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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사목] 북한 선교 어디까지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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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79

북한 선교 어디까지 왔나

 

 

한국교회는 200주년을 계기로 북한 선교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실질적인 대북 접근의 길을 모색해 왔다. 그 결과 1988년 말에 평양 장충성당 건립을 목격할 수 있게 되었고, 199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북한 신자 공동체와 직접 접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시작된 시기와 진전 과정은 타종교의 경우도 비슷하다. 개신교의 경우를 보면 1980년대 초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를 중심으로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표면화되기 시작한다. KNCC는 통일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의 도움을 받아 1980년대 후반에 북한교회와 직접 접촉하게 된다. 남북한 교회의 직접 접촉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개신교가 가톨릭보다 10년 정도 앞선 셈이다. 개신교의 행보가 이처럼 앞설 수 있었던 까닭은 북한에 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창구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WCC의 적극적인 협조와 함께 미국, 캐나다, 일본 NCC 등의 도움이 컸다는 점, 교계적 연계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가톨릭과는 달리 북한교회를 대하기가 편했다는 점 등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개신교 외의 종교는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접촉 기회를 갖게 되는데, 어쨋든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북한 종교 교류는 전반적으로 활기를 띠게 된다.

 

 

1. 북한 선교에 대한 인식과 여건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제200조에 따르면 북한 선교는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형제적 나눔을 실현하면서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비하여 북한교회의 부흥과 북한 동포의 복음화를 위한 사목적 역량을 갖추는 교회의 활동”을 말한다. 이같은 개념 정의는 북한 선교를 신앙의 불모지에 일방적으로 복음을 전하던 과거의 선교방식과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곧 1992년에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발효되어 남과 북이 “정치 군사적 대결 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 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 협력을 실현하여 민족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한다는 다짐이 북한 선교의 개념 설정에도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비록 남북합의서 이후에도 남북관계가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남북합의서의 기본 정신을 외면하는 상황을 나타내고 있지만, 민간 차원의 대북 접근 노력에서는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질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북한 선교는 북한 사회를 직접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북한 내부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당국은 남한에서의 대북 접근 노력이 활발해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과감하게 느껴질 만큼 커다란 정책 변화를 시도한다. 먼저 인적 교류의 측면을 보면, 1981년에 처음 방북한 재미교포 김성락 목사가 김일성을 만난 이후 해외 종교인들의 방북이 이어지게 된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1985년에 WCC 국제위원회가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여 북한 내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자, 새로운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게 되어 WCC 국제위원회는 1986년 9월에 스위스 글리온에서 남북한 개신교의 공식 만남을 주선하기에 이른다. 