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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사회교리: 성경에 나타나는 이주와 다문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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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22 ㅣ No.622

[김명현 신부의 사회교리] 성경에 나타나는 이주와 다문화 (3)


지난 호에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강력한 신앙적 체험이 되었던 탈출기와 가나안 정착과정에서 일어난 이주와 다문화 현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가나안 정착 이후 판관시대부터 바빌론 유배와 귀환에서 나타나는 이주와 다문화 현상을 살펴보자.

9) 판관시대


가나안에 정착한 후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참조. 판관 3,1~3)의 도전을 받게 될 때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여러 지도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곧 판관들이다. 판관시대에 이스라엘과 주변 민족과의 갈등과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주변 민족들과 문화적 영향을 주고 받았다. 기원전 12세기 경 기드온 판관시대에 이스라엘은 미디안족과 아말렉족과 동방인들의 침입을 받았다. 이들은 낙타를 이끌고 침입했는데 이스라엘은 이때 처음으로 낙타를 접하게 되었다.(참조. 판관 6,1~6) 또 입타 판관(참조. 판관 11~12장)의 경우 암몬족이 쳐들어 왔을 때 전쟁에 승리하면 자신을 맞으러 자기 집 문에서 처음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기로 서원하였고 자신의 딸은 번제물로 받쳤다. 야훼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인신제헌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삶이 다른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손 사화에서는 삼손이 팀나에서 필리스티아 여자와 결혼, 필리스티아인들과의 분쟁, 들릴라와의 사랑과 필리스티아인에 대한 복수 등은 이스라엘과 필리스티아인들의 갈등을 명백히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상속지가 없었던 단 지파는 이주를 통해 자신들의 땅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이 와중에 이스라엘 민족은 타 민족과 섞여 살게 되었다.(판관 18장)

10) 왕정시대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필리스티아인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왕의 존재를 필요로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달리 기브아성의 베냐민 지파 출신 사울을 왕으로 옹립(1사무 10,1 이하; 11,14 이하)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왕정이 시작되었고 다윗이 그 뒤를 이었다. 다윗은 갈릴래아 호수의 동쪽에 있는 아람족 국가인 그수르의 왕녀와 결혼하였고(2사무 3,3) 여부스족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그리로 궁을 옮겼으나(2사무 5,5~7) 그곳에는 여전히 여부스족이 살고 있었다.(2사무 24,18~25)

솔로몬은 다윗으로부터 물려받은 왕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봉신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이방의 귀족들을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고(1열왕 11,1~3) 왕국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외국들과 동맹을 맺고 오피르와 아라비아의 스바와도 교역을 통해 이스라엘의 번영을 가져왔다. 반면에 다윗과 솔로몬은 이교도 여성들을 아내로 맞아 들였는데 이들의 가정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가 말하는 다문화가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1)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솔로몬이 죽은 후(922년) 다윗 왕국은 둘로 분열되었다.(참조. 1열왕 12장) 남쪽 유다는 비교적 동질적 주민으로 구성되었으나 북쪽 이스라엘은 영토는 넓고 비옥했지만 가나안족이 많았고 지리적으로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웠다. 또 남북 왕조 시대에 이집트와 다마스쿠스의 정세 변화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교도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여 왕족들이 외국 여성을 아내로 맞아 들였다. 솔로몬과 암몬족 공주 나아마와 사이에 태어난 르하브암(1열왕 14,21.31)은 아바살롬의 가문 마아카를 아내로 맞았다.(1열왕 15, 2) 이 두 여자는 아람족의 혈통을 물려 받았으며, 특히 마아카는 아세라 여신을 숭배하였다.(1 열왕 15,13)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은 시돈의 임금 엣바알의 딸 이제벨과 결혼하였고 바알 신전을 세우고 아세라 목상을 섬겼다.(1열왕 16,31~33) 842년 예후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알 신앙을 만연하게 한 이제벨을 죽이고 바알 신전을 불태우고 바알 숭배자들을 처형하였다.(2열왕 9~10장) 남왕국 유다의 임금 여호람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의 딸 아탈야와 결혼하였는데(2역대 21,6) 아탈야가 예후의 쿠데타 후 왕위를 차지하고 바알신을 숭배하였다.

