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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31: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 기억에 남는 선교사 조선희 필립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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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099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31)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V - 기억에 남는 선교사 1


조선희 필립보 신부(Fr. Philip J. Crosbie, S.S.C. 1915. 11. 10 - 2005. 3. 24)

- 순간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순교 여정을 살아간 사제 -

 

 

조선희 필립보 신부는 1915년 11월 10일 오스트레일리아 빅토리아주의 가난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조 신부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15세 어린 나이에 동생들을 책임진 소년 가장이 되어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성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성실히 노력하여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1939년 12월 21일 사제로 서품된 조 신부는, 1940년 한국으로 파견되어 이제 막 교구로 설정된 춘천교구의 홍천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면서 선교 사제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 신부를 비롯한 모든 서양 선교사를 연금하고 일체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약 5개월간의 연금과 투옥 생활 후 1942년 5월, 조 신부는 강제로 출국 당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 2월, 해방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조 신부는 홍천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더 큰 십자가와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 6일, 조 신부는 홍천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춘천에서 체포된 교구장 구인란 주교와 함께 서울을 거쳐 이북으로 끌려갔다. 조 신부는 압록강변까지 걸어서 끌려가는 이른바 ‘죽음의 행진’을 거쳐 만 3년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굶주림과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조 신부는 강인한 정신력과 투철한 신앙으로 살아남아 1953년 5월 25일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54년 8월, 선교지인 한국에 세 번째 입국하여 홍천 본당의 주임신부로 다시 부임하였다.

 

이후 포천과 간성, 원통, 신남 본당에서 사목하며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그리고 현역에서 은퇴한 1991년 3월, 인제군 남면 부평리, 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강가에 오랫동안 계획하고 준비했던 ‘평화와 보속을 위한 기도의 집’(겟세마니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면서 기도와 피정 지도를 통해 마지막까지 선교사제로서의 본분에 충실했다.

 

이후 더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하고 건강이 나빠지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폐는 끼치지 않겠다.’면서 1998년 11월 12일, 고향인 호주로 돌아갔다. 26세에 한국에 와서 온갖 고난과 어려움을 이겨내며 58년을 살고, 84세에 “내 영혼의 반을 한국에 두고 떠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본국으로 돌아간 조 신부는, 현지 요양원에서 지내다가 2005년 3월 24일, 부활을 앞둔 성 목요일 저녁에 선종했다.

 

[2019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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