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사목신학ㅣ사회사목

[통일사목] 북한의 인권문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89

북한의 인권문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지난 4월 16일 제네바에서 열린 제59차 유엔 인권위원회는 북한 인권에 관한 결의안을 다수결로 채택하였다(표결의 결과는 찬성 28, 반대 10, 기권 14, 불참 1). 이 결의안의 채택으로 지금까지 직간접적인 인권 피해 당사자와 국내외 일부 인권단체가 주로 제기해 왔던 북한 인권문제가 유엔 무대에서 공식 의제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북한 인권문제를 둘러싼 논의가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도 점차 확산되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북한 인권에 관한 논의는 북한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기여하는 방향보다는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원론적 수준이거나 국내외의 다양한 정치 세력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필자는 국제 가톨릭 평신도 단체이자 유엔에 협의 자격을 가진 비정부기구(NGO)로 등록되어 있는 '국제가톨릭문화지식인운동'(Pax Romana ICMICA)의 사무총장 자격으로 이번 인권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북한 결의안이 추진되고 채택되는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을 토대로 이번 결의안의 의미와 배경을 살펴보고 한국사회와 국제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1. 유엔 인권위원회의 북한 인권 결의안의 의미

 

무엇보다도 이번 유엔 인권위원회 결의안의 가장 큰 의미는 북한 인권문제가 더 이상 남북한만의 민족문제가 아니라 유엔을 통해 국제문제로 확대되었다는 데 있다. 곧 남북한의 특수한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 인권문제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가 북한의 인권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정부나 시민사회의 의사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국제사회가 북한 인권문제를 직접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 결의안은 향후 사태의 전개에 따라 쓴 보약 또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으로 한국사회의 북한 인권 관련 담론은 기존의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다소 원론적 단계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어떻게 접근 또는 개선할 것인가?'라는 실천 단계로 바뀌어나가고 있다. 

 

한편 국내외에서는 노무현 참여정부의 표결 불참 결정을 둘러싸고 약간의 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 사실 한국정부는 유럽 연합이 추진한 결의안에 대해 사전에 알고서 협의에 참여했지만 분명한 입장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이고 '북핵문제'라는 큰 과제와 씨름하고 있던 상황에서 미리 입장과 전략을 마련하지 못한 탓도 크지만 한국정부는 북한 인권을 인권 말고도 통일과 안보라는 또 다른 큰 정책적 과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국내외 인권단체도 유엔의 북한 인권 결의안에 대해 각각 적극 환영, 조심스러운 환영, 비판적 유보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북한 인권은 국내의 인권문제나 미얀마와 같은 제3국의 인권문제를 다루는 방식으로 접근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총체적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려면 북한 인권의 실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중요하지만, 이번에 결의안을 채택한 유엔, 특히 유엔 인권위원회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국제문제로 확대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실효성 있는 실천전략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북한 인권의 현실 자체에 대해서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의 홈페이지 www.nkhumanrights.or.kr 참조).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듯이, 이번 북한 인권 결의안이 유엔 인권위원회 차원에서 채택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엔 인권위원회의 하급기관이면서 정부 대표가 아닌 26명의 독립적인 인권 전문가에 의해 구성된 유엔 인권소위원회는 이미 지난 1997년과 1998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인권 결의안을 채택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번 결의안은 1998년 이후 북한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권소위원회의 상급기관인 인권위원회가 재확인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번에 인권위원회는 북한뿐만 아니라 미얀마, 부룬디, 벨라루스, 투르크메니스탄 등 여러 나라에 대한 인권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유엔 인권위원회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다. 

 

 

2. 북한 인권 결의안의 정치적 성격과 결점

 

이번 결의안이 국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채택 시기가 이라크 사태와 북핵 사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유엔 인권위원회 취재 외신기자와 국제 인권단체 활동가 대다수는 필자에게 "왜 하필 올해 북한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곧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의도에 대한 의구심과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던 이들은 이라크와 이란과 함께 미국에 의해 3대 '악의 축'으로 지목된 북한의 인권 결의안을 결코 우연이나 별개의 사건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근 10년 간 연례 행사처럼 추진하던 중국의 인권 결의안을 이라크 침공에 대한 '묵인'의 대가로 '포기'하고 또 수년간 지속되어 왔던 이란에 대한 결의안도 뚜렷한 이유 없이 유럽 연합이 '포기'하면서 인권위원회의 나라별 결의안에 대한 이중 잣대 시비와 음모론이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곧 미국과 영국, 호주의 연합국이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대량살상무기 이외에도 인권 회복과 민주주의 수호를 이용했듯이, 북한 인권 결의안도 상황에 따라서는 '미국의 북한 목조르기와 침공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감 있게 다가왔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국제 사면위원회를 비롯한 대다수의 공신력 있는 국제 인권단체들은 북한 인권 결의안에 대해 즉각적인 환영 성명을 발표하지 않았다. 인권이 냉혹한 국제정치의 장에서 얼마나 자주 쉽사리 강대국, 특히 최근 미국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남용되는지 숱하게 목격하고 경험한 국제 인권단체들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이중 잣대 시비 또는 음모론은 유엔 자체 그리고 유엔 인권위원회의 정치적 성격을 알고 나면 결코 놀랄 일은 아니다. 필자를 포함해서 제네바의 대다수 인권 전문가들은 유엔 인권위원회가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가장 정치적인 유엔기구라고 하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곧 유엔 인권위원회는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국익과 충돌하고, 인권을 명분으로 국익이 경쟁하고 타협하는 다자간 외교의 현장이다. 