예후의 왕조 시대 북 이스라엘은 아람족, 유다는 에돔군과의 전쟁을 통해 이민족과 접하였다.(2열왕 14,7; 2역대 25,11~12) 그후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북부의 국경선을 솔로몬 시대만큼 확장하였고, 다마스쿠스를 격파하고 아람족들의 땅들을 합병했다. 반면 유다의 우찌야 왕은 아라비아 부족을 몰아내고 에돔족의 땅들을 지배하였다. 당시 두 왕국이 차지한 지역은 이집트와 아라비아를 연결하는 통상로였기에 두 곳의 문물이 유입되어 물질적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외부문화의 영향으로 원래 이스라엘의 삶의 기준이 계약의 법이었으나 왕정이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은 왕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상업의 발달로 인해 특권계급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은 계약의 법에 알지 못하는 특수한 주민집단으로 이스라엘에 편입되었다. 이상과 같이 남북왕조시대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혼인, 전쟁, 교역 등을 통해 주변 민족들과 접하며 살았고 이로 인해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삶의 방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2) 유배생활과 귀환


기원전 587년 바빌론 제국의 침공으로 남북 왕조가 멸망하고(참조. 애가 2,2.5)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육 당하였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는 3차에 걸쳐(579년, 587년, 582년; 예레 52,28~30) 이스라엘의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이때 대다수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필리스티나에 남아 있었고(참조. 2열왕 25,18 이하) 일부 무리들은 이집트로 이동하여 정착하였다.(참조. 예레 43,7; 44,1) 비록 유배자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으나 일정한 구역에 자신들만의 주거지를 형성하여(참조. 에제 3,15; 에즈 2,59; 8,17) 공동생활을 하였다.(참조. 에제 8,1; 14,1; 33,30 이하)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낯선 이국땅에서 일시적인 삶을 사는 채류자로 생각하였고 자신들의 고향 시온을 그리워하는 이방인의 삶을 살았다.(참조. 시편 137)

기원전 539년 바빌론 제국을 무너뜨린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이듬해에 필리스티나에서 유다인 공동체의 제의를 복구하는 포고령을 공포하였다.(참조. 에즈 1,2~4; 6,3~5) 이에 따라 바빌론에 있던 일부 유다인들이 2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지만 그 수는 2만을 넘지 못하였고 새로운 땅에서 고난과 궁핍과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했다. 당시 유다지방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이 자기네의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고, 유다 땅에 남아 있던 유다인들은 유다 땅을 자신들의 소유지로 여겼기에(참조. 에제 33,24) 조상의 땅을 되찾으려는 귀환자들은 조상들의 땅에서 자기 민족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유배에서 돌아온 에즈라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쇄신을 위해 모세의 율법을 다시 선포하였다.(참조. 느헤 8~10장)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제의공동체에서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공동체로 재조직되었다. 그리고 이민족 여성들과 혼인을 한 유다인들이(에즈 9,1~4) 에즈라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하였다. 하지만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그 주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방세계를 멀리하는 배타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다른 한편 유다인들은 다른 민족들도 언젠가는 회심하여 하느님을 예배하리라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었다.(참조. 토비 13,11; 14,6 이하; 제1에녹 10,21 이하) 하느님도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며(12족장의 유언 중 레위의 유언 4,4) 이스라엘과 나란히 의로운 이방인들도 구하실 것이라고 믿었다.(납달리의 유언 8,3) 이방인들 앞에서 신앙의 증거를 보여주어야 하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고(토비 13,3) 유다인들이 특유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인종상으로는 본질적으로 우월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예. 집회 10,19~22) 개종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매우 기뻐한 유다인들이 있었다.(참조. 유딧 14,10)

[월간빛, 2012년 7월호, 김명현 디모테오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다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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