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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자] 제자들의 공동체로서의 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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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64

제자들의 공동체로서의 신학교

 

 

들어가는 말

 

"왜 사제가 되려고 하지?" 지난 12월에 신학교 입학 시험 면접에서 응시한 모든 이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직도 얼굴은 소년 티를 벗지 못하였지만 당당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대답하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싶습니다.", "착한 사람을 많이 만들어서 세상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하여 사제가 되겠습니다.", "사제의 삶이 가장 멋있어 보입니다.", "우리 본당 신부님과 같은 사제가 되어 모든 이의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고 싶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으면서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고 동시에 큰 책임감을 느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으므로 10년 후를 예측하기 어렵고, 더욱이 20년, 30년 후를 예측하는 것은 미래 학자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학생들을 교육시켜서 올바른 미래의 사제로 양성하는 일은 생각할수록 매우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고, 예수님만이 인간에게 참된 기쁨, 평화,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은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어떤 세상, 어느 시대에도 모든 인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이심을 신학생들이 신학교 생활을 통하여 배워야 한다. 신학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 인간의 삶에 능통한 사제로 양성되어야만 한다. 신학생들이 하느님의 부름에 "예" 하고 대답하면서 지녔던 순수하고 소중한 마음이 결실을 얻으려면 신학교 생활에서 예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성덕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교회는 늘 큰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사제 양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제 양성 교령"과 그후에 발표된 교회의 문헌들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현대의 사제 양성]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발표한 [한국 사제 양성 지침]을 토대로 하여 사제 양성의 현재의 모습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하여 그동안 신학교에서의 경험에 비추어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1. 신학교에 거는 커다란 기대

 

사제 없는 교회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교구의 심장이라고 말한다(사제 양성 교령, 5항 참조). 심장이 멈추면 곧 죽음이 온다. 교회는 신학교에 대하여 늘 큰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사람과 돈을 투자하였다. 이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다. 신학교의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은 늘 교구장 주교의 뜻에 따라 신학교를 이끌어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므로 신부들은 물론이고, 수도자와 평신도들도 기도와 물질적 도움을 주고 있다. 그들은 너그러우면서도 사제 양성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도 많고 기대하는 것도 크다. 관심이 많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증거이므로 매우 감사한 일이다.

 

사제가 새로워지면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사제의 모습은 바로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은 사제이다. 겸손한 사제, 기도하는 사제, 가난한 사제,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는 사제, 강론을 잘하는 사제, 온순한 사제,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제 등을 기대하고 있다. 이러한 사제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제들 안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소망이라고 이해하여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제를 양성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어떤 동료 교수 신부의 표현을 빌리면 신학교에서 분명히 양과 같은 착한 목자로 양성하여 보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늑대로 변해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한숨 섞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은 일이 기억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신학교에서는 "엄격한" 규율에 따라 생활을 한다. 그러나 일단 사제 서품을 받으면 모든 삶을 스스로 자율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 신학교에서의 7년의 수련 또는 준비 과정을 통하여 일생을 착한 목자로 살아갈 수 있는 내적인 힘을 지닐 수 있도록 양성하여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세상에서 올바른 사제로 살기 위하여 시대의 조류를 거슬러야 하는 "순교자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신학교 생활에서 늘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서 생활할 수 있는 성숙한 사제로 양성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이러한 사제 양성 교육이 네 가지 방향에서 서로 깊게 연관되어 이루어질 때에 성숙한 사제로 양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 교육, 영성 교육, 지적 교육, 사목 교육이다.

 

- 인간 교육"사제 양성을 할 때 인간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제 양성의 전과정은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현대의 사제 양성], 43항).

 

- 영성 교육"영성 교육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서, 한 사람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작업입니다. 영성 교육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친교를 이룰 수 있게 해 주며, 성부께 자녀다운 자세를 갖추고 교회에 신뢰에 가득 찬 사랑을 기울이면서 자신의 삶을 성령께 전적으로 의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영성 교육은 십자가의 경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깊은 친교를 이루는 가운데 완전히 파스카 신비를 맛볼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모든 사제들에게도 영성 교육은 사제로서의 자신의 존재와 행동이 통일을 이루고 활기차게 될 수 있도록 해 주는 핵심인 것입니다"(45항).

 

- 지적 교육"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문제점들과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제들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복음을 선포하고, 복음을 통하여 인간의 이성이 정당하게 요구하는 모든 사항들에 대하여 믿을 만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사제들에게 아주 높은 수준의 지적 교육을 실시해야 합니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인간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다원주의적인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도, 엄밀한 분별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51항).

 

- 사목 교육"신학생들을 위한 모든 교육의 목적은, 신학생들이 스승이시요, 사제이시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영혼들을 돌보는 참된 목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사제 양성 교령, 4항).

