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2: 한국 전쟁의 발발, 전쟁의 비극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108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2) 한국 전쟁의 발발, 전쟁의 비극


공산군의 무자비한 공격… 최후까지 피 흘리며 성당 지킨 사제들

 

 

해방 후 북한 정권에 몰수됐다가 한국전쟁으로 전소되다시피 한 덕원수도원.

 

 

“1950년 6월 25일은 신학교 교수인 공베르(파리외방전교회) 신부님의 사제 수품 50주년 금경축 날이었다. 내가 총급장(총학생회장)인 데다 공 신부님은 소신학생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터라 학생들을 동원해서 금경축 행사를 정성껏 준비했다. 그날 금경축 행사를 다 치를 때까지도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중에서)

 

“진석은 주일 아침 간간이 들려오는 전투 소식을 접했다. 처음에는 38선에서 양측이 국지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혜화동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나왔는데 혜화동 로터리에서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돈암동 쪽에서부터 길가로 흙먼지를 뒤집어쓴 국군 병사들, 전투에서 다친 부상병들이 내려왔다. 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는 패잔병들처럼 보였다. 주일 오후에 그 모습을 보고 진석은 처음으로 전쟁을 실감했다.”(「추기경 정진석」 중에서)

 

 

전쟁 대비가 전무했던 남한

 

김 추기경과 정 추기경의 회고록에 묘사된 1950년 6월 25일이다. 때마침 주일이기도 했다. 서울 혜화동 신학교에선 공베르 신부의 금경축 행사가 열렸고, 혜화동성당에선 평소와 다름없이 미사가 봉헌됐다. 북한의 침입에 남한이 얼마나 무방비 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남한에 폭격을 가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옹진반도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춘천 주문진, 정동진까지. 동서를 가로지르는 38선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침략해 왔다. 소련제 탱크 240여 대를 앞세운 20만 명의 병력은 북한이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해왔음을 보여줬다.

 

반면 남한은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무했다. 북한의 병력 증강과 무기 이동을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 자정에는 북한에 대한 경계강화조치를 해제했다. 다음날인 24일은 토요일이라 전방부대 군인 3분의 1 가량이 외출을 했다. 농사일이 가장 바쁜 시기여서 농번기 휴가를 떠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3일 만에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함락당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군의 남침을 비난하며, 남한에 군사지원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 미국 대 소련의 싸움이 된 한국전쟁은 세계가 주목하는 국제전쟁이 됐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대한민국은 다시 외세의 영향 아래 놓였다. 남한은 미국, 북한은 소련이 관할했다. 이후 1948년과 1949년 남북은 각각 단독 선거를 치르며, 두 나라로 갈라졌다. 한국전쟁으로 분단은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신자들과 생사를 같이한 남북 사제들

 

예상치 못한 전쟁에 가톨릭교회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서울교구는 전쟁이 터진 다음 날 긴급 교구 참사회의를 열었다. 본당 사제는 본당에 남아 신자들과 생사를 같이하고, 나머지 사제와 수도자들은 남하하기로 했다. 다른 교구도 비슷했다. 본당 사제들은 대부분 끝까지 본당을 지켰다. 그만큼 희생도 컸다.

 

서울 도림동본당 보좌였던 이현종 신부는 전쟁 발발 뒤 첫 주일인 7월 2일, 아침 미사를 마친 뒤 들이닥친 공산군에게 피살당했다. 신원을 묻는 공산군에게 이 신부가 “나는 이 성당 신부요”라고 하자, 공산군은 즉시 이 신부 가슴에 총을 한 발 쐈다. 쓰러진 이 신부는 “나를 죽이는 게 그렇게 원이라면 마저 쏘아라. 너희가 내 육신을 죽일 순 있어도 영혼은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다”고 일갈했다. 공산군은 그 자리에서 총 두 발을 마저 쐈다.

 

춘천교구 삼척본당 매긴 신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성당에 모인 신자들에게 피란을 독려하며 자신이 가진 돈과 물건을 나눠줬다. 함께 피하자는 신자들에게 그는 “나는 최후까지 성당을 지킬 것입니다. 천주님을 부인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톨릭 신앙으로써 천주님을 증거할 것을 각오했습니다”고 했다. 얼마 뒤 성당에 난입한 공산군을 보며 매긴 신부는 의연하게 성당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공산군은 그를 체포해 며칠을 가둬두고 고문하다가 총살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피난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내 임지를 두고 떠날 수 없다”며 자리를 지켰다. 교황 사절 패트릭 번 주교, 춘천교구장 퀸란 주교, 광주교구장 브렌난 주교 등은 다른 이들을 먼저 피신시킨 뒤 자신들은 공산군에 체포돼 죽음을 면치 못했다.

 

북한 가톨릭교회는 이미 전쟁 전에 무너진 상태였다. 소련군은 해방 때부터 교회 재산을 약탈하고 성직자 학살을 이어갔다. 토지개혁의 이름으로 덕원수도원을 몰수했고,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를 비롯한 한국 사제들은 물론 외국인 수도자와 사제들도 닥치는 대로 체포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6월 24일 밤 공산군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신부 11명을 “미 제국주의자들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모두 체포했다. 1945년 주교 3명, 사제 80여 명, 수도자 180여 명, 신자 5만 7000여 명이었던 북한 가톨릭교회는 한국전쟁으로 잃어버린 교회,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됐다.

 

- 한국전쟁 중 피란민들이 모여 살던 부산 천막촌.

 

 

3일 만에 빼앗긴 서울, 줄지은 피란 행렬

 

북한군에 3일 만에 서울을 내준 남한 정부는 전세를 회복하지 못한 채 대전으로 대구로, 8월에는 부산까지 이동했다. 국민들의 피란 행렬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이를 업고, 봇짐을 머리에 이고 줄을 지어 걷고 또 걸었다. 버스와 기차는 만석이었고, 지붕까지 사람들이 올라탔다. 발 디딜 틈만 있으면 문에 매달려서라도 이동했다. 거리에선 실종과 죽음, 폭력과 약탈이 넘쳐났다. 살기 위해 피란길에 올랐지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었다.

 

“1950년 12월 19일 …. 기차 지붕 마루에 올라탄 어떤 어머니가 아이들을 줄로 묶어 차고 있었는데, 어머니 자신이 졸다가 떨어져서 아이들마저 함께 죽어버렸다. … 어떤 젊은 부인이 아기를 업고 죽을 힘을 다해 기차 지붕 마루로 기어오르긴 하였으나 워낙 손이 꽁꽁 얼어서 마음대로 아기를 잘 추스르지도 못하였는데 얼마를 가다 젖을 먹이려고 아기를 내려다보니 이미 싸느랗게 숨이 죽어 있었으므로 이 가엾은 젊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곧 미쳐버렸다. 이런 가지가지 참혹한 이야기는 그 어느 하나만이라도 듣는 사람의 가슴이 미어질 노릇이건만 오늘날 이 땅엔 하도 흔한 사실들이어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도 큰 충격을 받지 않으리만큼 우리들의 신경이 무디어 버렸다. 이제 조선 사람의 생명은 버러지에나 무엇에나 비길 만큼이 되었다.”(김성칠, 「한 사학자의 6ㆍ25 일기-역사 앞에서」 중에서)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1월 12일, 박수정 기자]



82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