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병인박해기 진잠의 신앙공동체와 순교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8 ㅣ No.1142

병인박해기 진잠의 신앙공동체와 순교자*



국문초록

 

진잠 지역에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교회의 밀사로 북경을 왕래한 김유산이 1798년 이후에 진잠 산막동에 거주한 것으로 보아, 진잠에는 1798년 이전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801년(신유박해) 김유산이 체포되어 순교한 이후, 진잠의 신앙공동체가 기록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1830년대이다. 박영근 가족, 손선지 가족, 한재권 가족, 정원지 가족이 이 시기에 진잠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1860년대에는 전자연, 강순지, 김 스타니슬라오, 원 베드로, 이 바오로 등이 진잠에서 살다가 체포되었다. 따라서 진잠의 신앙공동체는 박해시기 내내 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진잠의 신자들은 오늘날 대전광역시 서구에 속하는 산막동, 장안, 앞재, 바랑골, 오리동 등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농업에 종사했으며, 회장의 지도 아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66년에 병인박해를 맞이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된 진잠과 관련된 신자는 9명이다. 이 중 8명이 순교했고, 1명(원 베드로)은 석방되었다. 8명의 순교자 중 진잠에서 체포된 사람은 4명(전자연, 강순지, 김 스타니슬라오, 이 바오로)이며, 나머지 4명은 서산 강당리(김선양), 전주 대성동(한재권·손선지), 전주 성지동(정원지)에서 체포되었다.

 

타지에서 체포된 4명 중 한재권과 정원지는 진잠 출신이며, 손선지와 김선양은 타지에서 진잠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타지로 이주해 간 신자들이다. 그리고 진잠에서 체포된 4명 중 강순지, 전자연, 김 스타니슬라오는 진잠 지역에 세거한 사람이며, 이 바오로는 진산에서 진잠으로 이주한 신자였다.

 

 

Ⅰ. 머리말

 

조선시대 진잠현은 오늘날 대전광역시 서구 일부와 유성구 일부,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남선리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읍치는 유성구의 원내동 일대에 있었으며, 북쪽은 공주, 서쪽은 연산, 남쪽은 진산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1)

 

진잠은 박해시대 천주교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지명은 아니다. 1801년 김유산이 이곳에서 체포되었고, 병인박해 순교자 몇 명이 진잠에서 태어나거나 거주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2) 따라서 박해시기 진잠의 신앙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즉 이 지역에 언제부터 천주교가 전해졌고, 어느 지역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 그리고 이곳에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등이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었다.

 

박해시기 진잠의 신앙사와 관련해서 남아 있는 자료는, 대체로 ‘병인박해 순교자’에 대한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병인박해기 진잠과 관련된 순교자는 8명이며, 이중 진잠에서 체포된 사람이 4명, 타지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사람이 4명이다. 그리고 타지에서 순교한 사람 중에 3명의 성인(聖人 : 손선지, 정원지, 한재권)이 있다.

 

8명의 순교자는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다. 전주에서 순교한 3명의 성인은 《전주교구사Ⅰ》를 비롯하여 사전이나 성인전 등에, 공주와 홍주에서 순교한 5명의 순교자는 대전교구사 자료집인《순교자들의 전기》와 해당 본당사 등에 관련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8명의 순교자는 순교지 별로 따로 알려졌을 뿐, 진잠의 신앙공동체와 관련해서 함께 연구된 적은 없었다. 따라서 8명의 순교자는 이미 알려진 존재지만, 이들을 통해 진잠의 교회사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필자는 진잠 교회의 입장에서 ‘병인박해기 진잠 신자들의 자료’를 다시 한 번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전주, 공주, 홍주에서 순교한 사람이 아니라, 진잠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신자들에 대한 탐구이며, 진잠에 형성된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한 작업이다.

 

 

Ⅱ. 진잠의 신앙공동체

 

진잠 지역에 신앙이 전파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기록상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진잠이 등장하고 있다. 즉 1801년 전주에서 처형된 김유산이 ‘진잠 산막동(山莫洞)3)에 살다가 체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4)

 

김유산은 1798년과 1799년에 이존창의 부탁으로 북경을 왕래하며 서한을 전달한 밀사였다. 그는 원래 충청도 금정 청연역(淸延驛)5) 출신이며, 홍산에 거주하던 이존창을 통해 입교했다. 이후 이존창이 고산 저구리6)로 이주하자, 그도 고산으로 옮겨 계속 이존창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이존창이 수감된 이후에는 그의 부탁을 받고 북경을 왕래하는 밀사로 활동했다.7)

 

