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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하느님 이야기1: 오늘날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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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6-11 ㅣ No.430

조규만 주교의 하느님 이야기 (1) 오늘날의 하느님


하느님 말하지 않는 자본주의 시대

 

 

그리스도교 신앙인은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이자 구원자, 완성자로 고백한다. 이 세상은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됐고, 그분에게서 완성된다. 이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교회 역시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서는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인간의 행복도 하느님을 벗어나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사실 오늘날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옛날에는 하느님이 중심이었다. 특히 중세 유럽은 모든 것이 하느님 중심이었고 세상만사는 모두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종교가 밀려나기 시작했다. 과학이 인간 행복을 만들어줄 수 있다고 여기게 됐다.

 

생명공학이 발달하면서 모든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그것이다. 황우석 박사가 그 예다. 난치병을 다 고칠 수 있다는 주장에 정부 등에서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그의 실험은 인간 생명인 배아를 파괴하는 것이었고, 논문은 조작임이 드러났다.

 

요즘 사람들은 과학이 행복을 줄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래서 하느님보다 과학을 따르려는 경향을 보인다. 1960년대 미국과 구소련이 인간을 우주에 보내려 경쟁했다. 소련이 기술이 더 앞서서 가가린이라는 우주 비행사가 먼저 우주를 다녀왔다. 가가린은 당시 인터뷰에서 “우주에 신은 없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미국 우주비행사가 달에서 돌아 왔을 때는 “달에서 본 우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하느님을 찬미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

 

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가 추기경 시절 쓴 “그리스도 신앙, 어제와 오늘”이란 저서에는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를 유다인 전설을 인용해 설명하고 있다. 유다인 전설은 이렇다.

 

하루는 계몽주의 무신론자가 하느님이 없다는 사실을 논증하겠다며 유명한 유다교 랍비를 찾아갔다. 사제관에 갔더니 랍비가 깊은 생각에 잠겨 걷고 있었다. 무신론자는 랍비가 “혹시 그럴지도 모르지” 하며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이어 무신론자의 주장을 들은 랍비는 “자네는 하느님이 없다고 논증했고, 다른 사람은 하느님이 있다고 논증했는데 내게 하느님을 대령해올 재간은 없네. 그런데 한 번 잘 생각해보게. 혹시 계실지 모르니까” 하고 말했다. 결국 ‘혹시’라는 무서운 말 한마디에 계몽주의자가 항복했다는 이야기다.

 

교황님은 신자나 무신론자나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누구나 제 나름대로 유혹과 더불어 신앙을 지니고, 유혹과 더불어 불신을 지니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고 있으면서도 가끔 ‘하느님 계시는 것 맞나? 혹시 안 계시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마련이고, 아무리 안 계시다고 주장하는 무신론자들도 ‘혹시 하느님 계시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신앙인과 무신론자의 차이가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같은 사건을 놓고도 주관적 입장에 따라 사물을 다르게 보고 체험하게 된다. 물컵에 담긴 물이 컵 모양에 따라 형상이 달라지는 이치다.

 

진리는 인간의 시각에 따라 또는 상대적 체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 시대에 와서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만 진리가 된다. 점차 인간이 검증할 수 있는 것만 이야기하게 됐다. 하느님이 학문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현실을 맞게 된 것이다.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는 오늘의 상황을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다. 몸통과 귀, 코, 등 자신이 만진 것이 코끼리 전부라 여긴 시각장애인들은 결국 자기 체험만으로 싸운다. 이런 현상 속에서는 하느님을 말하기 어렵다.

 

교황님은 또 어릿광대와 어린 아이를 통해 이야기한다. 어느 덴마크 곡마단이 공연 중에 불이 나자 어릿광대는 마을 사람들에게 불이 났다고 진실로 호소하지만 사람들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별 쇼를 다 한다’고 생각하고 어릿광대가 말하면 할수록 더 웃는다. 결국 곡마단은 불타고 불이 번져 마을도 다 불에 타버린다.

 

그리스도인의 처지가 어릿광대와 다를 바 없다. 어릿광대가 사제의 모습은 아닐까. 분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고 동네에서 호소했다면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였을 것 아닌가. 그리스도교도 분장을 지우고 의상을 벗어 던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나아가 하느님을 진지하게 이야기하고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정약종 선생의 “주교요지”를 보면 하느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어느 부모가 아들이 살아갈 길이 막막하자 전답을 내줬다. 그것을 일궈 살 수 있게 되자 아들은 논밭에 가서 절을 하더라는 얘기다. 부모가 아닌 논밭에 말이다. 인간을 살게 하려고 태양과 달, 별을 줬더니 하느님이 아니라 그것에 절하는 것과 같다.

 

공산주의 세계에도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다. 타티야나 고리체바라는 여성이다. 흐루쇼프 시절 청년 지도자였다. 그는 어느 날 한 교수가 공산주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을 듣고 동방교회 사제를 찾아가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로 완전히 방향을 전환한다. 정보기관인 KGB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목숨을 잃을 수 있을 정도로 위험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서구 사회로 망명한 그는 자유가 넘치면서도 하느님을 말하지 않는 서구사회를 고발한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는 향수 광고 따위가 대형간판으로 서 있어 마치 중요한 것인 양 여기지만, 영혼과 구원 등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사제들도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하느님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평화신문, 2011년 6월 5일, 정리=이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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