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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 기쁨과 희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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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6-30 ㅣ No.477

[신앙의 해] 현대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 -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


시작하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 10. 11.~1965. 12. 8.)는 4개의 헌장과 9개의 교령, 그리고 3개의 선언을 문서로 남긴다. 16개의 문헌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중에서도 4개의 헌장(憲章)은 16개 문헌의 중심이다. 전례헌장, 교회헌장, 계시헌장, 사목헌장이 그것인데, 4개의 헌장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전례(典禮)헌장 :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는 생활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전례(典禮)와 성사(聖事)가 바로 그 자리이다. 전례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교회 안에, 특별히 전례 행위 안에 계신다.’(전례7)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전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특별히 성찬전례에서는 그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된다. 따라서 ‘전례는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전례 10)

전례헌장은 은총이 흘러나오는 원천인 전례를 그리스도인들이 더 쉽게, 더 가깝게, 더 거룩하게, 더 아름답게, 더 장엄하게 거행할 수 있도록 쇄신 방향을 제시한다.

교회(敎會)헌장 : 4개의 헌장 중심에 교회헌장이 있다. 교회헌장은 한마디로 교회가 무엇인지를 밝힌다.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 교회의 삶,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 결정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사(聖事)다. 교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 현존(現存)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다.

성령은 교회를 살아있게 하는 혼(魂)이다. 성령이 교회의 혼으로 살아있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하다. 하느님의 영이며 예수님의 영인 성령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활동하신다. 성령이 살아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듯이, 교회 안에도 각자 맡은 바 소명이 다른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들이 있다. 교회의 지체들이 자신들의 소명을 완수할 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계시(啓示)헌장 : 계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혜로는 알아낼 수 없는 초월적인 진리이다. 하느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초월적인 진리를 스스로 밝혀주신 것을 계시라고 한다. 교회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가지고 있다. 신구약 성경은 인간이 지어내거나 만들어 낸 경전이 아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성서의 저자들을 성령으로 감도(感導)하셔서 기록하게 된 경전이다. 인류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섭리를 알게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구세주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분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음으로 예수님은 계시의 완성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음으로써 말씀을 듣고, 말씀을 삶 가운데서 실천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또 다른 말씀의 강생(降生)을 구체화시킨다. [2013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사목헌장 개요(槪要)

간략하게 4개의 헌장 가운데서 3개의 헌장을 살펴보았다. 위 3개의 헌장은 교회가 누구이며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공동체인지, 그리고 교회가 전하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전례헌장, 교회헌장, 계시헌장은 교회가 자신을 살피고(ecclesia ad intra)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고 밝히는 헌장들이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 세상과 더불어,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위해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하여(ecclesia ad extra)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교회가 구원의 기쁜 소식인 예수님을 선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목헌장’은 라틴어로 ‘Constitutio Pastoralis de Ecclesia in Mundo huius temporis’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현대 세계 안의 교회에 관한 사목헌장’이다. 사목헌장의 제목은 사목헌장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는 인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인류와 인류역사에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사목1) 교회는 ‘현대 세계’ 안에 존재하고, ‘현대 세계’를 위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대세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교회는 인류가족 전체와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온갖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사목2)

사목헌장의 표제(標題)는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이다. 표제를 통해서 교회는 현대인들과 현대 세계에 기쁨과 희망이 되겠다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동시에 교회는 현대인들의 슬픔과 고뇌도 공유하고자 한다.(사목1) 교회는 현대세계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온갖 문제들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 인류와 함께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성령의 인도로 이 땅에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로,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교회가 지금 여기서 계속하는 것을 ‘사목’이라고 한다.


사목헌장의 구성과 형식

사목헌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머리말
서론 :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

제1부 : 인간의 소명과 교회
제1장 인간의 존엄
제2장 인간 공동체
제3장 전 세계의 인간 활동
제4장 현대 세계 안의 교회의 임무

제2부 : 몇 가지 긴급 과제
제1장 혼인과 가정의 존엄성
제2장 문화 발전의 촉진
제3장 경제 사회 생활
제4장 정치 공동체 생활
제5장 평화 증진과 국제 공동체

맺음말

[2013년 7월 7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사목헌장은 구성과 형식을 통해서 그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제1부에서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은 어떤 소명을 받고 있는지 고찰한다. 그리고 인간의 소명을 완수하는 데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밝힌다.

