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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리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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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9 ㅣ No.423

[본당신부의 지상 교리]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아름다운 이름이고, 가슴 설레는 이름입니다. 그 옛날 박해시절에는 이 이름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두려움을 가지고 경건하게 고백해야 할 이름입니다. 이 말마디는 ‘예수’라는 한 인물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 곧 구세주란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하더라가 아니라 바로 ‘나의 구원자’란 뜻입니다. 엄청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렇게 불리었습니다(사도 11,26). 당시 유다교인들과 구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명칭은 우리 정체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우리 믿음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저는 사제수품 때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공동번역, 필리 1,21)란 말씀을 기념 성구로 선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앎은 사랑하고, 닮고, 따르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예수를 알면 내 삶의 의미가 밝혀진다고 보았습니다. 생각건대 20대 초반 내 삶에 갑자기 개입하셔서 내 인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에게 참된 삶에 대한 갈망을 넣어주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살아야 될 의미요 가치였습니다. 그분과 함께 죽을 때 그분과 함께 살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뿐! 몸이 따라주지 않습니다(마태 26,41). 그래서 이렇게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말로만 당신을 사랑하고 따르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제가 깊이 깨닫게 해주십시오. 저를 다시 찾아주시고 당신의 빛으로 밝혀주십시오.’

 

누군가가 “네가 가톨릭 신앙을 가졌다 하는데 무엇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을 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사도신경을 그대로 외우면 됩니다. 우리의 믿을 교리는 사도신경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 사도신경의 2/3에 해당하는 분량으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이 선포한 순서대로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순명하여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

 

예수님은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마태 1,18),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 분(요한 1장),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셨지만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을 취하신 분(필리 2,6-7 참조) 이시며, 병든 이, 마귀 들린 이들을 치유해 주시고 이방인, 과부, 세리와 같은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되신 분이시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작은 이 하나에게조차 당신과 일치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유다 지도자나 빌라도와 같은 권력자들에겐 눈엣가시처럼 되고 맙니다. 자기들의 기득권 때문일 겁니다. 이상하게도 백성들도 한통속이 되어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재물과 편의주의에 야합하는 비겁한 우리의 군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죽음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타살이 아닙니다.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분의 선택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여 세상의 죄를 없이하는 십자가상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만을 고집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정체가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자주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는데 바로 이 점, 당신의 신원과 정체를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심화시키는 시간이었습니다.

 

사도신경에 보면 저승에까지 내려갔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분 강생의 끝은 이처럼 한계가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에서 제외되는 이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은 물론이고 종교까지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현세와 내세, 이미 죽은 모든 이에게도 그분은 구원의 빛입니다. 그분은 세상 모든 이들을 염두에 두십니다. 모든 이를 통합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염원입니다. 우리는 이분을 일컬어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하느님으로 섬깁니다.

 

 

일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분은 죽으셨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  부활은 과학의 차원에서 증명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시도들이 동원되어 납득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죽은 시신이 되살아나는 ‘강시’ 정도일 겁니다. 웃기는 개그지요.

 

부활하신 주님은 모습으로는 생전의 그 모습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과 가까이 지냈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제자들도 쉽게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분은 여러 차례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시며, 그곳에서 당신을 볼 수 있다는 말씀을 전하십니다(마태 28,10; 마르 16,7). 또한 부활하신 뒤 생전의 이 말씀을 다시 상기시켜 주십니다(루카 24,6).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갈릴래아는 그분이 제자들과 함께 살았던 곳입니다. 곧 일상입니다. ‘일상으로 돌아가서 생전에 내가 들려주었던 말을 잘 새길 때 나를 만난다.’ 부활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된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상처를 가지고 계십니다. 고달픈 인생살이의 평범한 사람들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요한 20,15; 루카 24,17; 요한 21,3 등).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 가르침대로 산다면 우리 주변에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다. 이기적인 나를 넘어서서 모든 이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그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라. 모든 사람을 통합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 삼으시는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나는 썩어 죽는 한 알의 밀알이 되지만, 더한 나로 다시 태어나 수많은 새 생명으로 살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악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실제로는 두려움의 실체가 아니다. 부활 신앙은 이처럼 막강한 것이다.’

 

 

예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새겨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무조건적인 웰빙(well-being) 을 말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적당주의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라.” “목숨을 건지려 하지 말고 오히려 복음 때문에 나 때문에 목숨을 던져라.” 그래야 산다는 겁니다.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행복과 구원은 파스카적입니다. 고통과 죽음 없이 기쁨과 생명을 약속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희생양이 되시어 파스카 진리가 참됨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의 의도는 명백합니다.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준행하고 그분의 행적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4개 복음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필사를 권합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분명 스승이고 우리 삶을 이끄는 큰 별입니다. 그분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 숨 쉬는 분으로 우리와 우정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물론 주도권은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먼저 말을 건네시고 “와서 보아라.”(요한 1,39)고 초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대답만 해놓고 가지 않는 작은아들이 되어선 안 되겠지요. 회심을 동반한 전적인 실존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적으로 바꾸어져야 합니다. 기도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무조건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이 우리 안에 새겨져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과 순명에 젖어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적인 기도입니다.

 

그분은 작은 이들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우리도 그리해야 합니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끄는 방법으로 스스로 가난한 이가 되셨습니다(2코린 8,9). 강생의 신비에서 시작해서 먹히는 존재로 오시는 성체성사까지 그분의 전 생애가 그렇습니다. 우리도 자발적 가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려는 것이고, 그 내면엔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함께한 그분의 사목적인 지향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순명하고,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고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마태 6,33).

 

주님의 주된 관심사는 하느님 나라였습니다. 우리 역시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오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이미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맛을 보고 그 나라를 꿈꾸며 희망해야 합니다. 적어도 하느님 나라의 작은 표지를 세우는 우리(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지체를 내 피붙이로 여기며 더불어 사는 것, 친교를 나누고 사랑하고, 싸우지만 다시 용서하고 더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유언으로 남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시오.”라는 말씀 역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씀 외에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 의정부교구 신부. 의정부주교좌성당 주임을 맡고 있다.

 

[경향잡지, 2011년 2월호, 서춘배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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