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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민족의 화해와 일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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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81

민족의 화해와 일치의 길

 

 

I. 머리말

 

해마다 6월아면 우리는 민족 상잔의 고통을 기억하게 된다. 1950년에 발발 하여 1953년에 휴전 협정을 체결한 한국전쟁은 민족 구성원 거의 전부에게 전쟁의 피해를 안겨주었다. 남북한에서는 이 전쟁 기간 동안 사망자 120만여 명을 포함해서 모두 520만여 명의 인적 손실을 보게 되었고, 1천만 이산 가족이 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 나라의 인구 가운데 절반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전쟁의 피해를 직접 입었다는 말이 된다. 

 

이 전쟁으로 인해서 남한과 북한은 영토적 분단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분단으로 인하여 1천여 년 이상 지속되어왔던 역사 공동체 내지는 문화 공동 체로서의 민족은 심각한 시련을 겪었다. 이에 남북한에서는 전쟁에 대한 피해 의식을 반추하면서도 전쟁 시 자신의 정당성을 강조하여왔다. 즉 오늘날 남북 한의 여러 사람들은 이 전쟁을 이른바 '해방 전쟁’으로 규정하거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성전’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자신이 수행한 전쟁의 정당성이 계속해서 주장되는 가운데 남북한 어디서나 민족의 통일을 위한 자기나름대로의 열망은 지속되어왔지만 분단의 장벽은 두터워만 갔다. 그리고 통일을 향한 그 열망에 비례하여 남북한 모두는 상호의 존재를 부인하고자 하는 시도를 강하게 전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지난날의 통일 논의 가운데 상당 부분은 진정한 평화나 민족의 화해 및 일치를 파괴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복 50주 년을 기념하면서 지난날의 통일 논의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를 느끼게 되며, 민족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방안들을 새롭게 모색해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우리 교회도 지난날의 전쟁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민족 통일을 위한 자신의 견해가 가지고 있는 정당성과 한계성을 분석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에 분단 체제가 수립된 이후 교회에서 전개한 민족의 통일을 위한 노력 가운데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므로 본고에서는 이에 관한 언급은 생략하고 제한적 측면으로 생각되는 부분만을 간략히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본고에서는 휴전 이후 교회가 제정하여 봉독했던 공식적인 기도문 등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세가 무엇인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II. 기도문에 스며든 분단 의식 

 

우리 교회에서 봉송하는 기도 가운데 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는 기도문으로는 「가톨릭 기도서」에 수록되어있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와 「미사 경본」에 수록되어있는 6월 25일 '남북 통일 기원 미사’의 감사송을 들 수 있다. 지난 날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던 북한에 대한 인식의 실상을 비롯하여 통일에 대한 염원의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기도문들의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이 기도문의 주요 부분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문: 순교자의 왕이신 예수여, 신앙의 자유를 잃은 침묵의 교회, 더욱이 북한의 형제들이 주의 이름과 교회에 대한 사랑과 충성으로 말미암아, 극심한 박해를 받으며, 신음하고 있나이다. 우리가 오늘날 저 시달리고 굶주리는 형제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와 희생을 바치오니, 어여삐 여기시고, 저들에게 빛과 힘을 주시어, 모든 유혹과 시련을 이겨나가게 하소서.(이하 생략) 

 

남북 통일 기원 미사 감사송 : (상략) 주는 우리 민족을 무수한 침략 속에서도, 수 천년 동안 단일 민족의 찬란한 역사를 지니도록 보호해주셨으며, 이백 여 년 전에는 우리 조상들에게,, 기묘한 방법으로 천상 진리를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교회를 세워주셨나이다. 삼 십 오 년 간의 일제 침략에서 해방 시켜주실 때에, 남북 분단의 쓰라린 시련을 허락하시어, 남녘 땅에서는 민족 복음화의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사오나, 북녘 땅에서는 무수한 교우들이 목자들과 함께 순교의 아픔을 겪은 후, 지금은 온전히 침묵 속에 잠겨버렸나이다. 주는 전능하시니,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게만 여겨지는 국토 통일의 길을 열어주시고, 북녘 땅에서도 주를 찬미하는 날을 앞당겨주실 수 있나이다. 그러므로 국토 통일과 북한선교의 희망을 품고, 천상에 계신 한국 순교 성인 성 녀들과 함께 기꺼이 주를 찬미하며 노래하나이다. 