제2부에서는 현대세계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과제들에 대해서 고찰한다. 혼인으로 이루어지는 가정 공동체는 인류의 기초 공동체이다. 건강한 가정 공동체가 바탕이 되어야 건강한 국가 사회와 교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현대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정치, 경제, 문화, 국제질서에 대해서 고찰한다.

제2부는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머리말

헌장의 머리말에서 사목헌장은 온 인류를 대상으로 제정 선포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신비를 더욱 깊이 고찰한 다음, 교회의 자녀들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뿐 아니라 곧바로 인류 전체를 향하여 말하며,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현존과 활동을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든 이에게 밝히고자 한다.’(사목2)

교회는 사목헌장을 통해서, 교회가 교회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따라서 교회는 세계와 인류 가족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사목2), 그 현실을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서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사목3) 교회는 진리를 증언하고,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섬김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사목3) 예수님의 길을 걷고자 한다.


서론

서론은 현대 세계의 인간 상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읽고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인류가 던지는 질문과 현대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답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현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는 급격한 변화이다(사목4). 이 변화는 인간의 지능과 창조적 노력의 결과이다. 이 변화는 현대인의 사고방식, 생활양식을 바꾸고 있고, 사회 문화적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종교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이 변화 속에서 정체성의 혼란뿐 아니라, 변화에 바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급격한 변화가 현대세계의 흐름이라 할지라도 변화되어야 할 것이 있고, 결코 변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변화될 수 없는 것을 근본(根本) 또는 기본(基本)이라 한다. 급격한 변화에 바르게 적응하기 위해서 근본과 기본이 확실해야 한다. 현대인들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은 근본과 기본이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는 복음의 빛으로 현대인들에게 근본과 기본의 정립, 신원(身元)과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 둘째는 풍요 속의 빈곤이다(사목4). 현대 세계와 인류는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풍요로운 재화와 능력과 경제력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기아와 빈곤에 허덕이고 있고,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문맹文盲에 시달리고 있다.

현대세계와 인류는 평화롭고 조화롭게 양극화(兩極化)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교회는 물질적인 풍요(豊饒)와 풍성한 재화(財貨)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풍요와 복음적 가난이야말로 진정한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양극화兩極化의 극복은 공정한 분배와 나눔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정신으로 사물과 재화의 바른 가치를 회복할 때 양극화는 극복될 수 있다. [2013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셋째는 자유 속의 예속이다. 현대인들은 유사 이래 최대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누구도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의 발달은 정치적인 자유를 누리게 하고, 물질적인 풍요는 경제적인 자유를 누리게 한다. 집회 결사의 자유, 언론 자유는 각자의 생각과 의사를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늘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정보통신기술(IT)의 발달은 빅브라더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개개인들은 스스로 IT기기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 정보통신 기술에 예속된 현대인들은 디지털 치매 증상까지 보이고 있다.

복음은 인류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성을 회복할 때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넷째는 상호의존과 연대 속의 고립과 대립 그리고 분열이다(사목4). 개인과 가정, 국가 사회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현대세계는 개인, 가정, 학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모두가 촘촘하게 서로 연결된 가운데 상호의존하고 필연적인 연대 속에 공존하고 있다(사목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고립과 대립은 심화되고, 극심한 분열로 인류는 고통받고 있다.

복음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으로 고립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고, 용서로 복수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람과 사물을 대상화하고 객관화하면 분열과 대립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다섯째로 사상교류의 증대 속의 소통 부재이다(사목4). 전자 정보통신의 발달과 홍보매체의 발달, 그리고 언론과 사상의 자유는 사상의 교류를 증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서로 다른 이념 속에서 상대방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소통 부재의 삶을 살고 있다. 나만을 고집하고 주장하면서 상대방에게 나의 것을 강요하면서 상대방을 포용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이다.

복음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해줄 때, 서로 다르지만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현대세계와 인류는 이렇게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고뇌하고 있다. 현대세계와 인류는 강하면서도 동시에 약하고, 최선을 이루면서도 최악에 빠질 수 있고, 자유를 누리면서도 스스로 노예상태에 빠지고, 진보하면서도 퇴보의 길을 걸을 수 있다. 현대세계와 인류는 이렇게 심각한 고통과 갈등, 불균형과 분열현상을 겪고 있으면서도 보편적인 열망을 지니고 있다(사목9). 그 열망은 어떻게 하면 인간 품위에 알맞은 만족스럽고도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현대과학문명이 제공하는 편리와 안락 그리고 그 풍요로움을 다 함께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사목9).

