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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신앙의 해: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1)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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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05 ㅣ No.484

[신앙의 해,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 서울대교구 사목국 · 평화신문 공동기획] 3.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지는 신앙 (1)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교회 가르침, 구원의 길 안내하는 '신앙의 내비게이션'


나는 길눈이 무척 어둡다. 병자영성체를 주러 제 발로 걸어들어간 길인데도 나오면서 헤맬 정도다. 내가 기억한 주요 지점에 다른 건물이 생기면 그 길은 전혀 새로운 길인 양 헤맨다. 운전할 때는 더 그렇다. 많아야 1년에 몇 차례 운전하는 내게는 시시각각 변하는 도로와 건물들이 나를 당혹하게 한다. 어쩔 수 없이 운전해야만 할 때는 지도를 꺼내놓고, 주요 도로와 교차로를 따로 적어 그대로 따라간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마련된 가장 큰 선물이 내비게이션이다. 어찌나 신통방통한지 목적지만 정해놓으면 알아서 길 안내를 해준다. 요즘은 기술이 더욱 발전해 몇 번 차로로 가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주유소까지도 알려주니, 이젠 지도책이 없어도 되고, 건물이 새로 생겨도 당황하지 않게 됐다.

그런데 모든 내비게이션이 다 완전한 것은 아니다. 같은 곳에서 빙빙 돌게 하거나,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때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어떤 회사 것이 좋다거나 어떤 소프트웨어가 좋다며 선호하는 제품이 있다. 그 제품을 쓰면 헤매지 않을 수 있고, 기름과 시간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의 내비게이션'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인간 구원의 길을 자세하게 안내해준다.


교회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교회의 가르침이란 한 마디로 '신앙의 내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로와 지명뿐 아니라 급커브 지역, 제한속도와 일방통행 같은 여러 가지 조건과 통행량, 낙석 지역 같은 환경도 자세히 조사해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가르침도 어느 한 개인의 주관적 생각이나 주장이 아니라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와 사도들과 교부들에게서 내려온 가르침,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바탕으로 현 시대의 문화와 과학ㆍ경제ㆍ환경 등 모든 조건을 고려해 인간 구원의 길을 자세하게 안내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왜 교회의 가르침이 필요한가?

2000년 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인류 구원의 문이 열렸지만, 모든 인간이 그 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다. 현재 세상을 사는 우리는 아직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충실하게 살아서 그 문으로 들어가겠지만, 그 문으로 가는 길을 아직 알지 못하거나 찾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전 인류가 그 구원의 길에 들어서고, 또한 충실히 그 길을 걸어서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사도시대 때부터 교회는 하느님 백성에게 구원의 길을 따라 하느님 나라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 안내를 해왔으며, 이 길인지 저 길인지 헷갈려 하는 사람들에게 확실한 이정표를 제시해왔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구원은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 일이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에서도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헌장」 16항)고 천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인가? 내비게이션 없어도 운전자가 알아서 스스로 목적지를 찾아갈 수는 있겠지만, 잘 알고 있는 지역이 아니라면 엉뚱한 곳에서 헤매게 될 가능성이 있다. 하느님 나라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그 길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으며, 스스로 길을 찾았거나 찾을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인간이 하느님께 올바로 나아가서 구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권한으로 가르치는가?

세상에는 큰 목소리를 내며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올바른 지식과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공동체 전체를 위해 말한다 하더라도 그 방식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울진대, 지식도 없이 자기 기분에 따라 그릇된 판단을 하면서도 고집을 부린다면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 시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스승에게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 행위의 바탕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백성을 가르칠 자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말과 행위에는 인간적 권위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예수님께서는 신적 권위를 지니고 계셨다. 그 말씀과 행위는 보는 이들마다 경탄하게 했고, '도대체 이분이 누구신가?'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이런 권위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사도단에게 직무와 권한을 주셨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7-19).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교도권이란

사도들의 직무 가운데는 사제직과 예언직, 왕직이 있고, 이 가운데 진리를 선포하는 직무를 예언직이라 하는데, 이 예언직을 수행하기 위해 하느님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교회의 가르침 혹은 교도권이라고 한다. 사도들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들은 계시의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 성령의 빛을 비추어줌으로써 진리의 빛을 밝히고, 하느님 백성이 그 빛을 따라 구원의 길을 걸어가도록 도와준다.

교회의 가르침은 새로운 계시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 말씀에 종속돼 봉사하며, 전해지는 것만 가르친다. 하느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경건히 듣고 거룩하게 보존하고 성실히 해석함으로써 교회와 세상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말씀에 대한 유권적 해석이 필요한데 이 권한은 '그리스도의 권위를 부여받은 참된 스승인 주교들'(「교회헌장」 25항)에게만 유보된다.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은 성경의 우위성을 전제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과 「교회법전」, 그리고 「가톨릭교회 교리서」에 담겨 있다.


가르침의 형태

교회의 가르침에는 유권적 교시와 권고적 설교, 학문적 교수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유권적 교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권위로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주요한 교도권의 행사이다. 이는 장엄 교도권(보편공의회나 관구공의회를 통해 문서로 가르치거나, 교황이 성좌에서 선언하는 문서)과 통상 교도권(지역 주교들의 사목교서나 설교, 교리해설 혹은 시노드), 그리고 통상 보편 교도권(교황령, 교황회칙, 교령, 로마 대심법원의 판결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권고적 설교는 계시 진리의 이해와 실천을 돕기 위해 권고와 격려, 해설, 교정 등의 방법으로 수행되는데 사제의 강론과 훈화, 교리가 이에 해당한다. 수도자나 평신도의 설교 및 교리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학문적 교수는 계시 진리의 학문적 연구와 교수를 통해 그 내용과 뜻을 밝히고 가르침으로써 교도권의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교도권의 중요성

개신교회가 여러 교파로 갈라진 이유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판단과 해석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큰 분열을 일으키게 됐다. 마르틴 루터도 처음에는 성경 해석의 자유를 주장했지만, 엉뚱한 해석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이 난립하자 성경 해석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주장했다. 해석의 자유를 부르짖었던 본인 스스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성경 해석에 있어 공식적 해석과 개인적 해석을 구별한다. 개인의 묵상, 체험 및 해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거나 강요할 수 없다. 본인 스스로 엉뚱한 길에서 헤매는 것은 상관하지 않으나 다른 사람들까지 헤매게 만들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된 내비게이션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진리의 길을 따라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통 교회의 가르침이 중요하다. 잘못된 길에 들어서 이단에 빠진 수많은 오류를 이미 겪어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가르침이야말로 정통 교회의 '신앙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전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모으기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해 온 세상의 하느님 자녀를 불러 모으고 계신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백성인 우리는 한 목자 아래서 한 목소리로 하느님께 찬미와 찬양을 드리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확신을 가지고 함께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다.

[평화신문, 2013년 6월 23일, 이형전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가정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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