 

이 두 가지 기도문 가운데 「가톨릭 기도서」에 수록된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는 현재 거의 봉송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자료를 통 해서 지난날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북한에 대한 인식과 선교관의 특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 기도문에서는 북한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지난 냉전 시기 구미(歐美)의 교회에서 사회주의 정권 아래에 놓여있던 교회를 가리키는 용어를 직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침묵의 교회’ 라는 용어는 서구사회의 관점에서 그 교회활동이 저조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적 교회에 붙인 부정적인 개념이다. 그리고 이 말은 신학적이거나 논리적 표현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시적(詩的) 표현의 특징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문화 내지 동양의 문화에서는 침묵의 가치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를 수덕의 한 방법으로 존중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침묵은 금처럼 소중한 것이었다. 이러한 우리의 문화 전통에 대한 배려나 이해가 없이 우리 교회는 지난날 북한의 교회에 대해서 '침묵의 교회’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해왔다. 이러한 일은 우리 문제를 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의 문제를 남의 시각을 통해서 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의 형제나 신도들에 대해서도 형제로서의 인식을 짙게 갖기보다는 이방인적 호기심이나 동정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온 듯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기도문에서 북의 형제들을 언제나 '극심한 박해를 받으며 신음하는 존재’로만 규정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이와 같은 기도가 북의 형제들이 가지고 있는 고귀한 자존심을 해치고 그들의 신앙활동을 오히려 저지할 수 있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다. 이 기도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은 북한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북한의 형제들이 자신의 사회에서 더욱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원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리는 과정에서 우리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의 만족만을 위해 기도했지 진정으로 북한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지는 아니한 듯하다. 북한의 형제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 기도를 그들과 함께 바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도문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느님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기도가 될 수 없다. 북한의 신자들이나 그곳의 겨레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기도라면 우리는 그것을 하루 속히 수정해가야 한다. 

 

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는 현행의 기도문 가운데 문제가 있는 것으로 우리는 '남북 통일 기원 미사’의 감사송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사송에서는 남쪽의 교회는 복음화의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으나, 북쪽의 교회에서는 비참 하기 그지없는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다는 대비법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이 감사송도 북한의 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단정하고 교회에 대한 탄압과 순교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감사송에서 논하는 '국토 통일’ 과 ‘북한선교’는 흡수 통일론을 전제로 하여 서술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감사송은 남북 통일을 기원하는 의미보다는 분단의 골을 깊게 하는 역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민족의 통일을 기원하기 위해서 드리는 미사라면 남북한의 편을 가르는 식의 표현이 들어가있는 기도문을 사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미사 제의는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고 나누어진 형제를 하나로 묶는 전례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통일을 기원하는 미사에는 남과 북의 겨레들이 가톨릭 신앙의 소지 여부를 떠나서 누구든지 자리를 함께하는 데에 껄끄러움이 없어야 한다. 비신자인 북한의 겨레에게까지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미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행 미사 경본에 수록된 '남북 통일 기원 미사’의 감사송은 이러한 내용을 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문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지난날 우리 교회 안에는 민족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바라는 화해의 정신보다는 자신의 우월성을 맹신하고 이를 상대에게 자랑하려는 분단 의식이 상당히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감사송이 별다른 반성 없이 계속 쓰여지고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가 봉송된다면 우리 교회는 말로만 통일을 이야기하고 행동으로는 반통일을 일삼는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에서는 남북 한 겨레들이 함께 스스럼없이 봉송할 수 있는 민족의 평화, 그리고 진정한 화해와 일치를 위한 새로운 감사송과 민족의 화해를 위한 기도문을 하루빨리 작성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문에까지 분단 의식을 침윤시켜야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III. 민족의 화해에 대한 교회의 기본 입장 

 

우리는 지난날 교회가 가지고 있던 분단 의식을 기도문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에 이어서 교회가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취해야 할 기본 입장이 무엇인지를 검토해보아야 하겠다. 한국 천주교회는 민족과 더불어 해방 이후 50년의 역사 과정을 걸어왔다. 이 50년 동안 한국교회는 세계의 현대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장족의 성장을 이루었다. 이제 교회는 내적으로 민족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그 발전에 걸맞는 책임의 수행을 민족과 인류로부터 요청 받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의 교회는 인간의 보편적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민족의 분단은 한반도에서 인간의 보편적 구원에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민족의 분단을 극복하고 화해와 재일치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현대 교회에서 명하는 자신의 고유한 사명을 실천하는 일종의 당위 적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민족 문제에 관심을 갖고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단순히 당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교회의 노력은 보편적 구원을 위한 현실이요, 구체적 방법이기도 하 다. 민족 통일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당위와 현실이라는 두 측면에 있어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에 관한 교회의 관심과 기여는 현재와 미래의 교회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해방 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위한 공식적 입장의 표명을 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교회 구성원 전체의 의견을 모아서 교회의 교도권 행사에 있어서 책임 있는 분들의 공통된 의견으로 제시된 통일에 대한 가르침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내일의 교회와 민족을 위한 통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좀더 분명히 정 리 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전개될 이 노력의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기본 입장들이 참고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교회는 신도와 민족 구성원 모두를 위해 통일을 생각해야 한다, 교회의 가르침은 제일차적으로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전개된다. 그러나 교회는 신자들뿐 아니라 민족구성원 모두에게도 '어머니와 교사’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에서도 신자들과 민족 구성원 모두를 위해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좀더 선명히 표현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교회는 민족 복음화와 관련되는 구체적 문제들을 신학적 사목적 차원에서 검토 적용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는 민족 통일을 위한 과정에서부터 구체적이고 적극적 참여가 필요함을 확인해야 한다. 이는 그 누구도 통일 과정에의 참여 없이 통일된 사회 에서의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을 것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한국 교회는 민족 해방의 과정에 대한 적극적 기여 없이 해방의 기쁨에만 동참하고 자 했다. 그 결과 해방 공간에서의 한국교회는 민족 구성원 상당수로부터 소외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로써 교회는 민족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되살려야 한다. 민족의 통일에 관한 문제는 민족의 광복 못지않게 우리의 역사 전개에 있어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교회가 민족 통일을 향한 과정 에서 자기 희생이나 참여를 주저하게 된다면 미래의 교회는 통일 이후의 사회 에서 민족의 구원이나 복음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통일을 위한 노력이 통일 이후의 사회만을 대비하여 진행된다면 그것은 결코 온당한 방법으로 보기 힘들 것이다. 