그렇다면 김유산이 진잠 산막동으로 이주한 시기는 언제일까? 이에 대해 김유산이 진잠에 거주할 때 북경을 왕래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김유산은 1798년 이전에 진잠으로 이주한 것이 된다. 그런데 유관검의 진술을 보면, ‘고산 대판리에 사는 김유산이 1798년에 북경을 왕래했다’는 내용이 있다.8) 유관검은 김유산이 고산에 거주할 때 밀사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김유산 자신도 ‘근년(近年)’에 진잠으로 이주했다고 진술하였다.9) 따라서 이들의 진술에 의하면, 김유산은 고산에 거주하며 북경을 왕래했고 그 이후에 진잠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김유산이 이주한 산막동은 오늘날 대전광역시 장안동 산막골로 비정된다. 그러나 그가 이곳으로 이주한 이유는 알 수 없고, 당시 산막동에 신자들이 살고 있었는지도 불명하다. 다만 산막동을 포함한 장안동 지역은 진산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이 진산을 통해 천주교가 전해졌을 개연성이 있다.

 

주지하듯이 진산 지역은 1787년 윤지충이 세례를 받음으로써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권상연도 같은 시기에 신앙을 받아들였다.10) 윤지충은 어머니와 동생 등 가족은 물론, 홍주 출신의 한덕운, 무장의 최여겸, 고산의 양태주, 무안의 고시윤 등에게도 천주교를 전파했다.11) 따라서 진산과 인접한 장안동도 김유산이 이주하기 이전에 이미 진산의 영향으로 신자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안동 지역은 연산과도 접해 있다. 그리고 연산에는 179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복음이 전해졌으므로,12) 연산의 신앙공동체도 장안동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김유산이 진잠으로 이주하기 전에 고산 저구리에서 살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고산 지역은 일찍부터 천주교가 전해진 지역이다. 고산의 양태주가 윤지충의 집에서 천주교를 배웠고, 1791년 이후에는 윤지충의 동생인 윤지헌이 고산 저구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리고 1795년에는 이존창도 고산 저구리로 거처를 옮겼다. 특히 이존창이 주문모 신부를 저구리에 은닉하려한 사실은13), 고산 지역이 당시 중요한 신앙공동체 중의 하나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김유산이 고산과 같은 지역에서 진잠의 산막동으로 이주한 것은, 산막동도 신앙과 관련된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고려할 때, 진잠의 장안동 지역에는 김유산이 이주하기 이전부터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14)

 

한편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하면서 진잠의 신앙공동체도 와해되었을 것이다. 김유산은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체포되지 않은 신자들은 신앙을 포기하거나 타지로 이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들을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이후 진잠의 신자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1830년대이다. 1830년대 이후 진잠에서 여러 명의 신자들이 태어난 기록이 있다. 먼저 1900년에 시복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한 박영근(토마스)이 1836년 진잠에서 태어났다.15) 박영근이 1836년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의 부모(박 바오로, 이 루시아)가 그 이전부터 진잠에 거주했음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손선지(베드로) 성인의 장남인 손순화(요한)도 1839년 진잠의 장안16)에서 태어났다.17) 그런데 손선지 성인의 고향은 진잠이 아니다. 그는 1820년에 충청도 임천의 고인돌18)에서 출생했다. 따라서 손선지 성인은 1839년 이전에 임천 혹은 다른 곳에서 진잠으로 이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 한재권(요셉) 성인도 1836년 진잠에서 태어났고,19) 정원지(베드로) 성인도 1846년에 진잠에서 출생했다.20)

 

이것으로 보아 진잠에는 적어도 1830년대 이후에는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 진잠에서 전자연 베드로(진잠 앞재?), 강순지 요셉(진잠 앞재), 김 스타니슬라오(진잠 바랑골), 원 베드로(진잠 바랑골), 이 바오로(진잠 바랑골)가 체포된 것은, 진잠의 신앙공동체가 186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1878년에 체포된 장희철(요셉)21)도 1866년 이전부터 진잠 오리동(오리울)에 살고 있었다.

 

박해시기 진잠의 신자들은, 산막동(1801), 장안, 앞재, 바랑골, 오리동 등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중 산막동, 장안, 앞재, 바랑골은 오늘날 대전시 서구 장안동에 속하며, 오리동은 서구 오동에 속한다. 그러므로 박해시대 진잠의 신자들은 (그림1)과 같이 대체로 대전 서구에 속한 장태산 휴양림 주위에 포진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술하겠지만 바랑골의 김 스타니슬라오는 앞재에 사는 전자연의 구초(口招)로 체포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앞재와 바랑골 신자들은 서로 알고 지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랑골의 이 바오로가 박해를 겪은 후 진산에서 바랑골로 이주한 사실은, 진잠과 진산의 신자들도 서로 교류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두 지역의 교류 사실은 장희철의 입교 과정에서도 알 수 있다. 즉 진잠 오리동에 살던 장희철이 25세 때인 1864년에 진산 이랑동22)에 사는 김공우에게 천주교를 배운 것23)은 양 지역의 교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외 당시 진산에는 앞재(금산군 복수면 신대리), 문바위(금산군 복수면 신대리), 가새벌(금산군 진산면 지방리), 진밭들(금산군 진산면 두지리) 등지에 신자들이 거주했는데, 이 지역들과 장안동이 가깝다는 점도, 진잠과 진산의 신자들이 교류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24)

