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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교회사따라 성지따라: 예수의 제2 고향 카파르나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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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3 ㅣ No.1648

[교회사따라 성지따라] '예수의 제2 고향' 카파르나움


구원의 기쁜 소식 전한 '위로의 마을'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가르침과 무수한 기적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의 예언대로 7세기 무슬림의 침입으로 멸망한 이래 지금까지 페허로 남아있다. 

 

- 20세기에 발굴된 베드로 집터. 이 집터는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하신 후 묵었던 안식처로, 카파르나움이 예수뿐 아니라 사도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위로의 마을임을 느끼게 해 준다. 

 

-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하셨던 카파르나움 회당터. 오늘날 발굴된 이 터는 예수 시대 회당을 부수고 4세기 이후 개축한 것이다.

 

 

꽃이 너무 아름다워 시간을 잊고 마냥 그 자리에 서 있을 때가 있다.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 북서부 연안의 작은 어촌 카파르나움은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환경이 주는 평온한 분위기여서 마냥 머물며 살고 싶은 마을이다. 카파르나움은 히브리 말로 '위로의 마을''아름다운 마을'이란 뜻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제2 고향이다. 복음서에서 카파르나움은 '예수의 고을'(마태 9,1), '예수의 집이 있는 곳'(마르 2,1)이라고 불릴 만큼 예수의 활동 중심지였다. 예수시대 카파르나움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와 예루살렘을 잇는 교통 요충지로 로마 군대가 주둔해 있었고 세관도 있던 번화한 행정도시였다.

 

이 고을 이름이 '카파르나움'으로 불리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경제지역' '제한지역'이란 뜻의 히브리 말 '케파르 테구민'에서 나왔다는 설. 그 이유는 카파르나움이 갈릴래아와 골란 지방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설은 '나훔의 마을'이란 뜻의 히브리 말 '케파르 나훔'에서 나왔다는 주장이다. 예언자 나훔의 고향인 '엘코스'가 원래 이 마을 이름이었으나 마을 주민들이 그를 존경해 '케파르 나훔'으로 고을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성서학자들은 대체로 후자를 더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예수는 이 곳에서 이 지역 출신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제자로 삼았다. 또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비롯해 백인대장의 종, 중풍병자, 나병환자, 마귀들린 자들을 고쳐주었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는 기적을 행했다.

 

예수는 아울러 이곳에서 율법학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회개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을 설교했다. 하지만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의 설교와 놀라운 기적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는 너무나 실망해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루카 10,15)고 저주했다. 예수의 말 때문인지 영화롭던 카파르나움은 7세기 초 페르시아 군대의 침입으로 폐허가 됐다.

 

카파르나움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가장 잘 확인된 성지 가운데 하나로 인정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예수 시대 카파르나움은 그 길이가 1km에 달했다고 한다. 2세기 말 로마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이 대거 카파르나움으로 이주해 이 도시는 더욱 번창해졌다. 그래서 4세기 경에는 예수가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던 카파르나움 회당을 부수고 그 자리에 더 큰 회당을 세웠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교회 창설 초기부터 카파르나움에 살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의 집에 모여들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함께 기도했다고 한다. 5세기 경 갈릴래아 지역 신자들은 베드로의 집을 개축해 팔각형의 큰 성당으로 꾸몄다. 하지만 이 성당은 614년 무슬림 페르시아군의 침입으로 페허가 됐다. 그 후 1200여년 동안 베드로의 집은 카파르나움과 함께 인적이 끊긴 채 무성한 들풀만 자라는 성경 속의 안식처가 되고 말았다.

 

카파르나움에 대한 본격적 발굴작업은 1894년 작은형제회가 일대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됐다. 작은형제회는 1921~1926년, 1968~1984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발굴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회당과 베드로의 집터를 발굴했다.

 

베드로의 집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약 30m 떨어져 있다. 베드로의 집은 5세기 경에 지은 팔각형 성당 한 가운데에 보존돼 있다. 이 곳이 베드로의 집터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리스 말로 쓰여진 '베드로'라는 푯말과 어선의 그림을 이 집에서 발굴했기 때문이다. 현재 작은형제회는 베드로의 집터를 보존하려 그 위에 팔각형 성당을 지어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베드로의 집은 곧 예수의 집이다. 예수는 베드로의 집에 자주 묵었다(마르 1,29-30; 2,1; 3,20-21; 요한 1,38-39; 2,12). 예수의 숨결과 체취뿐 아니라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열정과 번뇌가 배어있는 집이다. 온 힘을 다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지친 몸을 뉘었던 예수의 안식처를 카파르나움은 품고 있다. 카파르나움 베드로의 집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기 전 사도들의 피난처였을 가능성이 크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발현해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준 타브가와 크게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체취를 느끼고 예수의 안식처에서 믿음의 삶을 되돌아 보고자 위로의 마을 카파르나움에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바람이 꽃의 눈물을 보고 꽃의 소리를 전해 주듯, 순례자들은 이 곳에서 인간 예수를 보고, 돌같이 굳은 영혼을 살같이 부드럽게 되돌리는 생명의 소리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평화신문, 2007년 3월 11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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