 

신학교 생활은 모든 신학생들이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일생 동안 사제로 살아갈 수 있는 사제 생활의 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학년이라도 "큰 기쁨을 지닌 채로 착실하게 준비하는 신학생"이 있는가 하면, "사제가 되는 것이 자신의 길인지를 확실히 알기 위하여 마음속에 큰 태풍이 지나고 있는 신학생"도 있다. 이런 신학생들을 똑같은 기준으로 보살핀다면 외적으로는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용에서는 공평하지 못함이 사실이다. 모든 교육이 그러하듯이 사제로 양성하는 교육도 양성가들인 교수 신부들의 계속적인 사랑과 관심과 인내를 먹고 자라남을 볼 수 있다. 부부 사이에 금실이 좋으면 자녀들의 교육도 별 문제가 없듯이 신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수 사제단의 복음적인 형제애와 친교의 모습은 가장 좋은 양성의 분위기임을 늘 새롭게 깨닫고 있다([한국 사제 양성 지침], 23항 참조). 사랑이 있는 곳에 성령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2. 신학교가 닮아야 할 세 가지 "형태"

 

하느님과 교회와 인간에게 봉사하며 일생을 바치기 위하여 사제직을 선택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들어온다. 이렇듯이 거룩하고 숭고한 뜻을 지니고 신학교에 온 젊은이들을 착한 목자로 양성하기 위하여 신학교는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어야 할까?

 

1) 예수님의 신학교는 "나자렛의 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자렛의 가정은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가정이었다. 세상 가운데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던 가정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찬 특별한 가정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정의 부모 밑에서 성장하셨고, 노동을 하셨으며, 지혜와 나이와 은총이 자라나셨다(루가 2,51-52 참조). 성장하신 후에는 고독과 사막을 체험하셨고, 유혹을 당하셨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하여 공생활을 시작하셨다.

 

2) 신학교는 사도들로 구성되었던 제자들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도들로 이루어졌던 제자들의 공동체 중심에는 유일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한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마르 3,14 참조).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 사이에는 최후의 만찬처럼 친밀한 관계를 이루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하여 활짝 열려 있었고, 때로는 이곳 저곳으로 파견을 보내기도 하셨다. 스승이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였지만 '사막'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골고타 언덕을 오르면서 무서운 공포를 느꼈으며, 그후에 부활과 성령 강림, 세상으로의 파견 등이 있었다.

 

3) 신학교는 초대 교회의 공동체 모습을 늘 지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예언자들, 사도들과 사제들이 양성되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2,42-47).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4,32). 제자들의 공동체는 종교적인 공동체로서 세상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 위에, 세례성사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부활의 신비를 사는 공동체이다.

 

 

3. 새로운 천년대의 교회

 

요즈음 2000년대의 교회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2000년대의 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하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특징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의 상황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현실은 많은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 지역, 계층, 세대, 빈부, 성별 등에서 오는 차별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친교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건설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친교의 신학"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큰 일은 일치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서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를 통하여 성삼위의 삶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을 제시하고 계신다. 성삼위의 삶이란 성부, 성자, 성령께서 '친교'를 통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계시듯이, 지상의 교회와 그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친교의 삶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성부께 청한 기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 교황은 "교회를 친교의 원천이며 친교의 학교로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막 시작한 천년기에 우리가 당면한 큰 과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획에 충실하고 세계의 가장 깊은 열망에 부응하고자 한다면 말입니다."(새 천년기, 43항)라고 명확하게 말하였다. 교황은 "친교의 영성은 신앙의 형제 자매들을 신비체의 심오한 일치 안에서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형제 자매들의 기쁨과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의 바람을 느껴 알며 그들의 요구에 마음을 쓰고, 그들과 깊고 참된 우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또한 다른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보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것을 하느님의 선물, 곧 그것은 받은 형제 자매를 위한 선물일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성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외적인 친교 조직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외적인 조직들은 친교를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수단이라기보다는 영혼이 없는 장치, 친교의 '가면'이 될 것입니다."(새 천년기, 43항)라고 하였다. 우리가 건설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 친교의 교회이므로 가르치는 교회와 가르침을 받는 교회, 직무 사제직과 보편 사제직,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 '제도적인 교회'와 '특은의 교회' 사이에 친교가 있어야 함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4. 제자들의 공동체로서의 신학교

 

새로운 천년대를 맞은 교회가 친교의 교회이므로, 그 교회에 봉사해야 하는 사제들도 "친교의 사람"이 되어야 함은 확실한 사실이다. 신학교에서의 양성 과정에서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친교의 삶을 체험하고 살 때에 친교의 사제가 양성되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복음화 된 사람이 이웃을 복음화시키듯이 친교의 사람이 친교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신앙 - 공동체의 현실

 

성소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근원적으로 공동체적인 현실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공동체적이지 개인적인 신앙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께서는 삼위가 일체이신 "공동체의 하느님", "친교의 하느님"이시므로 그 자녀들도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교인 성소는 성삼위의 사랑의 친교에 참여함을 뜻한다. 사랑의 성소이므로 개인적인 방법으로 실현시킬 수 없는 것이다. ......각 신자의 성소는 개인적인 모습과 공동체적인 모습이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동시에, 더불어서 이해해야만 한다"([1987년 제7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의안집], 15-16항).

