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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신앙] 감각적 신앙? 신앙적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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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01 ㅣ No.482

[세상 속 신앙 읽기] 감각적 신앙? 신앙적 감각?


‘리빙(Living)’인가 ‘라이프(Life)’인가?

먹고사는 ‘리빙(Living)’의 문제를 걱정하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생존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점이 있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한 삶인지 고민하는 이른바 ‘라이프(Life)’에 대한 걱정, 삶의 질에 대한 물음이다.

과거, 삶이 숙명처럼 여겨지던 시대에는 모든 것이 나의 팔자거나 피할 수 없는 현실이어서 희망 없이 체념하며 오직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산 세대도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전쟁과 기근, 가난과 인권유린을 겪어온 세대에서는 살아있음에 그저 감사하는 것이 생존의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달라졌다. 여전히 사회의 그늘 속에서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극단적 빈곤은 다소 사라졌다 해도, 피할 수 없는 사회악과 사람들 마음속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 심각한 ‘이기적 유전자’의 확대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가정해체의 위기는 물론, 생명에 대한 경시, 윤리도덕적 가치들의 혼란, 생태계 파괴로 인한 공멸의 문제에 이르는 다양한 현대인의 문제는 여전히 생존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절대적 빈곤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려는 ‘라이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곧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간격을 좁히고, 물질적 풍요로 채울 수 없는 영적 평화와 삶의 휴식, 자연과 더불어 평화로운 휴식 같은 삶에 대한 욕구가 커져가고 있다. 과연 이런 우리 시대의 표징들 가운데 신앙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감각적 신앙의 맹점

인간은 누구나 신체적 감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파악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감각이란 일종의 인식의 통로이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들은 나를 자극하는 대상들을 향해 움직이려는 본성적 경향을 지닌다. 맛집만을 찾고, 향수의 세상에 빠지고, 옷감의 질을 식별하고, 꽃과 그림, 자연의 풍경을 찾아 나선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가진 감각을 자극하고 계발해 준 대상을 탐닉하고 그들과 교감을 통해 삶의 가치관과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혀가기 마련이다. 이런 감각으로 신앙을 보는 이들이 있다.

교회에 처음 발을 내딛는 이들 가운데에는 성당의 고요함이나 거룩함이 좋아서라거나, 다른 종교들보다 좀 더 깨끗한 이미지 때문에 성당을 찾는 이들도 있다.

신자들 가운데에는 성체조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고, 성모님을 지극히 공경하는 이들도 있다. 고해성사를 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해소를 연중행사로 들어오는 이들도 있다. 본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꾼이란 말을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발 본당활동을 자제해 주었으면 하는 잘난 척하는 신자도 없지 않다.

자신의 고유한 감각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은 언제나 편향성을 갖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찾아서 하는 이른바 ‘편의주의적 신앙’이 갖는 위험이다. 이들은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거나 행여 자신이 관심 가져온 일이 교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면 쉽게 냉담하거나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가 남들과 담을 쌓고 자기 신심에 몰두하는 경향이 많다.


감각의 정화가 필요한 세상

하지만 진정한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각은 볼 수 없고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신앙적 감각으로 정화되고 고양되어야 한다.

현대인들이 점차 동물적 감각으로 퇴보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하면 나의 감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현대매체들의 유해성을 식별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단절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신앙은 믿음이라는 신념의 문제이지만, 그 신념이 싹트려면 내 몸이 그런 확신을 갖도록 수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문제는 생각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고도의 지적 문화가 발달한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현실을 잘 식별하고 균형 잡힌 인생을 살고 있다는 자신감에 빠져있지만, 사실 대다수의 현대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적 요소들에 의해 중독되어 있거나 세뇌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한다. 아니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을 짓누르는 감각의 지배자로부터 벗어날 심리적 무능력을 체험한다.

그 결과 현대인들은 자포자기식으로 생을 마감하거나,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쪽으로 살기도 하고, 아예 그런 자기모순을 의식하지 않고 미화하고 포장하면서 이기적 유전자를 극대화하면서 살기도 한다.

우리가 노출되어 있는 현대 매체들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적 가치로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스스로 깨어있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단적 최면에 빠져 영적 균형감각을 상실하기 쉽다.

소비매체들은 소유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처럼 광고하고, 따라 하지 않으면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며, 함께 공감하지 못하면 시대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집단 왕따를 시킨다.

한국사회처럼 타인의 눈과 관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은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나 혼자 하지 않을 때 시대의 이단아나 풍운아처럼 동떨어져 외로운 길을 가야 한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신앙적 감각의 중요성

신앙의 해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신앙적 감각의 필요성이 더 커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제자들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라고 다소 과장된 표현까지 쓰시면서 그들의 믿음에 자극을 주셨다.

자신이 믿고 확신해 온 생의 감각들을 통해 하느님을 찾고 교회 안에서 맘에 드는 일만 찾아 하는 반쪽짜리 신앙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를 그저 ‘하느님’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거룩한 신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내 주신 하느님의 희생적 사랑과 용서와 자비의 은총에 자신을 맡기는 결단이야말로 믿음을 성장시키고, 자칫 동물적 감각으로 퇴락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을 하느님의 신성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한다.

인간의 감각은 신앙을 통해서 완성에 이르는 법이다. ‘신앙적 감각’이란 우리 감각이 하느님 앞에서 “제가 졌습니다.”라고 무릎을 꿇음으로써 얻어지는 ‘영적 감각’이다. 이런 영적 감각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운동이나 미술, 예능 감각이 수없이 반복된 경험을 통해서 자라나듯이 ‘신앙 감각’도 영적인 훈련을 통해 성장한다.

가톨릭 신자들이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신심행위들, 성호 긋기, 아침저녁 기도하기, 미사 참례,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성체조배, 삼종기도 등은 물론, 자선과 봉사, 양심성찰과 묵상을 통해 자신의 영적 감각을 회복하고 믿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신앙적 감각을 찾고 사는지, 감각적 신앙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 송용민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강화본당 주임으로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이다. 1997년 사제품을 받고, 2003년 독일 본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상 속 신앙 읽기」, 「신학, 이해를 찾는 신앙」 등을 썼고, 다음카페 ‘신학하는 즐거움’을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6월호, 글 송용민 · 그림 최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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