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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40-41: 춘천교구의 교육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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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103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40) 춘천교구의 교육선교* I

 

 

척박한 강원도에서 천주교회의 교육활동은 어떠했을까? 교구가 설립되기전 횡성에 교우촌 아이들을 위한 작은 규모의 학교가 운영되었는데, 바로 광동학교(光東學校)이다.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을 보면 북강원도의 이천에서도 루케트 신부가 부임한 1904년부터 선종한 1914년까지 학교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교구장에게 계속 주장하였는데, 안타깝게도 자세한 설립과 운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들은 대부분 교우촌의 아이들이 우선 대상이었기 때문에 도시보다는 지방에 분산되어 있었다. 교우촌 교우들의 자녀들이 다닌 이 학교들은 사제뿐만 아니라 수도자 성소의 밑거름이 되었고, 실제로 춘천과 원주교구 사제들 여러 명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교우촌의 아이들은 신앙이 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분위기인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그렇게 교육하는 사제 수도자의 영향하에 성장하였으므로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신학교와 수도회에 갔다. 광동학교 등, 이들 학교의 초등 교육 과정이 어떠했는지 상세하게 알 수는 없으나 기본적인 지식 외에 신앙인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를 가르쳤을 것이다.

 

1920년대에 강원도 춘천, 양양, 주문진, 강릉, 홍천 등 몇 곳에 성당이 설립되어 한국인 사제들이 더 많이 사목을 하게 되었다. 이때도 사제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우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시설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교육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교구의 진광중학교와 진광고등학교는 오늘날에도 지역사회에서 천주교 계통의 학교로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묵호에서 운영되었던 남호고등공민학교는 가정 형편상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남호고등공민학교는 춘천교구의 구인란 토마스 주교 때 운영되었다. 교구의 사제들이 재단의 이사를 맡아서 운영하였으나, 교육제도가 급격하게 변화되는 와중에 선택을 강요받았다. 박 토마 주교 당시 정식 중학교로 인가를 받아 춘천교구에서 운영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게 되었는데, 재정상 어려움 때문에 운영권을 포기하여 공립중학교로 전환되었다. 결국 춘천교구에서 운영하는 중학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한국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던 시기였다. 산업화에 따라 사회제도 역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제도의 변화로 종교계통의 학교들은 정체성 상실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입시제도의 변화에 따른 교육제도의 변화로 교회나 학교 모두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 춘천교구의 교육선교에 대해서는 본 연구소 연구위원인 금경숙 선생이 발표한 ‘강원도 천주교회의 교육활동’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2019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41) 춘천교구의 교육선교 II

 

 

작은 교구에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구인란 주교는 학교 운영에 계속 관심을 기울였다. 1962년경 성심수녀회가 한국에 대학을 설립하려고 하자 구인란 주교는 춘천에 성심여대를 초청하였다. 교구에서 대학 설립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며 교구의 여학생들이 이 대학에 진학하여 천주교 문화 안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수도회에서 책임 운영을 하고 교구에서도 지원을 하였음에도 학비가 비싼 사립대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당시 성심여대는 학교에 대한 평도 좋고, 기존의 여자대학과 달리 천주교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 멀리 제주를 비롯한 전국에서 많은 학생들이 진학하였다. 서울 출신의 학생들이 많았으며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그렇다 보니 교구에서 기대했던 만큼 지역 사회 안에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성심여대는 1980년도부터 캠퍼스를 경기도 역곡으로 이전하기 시작하여 3-4년 후에 완전히 춘천교구를 떠났다. 교육은 긴 안목을 갖고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뒷받침할 수 있는 재정도 갖추어야 했지만, 당시 춘천교구는 이를 감당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한 실정이었다.

 

교육적 환경이 좋지 않았던 강원도에서 교회는 초등, 중등, 대학 등의 정규학교 뿐 아니라 자기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도 하였다. 실업학교를 세워 청년들이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도운 것이다. 교구에서 정식으로 학교를 세워 운영할 수는 없었으나, 강원도 여러 곳에서 여성들에게 기술 교육을 하였다. 1970년대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화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회적인 갈등도 내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변화 속에서 교회는 나름대로의 대응 방안을 모색을 하였다.

 

강릉의 양재학원과 안토니오학원, 그리고 훗날 성심중학교로 개칭한 성심공민학교, 묵호의 남호고등공민학교, 풍수원의 광동초등학교, 성심여자대학교, 춘천과 강릉에서 명문 유치원으로 자리 잡은 성심유치원과 소화유치원, 폐원된 춘천의 대건유치원, 포천의 복자유치원 등을 통해 춘천교구 사제들은 교육 선교에 헌신하였다. 특히 양재학원은 편물학원이라고 불렸는데 배움의 길이 닫혀 있었던 여성들에게 매우 유익하였다. 실제로 그들은 그 배움을 바탕으로 삶의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물론 함께 한 신부들과 수녀들로부터 종교적인 영향도 받았을 것이고 나중에 신자가 된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 교구가 교육의 토대를 이루는 초등·중등학교를 육성하면서 현대 상황의 요구에 따라 직업학교, 기술학교, 성인교육과 사회사업 증진을 위한 교육기관, 특수학교, 교사양성학교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가톨릭 교육 시설의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지금부터 이에 대한 준비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별히 가난한 가정 자녀들이 교육 받을 수 있도록 장학금을 주거나 지원을 하는 본당이나 기관의 활동은 참으로 가난한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에 응답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후원자인 교우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2019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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