 

 

Ⅲ. 진잠과 병인박해

 

1801년 김유산이 체포된 이후 진잠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30년대에 확인되며,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그 사이 진잠의 신자들은 한재권 성인이 회장에 임명된 사실25)에서 알 수 있듯이, 공소 회장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박영근, 손선지, 한재권, 정원지 등이 가족 단위로 생활했다는 점에서,26) 신자들은 가족끼리 모여 살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아울러 장희철이 농업에 종사했다는 사실27)에서, 다른 신자들도 대체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바오로의 직업이 약장사로 나오는데,28) 이 바오로는 외부에서 이주한 사람으로 약장사는 이전부터 하던 일로 생각된다.

 

이처럼 박해시대 진잠의 신자들은 가족끼리 농사를 지으며, 회장의 지도하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진잠의 신앙공동체도 변화를 겪게 되었다. (표1)에서 알 수 있듯이 병인박해기 순교자가 가장 많이 배출된 지역은 충청남도였다.

 

 

 

 

충남 지역의 박해가 격렬했던 만큼 진잠 지역도 박해를 피해갈 수 없었다. (표2)는 기록상 병인박해 때 체포된 진잠과 관련된 신자들의 명단이다.

 

 

 

 

(표2)에서 알 수 있듯이, 병인박해 때 체포된 진잠 관련 신자는 9명이다. 이중 8명이 순교했고, 1명(원 베드로)은 석방되었다. 8명의 순교자 중 진잠에서 체포된 사람은 4명이고, 4명은 서산 강당리(김선양), 전주 대성동(한재권 · 손선지), 전주 성지동(정원지)에서 체포되었다. 타지에서 체포된 4명 중 한재권과 정원지는 진잠에서 태어나 살다가 타지로 이주한 신자이고, 손선지와 김선양은 타지에서 진잠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타지로 이주해 간 신자들이다. 그리고 진잠에서 체포된 4명 중 이 바오로는 박해를 겪은 후 진산에서 진잠으로 이주한 신자였다. 따라서 병인박해 때 체포된 신자 중에 진잠 지역에 세거한 사람은 3명이었다.

 

3명 중 강순지는 앞재에 거주했고, 김 스타니슬라오는 바랑골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강순지의 매형인 전자연은 강순지와 함께 앞재에 거주한 것으로 생각된다.30)

 

주지하듯이 병인박해는 1866년 1월 5일(양력 2월 19일) 최형 등이 체포되고, 1월 9일에 베르뇌 주교와 홍봉주가 체포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1월 24일에는 사교(邪敎)를 금하는 대왕대비의 교서도 반포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진잠에도 박해의 여파가 미쳤다. 진잠의 병인박해는 바랑골에서 시작되었다. 진산에서 바랑골로 이주한 이 바오로가 1866년 1월에 원 베드로와 함께 체포된 후 공주에서 순교한 사건이 있었다.31) 그러나 이때의 박해는 이 바오로의 순교와 원 베드로의 석방으로 일단락되었다.

 

3월에도 진잠에서 천주교도에 대한 체포 시도가 있었다. 1866년 3월 4일자 《일성록》에는 ‘진잠 현감 윤태익이 천주교도를 형착(詗捉)할 때 신자가 아닌 사부(士夫)를 잘못 잡아들여 파출되었다.’32)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만으로는 이 시기에 신자들이 체포되었는지, 신자들을 체포하려다 양반만 잘못 체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신자들의 체포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체포 여부를 떠나, 이 시기 신자들에 대한 체포 시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진잠에서 박해가 본격화된 것은 1866년 9월경이었다.33) 이때는 강순지와 전자연이 살던 앞재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본촌(本村) 사람인 김덕보가 강순지를 고발한 것이다. 김덕보가 신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이 먼저 체포된 후 신자들의 이름을 발설하면서 앞재의 신자들이 체포된 듯하다.

