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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동맹과 악의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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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90

동맹과 악의 축

 

 

남북한과 미국, 그 지독한 역설

 

두 개의 코리아와 미국, 이들 관계만큼이나 지독한 역설이 있을까? 21세기 들어 우리는 이를 생생하게 목도하고 있다. '반미'를 국시(國是)로 삼았던 북한은 그 투철했던 정신만큼이나 오늘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너무나도 절실한 상황이다. '친미'가 아니면 살길이 없다고 믿었던 남한은 정반대로 미국과의 관계가 '비정상적'으로 긴밀해서 탈이다. '반미의 북한'이 미국과 가까워져야 하는 것도, '친미의 남한'이 미국과 좀 멀어져야 하는 것도 '탈냉전'이 남북한에게 각기 부여한 상반된 역사적 과제인지도 모른다. 냉전시대 북한의 반미도 남한의 친미도 모두 지나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냉전시대의 관성을 극복하지 못한 남북한 모두 미국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아오고 있다. 친해지고자 하는 북한의 노력도, 대등해지고자 하는 남한의 노력도 미국에게 거부당하면서 남북한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적 딜레마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미국에게 언제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불안감이, 남한에서는 2003년 3`-`4월 이라크전 파병 논란과 5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외교에서 확인된 것처럼 정상적인 주권 국가가 아니라는 자괴감이 어느 때보다 팽배해지고 있다. 어쩌면 군사주의와 일방주의로 무장한 부시 행정부의 출범은 남북한의 상반된 대미 딜레마를 잉태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따라 21세기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의 첫 대통령이 패권주의를 넘어 제국주의적 성향까지 보이면서,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은 저마다 기존의 대미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는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한반도와 미국의 관계가 이처럼 일방적이고 비정상적이지만은 않았다. 불과 3년 전 한반도와 미국의 관계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클린턴 행정부를 김대중 정부는 포용정책의 방향으로 견인해 냈다. 당초 강경한 내용이었던 페리 보고서를 부드럽게 했던 것도 김대중 정부의 대미 개입정책의 성과였다. 그리고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은 미국에게 한반도를 다시 보게 만든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동참해 새로운 동북아 시대에 참여할 것인지 배제될 것인지 미국에게 암묵적인, 그러나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참여를 선택했다.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내 강경파들의 강력한 견제를 뚫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동참하기로 했던 것이다.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남북한 정부로부터 확인받고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한 것이다. 북미 미사일 협상이 급물살을 타면서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담판을 짓는 것만 남아 보였다. 그러나 2000년 11월 플로리다 팜비치의 개표 혼란은 한반도의 운명마저도 뒤바꿔놓았다. 마치 '나비 효과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팜비치의 종이 몇 장이 한반도는 물론 세계의 운명을 뒤흔들어버린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남북한은 평화 지향적인 민족공조의 힘으로 미국을 견인해 냈지만,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남북한 모두 미국에 대한 무지(無知)의 결과로 너무나도 중요한 역사적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남한과 북한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잠시 중단하고 부시만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포용정책 이외에 대안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졌던 김대중 정부는 2001년 3월 워싱턴에서 너무나도 초라해진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시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지지한다."는 립 서비스 이외에 아무런 성과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방미 직전에 터진 탄도 미사일 방어(BMD) 조약 파동으로 심한 모멸감만 받았을 뿐이다. 이를 두고 미국의 저명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셀리그 해리슨은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뺨을 맞았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에 덩달아 기대를 했던 북한 역시 대혼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클린턴 행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부시 행정부를 견인할 것으로 기대했던 김대중 정부가 푸대접을 받는 모습을 보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부시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 자리에서 "나는 김정일에게 회의감을 갖고 있다." 하고 발언하는 모습을 보고 아연실색했던 것이다. 이러한 남북한 모두의 당혹감은, 미국, 미국 하면서 정작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 너무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부시의 미국이 클린턴의 미국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 특히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접근이 판이하게 다를 것이라는 점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부시의 미국을 제대로 알았다면, 남북한은 미국 정권 교체기라는 외교 공백기를 남북관계 진전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사실적 가정을 통해 김대중 정부가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1999년 3월 베를린 선언 때 약속한 전력 지원을 지렛대로 삼아 워싱턴에 가기 전에 2차 남북정상회담부터 가졌다면 어떠했을까? 말로만 민족공조를 얘기할 것이 아니라, 대미관계가 더디어져도 남북관계 개선에 북한이 충실하게 나섰다면 어떠했을까? 부시 행정부 출범 초기, 남북한 두 정상의 용기와 지혜의 부족이 낳고 있는 결과의 암담함에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탓한들 무엇하랴. 그렇다고 그 교훈마저도 깨닫지 못한다면, 역사는 더욱 악화된 형태로 되풀이되기 마련이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남북한이 또다시 미국에 대해 오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1년의 오판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중단이라는 결과를 낳았다면, 오늘날의 오판은 민족공동체의 생존권마저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북한은 '힘만이 살길'이라며 선군정치로 부시의 패권주의에 맞서고 있다. 남한은 한미동맹 강화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열쇠라며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라는 더러운 전쟁의 부역자로 나서고, 5월 방미 때 부시의 환심을 사고자 굴욕적인 발언들을 쏟아내는 등 대미 추종의 관성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남북한의 '상반된' 반미와 친미의 길은, 그러나 둘 모두 부시의 패권주의를 강화시켜 주는 결과를 낳고 있기도 하다. 

