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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사회교리: 예수 그리스도와 다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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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8-18 ㅣ No.630

[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예수 그리스도와 다문화 (1)

 

 

신약성경은 다양성과 다문화주의와 관련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사명을 드러내고 있다. 먼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다양성 안에서 이루시는 일치를 보여 주시며,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이방인으로 사셨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였지만 이방인을 찾아가시고 모든 이와 일치를 이루시길 갈망하셨을 뿐 아니라 수난과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당신과 일치시키셨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이 세상의 이방인으로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셨지만 이방인들을 찾아 주셨다. 이제 그분의 신원과 삶에서 이방인과 관련된 사항들을 살펴보자. 그분의 삶 자체가 다문화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삶의 기준을 제시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1.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은 위격으로 서로 다르시지만 한 분 하느님이시다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근원적 신앙이다. 비록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은 성부로, 성자로, 또 성령으로 당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지만 한 분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다양성 안에서 이루시는 일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와 한 분이시며, 아버지의 파견을 받으신 분으로 세상에 속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계시기에(참조. 요한 14,11) 성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며, 그분의 파견을 받아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참조. 요한 12,44-46) 

 

이와 같이 예수님은 아버지에 속하시며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신 분으로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참조. 요한 17,14.16)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생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며 빛 자체이신 분이 어둠의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본성상 하느님이신 분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필리 2,7) 인간이 되신 분이시다. 곧 예수님은 당신의 본성마저도 감추시고 당신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이 세상에 오신 분, 달리 말해서 하느님이신 성자께서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고자 인간의 몸(육)을 선택하신 것이다. 이 선택을 통해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의 만남, 완전히 다른 두 세계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달리 말해서 예수님 안에서 완전히 이방적인 두 본질(신성과 인성)의 일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인간인 우리와는 다른 이방적인 존재이시지만 인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 분이시다. 이 일치가 인류의 구원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과 완전히 다르신 분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치의 근원이시다.

 

 

2. 이방인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인간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참조. 요한 1,11) 세상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참조. 요한 1,10), 이 세상을 구하러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나그네의 삶, 이방인의 삶을 몸소 겪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정책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러 가던 중에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았다. 성가정이 들어갈 여관이 없어서 예수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야 했다.(참조. 루카 2,1-7) 예수님은 타향에서 이방인으로 태어남으로써 최초의 이방인 경험을 하게 된다. 탄생 직후 성가정은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헤로데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이집트로 피난하게 되었고, 헤로데가 죽자 성가정은 유다로 가지 않고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가서 살았다.(참조. 마태 2,13-23) 

 

성가정이 이집트 피난과 나자렛으로의 귀환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로의 피난과 탈출을 연상시켜준다. 성가정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면서 겪었던 것처럼 이방인이며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 파스카 축제 때 가족들과 함께 참여하였고, 축제 후에 예수님은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예수의 부모들은 사흘 동안 예수를 찾아 헤매면서 이산가족의 아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린 예수님은 공생활 동안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마태 8,20)고 하셨다. 또 예수님의 설교와 기적은 길에서, 산 위에서, 물가에서 이루어졌고 극히 드물게 회당에서 이루어졌다. 또 그분은 필리스티나(유다, 갈릴래아, 사마리아)와 국경 너머까지 끊임없이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선포하였다.(참조. 루카 8,1)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공생활에서 정착된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이웃 고을들을”(마르 1,38) 찾아 다니셨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유랑 생활,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사도들도 예수님의 이러한 삶에 동참하였다.

 

 

3. 배척당하신 예수님

 

배척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같은 민족인 유다인으로부터 사마리아인으로 또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받았다.(참조. 요한 8,48)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시자 고향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하였다.(루카 4,16-30; 마태13,54-58; 마르 6,1-6)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보다 못한 민족인(마태 10,5-6) 사마리아인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 10,29-37)를 통해 그들을 참된 이웃의 본보기로 삼았고,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무르시며(요한 4,1-42) 호의적인 태도를 드러내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기 전 머무실 곳을 찾는 예수님과 그 일행을 맞아 들이지 않았다.(루카 9,51-56) 또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와 부활에 관한 논쟁(루카 20,27-40; 마태 22,23-33; 마르 12,18-27)을 벌였고,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각종 율법과 관련된 사항들(단식과 안식일 등 각종 율법) 때문에 논쟁하였다. 

 

바리사이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 고소하기 위하여 간음한 여자를 데리고 왔으며 심지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함께 모의를 하였다.(마태 22,15)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공모를 했으며(마태 26,3), 체포하기 위해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를 보냈다.(마태 26,47) 예수님이 체포되자 제자들마저도 그분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마태 26,56) 붙잡힌 예수님은 군사들로부터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였다.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의 꼬임에 빠진 군중들은 빌라도 앞에서 말씀과 기적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2-23)라고 외쳤다. 또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수석사제들, 군사들, 심지어 함께 못 박힌 죄수마저도 조롱하였다.(루카 23,39)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탄생으로부터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셨다. 그분이 배척당하신 것은 그분에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을 못 알아보고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철저히 배척당하시면서도 인류를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어 당신 자신을 철저히 내어 놓으심으로써 인류를 당신에로 이끄시어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월간빛, 2012년 8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예수 그리스도와 다문화 (2)

 

 

지난 호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존재론적으로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 즉 이방인이라 할 수 있으며 이방인으로서의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셨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이방인을 찾아가시는 예수님, 모든 사람의 일치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자.