 

앞재의 박해는 바랑골로 확대되었다. 진잠 관아로 끌려간 전자연이 바랑골의 김 스타니슬라오의 이름을 발설한 것이다. 그 결과 1866년 9월에 김 스타니슬라오도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된 강순지, 전자연, 김 스타니슬라오는 1866년 10월 20일 공주에서 순교하였다.34)

 

기록상 병인박해 당시 진잠에서 체포된 신자는 4명만이 알려져 있다. 아마도 남아 있는 자료가 부족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와 함께 신자라는 것이 드러나지 않았거나, 배교했거나, 미리 피신했기 때문에 순교자가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병인박해 이전에 입교한 장희철이 병인박해 때 체포되지 않고 오리울에서 계속 거주한 것은 그러한 예가 될 것이다.

 

순교자가 적은 것은 거주지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1871년에 간행된 《호서읍지》35)를 보면, 1871년 당시 장안리에 20호(戶), 앞재 인근인 용암리에 12호, 바랑골 인근인 길곡리에 13호, 오리울 인근인 영동리에 10호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 중 손선지 가족, 한재권 가족 등이 거주했던 장안리는 다른 마을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주민이 많았다. 그리고 호구수를 관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우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리울 역시 장희철이 1864년에야 진산의 김공우에게 천주교를 배웠다는 점에서 교우촌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장안과 오리울은 신자들이 외교인과 혼거하는 지역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에 비해 앞재와 바랑골은 중심된 마을에서 떨어져 있고, 체포된 신자가 상대적으로 많았으며, 이 바오로가 박해를 겪은 후 이주했다는 점에서 교우촌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병인박해 당시 앞재와 바랑골에서만 순교자가 나온 것은, 이러한 거주지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Ⅳ. 진잠의 병인박해 순교자

 

(표2)에서 알 수 있듯이 병인박해 때 체포된 진잠 관련 신자는 모두 9명이며, 이 중 8명이 순교했다. 8명 중에 진잠에서 체포된 사람이 4명(전자연, 강순지, 김 스타니슬라오, 이 바오로)이며, 타지에서 체포된 사람이 4명이다. 타지에서 체포된 사람 중에 진잠 출신이 2명(한재권, 정원지)이며, 진잠에서 거주했던 사람이 2명(손선지, 김선양)이다.

 

 

1. 전자연 베드로36)

 

전자연은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진잠(앞재)에 살다가 병인박해 때 공주에서 순교한 인물이다. 전자연의 출생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순교 당시의 나이도 40세37)와 47세38)라는 두 가지 기록이 있다. 그는 진잠에 살며 수계를 잘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으며, 모든 이와 화목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1866년 9월 이전에 진잠 포교에게 체포되었다.39)

 

전자연은 무수한 형벌을 받는 가운데 일시 배교하였다. 그리하여 숨겨두었던 책과 성물을 바쳤고, 바랑골에 살던 김 스타니슬라오의 이름도 댔다.40) 그러나 곧 바로 마음을 바꾸었고,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서도 신앙을 지켰다. 그 결과 수감된 지 9일 만인 1866년 10월 20일에 강순지(요셉), 김 스타니슬라오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41)

 

 

2. 강순지 요셉42)

 

강순지는 진잠 앞재 출신이다. 그의 입교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애주애인하는 마음으로 살았고, ‘박해가 일어나면 피하지 않고 순교하겠다’는 원의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866년 9월 이전에 본촌(本村) 사람 김덕보의 불림으로 진잠 포교에게 체포되었다.43)

 

강순지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1866년 10월 20일에 전자연, 김 스타니슬라오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44)

 

 

3. 김 스타니슬라오45)

 

김 스타니슬라오는 진잠 바랑골에 살았다. 바랑골이 그의 출신지인지는 알 수 없고, 입교 시기도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옥중에서 동생에게 한 말을 통해, 그가 순교 원의를 가지고 애주애인의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 스타니슬라오는 병인박해 때 전자연의 발설로 1866년 9월에 진잠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전자연 때문에 형이 체포된 것을 알게 된 그의 동생(김 베네딕도)은 옥중에 있는 형을 찾아가 그 사실을 알리고 전자연을 비난하였다. 그러자 그는 오히려 “내가 이 날을 기다린 지 오래되었으니, 네 어찌 남을 탓하느냐. 물러가 부모 형제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라”며 동생을 꾸짖었다.