 

인권 외교에는 국익 증대를 위해 인권을 이용하는 현실 외교와 외교적 수단을 이용해 인권을 증진시키는 인권운동의 양면이 포함돼 있다. 따라서 인권위원회의 결의안에는 원칙으로서의 인권과 현실로서의 정치가 뒤섞여 있다. 따라서 유엔 인권위원회의 결의안을 마치 인권에 관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중립적이고 초국가적인 국제기구가 법적 도덕적 판단을 내렸다고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반대로 강대국, 특히 미국과 유럽 연합의 정치적인 음모라고 그 의미를 깎아내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의안 내용은 관점에 따라서 현실을 다소 과장했거나 특정 부분을 부풀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재 접근 가능한 북한 인권에 관한 공식, 비공식 자료에 비추어 볼 때 결의안의 정당성 자체를 훼손할 만한 심각한 의도적 조작이나 왜곡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립적인 국제 인권단체들이 따르는 인권 원칙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결의안의 내용에 여러 부분에서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발견된다. 

 

먼저 아쉬운 점은, 당장 시급한 문제인 중국 영토 내의 탈북자 문제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주된 이유는 '중국을 자극해서 결의안 통과 자체가 어려워질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필자가 보기에 북한 내부의 인권문제와는 달리 탈북자 문제는 국제사회가 힘과 지혜를 모으면 상당 부분 해결이 가능할 수도 있는, 현실적으로 접근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의안의 가장 큰 약점이자 결함은 북한 인권을 북한의 내부문제로 한정해서 파악한 일방적 시각에 있다. 대부분의 인권침해가 그러하듯이 침해 현상 자체는 한 국가의 영토 안에서 발생하지만 원인은 국내와 국외적인 요소가 복합적인 경우가 많다. 특히 경제사회적 권리나 발전권의 경우가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영양실조와 기아문제를 단순히 북한의 정치경제 체제 문제로 환원해서 북한정부만을 비난하는 것은 객관성이 결여된 접근으로 보인다. 특히 탈냉전 이후 지속된 경제봉쇄조치에 따른 체제 존속에 대한 위기감과 악화된 북한의 에너지 위기 등 안보와 경제 개발의 연관성에 대한 고려 없이 인권을 독립 변수로 취급, 분리해서 다루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북한의 모든 인권문제가 환경재난 또는 미국의 경제봉쇄조치에서 기인한다.'거나 '북한이 요구해 온 북미불가침협정이 맺어지면 북한의 인권문제가 자동적으로 해소 또는 해결된다.'는 또 다른 환원론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위에서 간단히 설명했듯이, 이번 결의안에 담긴 북한의 인권에 대한 불균형적이고 파편적 인식 때문에 북한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별다른 효과를 가져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가지고 있다. 곧 이번 결의안이 어느 정도 정당성은 확보하고 있지만 실효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이미 북한 당국은 이 결의안을 음모론의 입장에서 판단해 '요구사항 수용은 물론 인정조차 거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결의안이 채택된 지 약 3개월이 지났지만 결의안의 실행에 관한 이렇다 할 진전이 거의 없다. 

 

물론 지금까지의 답보 상태를 이유로 결의안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깎아내리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필자는 답보 상태의 일차적 책임이 북한 당국의 폐쇄적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거의 모든 국가가 자국에 대한 인권 결의안을 일단 부인하는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북한정부의 태도에 대해 너무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3. 북한의 인권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전략

 

정작 중요한 문제는 결의안을 활용하여 어떻게 북한을 인권 대화의 장으로 초대하여 점진적인 인권 개선의 길로 유도하느냐에 있다고 본다. 알다시피, 결의안은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비판적이지만 실천의 측면에서는 외부 세계, 특히 유엔과의 대화와 협력을 통해 인권을 개선하자는 권유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이를 음모론의 관점에서 필요 이상의 의구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대한다. 따라서 북한 당국이 결의안의 실행 내용을 합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효과적인 정책을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인내와 지혜가 필요하고 장기적인 전략이 있어야 한다. 