현대 세계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고뇌와 갈등, 부조리와 분열, 불일치 현상은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근본적인 부조리에 가서 닿는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면서도 무한을 갈망하고, 죽음이라는 한계를 알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면 보편적인 열망을 성취시킬 수 있는 길도 발견하게 된다.

교회는 현대세계와 인류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나자렛 사람 예수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곧 복음의 빛 아래에서만 현대세계와 인류는 인간의 신비를 밝히고 주요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2013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제1부 인간의 소명과 교회

제1부에서 사목헌장은 현대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읽어내고자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그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시대의 징표를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현대세계와 인류가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는 가치들이 무엇인지 복음의 빛으로 식별하여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이렇게 묻는다. ① 인간이란 무엇인가? ② 교회는 현대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무엇을 권고해야 하는가? ③ 현대세계 안에서 인간 활동의 궁극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끝으로 ④ 현대세계 안에 있는 교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제1장 인간의 존엄

제1장은 12항~22항까지 11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항마다 작은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12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 13 죄. 14 인간의 구조. 15 존엄한 지성, 진리와 지혜. 16 존엄한 도덕적 양심. 17 자유의 우월성. 18 신비로운 죽음. 19 무신론의 형태와 근원. 20 체계적 무신론. 21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자세. 22 새 인간 그리스도.

제1장의 소제목을 살펴보기만 해도 사목헌장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목헌장은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바탕이 된다. 그리고 사목(司牧)은 인간성 회복과 하느님 모상 되찾기, 다시 말해서 인류의 또 다른 예수 되기가 사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현대세계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핵심에 이 물음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물음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서 현대세계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 또한 달라진다. 이 물음에 여러 가지 답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을 알고 사랑해야 한다. 창조주 하느님은 인간을 세상 만물의 주인공으로 세워 자연을 다스리고 이용하도록 하셨다. 처음부터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은 남녀의 결합으로 기초사회를 이룬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며 관계 속에서 자신을 완성한다.

불행하게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과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하느님이 자기 자신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하느님이 되려고 한다. 죄(罪)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목헌장은 죄(罪)를 이렇게 정의한다. 질서와 조화의 무너짐, 인간 내면의 분열, 선악(善惡)과 명암(明暗)의 싸움, 예속과 부자유가 죄(罪)라고 정의한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하느님이 되고자 죄에 떨어진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잃고 만다. 인간의 불행과 비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2013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된 단일체이다(사목 14). 지난날 스콜라신학의 영향으로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삼구(三仇) 곧, 세 가지 원수라 하여 극복하거나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사목헌장은 세상과 육체가 극복하거나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목(司牧)의 주체이자 객체라고 정의한다.

죄로 인해 육체가 상처받기는 했지만, 육체는 정신과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또한, 인간은 육체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육체라는 그릇 안에 인격, 양심, 정신, 불멸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육(靈肉)을 별개의 두 요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영혼은 육체를 아름답게 만들고, 자기 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아름답고 건강한 영혼도 가질 수 있게 된다. 인간 육체는 사목(司牧)의 주체이며 동시에 대상이다.

인간은 지성(知性)으로 하느님의 신적지성(神的知性)에 참여한다(사목 15). 인간은 지성으로 재능을 발휘하여 경험 과학, 기술, 학문, 예술을 발전시키고 풍요로운 삶을 창조한다. 또한, 지성으로 심오한 진리를 탐구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만으로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지성은 지혜를 통해서 완성된다. 지혜는 진(眞) · 선(善) · 미(美)를 통해서 지성을 완성한다. 하느님의 성령은 인간의 지성을 비추어, 온전한 진선미(眞善美)인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이끌어준다.

