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신앙의 해: 말씀과 신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13 ㅣ No.491

[신앙의 해 특집] 말씀과 신앙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11월 24일까지를 ‘신앙의 해’로 선포하셨습니다. 2012년 10월 11일은 현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50년 전 바로 이 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0-1965.12)가 열렸고, 20년 전 같은 날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반포되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와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이며 이 신앙을 어떻게 현대 세계 안에서 실천해 나갈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또한 신앙의 해를 마감하는 2013년 11월 24일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인 동시에 한국천주교회가 1985년부터 성서주간으로 정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해는 말씀이 신앙의 기초임을 유감없이 증언합니다.

신앙의 해는 2011년 10월 11일 베네딕토 16세께서 자의교서 “믿음의 문”(Porta Fidei)을 발표하면서 제정하셨습니다. 이 교서는 성경 말씀의 인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선 교서의 시작에 나오는 “믿음의 문”은 사도행전 14장 27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믿음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순례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교황님은 이 여정이 삼위일체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세례로 시작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으로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밝히십니다(1항). 여기서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고(로마 6,4),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요한 17,22)을 말합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문이십니다(요한 10,7).

베네딕토 교황님은 이 교서 3항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결정적인 길”임을 밝히시면서 요한 복음을 폭넓게 인용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생명수는(요한 4,14) 그분의 말씀과 성령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앞서서 해야 할 꼭 필요한 한 가지 일, 곧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입니다(요한 6,28-29).

사도 요한을 비롯하여 열두 제자와 신약성경 저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그분을 “우리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히브 12,2)로 받아들이는 일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다인으로서, 나면서부터 하느님의 말씀인 구약성경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고백하며 살아온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생활했던 나자렛 출신 “요셉의 아들”(루카 3,24; 4,22; 요한 1,45; 6,42)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감히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그분이 십자가에서 치욕스럽고 고통스런 죽음을 겪고 묻히셨다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사건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능력 밖이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분의 십자가 처형과 죽음은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한 반면,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그분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그 자체로 모순이요 역설이었습니다.

공생활 동안에 예수님은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에 대해 제자들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알려주셨지만 제자들은 그분의 인격과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위로부터의 특별한 능력에 힘입지 않고서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도 그분이 누구신지, 그분이 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고 돌아가셔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부활하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베드로의 환상적인 고백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하느님의 계시가 아니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가장 정상적인 통로는 성경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말씀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유다인들은 성경에서 하느님의 뜻을 깨우치고 성경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생명을 얻는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성경 말씀 따로 예수님의 신원(identity) 따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대롭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39). 그것은 예수님에게 적대적이었던 유다인들뿐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활에 동참했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로 놀고 있던 성경 말씀과 예수 사건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보호자 성령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두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실제로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베드로는 순례하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해외 거주 유다인들에게 설교하는 자리에서(사도 2,14-36) 구약성경의 빛으로 오순절 사건(요엘 3,1-5)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시편 16,8-11; 2사무 7,12-13; 시편 89,4-5; 132,11; 시편 110,1)을 설명합니다. 역사는 ‘나자렛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에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다가 죽음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다’(사도 2,23-24)고 말합니다.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도 이 복음을 확인합니다. “나도 전해 받았고 여러분에게 무엇보다 먼저 전해 준 복음은 이렇습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말씀과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리의 영”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요한 복음에서 진리는 철학자들이 논하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진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고별사에서 제자들도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아버지께 대사제의 기도를 바치실 때,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란 아버지의 말씀이고 아버지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요한 1,1)지요. 이 로고스가 글로 기록되어 구약성경이 되고, 살이 되시어(육화 되시어)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영은 로고스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니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지요.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영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미리 다 말해 놓은 셈입니다.

굳세고 튼튼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베네딕토 교황님은 “믿음의 문” 13항에서 “천사의 말을 받아들여 겸손하게 순명하신”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교서의 마지막에서 신앙의 해를 성모님께 맡겨 드립니다. 성모님의 방문을 받은 친척 언니 엘리사벳의 행복선언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2013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6-7면,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


1,06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