 

'인도주의적 개입'과 '인도주의적 침묵'의 극단이 아닌 대화와 협력을 통한 북한의 인권문제 개선의 길은 한국정부나 인권단체 또는 시민사회 혼자만의 역량을 넘어서는 과제이다. 유엔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주변 강대국 가운데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반도의 핵문제가 그러하듯이 북한의 인권문제도 이들과 협력하여 풀어나가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4. 북한과 한국 정부의 역할

 

가장 먼저 당사국으로서 열쇠를 쥐고 있는 북한정부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북한정부는 결의안을 무조건 배척하기보다 마땅히 최대한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감출수록 의혹은 더 커지고, 부정하고 배격할수록 국제사회의 압력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유럽 연합을 비롯해 북한 결의안을 주도한 대다수 국가가 결코 북한에 적대적이지 않다. 북한은 이들의 '선의'를'선용'해서 자국의 인권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결의안의 권고대로 북한의 개선되지 않는 기아 상황과 관련하여 식량권(right to food)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의 방문을 시범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점차 다른 영역의 인권 관련 제도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기존의 유럽 연합과 인권 대화를 지속하고, 결의안이 요구하듯이 유엔 인권고등판무관과의 포괄적인 대화를 통해 인권 개선의 국내외적 장애에 대해 논의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본다. 

 

한국정부는 북한정부의 이러한 노력을 돕고 그러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특히 한국정부는 90년대 초 이전의 군사 독재 시절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국제 인권단체에게 인권 침해국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국내의 인권운동은 우리나라의 인권 개선에 유엔을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인권 개선을 위해 외부적 압력은 필요하지만 내부에서의 개혁을 근본적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특히 인권을 자유롭게 논하고 행동을 통해 표출할 수 있는 시민사회가 없는 현 북한의 현실에서 북한정부가 정치적 태도를 바꾸어 인권에 긍정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는 외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동시에 그동안 별도로 진행되어 온 통일, 안보, 남북 경제협력 정책을 인권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인권을 모르거나 외면하고는 통일정책의 정당성과 실효성을 담보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5. 한국 인권단체의 역할

 

현 단계의 정치적 환경에서는 한국정부보다 한국의 인권단체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시민사회, 특히 주류 인권단체가 더 적극적으로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나서야 한다. 그러나 공동의 행동에 나서기에 앞서 극복해야 할 내부 과제들이 있다. 

 

일부 인권단체가 보여온 폐쇄적 민족주의 감정에 기댄 '북한 눈감아주기' 또는 냉전적인 반북한 정서를 등에 업은 지나친 '북한 때리기'는 북한의 실질적인 인권 개선과 평화 통일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북한의 인권문제에(만) 전념하고 있는 인권단체와 남한 인권문제에(만) 전념하는 인권단체 간에 서로의 이해와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의 좌편향과 우편향은 사상과 이념의 다양성 및 관용의 차원에서 인권운동에 필요하고 바람직하다. 양자는 공통의 기반을 만들어서 아직 과거 냉전 이데올로기에 취해있는 극우와 극좌 세력이 한국의 시민사회를 이념 투쟁의 장으로 몰아가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철저하게 피해자의 눈으로 현실을 보면 민족, 체제,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모든 인권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공분이라는 보편적 인권 감수성을 공유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바탕으로 관심은 있어도 역량의 한계와 과거의 관성 때문에 미처 실천하지 못하는 영역을 다른 단체가 대신하고 있다는 역할 분담론의 관점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내편 아니면 적'에서 '적이 아니면 친구'라는 더욱 적극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렇게 상호신뢰와 연대로 맺어진 국내의 인권단체들은 몇 가지 연대사업을 전개해 볼 수 있다. 

 

먼저, 식량과 같은 인도주의적 지원을 통한 북한의 인권 개선 노력을 국내외에서 강화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식량 배급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여야 하지만 이것이 전제조건이 되어 정치적 무기로 남용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굶어죽고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에게는 인권에 대한 백 마디 말보다 한 끼의 밥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 국내뿐만 아니라 이번에 결의안을 추진하고 지지한 나라들을 대상으로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인도주의적 지원을 증대할 것을 결의안에 근거해 요청할 수도 있다. 

 

둘째, 탈북자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탈북자 문제는 북한 내부의 식량난과 관련이 있지만 일단 중국으로 들어온 탈북자는 인신매매, 노예제 등 온갖 인권 침해의 피해자가 된다. 그리고 강제로 송환되는 경우에는 구금과 징역 또는 처형을 당하기까지 한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 당국이 탈북자를 북한으로 강제 송환하는 것을 중지하고, 탈북자에게 조속히 난민 지위를 부여하거나 안전지대를 설치하는 등의 조치로 중국에서의 탈북자 인권 침해를 제도적으로 방지하는 문제를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강력히 거론할 필요가 있다. 탈북자 문제야말로 본질적으로 국제 인권문제로 유엔과 같은 기구가 더욱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본다. 