인간은 양심(良心)을 지니고 있다(사목 16). 양심은 인간이 제정한 법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각자의 마음속에 새겨주신 보편적인 법이다. 양심은 인간들에게 취선피악(取善避惡)과 사랑의 실천을 요구한다. 인류가 존엄한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인류는 양심의 소리에 충실함으로써 도덕적인 문제들을 진리 안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존엄한 존재인 이유는 자유(自由)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사목 17).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있지만, 하느님의 꼭두각시가 아니다. 자유란 선택과 결단을 말하는데, 인간이 참 자유를 행사할 때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닌다. 참 자유는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유를 말한다. 자유에는 무한책임(無限責任)도 따른다. 따라서 욕망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따를 때 인간은 진정으로 존엄한 존재가 된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은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죽음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인간의 존엄성, 양심, 지성, 자유 등 모든 것을 집어삼켜 허무(虛無)로 돌아가게 하는 궁극적인 고뇌이다. 궁극적인 고뇌인 죽음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일까.

인류는 영원불멸하는 신적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하느님과의 친교를 신앙생활이라고 한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가 이 사실을 증거가 되고 있다. 동시에 믿음은 먼저 세상을 떠난 형제들과의 만남과 친교도 약속해 준다. [2013년 8월 4일 연중 제18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인간은 신적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죽음이라는 허무를 건너갈 수 있는 길을 하느님 안에서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현대인은 무신론(無神論)에 기울어져 하느님 존재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한다. 이들을 무신론자(無神論者)라고 한다. 무신론자라고 해서 다같은 모습은 아니다.

현대 무신론을 대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과학 만능주의 : 실증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사실을 모두 부정하는 무신론. 인간은 경험할 수 있는 것만 인지(認知)할 수 있다. 신은 실증 과학으로 존재 자체를 입증할 수 없으므로 무신론을 주장한다. ② 인간중심주의 :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인간의 가치를 절대화함으로써 인간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무신론이다. 인간이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인간이 신보다 강한 존재라고 느낄 때 무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③ 종교나 신에 대한 무관심 주의 : 자유의사로 신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이다. 대체로 종교에 대한 비판적 반동으로 무신론자가 된다. 교회나 신앙인들이 싫어서 무신론자가 되는 경우인데, 교회와 신앙인들의 책임이 크다.

지금까지 살펴본 무신론을 실천적(實踐的) 무신론이라고 한다면, 보다 이론적이고 체계적(體系的) 무신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① 인간 중심주의 무신론 : 인간의 자기 성취와 완전한 자유를 위해서 신이라는 존재를 거부한다. 신이라는 존재에 의존하면 인간의 자기 성취는 불가능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과학 만능 풍조가 만연된 결과로 빚어진 무신론이다. ② 유물론적(唯物論的) 무신론 : 마르크스주의 무신론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해방과 자기 성취는 물질적 경제적 자율과 풍요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종교나 신은 이런 인간해방과 자기 성취에 장애가 될 뿐이다.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태도

교회는 무신론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하고 있는가.

교회가 무신론을 배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무신론은 인간 경험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품위를 완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손상하기 때문이다.

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느님과의 친교 속에서 신적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② 죽음은 인간의 궁극적인 고뇌이다. 무신론자들은 죽음이 허무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궁극적 고뇌인 죽음과 인간의 내적 분열과 부조리들을 해결하는 길을 하느님 안에서 발견한다. 하느님 안에서 종말론적 희망을 발견하는 인간은 지상의 삶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건설해 나간다.

③ 현대의 무신론을 극복하는 길은 철학적, 신학적, 교리적, 이론체계를 확립하고 무신론자들을 설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신앙인이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아가고 있다. 이론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무신론자들을 설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신앙인들의 삶이 무신론자와 다르지 않다면 무신론을 극복할 수 없다. 사랑과 용서, 정의와 나눔, 화해와 일치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삶으로 증거 하는 것이 무신론을 극복하는 길이다.

④ 교회는 무신론을 배격하지만, 무신론자들과의 대화를 기피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세계의 건설과 인간 존엄성의 고취를 위해서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숙고해 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과 인간의 발전을 위하여 빛과 생명과 자유를 쏟아부어 주기 때문이다. [2013년 8월 11일 연중 제19주일 ·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새 인간 그리스도

사목헌장은 인간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간 구원의 해답은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다. 첫 인간 아담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성과 지혜 그리고 자유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욕망의 노예가 된 첫 인간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다가 고통과 무질서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된다.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새 아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다.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 아담 예수는 누구인가? 사목헌장은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두 개의 열쇠 말을 제시한다. ① 강생(降生 incarnatio)과 ② 결합(結合 unio)이다.

