이 울부짖는 곳이면 어디서나 만나주시는 하느님이심을 알게 된다. 모세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그가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이 '야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위하신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히브리어 네 글자(YHWH)로 전해지는 이 이름이 정확히 야훼로 발음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나는 있는 나다'는 것이 첫째 해석이다. 둘째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자', 곧 창조자요 만물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나야 나'라는 해석이다.

 

 

파스카의 의미

 

친교에서는 이름이 중요하다. 죄수, 군인은 번호(군번)로 불린다. 그만큼 인격적 관계가 무시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다.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와 같이 자신을 자주 '나는 ~이다'고 표현하셨는데, 이는 하느님의 이름 '나는 있는 나다'와 맥을 같이 한다. 모세의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임마누엘이시다.

 

모세에 의해 파스카의 의미가 업그레이드됐다. "집집이 양을 한 마리씩 끌어다가 파스카 제물로 잡으시오.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 피를 문 상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르시오. … 파괴자가 당신들의 집에 들어가 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실 것이오. … 당신들은 이것을 당신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 가게 되거든 이 예식을 지키시오…"(탈출 12,21-27).

 

파스카는 '페샤흐'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도약하다', '건너뛰다'는 뜻이다. 요즘 사건으로 비유하자면 구제역이 우리 목장을 건너뛰는 것처럼, 무사안일을 기원하는 잔치였다. 모세는 이 축제를 업그레이드시켰다. 이스라엘 백성을 노예의 삶에서 자유인의 삶, 영원한 삶으로 도약케 하는 신앙의 파스카로 업그레이드했다.

 

[평화신문, 2011년 7월 10일, 정리=이힘 기자]

 

※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는 평화방송 라디오(FM 105.3㎒)에서 매 주일 오후 6시 5분에 방송되며, 평화방송TV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전 8시(본방송), 수요일 새벽 4시와 저녁 9시, 금요일 오후 4시, 주일 오후 6시에 재방송된다. 인터넷 다시 보기 www.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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