 

자신을 고변한 사람을 용서하고, 자신이 체포된 것을 순교할 기회로 여긴 김 스타니슬라오는, 공주로 이수된 후 전자연, 강순지와 함께 1866년 10월 20일에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4. 이 바오로46)

 

진잠에서 체포된 신자로 이 바오로가 있다. 그는 전주 노를리에서 살다가 진산 진밭들47)로 이주했다.48) 천주교는 진산으로 이주하기 전에 받아들였으며, 진산에 살면서 사군난(私窘難)을 겪기도 했다. 사군난 당시 바오로는 진산 포교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가 8달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 후 진잠 바랑골로 이주한 바오로는 1866년 1월 23일에 다시 본읍 포교에게 체포되었다.49) 그는 5일 동안 진잠읍에 갇혀있다 공주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혹독한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영(鎭營)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1866년 1월 29일 56세50)의 나이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51)

 

 

5. 한재권 요셉52)

 

한재권 성인은 1836년(혹은 1829년)에 한언적(도미니코)과 성주 배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재권은 보명(譜名)이며, 자(字)는 원익(元益)이다. 성품이 양선(良善)하여 사람들에게 항상 칭찬을 받았으며,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서 막달레나와 혼인하여 딸 하나를 두었으며, 진잠에 살때 회장으로 활동했다.

 

한재권은 진잠에서 고산 다리실로 이사했고, 다시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이주하였다. 그러다가 병인박해가 발생하면서 1866년 12월 5일에 손선지(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진영에 갇히게 되었다. 이 때 그의 아버지는 뇌물을 써 아들을 석방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한재권은 배교를 거절한 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성인의 유해는 오사현 등에 의해 형장 근처(부엉바위-범바위 아래 도랑 가)에 묻혔다가, 1867년 3월에 손선지 성인의 아들인 손순화(요한) 등에 의해 다리실 근처 시목동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 후 가족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면서 다리실의 손선지 성인 곁으로 이장되었다.

 

한편 한재권 성인은 진잠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53) 그러나 본래 금정역인(金井驛人)이라는 기록도 있다.54) 따라서 한재권 성인이 진잠에서 태어났는지, 금정역에서 진잠으로 이주했는지는 좀 더 검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성인이 진잠의 어느 마을에 거주했는지도 밝혀야 할 과제이다. 물론 이 문제는 자료가 한정되어 있어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성인의 거주 지역이 “진잠 → 고산 다리실 → 대성동 신리골”로 손선지 성인과 동일하기 때문에, 진잠에서도 손선지 성인과 같은 마을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5) 그리고 만약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한재권 성인은 손선지 성인과 함께 진잠 장안에 살면서 회장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56)

 

 

6. 손선지 베드로57)

 

손선지 성인은 1820년에 충청도 임천군 팔충면 고인돌에서 손달원(이냐시오)과 임 세실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다. 품행과 재주가 뛰어났으며, 천주교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워 입교하였다.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18세인 1837년에 샤스탕 신부로부터 회장에 임명되었다.

 

박해를 겪으며 여러 곳을 떠돌던 성인은 1839년 이전에 진잠 장안에 정착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1839년에 장남인 손순화(요한)를 낳았다. 그 후 성인은 고산 다리실로 이사하여 지내다가 다시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이주하였다. 성인은 신리에서도 회장 소임을 맡았으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성인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신문을 받은 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인의 시신은 오사현 등에 의해 형장 근처(부엉바위-범바위 아래 도랑 가)에 묻혔다가, 1867년 3월에 아들인 손순화가 다리실로 모셔와 안장하였다.

 

 

7. 정원지 베드로58)

 

정원지 성인은 1846년에 진잠에서 정 베드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중 교우였고, 아버지는 공주에서 치명한 순교자이다. 성인은 진잠을 떠나 양양소면(완주군 운주면 산북)의 늘마루, 금구 등지에서 살았고, 마지막으로 전주 성지동(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으로 이사하여 조화서(베드로) 성인의 집 아래채에 거주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되었고, 전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은 뒤,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인의 유해는 조화서, 이명서(베드로) 성인과 함께 유상리 막고개에 묻혔으나, 그 뒤 가족들이 먼 곳으로 떠나면서 현재는 무덤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8. 김선양 요셉59)

 

진잠에서 살았던 순교자로 김선양 요셉이 있다. 그는 1808년(혹은 1810년)60) 공주 새재에서 태어났으며, 1838년에 입교하였다. 고산 동면 시어동에서 5년 동안 거주했는데, 그곳에서 살던 1839년 4월에 여산 포교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김선양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동네 교우들은 다 떠나고 부친과 형님만 남아 있었다. 이에 김선양은 진잠으로 이사하여 10년을 거주했고, 다시 전주 소양면 약바위61)로 이주하여 3년을 살았다. 약바위에 살던 1858년 1월에는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와 고산에 잡혀있다가 20여일 만에 석방되기도 했다.

 

이후 김선양은 가족들을 데리고 공주로 이사하여 3년을 살았고, 다시 서산 강당리로 이사하여 6년을 거주했다. 그러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홍주 포교에게 17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된 후 1866년 11월 21일 홍주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상에서 진잠과 관련된 8명의 순교자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김선양 가족이 진잠에 거주하던 1840~1850년대는 손선지, 정원지, 한재권의 가족들도 진잠에 살던 시기이다. 이 네 가족 중 손선지 가족은 장안에 거주한 것이 분명하며, 한재권 가족도 장안에 거주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가족의 거주지명은 알 수 없다.