 

2) 사제는 공동체의 건설자

 

사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사람이므로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공동체이어야 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사제는 주교, 다른 사제들과 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친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신학교 안에서의 공동체적인 삶을 통한 형제적인 친교는 사제가 되어 행하게 될 사도적 활동을 가장 잘 준비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공동체에서 출발하여

 

사제는 공동체의 건설자일 뿐만 아니라 주교님을 중심으로 한 교구에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제들로 사제단을 구성하면서 각자 서로 다른 임무를 통하여 봉사하고 있다(사제 직무 교령, 8항 참조). 그러므로 "개인적인" 사제는 존재할 수 없고, 한 몸의 부분을 이루면서 유일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신학교의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사제단에 들어가기 위하여 마음과 영혼도 점진적으로 준비하여야 한다.

 

4) 공동체와 증거

 

사제 직무의 공동체적인 차원 안에 사도직 활동의 부유함의 뿌리가 있다. 신앙과 사제 직무뿐만 아니라 복음화 사업도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다. 신학생들은 사제 직위에 오른 후에 주교의 충실한 협력자로서 자기 주교와 결합되어, 형제 사제들과 함께 일하면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결합시키려는 그 일치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사제 양성 교령, 9항 참조). 또한 신학교에서 "교수 신부들은 학장의 지도 밑에서 정신과 행동에서 긴밀한 일치를 유지하며, 자신들 사이에, 또 학생들과 더불어,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11) 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실천에 옮길 수 있고, 학생들 안에 그 성소의 기쁨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그런 가정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사제 양성 교령, 5항).

 

위에 열거한 사항들을 보아도 신학교의 공동체적인 차원은 가장 근본적인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공동체를 이루지 않으면 신학교 안에 참된 신앙도, 참된 복음적인 증거도 보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신학교가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우정의 학교'로서의 공동체로 존재할 때에 오늘날 사제 양성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지목되고 있는 사제 독신제와 복음적인 가난의 삶을 잘 살 수 있는 사제들로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현대의 사제 양성], 29-30항 참조). 신학교 공동체 안에서의 영성적인 양성을 통하여 모든 이를 한마음 한 몸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던 초대 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모습처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가는 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서 "새 천년기"를 발표하면서 "대희년의 유산인 예수님과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관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롭게 출발하여, 이 세상에 '사랑의 증인들'로 존재해야 된다."라고 말하였다. 신학생들은 거룩한 학문인 신학 공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알아야 하고, 그분을 더 잘 알기 위하여 특별히 복음으로 무장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신학생들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이 신학교 안에서 생활화되고, 특별히 날마다 복음 말씀대로 구체적으로 살려고 노력함으로써 신학생들은 성덕으로 전진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복음 말씀대로 살 때에 신학생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장벽들이 무너지고,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신학교로 변할 것이다. 복음을 구체적으로 생활하는 사제만이 성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시대적 징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고,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 하느님의 뜻을 찾아내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이 구체적인 삶의 원칙이 될 때에 사제는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주어진 환경을 복음화할 수 있으며, 복음이 삶의 원칙이 될 때에 선교 정신으로 가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복음에 따르는 매일의 삶이 이루어질 때에 주교가 명하는 어느 본당이라도 갈 수 있을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교회가 명한다면―북한, 중국, 아프리카 등 이 세상 어느 곳에라도 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새 천년기를 맞은 21세기의 교회는 이러한 사제를 요구하고 있다.

 

신학생들의 삶이 이러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누구도 깊이 새기지 않고 공부만 한다든가, 열의는 없으면서 묵상만 한다든가, 감탄이 없는 탐구만 한다든가, 기쁨을 느끼지 못한 채 계명만 지킨다든가, 신심은 없으면서 활동만 한다든가, 사랑을 갖추지 못한 채 지식만 갖춘다든가, 겸손은 갖추지 못한 채 지성만 갖춘다든가,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지 않은 채 공부만 한다든가, 하느님께서 지혜를 불어넣어 주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든가 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입니다"([현대의 사제 양성], 53항).

 

사제 양성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 백성인 우리 모두가 좋은 사제를 보내 주실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 애타게 청하면서, 사제 양성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계속적인 기도와 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그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마태 9,38).

 

[사목, 2002년 3월호, 유흥식(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 신부, 교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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