 

'벼랑 끝 전술'이 부시에게는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이를 고집하고 있는 북한이나, 한미동맹을 패권주의 강화의 도구로 삼으려 하는 부시 행정부의 전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남한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민족 모두에게 심각한 불안감을 주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핵 시위를 비롯한 군사주의를 강화할수록 한반도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남한의 입지는 좁아지기 마련이다. 반대로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이라크전에 파병하고 한미동맹을 강화한다."라는 식의 미국 편향적인 남한의 논리가 북한의 대남 불신을 더욱 키워주고 있기도 하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남북한 모두 미국 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분명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민족공조'를 통해 클린턴 행정부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로 견인해 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북한의 무모한, 그리고 위험하기까지 한 대미 도박도 큰 문제이지만, 대북포용정책을 계승·발전시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열고 동북아 중심 국가가 되겠다는 노무현 정부의 전략적 사고의 부재 역시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난 4월 이라크전 파병이나 5월 방미외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기실 국민들의 강력한 반전 여론이 있었는데도,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전 파병안 처리를 강행하면서 펼쳤던 논리, 곧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지렛대 확보는 이라크전 파병보다 대북 송금 특별검사제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국민 여론과 한나라당을 의식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특검제로 인해, 노무현 정부가 가질 수 있었던 지렛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와 정당이 2003년 상반기를 달구었던 특검제와 이라크전 파병안을 처리하는 과정을 비교해 보면, 국민 여론도 국익도 정치권의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춤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회와 정부가 특검제를 통과시킬 때는 '남북관계'라는 국익을 일부 조정하더라도 국민 여론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던 반면에, 파병안을 처리할 때는 반전 여론을 저버리고 '한미관계'라는 국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이중 잣대를 적용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남북관계가 중요하냐, 한미관계가 중요하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대북 송금 문제는 특검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풀었어야 했다. 정부와 정당 할 것 없이, 북핵문제 해결의 주도적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남한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지렛대를 스스로 차버린 것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이라는 양보할 수 없는 국익조차도 북한과 미국에게는 차별적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만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에 기대를 걸었던 북한은 특검제가 공포되는 것을 보고, 반쯤 등을 돌렸다. 그리고 과거 팀스피리트 훈련에 버금가는, 그리고 최근 유례가 없는 강화된 형태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노무현 정부가 한마디 말도 못하고 수용하는 것을 보고 조금 더 등을 돌렸다. 미국에서 북폭론이 심상치 않게 제기되는 상황에서, 10여 년 만에 스텔스 전폭기 6대가 한국에 배치되고, 걸프 지역으로 간 키티호크를 대체한다며 핵추진 항공모함 칼빈슨호가 부산으로 들어오고, 24대의 폭격기들이 북한을 견제한다며 괌에 배치되기도 했다. 이 정도의 군사력이라면, 영변 핵시설 폭격은 어렵지 않게 수행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에게 "2003년만큼은 합동군사훈련이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킬 수 있으니 연기하자."라는 제안을 왜 못했을까? 이것이 무리라면, "통상 수준의 군사력으로 훈련을 하자."라는 제안은 왜 못했을까? 이것마저도 무리라면, 훈련차 배치되었다는 스텔스 전폭기와 F-15E 전투기를 "이제 훈련이 끝났으니 미국으로 가져가라."라는 요구는 왜 못했을까? 

 