 

그런데 장안에 살던 손선지와 한재권 가족은 타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 앞재와 바랑골과는 달리 장안에서 체포된 신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병인박해 당시 장안리에서는 왜 신자들이 체포되지 않았을까?

 

물론 자료 부족, 배교, 신자들의 피신 등이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장안리가 교우촌이 아니라, 교우와 일반인의 혼거지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한다. 즉 혼거 지역의 경우 신자의 신분이 밝혀지거나 신앙생활이 어렵게 되면 신자들은 타 지역으로 이주하는데, 장안리에서도 그러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점차 신자들이 감소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면, 정원지와 김선양 가족도 장안리에 거주하다 타 지역으로 이주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Ⅴ. 맺음말

 

진잠 지역은 김유산이 1801년에 체포된 사실, 손선지의 아들인 손순화가 1839년에 태어난 사실, 전자연과 강순지, 김 스타니슬라오 등이 1866년에 체포된 사실에서, 신유박해 이전부터 병인박해 때까지 신자들이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해시기 진잠의 신자들은 산막동, 장안리, 앞재, 바랑골, 오리울 등에 거주했다. 산막동은 1801년 김유산이 체포된 곳이며, 장안리는 신자들이 1830~1850년대 일반인과 혼거하다 타지역으로 이주한 곳이다. 그리고 앞재와 바랑골은 교우촌으로 생각되며, 오리울은 1860년대에 새로 신자가 생겨난 지역이다. 신자들은 이러한 지역에서 가족끼리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고, 회장의 지도 아래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진잠 관련 신자는 8명이다. 이중 진잠에서 체포된 사람은 전자연, 강순지, 김 스타니슬라오, 이 바오로 등 4명이며, 진잠 출신으로 타지에서 순교한 사람은 한재권과 정원지 2명이다. 그리고 타지에서 진잠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타지로 가서 순교한 사람은 손선지와 김선양 2명이었다.

 

 

참고문헌


1. 자료

 

《병인순교자 시복재판기록》,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병인치명사적》,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사학징의》, 불함문화사 영인본, 1977.

이기경 편, 《벽위편》, 서광사 영인본, 1978.

《치명일기》, 성황석두루카서원 영인본, 1985.

《포도청등록》(중), 보경문화사 영인본, 1985.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시복자료집 제1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2005.

 

2. 저서 · 논문

 

《대전광역시 서구사》 제2권, 대전서구문화원, 2006.

《순교자들의 전기》, 천주교 대전교구, 1991.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천주교 전주교구, 1998.

이기봉,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 2》, 국립중앙도서관, 2014.

김정환, 《논산본당사》(원고본).

김진소, 〈순교복자 윤지충 · 권상연의 흔적에 대한 연구 - 태어난 곳, 자라고, 묻힌 곳을 중심으로 -〉, 금산 천주교 진산성지 심포지엄 발표문, 2016. 4.

방상근, 〈개화기 진산 지역 신앙공동체의 재건과 변화〉, 《교회사학》 13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16.

방상근, 〈병인박해기의 순교자와 체포자〉, 《한국기독교와 역사》 45집,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

 

1) 이기봉, 《고지도를 통해 본 충청지명연구 2》, 국립중앙도서관, 2014, 90·196쪽.

 

2) 김진소, 《전주교구사Ⅰ》, 천주교 전주교구, 1998, 162·195·292·295·303·328·333쪽; 《순교자들의 전기》, 천주교 대전교구, 1991, 87·98·124·119~120·198~201쪽.

 

3) 대전광역시 서구 장안동 산막골. (《대전광역시 서구사》 제2권, 대전서구문화원, 2006, 475쪽).

4) 《사학징의》(영인본), 불함문화사, 1977, 29~30쪽.

 

5) 김유산의 결안에는 김유산이 보령현의 역촌에서 태어났다고 했고, 그의 문초 기록에는 ‘금정 청연역에서 거생했다’는 진술이 있다. 따라서 김유산의 출생지는 청연역이라고 할 수 있고, 청연역은 오늘날 보령시 주포면 관산리에 위치해 있다. (이기경 편, 《벽위편》(영인본), 서광사, 1978, 451쪽; 《사학징의》, 242쪽)

 

6)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7) 김유산의 행적에 대해서는 《사학징의》(30~34쪽, 242~245쪽)에 수록된 그의 진술 참조.

8) 《사학징의》, 25쪽.

