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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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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11: 애국회, 불가피한 역사적 산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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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02 ㅣ No.105

[니~하오! 중국교회] (11) 애국회, 불가피한 역사적 산물인가?


중국교회에 분열의 칼바람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중국 공산당 입장은 단호했다.

 

종교의 자유는 허용하되 종교에 대한 외세 간섭은 철저히 배격한다는 것이다. 외국 간섭이나 도움없이 스스로 교회를 관리하고[自治], 경제적 도움없이 자급자족하며[自養], 스스로 전교하는[自傳] 삼자운동(三自運動)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났다.

 

 

신권은 로마에, 속권은 중국 정부에

 

공산당의 종교자유정책은 종교 자체 발전이나 확장을 꾀하려는 게 아니다. 그 목적은 사회주의국가 발전에 인민의 역량을 총동원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당은 종교인들에게 애국을 강조하며 "교회행정은 반드시 정부 정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못박았다.

 

당의 압력이 가중되자 1954년 개신교를 선두로 불교ㆍ도교ㆍ이슬람교가 애국회를 속속 설립했다. 그러나 천주교로서는 애국회 설립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교황청은 중국 신자들의 고통과 시련을 위로하면서 공산 정부에 굴복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왔다. 교황 비오 12세는 1954년 '중국 민족에게'라는 서신을 통해 삼자운동을 질책하고 "누구도 교회가 강권(强勸)에 복종할 것이라고 믿지 않으며, 누구도 교회에 복종을 강요할 수 없다"고 말했다. 로마와 결별하려는 시도에 깊은 우려도 표시했다.

 

이로 인해 천주교 내에서는 순교를 각오하고 교황 지시를 따르자는 파와 정부 정책에 따르자는 파가 갈라져 충돌했다. 이 무렵 정부는 교회를 위협하기 위해 상해 지역에서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을 체포, 구금하고 성직자와 신자 17명을 총살형에 처했다.

 

결국 1957년 7월, 정부 주도로 26개성 교구 대표 241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전국대표회의에서 '중국천주교애국회'가 설립됐다. 다음은 이때 발표된 선언문 일부다.

 

"바티칸은 미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세계를 위하여 일하며 사회주의 제도를 원수로 여긴다. 따라서 바티칸에서 오는 명령은 그것이 정치적인 것인지 종교적인 것인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하며, 종교 형식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를 반대하는 그런 명령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애국은 천직이므로 (바티칸을 포함해) 어떤 사람이라도 우리나라를 반대하면 우리도 그를 반대할 것이다…"

 

애국회는 "교황청과 순수한 종교 관계는 유지하되 정치적ㆍ경제적 관계는 철저히 단절한다"고 천명했다. '신권은 로마에, 속권은 중국 정부에'라는 입장을 택한 것이다.

 

당시 애국회 주석에는 수감 중이던 심양교구 피수석(皮漱石) 주교가 선출됐다. 바티칸에 대표단을 파견해 중국 사정을 알리고 최소한의 양해라도 구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정부 편에 선 신부들이 이를 묵살해 버렸다.

 

 

애국회는 교회 내 한 조직

 

중국교회는 애국회 설립에 이어 이듬해 주교를 자체 선출하고 성성함으로써 교황청과 결별을 고했다. 중국교회는 애초 주교를 자선자성(自選自聖)하라는 정부측 요구에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정부는 "교황청과 제국주의는 서로 연결돼 있는데 어찌 정치적 간섭을 안 하겠느냐"며 교황청과 과감히 결별하라고 강요했다. 피선거인 주교는 반드시 사회주의를 열애하고, 사회주의에 유리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지침도 내렸다.

 

그동안 중국교회에서 전권을 행사하다시피한 애국회는 정부가 교회행정을 관장하는 방침에 따라 설립된 조직으로 이해해야 한다. 애국회는 공산정권하에서 교회 일을 도맡아 해왔지만 스스로 자신을 '교회'라고 밝힌 적은 없다. 정부가 내리는 지시를 교회에, 또 교회의 필요 사항을 정부에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교회 내 한 조직(association)으로 봐야 한다.

 

애국회를 보는 시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을 잃고 정권에 충성하는 조직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교회의 복잡한 상황을 이해한다면 문제 본질은 애국회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를 정치적 예속하에 두는 정부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정부와 애국회 방침을 거부하고 베드로 사도좌와 일치하려는 성직자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지하로 숨어든다.

 

[평화신문, 2008년 11월 30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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