① 강생(降生 incarnatio)은 육화(肉化), 또는 성육신(成肉身)을 말한다. 하느님의 자기 낮춤과 비움으로 강생은 현실이 된다. 범죄로 하느님의 모상이 이지러진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하늘에 오를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강생降生은 인간이 하늘에 오르지 않아도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누리는 길을 열어준다. 이 땅에 하느님이 강생하심으로서 하느님 나라는 이 땅 위의 현실이 된다. 이것을 복음(福音)이라고 한다.

② 결합(結合 unio)은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사건이다. 강생으로 하느님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신인(神人) 동체의 존재이다. 이로써 인간 앞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 열린다.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되찾고 존엄성을 회복한다. 이것을 구원(救援)이라고 한다.

강생과 결합은 인류 앞에 구원의 문을 열어놓는다. 인간 구원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짜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그러나 믿음(信仰)과 회개(悔改)라는 그릇을 준비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믿음과 회개로 구원받은 인간은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인간 욕망이 아니라 성령으로 내적 쇄신을 이룬 인간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가 당면한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이며 길이다.

제2장 인간 공동체

제2장은 23항부터 32항까지이다. 각 항의 제목을 살펴본다.

23 공의회의 의도. 24 하느님 계획안에 있는 인간 소명의 공동체적 특성. 25 개인과 사회의 상호 의존성. 26 공동선의 증진. 27 인간 존중. 28 반대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 29 모든 사람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정의. 30 개인주의 윤리의 극복. 31 책임과 참여. 32 사람이 되신 말씀과 인간 연대

사목헌장 1장에서 인간이 무엇인지, 현대 세계 안에서 인간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답으로서의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한다. 제2장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한자어 人間(인간)이 의미하는 것처럼 사람은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완성해간다.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이미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없고, 자신을 완성해 갈 수도 없다. 인간 공동체는 인간이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을 완성해 갈 수 있는 자리이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계시(啓示) 곧 복음의 빛으로 인간 공동체의 건설과 공동선의 증진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013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은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뜻이다. 동시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인류는 형제자매가 된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신명기 6,5: 레위기 19,18)은 인간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길이자 동시에 서로 사랑함으로써 형제애를 나누는 길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동시에 인간 서로 간의 사랑을 나누고 일치를 이루는 길이 된다. 하나 됨은 자기 비움과 낮춤, 그리고 서로 포용하고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서로 의존하는 존재이다. 사회생활은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모든 사회 제도의 근본은 인간이어야 하고, 사회제도의 주체도 인간이어야 하고, 사회제도의 목적 또한 인간이어야 한다.

가정과 정치공동체는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둔 공동체이지만, 개인이나 공동체의 이익과 권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생겨나는 각종 사회단체도 있다. 어떤 공동체이든 인간의 오만과 이기심으로 오염되어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해치거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공동체는 공동선의 증진을 위하여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를 바르게 인식하고 행사해야 한다. 의식주, 신분의 자유로운 선택, 가정 형성, 교육, 노동, 명예, 양심적 선택과 판단, 사생활보호, 종교와 신앙생활의 자유 등의 권리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타인의 권리와 의무를 침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사회 질서와 그 발전은 언제나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목헌장은 인간존중의 길을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찾는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주는 것(루카 10,29-37)과 약자, 노인, 외국인 노동자, 가난한 이웃, 어린이, 과부와 고아 등 보잘것없는 사람을 하느님처럼(마태 25,40) 맞아주는 것이 인간존중의 길이다. 따라서 인간 존엄성을 훼손하는 살인, 학살, 낙태, 안락사, 자살, 고문, 폭력, 불법감금, 추방, 매매춘, 인신매매, 노동력 착취 등 인간을 이윤추구의 수단이나 도구로 삼는 모든 행위를 반대하고 배격한다.