 

9) 《사학징의》, 30쪽. 김유산이 진잠으로 이주한 시기에 대해, 전라감사 김달순은 “年前”이라고 표현했다. (《사학징의》, 29쪽)

 

10) 김진소,〈순교복자 윤지충 · 권상연의 흔적에 대한 연구 - 태어난 곳, 자라고, 묻힌 곳을 중심으로 -〉, 금산 천주교 진산성지 심포지엄 발표문, 2016. 4. 29, 11~12쪽.

 

11)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시복자료집 제1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2005, 101쪽.

 

12) 김정환, 《논산본당사》(원고본).

13) 《사학징의》, 233쪽.

 

14) 진잠에 신자들이 존재하게 된 시점에 대해, 1791년 이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것 같다. 진산사건을 계기로 박해를 피해 신자들이 이주함으로써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잠의 신앙공동체가 있던 곳은 산지이자, 충청도와 전라도의 경계 지역이라는 점도 이러한 설의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즉 진잠 지역이 박해가 일어났을 때 쉽게 피할 수 있는 교우촌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잠은 박해 때문에 피신한 신자들이 세운 교우촌이라기 보다는, 교회의 초창기에 진산의 영향 하에 자연스럽게 신자들이 생겨난 곳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진잠의 신자들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경계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신앙이 이웃한 진산으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이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주한 것이 원인은 아니었다. 따라서 진잠은 신유박해 이후에 생겨난 교우촌, 즉 박해를 피해 이주한 신자들이 새로 형성한 교우촌과는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만약 이곳의 신앙공동체가 1791년 진산사건을 계기로 생겼다면, 사건이 발생한 진산에서 바로 이웃한 진잠으로 신자들이 피신했을 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신해박해의 상황을 보면, 대체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배교하고 석방된다. 그리고 이 때 이존창처럼 고향을 떠나 이주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들의 이주는 박해를 피한다기보다는 고향에서 쫓겨나는 형태였기 때문에, 신해박해 직후의 상황은 신유박해 때의 상황과는 구별된다고 하겠다.

 

15) 《병인순교자 시복재판기록》 6권, 85회차 박영근 증언,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1068 · 1073쪽.

16) 대전광역시 서구 장안동 원장안. (《대전광역시 서구사》제2권, 474쪽)

17) 김진소, 앞의 책, 292쪽.

18) 충남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김진소, 앞의 책, 291쪽)

19) 김진소, 앞의 책, 295쪽. 다만 김진소 신부는 한재권이 1829년에 출생한 것으로 보았다.

20) 김진소, 앞의 책, 303쪽.

 

21) 장희철의 경우 교회측 기록과 관변측 기록에 차이가 있다. 즉 교회측 기록인 《병인치명사적》에는 장 요셉으로 나오며, 1878년에 경포에게 체포되어 8~9월에 서울에서 치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포도청등록》을 보면 1878년 3월 8일의 신문에서 배교하는 말을 했다. 아마도 처음에는 배교했다가 이후 회두하고 교회측 기록처럼 8~9월에 순교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병인치명사적》 21권, 절두산 순교성지 소장, 26·123쪽; 《포도청등록》(중), 보경문화사 영인본, 1985, 801쪽)

 

22) 충남 금산군 진산면 오항리.

23) 《포도청등록》 (중), 801쪽.

24) 방상근, 〈개화기 진산 지역 신앙공동체의 재건과 변화〉, 《교회사학》 13호, 수원교회사연구소, 2016, 105~106쪽.

25) 《병인순교자 시복재판기록》5권, 78회차 손순화 증언, 973쪽.

26) 강순지와 전자연도 처남 · 매부 사이였다.

27) 《포도청등록》(중), 801쪽.

28) 《병인치명사적》 21권, 122쪽.

29) 방상근, 〈병인박해기의 순교자와 체포자〉, 《한국기독교와 역사》 45집,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6, 42쪽.

30) 강순지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그를 고발한 김덕보가 전자연과도 같은 동네에 살았다고 한다. (《병인치명사적》 21권, 7쪽)

31) 《병인치명사적》 21권, 123~124쪽.

 

32) 公忠監司 申檍狀啓 以爲鎭岑縣監尹泰益 邪徒詗捉之際 誤捉無瑕之士夫 擧措駭妄 爲先罷黜 其罪狀令攸司稟處敎 以口傳差出 催促下送 以李悳初爲鎭岑縣監 口傳也.

 

33) 이때 박해가 일어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인근인 연산과 진산에서도 박해가 있었다. 즉 1866년 8월에 장안동과 인접한 연산 상사바위(논산시 벌곡면 덕곡리)에서 김영오, 김 베드로, 김윤지 등이 체포되었고, 1866년 10월에는 진산 이랑동에 사는 김공우가 공주에서 순교하였다[김정환, 《논산본당사》(원고본); 《치명일기》 592번(성황석두루카서원 영인본, 1985, 189쪽)].