이후 2년마다 열리게 된 글리온 회의는 남북한 교회를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하게 되고, 1988년 글리온 회의에서 1995년을 남북한 공동 희년으로 선포하여 이를 준비하는 공동 프로그램 마련에 합의하는 등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된다. 가톨릭의 경우는 1984년 3월에 북한선교부 해외 임원이던 고종옥 신부의 방북이 이루어지고, 1987년 6월에 장익 신부가 포함된 바티칸 대표단이 평양 비동맹회의에 참석하여 북한에 남아있던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접촉한 북한 신자들 가운데 2명이 1988년 4월 부활대축일에 바티칸에 초청되어 교황을 알현하였던 사실은 북한 선교의 현실성과 가능성을 처음으로 확인시켜준 것이기도 하다. 이후 바티칸의 이해와 지원을 바탕으로 한국교회의 방북이 추진되었지만, 1989년 8월의 문규현 신부 방북 파동 등 여건이 급속히 악화되어 한국교회의 방북과 교계적 연계를 포함한 관계 정립 시도는 무산되고 만다. 이 시기에 북한이 개신교뿐 아니라 불교, 천도교, 원불교 등과도 활발하게 접촉하며 폭넓게 움직였던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우리 교회의 경우도 그 상황에서 그대로 주저앉지 말고 어떤 형태로든 대북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기 위해 좀더 다양한 형태의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으로 북한에서 종교에 대한 인식 변화와 정책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5년도에 WCC 국제위원회 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선임 연구원인 김영철은 이들에게 북한의 모든 정책들이 주체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주체사상과 종교 사이에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여 종교에 대한 인식에 상당한 변화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또한 1988년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학술 심포지움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주체사상연구소장인 박승덕은 주체사상이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현대의 종교와 신학들이 그 나름의 발전의 내적 법칙성을 지니는 사회적 의식의 독자적인 한 형태라는 점을 인정”하였는데, 이 같은 견해는 그후 주체사상이 “종교에도 긍정적인 주장과 사상이 있다고 인정하여 그 가치를 공명정대하게 평가한다.”는 언급으로 이어지는 등 확산되어 갔다. 박승덕은 김일성 사망 이후 1996년에 개최된 북미주 기독학자회의에 참석했을 때에도 주체사상이 ‘사랑과 협력의 가치관’에 입각해 있으며, 이점에서 기독교의 가치관에도 전적으로 부합된다고 강조하여 북한의 인식에 별다른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90년부터 김일성대학 역사학부에 종교학과가 개설되고, 1992년 3월에 간행된 [조선말대사전]이 이전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 기초한 종교에 대한 부정적 기술이나 평가를 없애고 상당히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술해 놓은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조선말대사전]이 “주체사상을 확고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주체의 언어 이론과 사전 편찬 원칙에 기초하여 만든 우리 식의 대사전”이라는 언급에 비추어볼 때, 이 같은 변화에 대한 놀라움은 크다. 한편 북한 당국은 1992년 4월에 북한 사회주의헌법을 대폭 손질하면서 종교의 자유에 관하여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이 권리는 종교 건물을 짓거나 종교 의식 같은 것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장된다. 누구든지 종교를 외세를 끌어들이거나 국가사회 질서를 해치는 데 이용할 수 없다.”(제68조)고 그 내용을 구체화하였는데, 이는 북한의 종교 정책 변화의 폭과 깊이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북한 내에서도 종교 건물을 짓고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 사회의 특수성에 비추어볼 때 북한 주민들이 현 시점에서 얼마나 이러한 변화를 느낄 수 있고 또 실제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없을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러한 변화가 북한 선교 여건에서는 중장기적으로 커다란 전환의 계기를 마련하였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2. 북한 선교활동에 대한 반성적 고찰 

