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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를 찾아서: 해외 성지 (7) 예루살렘 통곡의 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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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해외 성지 (7) 예루살렘 '통곡의 벽' 역사 굴절 딛고 순례객 '소원' 들어주는 희망의 벽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성전의 일부
성전이 파괴되고 불탄 자리에 로마제국은 제우스 신전을 세우려고 했다. 유대인들은 또다시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마저 진압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바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내좇아버린 것이다. 바로 로마가 세계사를 두고두고 말썽거리가 될 일을 저지른 셈이다. 출애급을 통해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잘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그곳에서 내쫓음으로서 오늘날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묘사되어 있는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내 거주가 금지됐다. 로마제국이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정한 동로마 시대에는 일년에 딱 하루, 즉 로마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아브(Av. 여덟번째 달 8일)에만 예루살렘 출입을 허용했다. 아브날이 되면, 유대인들은 파괴된 성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쪽 기단 벽에 머리를 대고 통곡했다.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했다. 서쪽 벽은 유대인들의 통곡으로 늘 젖어있는 것 같았다. 점차 서쪽 벽은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불리어갔다.
성전 파괴 이후 1900년 만에 서쪽 벽 되찾아
유대인들은 로마의 디도 장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고 불태워버린 날 밤 이후 예루살렘의 열쇠는 하늘이 갖고 있다고 여겨왔다. 성전이 불타버린 그날 밤, 망연자실한 랍비가 “이 (예루살렘의)열쇠는 당신이 간수하소서.”라며 예루살렘의 열쇠를 하늘을 향해 던져버렸다는 전승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는 단 하루만 성역에서 기도하는 것을 허락 받았고, 이슬람이 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할 때는 이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가장 가까운 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풍습이 생겼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이후에도 서쪽 벽은 요르단이 차지했기에 유대인들은 접근할 수가 없었다. 정해진 날에만 방문이 허가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히브린의 후예인 이스라엘은 서쪽 벽을 되찾았다.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을 공식적으로 되찾은 것은 서기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약 1900년 만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의 최대 성지이자, 히브리 민족의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통곡의 벽 앞쪽에는 큰 뜰이 건설되어 수천명의 순례 객을 수용할 수 있다.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통곡의 벽에는 기도쪽지 가득
서쪽 벽은 예수가 마귀에게 세차례나 시험당한 성전산의 서쪽 450m의 벽으로 헤롯에 의해서 세워진 성벽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다. 오늘날 통곡의 벽은 두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입구에서 오른쪽(남쪽)은 여자들 구역, 왼쪽(북쪽)은 남자들이 기도하는 구역이다. 남자 구역에 여자 구역보다 세배 이상 크다. 통곡의 벽에는 키파라는 꼬깔모자로 머리를 가린 유대인들이 토라(모세오경)를 읽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항상 볼 수 있다. 24시간 개방되어 있지만 매주 금요일 오후, 해가 저물면서 시작되는 안식일부터는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드는 시간이다. 안식일에는 사진 촬영도 금지된다. AD 70년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때 "돌위에 돌하나 남지 않도록" 무너진 통곡의 벽 아래 부분은 당시 성전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 통곡의 벽 돌틈에는 전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뿐 만 아니라 순례객들도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두고 기도한다. 한가지 간절한 소망은 들어준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매일신문, 2007년 3월 8일, 글 사진 최미화 기자] 0 1,559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