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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소작인들은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수도 ㅣ 봉헌생활

사도 바오로 영성을 따라서2: 성 바오로 수도회 로마 총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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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1-13 ㅣ No.112

[바오로 해 특집 사도 바오로 영성을 따라서] (2) 성 바오로 수도회 로마 총본원


도심속에 우뚝 선 미디어복음화 심장

 

 

수도회 사료가 전시된 박물관 유리 진열장.


- 사도의 모후 성당. 둥근 기둥에 둘러싸인 제대가 인상적이다.


- 수도회원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 사도의 모후 성당 외부 전경.


- 사도의 모후 성당 1층 소토크립타에는 알베리오네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수도회 영성을 소개하는 책자들.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 각국 언어로 제작됐다.

 

 

보석 가게에 진열된 다이아몬드보다, 진흙 속에서 찾아낸 진주가 더 짜릿한 법이다. 성 바오로 수도회 로마 총본원에 첫 발을 내디딘 느낌은 그랬다. ‘여느 수도회들처럼 로마시 외곽 한적한 곳에 있으니 차비 깨나 들겠다’하는 기자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파트와 주택이 즐비한 도심 한복판에 수도원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도원 입구에는 김태훈(리푸죠) 수사와 황인수(이냐시오) 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 바오로 수도회 로마 총본원에서 유학중인 유일한 한국인 수사들이라는 인연으로 길 안내를 자청한 이들이다.

 

 

이탈리아 알바에서 로마로

 

성 바오로 수도회 로마 총본원의 역사는 8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4년 이탈리아 알바에서 창립된 후 전 세계적으로 방송, 신문, 잡지 등 매스컴 사도직을 펼쳤던 수도회는 1926년 1월 수도회를 로마로 옮겨왔고, 1928년부터 수도원 건립에 들어갔으며, 1936년 알베리오네 신부가 로마에 정착했다. 그때부터 로마는 수도회의 총본부가 됐다.

 

로마에 수도회 총본원을 둔 이유는 분명하다. 바오로 가족이 교황과 보편교회에 더욱 가까이서 봉사하기 위해, 즉 교서와 교회 정신과 교리서의 출판을 제일 첫 자리에 두는 사도직이 좀더 신속하기 위해서는 로마에 자리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세계의 관문인 로마는 모든 인류를 향해 가는 길목이다. 따라서 사도들은 로마에서 전 세계를 향해 떠난다’는 바오로 사도의 사상과도 연결된다.

 

 

화려한 성당 그리고 소박한 박물관

 

두 수사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서는 입구는 마치 대형 방송사나 신문사 건물의 안내 데스크를 방불케 한다. 옛 건물의 정취를 살리면서 세련되고 쾌적하게 꾸며놓았다. 입구를 지나면 환한 빛이 몰려들면서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수도원에 들어서며 처음 눈길이 머무는 곳은 대학교 캠퍼스를 연상시키는 넓은 부지와 시야를 가득 채우는 큰 규모의 건물이다.

 

수도원 중앙에 위치한 이 건물은 ‘사도의 모후 성당’으로, 1954년 11월 30일 ‘사도의 모후’께 봉헌됐다. 이 성당은 특별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바오로 가족 수도회 회원들이 한 사람도 희생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로 세워진 것이다. 성당은 수도회의 창립자 알베리오네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소토크립타’와 ‘상뚜아리오’ 등 세 개의 성당으로 이뤄져 있다. 사도의 모후 성당은 외관은 밋밋하나 성당 입구에 들어선 순간부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내부는 화려하다.

 

복자 알베리오네 신부는 일상생활에 쓰는 비용에는 매우 철저했지만 전례를 위한 경비에는 비용(?)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는 데에는 언제나 최고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사도의 모후 성당은 이점을 잘 증명해 준다.

 

현대식 기숙사를 연상시키는 총본원 건물도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다. 건물 모서리에 우뚝 서 있는 사도 바오로의 동상이 눈길을 끈다. 1층에 들어서 왼편 복도를 따라 가다보면 수도원 박물관과 만난다. ‘박물관’이라기에 내심 큰 기대를 했으나 달랑 두 개의 방안에 늘어선 유리 진열장이 전부다. 진열장 안에는 수도회 창립 및 알베리오네 신부에 대한 사진 자료와 수도회가 펴낸 서적, 잡지, 영상물 등이 가지런히 보관돼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당과 총본원을 짓고도 소박한 박물관이라니. 창립 100년을 앞두고 있는 수도회의 박물관 치고는 좀 실망스럽다. 그러나 안내를 맡은 황인수 수사의 설명을 들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너무 소박하고 단순해서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꼭 오래된 건물, 유품, 문서고의 서류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수도회의 가장 자랑스러운 박물관은 총본원에서 함께 살면서 매일 마주치는 선배회원들입니다.”

 

김태훈 수사가 거들었다. “칠순을 넘어 팔순, 구순이 다되신 선배 수사님들이 정원을 거닐면서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보면 왠지 제 자신이 작아지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선배 수사님들이 걸어오신 영성의 길을 이젠 저희들이 이어 나가야죠.”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의 제목은 지금 이 순간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알베리오네 신부 소박한 삶 그대로

 

박물관 건너편은 ‘알베리오네 신부 방’이다. 온통 옥빛 회벽으로 처리된 이곳에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살아생전 사용하던 공간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마치 동화 속 장소로 이동한 느낌을 안겨주는 이곳에는 알베리오네 신부가 사용하던 침대나 책상 외에도 성경책, 전화기, 십자고상, 제의 등 그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집무실과 연결되는 그의 숙소에는 작은 책상과 침대 하나가 놓여 있다. 알베리오네 신부는 1971년 11월 26일 교황 바오로 6세의 방문을 받은 후 이 방에서 숨을 거뒀다. 무엇하나 값나 보이는 물건은 없거니와 소박함이 묻어나오는 소품들은 생전 그의 삶이 얼마나 검소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박물관을 나와 수도원 식당으로 향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수도자, 형제들과 함께 나누는 빵과 포도주의 만찬은 돈 주고도 못할 경험이다.

 

김태훈 수사와 황인수 수사의 배웅을 받으며 수도원을 나섰다. 속세의 땅을 되밟는다. 잔뜩 흐렸던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내비친다. 그 햇살,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복음전파’를 위해 세상 속으로 뛰어든 성 바오로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닮았다.

 

[가톨릭신문, 2008년 1월 13일, 곽승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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