 

 

4. 이방인을 찾아가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만 인간을 찾아오셨다. 하느님이신 당신과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존재론적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존재론적 차이 때문에 사람들은 하느님이 인간이 된 신비를 이해할 수 없고 단지 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비록 성자의 강생은 이성의 이해를 완전히 뛰어넘는 사건이지만 이러한 강생이 가능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성자의 강생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의 지극하고 전능한 사랑을 믿는 것이다.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강생하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분(요한 17,14.16)이지만 이 세상을 찾아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공생활 가운데 당신이 속한 유다인뿐 아니라 당시 사회의 소외계층과 이방인들을 찾아가셨고,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만나셨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들을 찾아가셨다. 그분은 사마리아에서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면서 마을에 들러 나병환자들을 고쳐주셨고(루카 17,11-19) 야곱의 우물이 있는 시카르라는 사마리아 마을에 들러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고 그 마을이 당신을 믿자 그곳에서 이틀을 머무셨다.(요한 4,1-42) 또 사마리아에 머물기 위해 심부름꾼을 보냈으나 그들로부터 배척당하기도 했다.(루카 9,51-52)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던 세리 마태오의 집에 들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했다.(마태 9,9-10) 이 사건이 바리사이들에게 스캔들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배척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셨고, 제자로 부르실 뿐 아니라(루카 5,27) 심지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선포하신다.(마태 21,31) 또 예수님은 당신을 배척하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을 만나기를 꺼려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을 만나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권위있게 지적하시고 율법의 참뜻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많은 고을을 찾아다니며 이방인이나 세리와 죄인, 그리고 창녀 등 당시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한 그분의 보편적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선포하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혈통과 지역, 그리고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서로 경원시하는 이방인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분의 사랑과 그분에 대한 신앙으로 모든 차이를 극복하고 모든 이를 자신의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여야 함을 선포한 것이다.

 

 

5. 일치를 원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생활하셨던 당시 이스라엘에는 매우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유다인, 사마리아인, 필리스티아인, 로마인을 비롯하여 다양한 민족 출신의 이방인들이 그 속에 섞여 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에도 유다교의 종파에 따라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열혈당원, 에세네파 등으로 나눠져 있었다. 또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자유민과 종(노예), 왕을 비롯한 율법학자와 사제 등의 지도층과 일반 시민들, 그리고 창녀, 세리, 나병환자 등 소외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들과 다양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삶의 형태를 지닌 사람들이 각기 자신들만의 고유한 삶의 형태를 유지하며 다른 부류의 삶의 형태를 무시하거나 배척하기가 다반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17)라는 새 계명을 주시며 모든 이들이 서로 일치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당신이 성부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으며(참조. 요한 17,10), 제자들과의 일치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요한 15,5)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제자들 역시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치하고 있으며(요한 17,14.16),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제자들을 넘어서서 예수님과 성부를 받아들임으로써 궁극적으로 당신과 일치하고 있음을 밝히셨다.(참조. 마태 10.40) 또 그분은 착한 목자로서 당신 양들을 알고 양들도 당신을 알며 양들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으셨으며(참조. 요한 10,14-16) 한 목자 아래 한 양떼가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배척하셨지만 온 인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 예수님은 성찬례를 제정하시며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수난이 모든 이를 위한 것임을 밝히셨다. 예수께서 강생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수난을 겪으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인류가 당신을 믿음으로써 당신과 하나 될 뿐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게 하신다.

 

예수님은 수난 전에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성부께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기도하셨다. 또 예수님은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십자가상 희생이 모든 인류를 당신에게로 이끌어 드리는 것임을 밝히셨다. 예수님은 제자들뿐 아니라 제자들의 말을 듣고 믿는 이들을 위하여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성부와 당신이 하나인 것처럼 제자들과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으며, 당신 친히 제자들과 믿는 이들 안에 계시고, 성부께서 당신 안에 계시는 것은 곧 제자들과 믿는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의도였다.(참조. 요한 17,23-24) 그리고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여 일치하는 것이 곧 세상에 제자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6. 결론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다문화와 관련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살펴보았다. 비록 그분이 생활하던 시대에 다문화, 다문화주의란 말은 없었지만 존재론적으로 우리와 다른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방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방인처럼 당시 사람들의 배척을 받으셨지만, 그럼에도 당시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마리아인들을 찾아가셨고 세리와 창녀들을 맞아들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일치뿐만 아니라 모든 이를 일치에로 초대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서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 땅에 함께 살고 있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즉 고단한 삶에 지친 이방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고통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들을 따뜻이 맞아들여야 할 것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월간빛, 2012년 9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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