 

셋째, 교회는 통일이 민족의 미래를 위한 방법이지 목적 그 자체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회는 통일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정립하는 데에 기여하여야 한다. 교회는 인간 구원을 위한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전제로 하여 통일에 대한 성찰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을 모색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통일은 남북한 모두가 서로를 변모시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좀더 합당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밝혀주어야 한다. 통일은 정의와 평화가 존중되고 인권이 보장되며 민주가 신장될 수 있는 효과적 방법인 것이다. 이 정의와 평화와 인권과 민주의 신장을 위해서 교회는 통일을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통일이 민족의 유일한 목적이 될 때 통일은 민족의 재앙으로변할 수도 있음을 미리 알도록 겨레에게 일깨워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통일만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민족의 평화를 더 중시하고 이를 소중하게 여기려는 자세가 요청되는 것이다. 

 

넷째, 교회는 통일의 방법과 통일을 위한 자기 희생의 자세를 민족 공동체 모두와 그 민족 구성원의 일부인 신자들에게 제시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통 일은 서로의 양보와 자기 희생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이를 통해서 서로가 변모되어 새로운 하나가 되어야 함을 교회는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 날 일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일론 가운데 타방이 일방에게 흡수되거나 합류 되는 흡수 통일론 내지는 합류 통일론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직시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통일 지향 세력뿐만 아니라 통일 회의론자들 에게도 일깨움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통일은 가능한 것이며 바람직한 것임을 알려주어야 한다. 오늘날 일부의 사람들은 통일의 후유증이나 통일 비용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고 있다. 이들에게 교회는 분단 체제가 가지고 있는 비그 리스도교적 요소를 지적하고 분단 비용의 문제점도 생각할 수 있는 균형감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통일비용이 바로 우리가 기꺼이 짊어져야 할 희생의 짐임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IV. 맺음말

 

우리 민족의 통일은 둘을 합해서 하나의 새로운 종합을 이루려는 작업이다. 이 종합은 지금 갈라져있는 둘이 서로를 이해하고 자기 희생을 감수하려는 자세를 가질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상대의 존엄성이 인정되고,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상처와 한을 서로가 치유해주려 노력할 때에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는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노력이 상호간에 당장 전개되기 어렵다면 우선 가능한 사람들만이라도 이러한 시도에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는 자기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와 신도들은 민족의 내일을 위해 자신이 감수해야 할 자가 희생의 몫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는 해방 이전 북한 지역에 적지 않은 연고와 재산권을 가지고 있었다. 재산권 문제는 통일 독일의 경우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통일 이후의 사회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사유 재산권은 인간의 본성에 합치되는 당연한 것이지만 교회는 스스로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위해서 자신의 재산권에 대한 포기를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교회 구성원들의 동참도 이어서 이루어진다면 통일은 ‘새로운 종합’ 이 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자신의 가진 바를 형제들과 조건 없이 나눔으로써 자기 희생의 길을 실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교회는 민족의 화해를 위한 평화의 교육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 평화교육과 더불어 교회는 통일을 전망하면서 지역 감정이나 투기 심리의 극복을 신자들에게 우선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의 극복 없이는 하느님의 축복이어야 할 민족의 통일이 악마의 재앙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일 깨워주어야 한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문제들이 좀더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분위기의 조성을 위해서도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통일을 추상적 이론이나 비현실적 환상의 세계로부터 구체적 사랑과 실천의 단계로 전환시켜가야 할 것이다. 

 

* 이 글의 후반부는 1995년 교회 내에서 간행되는 어떤 주간 신문에 발표했던 내용을 재정리하여 게재한 것이다. 이 글과 함께 「공동선」1995년 5, 6월호에 수록된 필자의 "민족 화해와 일치에 대한 지향”을 함께 참고해주시기를 바란다. - 필자 주

 

[사목, 1995년 6월호, 조광(고려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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