 

1995년에 서울대교구가 민족화해위원회를 발족시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교회 내의 북한 선교활동은 200주년을 계기로 만들어진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흐름에 비추어본다면 서울대교구의 독자적인 행보는 충분히 눈길을 끌 만하다. 더구나 서울대교구는 2년 후인 1997년에 통일사목위원회도 만들어 황해도 지역과 평양교구 관할구역에 대한 선교 전략과 사목 계획을 수립하는 구체적인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는 1997년도 추계 주교회의에서 서울, 광주, 대구 대교구 그리고 강원도 이북 지역을 관할해야 하는 춘천교구장을 비롯하여 북한선교위원장, 민족화해위원장 등이 모두 포함된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의 발족은 북한 선교와 통일 사목에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북한선교위원회 활동의 특징은 기도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집약된다. 북선위는 1965년에 제정된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행사를 주관하면서 이를 위한 강론 자료, 메시지 등을 준비 배포하였고, 1985년에 북한선교후원회를 창립하여 북한 선교를 위한 재정적 기반 구축과 기도운동의 구심체 형성을 도모하여 왔다. 북한선교후원회는 후원회비 납부로 북선위의 활동을 뒷받침하면서 매달 마지막 주 화요일마다 북한 교회와 통일을 위한 월례 미사를 봉헌해 왔다. 북선위는 푸른군대와 함께 판문점 통일기원미사를 봉헌하는 한편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 행사의 하나로 북한의 개성 시가지가 바라다 보이는 전방 도라전망대에서 남북통일 기원미사를 봉헌하였는데, 1991년부터 같은 장소에서 같은 취지로 평화통일미사를 계속 봉헌해 오고 있다. 북선위의 전향적인 노력 가운데 하나는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도록 만든 것이다. 북선위는 남북관계의 변화를 반영하여 1992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기도의 날 명칭 변경에 대한 승인을 얻어 시행하였으며, 이러한 취지를 반영한 기도문을 만들어 보급하여 통일에 관한 교회 내 인식 변화를 가져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계몽운동 측면을 살펴보면, 북선위는 1984년부터 회보인 [북한선교]를 격월간으로 발간하여 북한 선교의 의미와 방향을 홍보하고 그 활동 결과를 담아 계몽운동을 펼쳐 왔는데, 1992년부터 [화해와 나눔]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북선위의 계몽운동은 1988년 5월에 통일사목연구소를 창립한 것을 계기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게 된다. 통일사목연구소는 북한 선교와 통일 사목에 관련한 각종 세미나 개최, 연구논총 발간 등으로 그 폭을 넓히게 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오히려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침체를 면치 못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북선위는 1986년부터 기독교방송과 KBS 사회교육방송을 통해 대북 선교방송을 실시하였고, 최근에는 국방부의 요청으로 휴전선 대북 종교방송을 주관하고 있다. 그러나 평화방송과 평화 CATV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북선위의 역할 가운데 주목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남북관계나 통일문제 그리고 북한 선교와 관련하여 교회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창구가 되어 왔다는 점이다. 북한선교위원장 명의로 정례적으로 발표된 것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메시지, 성탄절 메시지 등이다. 북선위는 이 메시지를 통해 남북관계에 대한 교회의 인식에 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여왔다. 북한선교위원장 이동호 아바스는 1991년도 평화통일미사 강론을 통해 대북 제의 5개항을 발표한 바 있다. 이때 발표된 5개항은 ① 북한교회 신학생 양성 요청시 적극 지원, ② 남북한 신자 공동 참회예절 거행, ③ 남북한 합동 성지순례 실시, ④ 예수부활대축일 등 3대 대축일과 평화통일기원미사 합동 봉헌, ⑤ 60세 이상 이산가족 신자 고향 방문 실시 등이다. 비록 이 대북 제의가 당시로서는 별다른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으나 대북 선교의 접근 방향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북선위는 1995년에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북한 선교와 통일문제에 관한 교회의 공식적 입장을 정리하여 발표할 필요를 느껴 이에 관한 주교단 사목교서 초안을 1995년 추계 주교회의에 상정하였다. 그러나 주교회의는 이를 주교단 사목교서로 발표하는 대신 북선위 차원에서 처리하도록 하여 북선위원장 명의로 1995년 10월에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하여]라는 일종의 사목교서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문건은 한국 교회가 “한민족 공동체 전체의 삶과 그 구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밝히면서 분단 고착과 민족사회 분열에 대한 참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노력, 북한 교회에 대한 인식, 통일의 복음적 원리와 실천적 지표, 남북한 정부에 대한 제안, 2천년 대희년과 교회의 통일 맞이 등의 내용을 38개 항목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이다. 이 내용 역시 각 교구나 본당, 수도단체 등에 제대로 홍보되지 못하였으나 북선위로서는 분단 50년을 돌이켜 보면서 2천년대를 내다 보는 한국교회의 입장과 그 위상을 명확히 자리매김하였다는 평가를 들을만 하다. 

 

이처럼 1982년부터 약 15년여에 걸쳐 이루어진 북한선교위원회의 활동을 정리해 보면,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많은 일을 해왔는데도 그 결과가 한국교회 전체에 제대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음이 느껴진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모든 활동이 교구 중심으로 이루어져 단발성의 행사를 위해서는 힘을 모을 수 있어도 이처럼 지속적인 사업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는 주교회의 전국위원회 자체가 지니는 현실적 한계를 극복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의 발족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지만, 특위 역시 잘못하면 북선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를 배제하기 힘들다. 

 

 

3. 북한 선교와 북한 교회 재건 운동

 