이념과 사상, 신앙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비록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대화하면 인간존중과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진리와 선에 대해 무관심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류에 빠진 사람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대화하면 그를 바른길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자기 이념과 종교, 사상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인간 존중의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평등하고 그 인격은 존중받아야 한다. 비록 개개인의 육체적, 지성적 능력과 도덕적 역량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성별, 인종, 피부색, 종교, 언어 때문에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공적이거나 사적 단체들은 인간의 기본권 수호와 평등, 그리고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자유가 무제한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전히 개인주의 윤리와 사고에 빠져서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사회질서와 법규 또는 규범을 무시하는 생활태도는 규탄받아야 마땅하다. 관계의 존재인 인간은 사회적 연대책임을 존중하고 함양하기 위해 도덕적 사회적 덕을 닦고 확산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사회적 연대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 개인의 존엄과 자유도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인간의 존엄을 다룬 제1장의 결론은 새 인간 그리스도였다. 인간 공동체를 다룬 제2장은 사람이 되신 말씀과 인간의 연대를 결론으로 제시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운명에 동참하시려고 당신의 아들이자 말씀이신 예수님이 되어 이 땅에 한 인격으로 강생하신다.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으로서 나자렛에서 목수 일을 하시면서 노동하시고, 한 가정의 구성원이자 아들로서 일상적인 삶을 사셨다. 출가하신 후에는 가난하고 작고 약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여 사랑과 삶을 나누셨다.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서 모든 인류가 형제적인 사랑을 나누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일치하도록 초대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화해하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 일치하도록 초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인 교회는 온 인류를 성령 안에 하나가 되게 하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종말적인 완성에 도달하도록 초대한다.

제3장 전 세계 안의 인간활동

사목헌장은 제1장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제2장에서는 인간 공동체에 대해서 고찰한다. 제3장에서는 개인적, 사회적 인간 활동을 복음의 눈으로 고찰한다. 제3장은 33항부터 39항까지인데, 그 제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3 문제 제기. 34 인간활동의 가치. 35 인간활동의 규범. 36 현세 사물의 자율의 정당성. 37 죄로 물든 인간활동. 38 파스카 신비 안에서 완성된 인간활동. 39 새 하늘과 새 땅

현대의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지배권을 자연과 우주로 확장해가고 있다. 동시에 정보통신 기술(IT)의 발달은 세계와 인류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공의회는 인류가 성취한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산업, 교육과 사회, 첨단 과학기술의 발달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 그리고 목적과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올바른 것인지를 복음의 빛으로 비추어주고자 한다.

구약성경 창세기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참 좋은 세상을 인간에게 맡기시고 돌보게 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세상을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고, 그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빛나게 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한 활동, 개인과 단체의 이익을 위한 활동, 사회봉사를 위한 활동 등 모든 활동은 하느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게 되고, 공동체의 건설과 공동선과 행복의 창출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복음 메시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세계 건설과 인류의 행복 증진을 위해 더욱 성실히 활동해야 한다고 격려하고 가르친다.

인간의 활동은 물질적인 풍요나 소유욕의 충족, 기술력의 발달만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최첨단 기술력을 갖추고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바른 인간성을 상실한다면, 기술력과 소유물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으로 바뀔 수 있다. 인간의 활동은 소유나 기술력보다 인간의 존엄성 고취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계획과 뜻이며 인간 활동의 규범이다. [2013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창세 1,28) 인간은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자연과 만물을 관리할 권한을 받았다. 관리할 권한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에 부여하신 고유한 법칙과 질서를 존중하고 그 자율성을 고취시켜 더욱 아름답고 완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현세 사물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겸허한 마음으로 사물의 비밀을 탐색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 손길을 찾아내야 한다. 모든 종교와 신앙인들은 피조물과 자연의 언어를 통해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왔고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해 왔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인간의 진보는 가치질서가 뒤집히고 선과 악이 뒤섞인 현실 가운데서 선익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증대된 인간의 힘과 능력은 자기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악용되고 때로는 인류 자체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인간은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으로 만들어서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혹과 악의 세력과 싸워야 한다. 인류의 역사는 악의 세력과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악의 세력을 극복하는 길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찾는다. 악의 유혹과 이기적인 욕망을 뿌리치고 인간 활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세상과 피조물은 더 아름답고 풍요롭게 재창조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고 사랑하시기 위해서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이 땅에 한 인격으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인류의 역사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새로운 역사, 곧 구원의 역사가 된다.

역사를 새롭게 하신 예수님은 인간 완성과 세상의 개혁을 위한 법칙을 주셨다. 사랑의 새 계명이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완성과 구원을 위한 새로운 법을 몸소 실천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부활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웃과 형제를 제 몸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자연을 사랑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한다면, 틀림없이 더 아름답고 풍요롭고 생명으로 충만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새 땅과 새 하늘은 이렇게 해서 우리 앞에 도래하게 된다. [2013년 9월 15일 연중 제24주일 / 9월 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가톨릭마산 6면, 강영구 루치오 신부(교구 총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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