그런데 연산, 진잠, 진산에서 박해가 일어난 1866년 8~10월은, <척사윤음>(8월 3일)이 반포되

고, 병인양요(9~10월)가 발생한 시기이다. 따라서 진잠과 인근 지역의 박해는 이러한 사건들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 1866년 9~10월 사이에는 서울의 양화진에서도 신자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다.

 

34) 《병인치명사적》 21권, 34쪽.

35)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36) 전자연에 대한 기록은 《치명일기》 575번, 《병인치명사적》 6권 30쪽, 8권 32쪽, 21권 7쪽에 언급되어있다.

37) 《병인치명사적》 6권, 31쪽.

38) 《치명일기》, 185쪽; 《병인치명사적》 8권, 32쪽.

39) 1867년에 체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병인치명사적》 6권, 31쪽)

40) 《병인치명사적》21권, 35쪽.

41) 《병인치명사적》 21권, 35쪽. 1866년 11월 치명설도 있다. (《치명일기》, 185쪽; 《병인치명사적》 8권, 32쪽).

42) 강순지에 대한 기록은 《치명일기》 576번, 《병인치명사적》 6권 30쪽, 21권 7쪽에 언급되어 있다.

 

43) 강순지에 대한 증언 기록인 《치명일기》(185쪽)와 《병인치명사적》 6권(30쪽)에는 1867년에 체포되어 치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전자연과 같은 시기에 체포되었다고 생각됨으로 1866년 체포설을 취한다.

 

44) 《병인치명사적》 21권, 35쪽.

45) 김 스타니슬라오에 대한 기록은 《병인치명사적》 21권(34~35쪽)에 동생인 김 베네딕도의 목격 증언이 있다.

 

46) 진잠 바랑골과 관련된 이 바오로는 《병인치명사적》 21권에 3명(6쪽, 122쪽, 123쪽)이 나온다. 3명은 나이, 순교일 등 몇 가지 사실에서 차이가 나지만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47) 충남 금산군 진산면 두지리.

 

48) 《병인치명사적》 21권, 6쪽. 한편 이 그레고리오의 증언에 따르면, 이 바오로는 전주 통골에 살 때 입교했고, 홀아비로 여러 해 동안 약장사를 했다고 한다. (《병인치명사적》 21권, 122쪽)

 

49) 《병인치명사적》 21권, 123~124쪽. 한편 이 바오로의 체포 시기에 대해 1867년 1월에 체포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병인치명사적》 21권, 6쪽)

 

50) 이 그레고리오는 60여 세라고 증언하였다. (《병인치명사적》 21권, 122쪽)

51) 《병인치명사적》 21권, 124쪽. 이 증언은 함께 잡혀 있던 원 베드로의 목격 증언이다.

52) 한재권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김진소, 앞의 책, 295~297쪽 참조.

53) 《병인치명사적》 16권, 10쪽.

54) 《치명일기》 765번, 252쪽. 《병인치명사적》 8권 6쪽. 금정역은 오늘날 충남 청양군 남양면 금정리에 있었다.

 

55) 손순화는 1900년 한재권 성인에 대해 증언하면서, “죄인이 한동네에서 산 고로 친히 알았다”고 하였다. (《병인순교자 시복재판기록》 5권, 973쪽) 그런데 함께 산 동네가 진잠을 말하는 것인지, 대성동 신리골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만약 한동네가 진잠을 가리킨다면, 한재권 성인의 진잠 거주지는 장안이 분명하다.

 

56) 김진소 신부도 한재권 성인이 진잠 장안리에 거주한 것으로 언급한 바 있다. “손선지는 김 루시아와 결혼하였으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한재권 성인이 살던 진잠 장안리로 이사’하여 거기서 장남인 손순화를 낳았다.” (김진소, 앞의 책, 291~292쪽) 그러나 ‘장안리로 이사하여 살았다’는 내용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 것은 아니다.

 

57) 손선지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김진소, 앞의 책, 291~295쪽 참조.

58) 정원지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김진소, 앞의 책, 303~305쪽 참조.

59) 김진소, 앞의 책, 327~328쪽.

 

60) 《치명일기》 680번(214쪽)에는 59세(1808년생)로 되어 있고, 《병인치명사적》 21권(157쪽)에는 57세(1810년생)로 되어 있다.

 

61)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 성지동과 인접한 마을이다.

 

* 본 논문은 2017년 7월 7일 ‘장안동지역의 천주교회사’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문을 수정 · 보완한 것이다.

 

[학술지 교회사학 vol 14, 2017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내포교회사연구소 연구위원)]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22358&Page=3&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파일첨부

1,335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