 

셋째, 북한의 인권과 관련하여 국내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다. 우선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들의 인권 보호와 증진에 힘써야 한다. 탈북 동기와 상관없이 한국사회에서 보통사람과 같은 수준의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특별한 관심이 요청된다. 이와 함께 남북한의 반인권적 악법 개혁도 동시에 추진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남한의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그동안 국가보안법은 오히려 북한의 인권 현실을 제대로 아는 데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사형제도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도 마찬가지이다. 북한 인권 결의안을 채택한 유엔의 여러 인권기구는 오래전부터 한국정부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것을 권고하였고 한국의 여러 반인권적 법과 제도의 개선을 요구해 왔다.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서라도 남한의 인권 현실을 유엔이 설정한 국제 기준 이상으로 하루빨리 끌어올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넷째, 이런 과정에서 공신력 있는 국제 인권단체의 참여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의 인권문제가 지닌 복합적 성격을 고려하여 북한의 인권문제만을 다루는 단체만이 아닌 여러 나라 인권문제나 특정 주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국제 인권단체의 폭넓은 참여가 중요하다. 이를 통해 일부 특정 단체의 이념적 편향을 극복할 수 있고 더욱 효과적으로 여론과 재원을 동원하여 시너지 효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한편, 인권을 남북 평화 통일의 입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남북한 당국과 대다수 정치인들은 인권을 통일과 경제발전에 장애 또는 장식 정도로 이해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남북한 정부 모두 유엔이 설정한 국제적 인권 기준을 통일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곧 '어느 체제가 더 우월하냐'는 체제 경쟁이 아니라 '남북한 모두 국제 기준보다 얼마나 낙후되어 있느냐?'는 자기 반성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권이 통일 과정에서 정치화 또는 수단화하는 것을 막고 안전장치 또는 나침반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역할

 

국제사회의 경우 직접적 개입보다는 한국정부와 인권단체를 측면 지원하는 역할을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미국, 유럽, 일본에 있는 인권단체의 경우 그들의 '순수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관심이 자국의 외교정책이나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략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을 조심해야 한다. 따라서 독자 행동보다는 공동의 목표와 전략을 세워 국내 인권단체와 공동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 유럽 연합과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한 우호적 국제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유엔과 함께한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핵위기를 평화적으로 조속히 해결하는 과제가 급선무이다. 이 문제의 해결 없이 인권만 주장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국가체제 자체가 위협에 처한 상황에서 국가 안보보다 국민 개개인의 인권을 우선시할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곧 '북한의 핵무기 개발 포기와 체제 안전 보장'을 통해 한반도 긴장의 구조적 요인이 하루빨리 제거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인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다. 체제 안전을 인간 안보의 관점에서 보면 인권이 체제 안전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제안을 하나의 제도적 틀로 묶는 작업은 개별 사업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사실 둘은 상호보완적인 성격을 지닌다. 예를 들어, 70년대 냉전시기 서방과 소련 사이에 맺어진 헬싱키 협약처럼 안보, 경제협력과 인권을 하나의 묶음으로 협약을 맺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가치가 있다. 이 모델의 관점에서 보면 북한 인권, 남북 경제협력, 한반도 핵위기, 평화통일 및 동북아 평화와 안정은 하나로 묶여진다. 이는 인권의 상호의존성, 곧 인권을 민주주의, 평화, 발전과 함께 접근해야 한다는 원칙에도 부합한다. 이러한 틀에는 국가를 대표한 정부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특히 인권단체의 참여가 보장되어야 하고 국가인권위원회도 이 틀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지역 차원에서 다자적이면서 종합적인 대화 협력의 제도적 틀이 없는 동북아의 정치 현실에서 이러한 시도는 초기에 우여곡절을 겪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신뢰 증진과 갈등 예방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물론 주변 당사국이 이러한 틀을 수용하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북한의 인권문제가 북한 내부의 문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북아 전체, 더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의 인권을 개선하고 제도적으로 연결시키는 장기적 구상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유엔의 국제 인권 기준에 비해 매우 낙후된 동북아 지역의 인권 현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다자적 이해 당사자 대화 모델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이러한 접근은 예언자적 신앙인의 모범인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으로 그 뿌리가 소급될 수 있고, 최근 국내외에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동북아 중심국가론' 또는 '시민사회 주도의 동북아 공동체론'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된다. 더 넓히면 '동북아 문명론'으로까지 확대해 볼 수도 있다. 곧 대응하기에 따라서 북한의 인권문제는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위기가 아닌 호기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비로소 북한 인권 결의안은 한국사회를 분열시키고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는 양날의 칼이 아니라 축복받은 원죄(blessed sin)가 될 것이다.

 

[사목, 2003년 8월호, 이성훈(팍스 로마나 사무총장)]



55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