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e-세상에서 영성을 살기: 과잉 커뮤니케이션, 주의력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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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01 ㅣ No.481

[e-세상에서 영성을 살기] 과잉 커뮤니케이션, 주의력을 잃다!


‘접촉(contact)’을 해도 ‘접속(connect)’처럼 만나요!

친구들이나 동료들을 만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조용해서 둘러보니 말하는 사람을 빼고 대부분 스마트폰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다가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더 많을 때도 있고요. 누군가의 말이 길어지면 농담으로 말의 흐름을 끊거나 화제를 돌리기도 합니다.

듣기보다 말하기 바쁘고 두세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주고받기도 합니다. 누군가 “하나씩 이야기하자.”고 제안하면 “그건 왠지 밋밋하지. 난 동시에 다 들을 수 있어.” 하며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집에서의 대화는 어떨까요? 부인은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남편은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고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면서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고요.

데이트하는 커플들은 또 어떤가요? 마주하고 앉아있긴 하지만 시선은 각자 스마트폰에 가있으면서도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요. 그들은 “선보는 자리도 아닌데 너무 진지하게 바라보면서 이야기하면 서먹하다.”고 합니다. 디지털 ‘연결’에 익숙해서일까요? ‘접촉’을 해도 ‘접속’처럼 대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즘 우리의 대화는 순차적으로 주고받기보다 다양한 메뉴를 선별하듯 흥미도에 따라 쏠리고 몰리며 탈중심적 대화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돌아서면 남는 것은 ‘언어’가 아닌 ‘형태’로 기억되지요. 말이 너무 많아서일까요? 아니면 말을 마음에 담지 않아서일까요? 쉽게 연결하고 소리가 넘치니 소통이 가볍지요. 대화는 주고받는 ‘소통’이 아니라 이벤트성 ‘참여’가 되었고, 내면의 ‘접촉’이 아니라 몸의 ‘연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가볍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나 봅니다.


들끓는 말, 진짜 대화가 사라졌어요!

‘과잉현실’은 진짜 현실을 잊게 만든다고 하듯이 ‘과잉소통’은 진짜 ‘대화’를 잊게 합니다. 너와 나의 살아있는 내면의 이야기보다는 정치나 스포츠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너와 나의 하루 일과를 나누기보다 개그콘서트나 연예인 일상을 나누기에 바쁘고, 나의 이웃과 너의 이웃에 대한 삶보다는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는 희귀한 사건에 주목합니다.

함께 생각과 힘을 모아 헤쳐 나갈 진짜 ‘우리’의 일보다는 조금 ‘더’ 편안하고 ‘더’ 달콤하고 ‘더’ 즐거운 이벤트를 찾으려 합니다. 그 ‘더’로 인하여 불편한 현실은 사라지고 ‘더’로 채워지는 순간의 쾌감이 현실이 되고 말지요. 그렇게 클릭 한 번으로 ‘재미’를 얻어내듯 사람과의 만남도 ‘나’를 즐겁게 해주는 오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볍고 즐겁게 떠들고 돌아서면 허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시간과 공간에서 갖는 유일무이한 일회적 현존성은 그 어떤 것과도 대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성이며 아우라라는 것이지요. 현대기술은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복제품을 내놓았지만 유일무이한 원본의 진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소중한 사람들 간의 만남도 복제보다 쉬워지고 있고 들끓는 말로 상대에 대한 ‘주의력’도 떨어지고 그의 말에 몰입한다는 것이 지루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불행하게도 진정성 있는 현존성 안에서의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지요. ‘현존성’은 함께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요. 상대방이 나와 마주하고는 있지만 ‘나’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는 나와 함께 있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진정한 사랑은 ‘주의력’에 있어요!

사랑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그의 눈빛과 표정, 움직임과 목소리에 ‘주의’하면서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어야 합니다. 필요한 것을 베풀고 나누는 사랑보다 더 높은 사랑은 바로 상대를 향한 온전한 ‘주의력’에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그 어떤 동물보다 뛰어난 이유는 바로 이 대상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니까요.

특히 디지털 테크놀로지 혁명으로 인한 지속적 주의력 분산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내가 필요한 것을 선택하여 집중하기보다 주변의 것들에 따라 이리저리 끌리고 흩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주의력’이 필요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주의력이 부족하면 ‘기도’도 어렵지요. 기도란 온전히 하느님과 주파수를 맞춰가는 여정이니까요. 주님께 온전히 주의를 기울일 때 비로소 그분의 현존에 머물게 되지요. 주의와 집중의 단계를 거쳐야만 말씀을 듣고 깨달아 신앙체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주의’한다는 것은 곧 그와 함께 ‘현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는 곧 ‘현존’이며 기도는 주님의 현존을 누리는 순간이지요. 산만하면 기도도 어렵고 신앙생활도 이벤트성이 되고 맙니다. 공연장에 가듯 성당에 가고 텔레비전 보듯이 강론말씀을 듣고 쇼핑하듯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미사 드리고 기도했다는 그냥 그런 ‘느낌’을 간직하고 돌아오지만 그 ‘느낌’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않지요.


‘대화’는 그 사람의 영혼을 반영해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대화는 그 사람의 영혼을 반영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화의 풍경은 어떠한가요?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내면의 향기를 타고 아름다움을 드러내주고 있나요? 오히려 점점 가볍고 경박해져 가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니 나의 딱딱하고 상처받아 굳어진 언어들을 보듬어주려면 잠시 멈추고 침묵하는 순간도 필요하겠지요.

누군가에게 온전히 ‘주의’를 기울일 때 그에 대한 사랑과 연민, 배려, 공감과 친절함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고요하고 깊은 내면에서 살아 숨 쉽니다. 아래로 내려가 ‘고독’의 공간에서 홀로 설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대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기도하기 전 잠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내려놓고 온전히 주님께 ‘집중’해야겠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의식하고 집중하면 내 마음이 고요해지고 흔들림 없는 기쁨과 평화가 잔잔하게 마음 깊이 파고들어 옵니다.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7-28).


<더 공부하고 싶으세요?>

“우리는 눈을 통해 세상으로 나가고 세상은 귀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잃어버린 지혜, 듣기」(서정록 지음) 첫 장에 쓰인 글이다. 우리는 넘치는 이미지에 끌려 세상에 나가 있지만, 결국 듣지 않아 세상이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고독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는 걸까? 그 어느 때보다 ‘듣기’가 절실한 시대에 지혜를 잃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저자는 세상의 모든 소리와 영적인 내면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듣기’에 대한 저자의 성찰은 과학적, 인문학적 그리고 영성적인 탐구 안에 폭넓게 펼쳐진다. 진실로 듣는다는 것은 즐겁고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 김용은 제오르지아 - 살레시오수녀회 수녀. 부산 살레시오영성의집 관장으로 청년과 평신도 신심단체를 위한 현대영성 강좌 및 피정지도를 하고 있으며 여러 수도단체에 디지털 시대의 봉헌생활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미디어생태학을 전공하고 버클리신학대학원 내 살레시오영성센터(ISS)에서 살레시오영성을 수학했다. 「세상을 감싸는 따뜻한 울림」, 「3S 행복 트라이앵글」, 「영성이 여성에게 말하다」 등의 책을 냈다.

[경향잡지, 2013년 6월호, 김용은 제오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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