이러한 이유들 때문인지, 북한은 예정되었던 남북대화를 줄줄이 취소시킨 바 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북한을 비난하기에 앞서 남한의 행동 하나하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눈치나 보자는 말이냐?"는 속풀이식 핀잔보다는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북한을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남한은 할 것 다 하면서, 북한의 통 큰 정치를 기대하는 것 역시 '일방주의적 사고'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담(5월 하순)과 뒤이은 서울 남북장관급회담(7월 초) 등 남북대화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남북한 사이의 신뢰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실리를 고려한 북한의 선택이라는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기실 2003년 2월 25일 출범 후 불과 세 달 사이에 보여준 노무현 정부의 네 가지 중대한 전략적 실책, 곧 대북 송금 특검제 공포, 강화된 형태의 한미합동군사훈련 실시, 이라크전 파병안 조기 확약, '추가적 조치'에 대한 합의를 비롯한 한미공동성명의 채택 등은 노무현 정부의 국가전략이 김대중 정부 때의 균형을 잃고 미국 쪽으로 경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음모론'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특검제 역시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사건이 발단이 된 4억 달러 대북 지원설의 최초 출처는 미 의회조사국 전문위원인 래리 닉쉬가 미국 정보기관들이 흘린 정보를 바탕으로 2002년 2월에 작성한 '한미관계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를 뒤늦게 입수한 「월간 조선」은 같은 해 5월호에 대북 비밀 지원 의혹설을 보도했고, 그해 가을 정기국회에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공개적으로 이를 폭로하면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이 북한의 무장을 돕고 있다는 의혹을 이유로 이 사업에 대단히 부정적이었고, 이에 김대중 정부가 순순히 미국 말을 따르지 않자, 여러 경로를 통해 압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우방국인 한국 정부의 아킬레스건을 잡을 수 있는 대북 비밀 지원설을 공개함으로써 남북관계를 상당 부분 지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북한이 특검제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금강산 관광사업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는 '옥동자'와 같은 것이지만, 부시 행정부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것이다.

 

이렇듯 상처받은 남북관계는 2003년 4월 극적으로 마련된 북핵문제 다자 회담에서 남한이 배제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경도된 대미 태도와 전략적 사고의 부족은 북한에게 '남한은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케케묵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고, 핵문제는 북미간의 사안이라는 경직된 인식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1993-1994년 때와 마찬가지로 위기 상황에서 남북대화의 단절과 상호간의 불신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는지 새삼스럽게 확인해 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전략을 넘어 '민족' 전략 수립을

 

부시 행정부 때의 남-북-미 삼각관계의 위기 구조를 보면, '국가' 차원의 전략이 갖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미동맹을 강화시켜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라는 남한의 국가전략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국가전략과 충돌하는 것이다. 반대로 "전쟁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미국과 담판을 짓겠다."라는 북한의 국가전략 역시, 민족공동체의 생존권을 미국의 선택에 맡기는 극히 위험한 발상일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가전략과도 충돌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충적인 남북한의 국가전략은 부시의 패권주의 강화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있다. 

 

이는 결국 남북한 모두 '국가'를 넘어선 '민족' 차원의 전략 수립이 절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시 행정부는 세계전략 차원에서 남북한을 분리해서 대응하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의 북쪽은 '테러와의 전쟁'의 대상이 되고, 한반도의 남쪽은 그 전쟁의 동맹국이 되고 있는 현실만큼이나 지독하고도 위험한 역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북한이 미국만 바라보면서 서로를 배제하고 무시하는 국가전략을 고집할 경우, 깊은 늪으로 빠져들 수 있는 구조적인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국가를 넘어 민족의 관점에서 전략을 수립하려면 최소한 어느 한쪽의 전략이 다른 쪽의 전략에 해(害)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 충족되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이라는 민족적 관점의 전략 목표를 남북한 모두 공유해야 한다."라는 대전제가 성립되어야 할 것이고, 여기에는 '민족적 집합의지(national collective will)'가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위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남북대화가 중단되고 상호간의 불신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어느 일방의 국가전략은 상대방에 대한 포용보다는 배제를 낳기 쉽다. 이는 거꾸로 국가를 뛰어넘는 민족 차원의 전략 마련을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 꾸준한 남북관계의 발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민족이 동맹보다 우선한다."라는 민족주의 관점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민족공조이든, 한미동맹이든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가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크게 넘어서지 않는다. 곧, 미국이 말하는 한미동맹 강화 논리가 한반도의 평화를 저해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면 견제를 해야 하듯이, 북한이 강조하는 민족공조 역시 맹목적인 선(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북미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한은 숙명과도 같은 딜레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북미관계의 사이가 좁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미동맹 논리에 따라 미국에 접근하면 남북한 사이는 그만큼 멀어지기 마련이고, 반대로 민족공조 논리에 따라 북한에 접근하면 한미관계에 갈등이 인다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일어나는 딜레마를 극복하려면 먼저 남한이 무게중심을 잡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동시에 이러한 제로섬 게임과 같은 영역에 속하지 않은 '제3의 영역'을 발견해 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무게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남한이 북한, 미국 어느 한쪽에 접근함으로써 다른 쪽과 멀어지는 것보다는 한반도 평화구조에서 남한이 무게중심이 됨으로써 북한과 미국을 견인하는 구심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제3의 영역'은 남북관계나 한미관계 어느 한쪽이 가까워진다고 해서 다른 한쪽이 멀어지지 않는 영역을 의미한다. 일례로 남북한 민간 교류나 이산가족 상봉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남북관계의 꾸준한 발전과 평화지향적인 민족공조체계의 수립만이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사목, 2003년 8월호, 정욱식(평화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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