서울대교구 중림동본당이 자본당이었던 개성의 송도본당을 재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그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중림동본당은 1901년에 개성의 송도본당을 분리시켰는데 그 이후 관계를 지속해 오지 못했기 때문에 송도본당의 현황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통일과 북한 선교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북한의 한 본당을 책임지고 재건한다는 계획을 세워 연고가 있는 송도본당을 대상으로 선정한 것이다. 중림동본당 신자들은 송도본당 신자들을 위해 매주일 2차 헌금과 국수 잔치 등을 통해 기금을 적립하여 통일 전후에 필요한 성금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대북 식량 지원 문제도 적십자사를 통해 지정기탁제를 활용하여 송도본당 지역의 주민들에게 지원 물품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1997년에 발족한 서울대교구 통일사목위원회에서는 중림동본당의 경우처럼 교구 내 본당들이 서울대교구 관할 구역인 황해도 지역 23개 본당들과 평양교구에 속한 23개 본당 등 모두 46개 본당에 대해 ‘이북 본당과의 결연’을 추진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를 위해 과거에 본당이 있던 북한 지역의 행정구역 변화를 확인하고, 탈북자들을 통해 해당 지역에 관한 정보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필요한 준비를 하고 있다. 명동대성당 역시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의 방북이 이루어질 경우 평양 장충성당과 자매결연을 추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울대교구의 이같은 움직임이 교회 안에서는 상당히 앞선 것이지만, 개신교에는 한 발 뒤져있다. 주로 북한 평안도 지역에서 피난 나온 개신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 대한예수교 장로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이미 1993년 8월에 한기총 남북교회협력위원회 안에 ‘북한교회재건위원회’를 조직하고, ‘북한교회 재건 강령’을 마련한 후 한기총 산하 특별위원회로 승격시켜 1995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였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한기총 북재위는 해방당시 북한에 존재하였던 2,069개 교회의 주소와 지도, 설립연도, 교역자, 간단한 역사와 지리와 자연 조건 등을 파악하고 이와 관련된 수백 장의 자료 사진을 함께 수록한 자료집 [무너진 제단을 세운다]를 발간하였으며, 1997년 8월에 다시금 북한교회 재건 운동의 결과인 ‘북한교회 재건 담당 현황표’를 포함시킨 [북한교회재건백서]를 발간하였다. 이 백서에는 최종적으로 확인된 2,850개의 교회를 각 교단과 교회에 분담시킨 결과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기총 북재위는 한걸음 더 나아가 통일 이후 5년까지의 인구비례를 계산하여 적어도 15,000개의 교회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고, 북한교회 개척 담당자 신청을 받고 있다. 한기총은 북한교회 재건 강령을 통해 창구 일원화, 북한 정권 아래 세워진 관제 교회를 정상적 교회로 보지 않으나 필요한 접촉은 유지, 북한교회 재건의 주체를 숨어있는 지하 교회의 교인들로 확인, 종교의 자유 신장을 위해 북한 당국과의 접촉 등 모든 노력 경주, 남한교회의 기복신앙, 물질주의, 교권주의 배제, 북한교회를 자립교회로 육성, 북한교회를 하나의 교단으로 재건, 교구제 실시(1,500교구로 분할하고 점차 세분하여 15,000교구로 분할) 등을 원칙으로 내세워 혼란을 방지하고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한기총은 이를 위해 최소한 1만여 명의 사역자가 필요할 것으로 보고 북한교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여 그 경과를 알리고 동시에 북한교회 재건 담당자들을 모집하고 있다. 이와 함께 북한교회 재건 담당자로 선정된 교회에서는 실제로 북한에 가서 재건사업에 참여할 사람을 1명 이상 선발하여 북재위에 보고하고, 북재위는 교육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지속적으로 '재건 담당자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물론 북한 선교를 북한교회 재건과 동일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북한 선교의 핵심 내용 속에는 북한교회 재건 과제가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북한 사회의 현실이 북한 사회 자체적으로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는 한기총의 경우처럼 우리 교회의 차원에서도 북한교회 재건에 따르는 원칙을 분명히 제시하여 혼선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북한 선교에 대해 다각적인 방안을 찾아왔지만 구체적 실행 계획 수립을 소홀히 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통일에 대한 소극적이고 막연한 의식에 젖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북관계를 의식하여 구체적 실행계획 수립에 앞서 알아야 하거나 해결되어야 할 사항이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어떤 점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대북 접촉에 있어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정도 북한에 대한 실상 파악이 가능하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과 함께 북한교회의 부흥과 북한 동포들에 대한 복음화를 준비하는 구체적 준비에 들어갈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 선교의 시대적 과제는 이제 겨우 출발선 위에 다시 선 느낌을 주고 있다.

 

[사목, 1998년 2월호, 변진흥(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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