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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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성 골롬반외방선교수녀회의 의료활동: 강원도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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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7 ㅣ No.1138

성 골롬반외방선교수녀회의 의료활동


- 강원도를 중심으로 -

 

 

국문초록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죄의 보속이라 생각하였으며, 치유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교회는 병고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질병 치료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정신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의료 사업을 선교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였다.

 

가톨릭 역시, 초대 교회부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구호를 시작하였고,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된 한국 천주교회의 의료활동인 施藥所는, 1886년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다시금 부활하게 되었고, 시약소의 단계에서 진료소로 그 시설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의료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로, 이 시기에는 전체 국민들 대상으로 하면서 특히 영세민이나 의료혜택이 소외된 지역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가 강원지역에서 행한 의료 활동에 대해서, 〈골롬반문서〉 및 골롬반선교회의 선교잡지인 《The Far East》, 증언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한국 전쟁 이후 외국의 원조를 중심으로 한 구호물자가 이루어지는 1955년 춘천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는, 2011년 골롬반 병원을 폐원할 때 까지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춘천 진출은, 홍콩에서 병원을 운영한 경험이 있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를 목포에 진출시킨 것과 관련되어 시작되었으며, 처음 춘천에 온 수녀는 의사 1명과 간호사 1명이었다. 임시 진료소에서 진료를 시작하여, 미국과 독일에서 의약품을 지원받으면서 하루에 4-5백 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돌보았다.

 

병원을 확장한 이후에 골롬반 수녀들이 중점을 둔 것은 1966년부터 시작된 무의촌진료였으며, 이를 통해서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진료와 예방 접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보건소가 설립되기 이전 질병 예방의 차원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춘천에서 시작된 이들의 활동은 1962년에 삼척에서도 병원을 개설하는데 이 역시, 열악한 의료시설과 결핵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들의 의료 활동은 시대적인 흐름과도 궤도를 같이 하였는데, 1970년대 정부의 가족계획 캠페인 당시에는 행복한 가정운동이라는 교육으로 자연적인 가족 계획에 대한 교육을 담당한 것과, 1990년대에는 골롬반 의원 내에 호스피스과를 신설하고 가정 호스피스를 시작한 것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이들 병원은 교구 내에 설립되었으나, 실질적인 운영은 수녀회에서 담당하였으며, 이들의 의료 활동은 종래의 골롬반 병원이나 성 요셉 의원이라는 정식 명칭보다는 ‘수녀병원’ 또는 ‘성당병원’으로 불리면서 의료선교라는 말과 어울리게 복음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Ⅰ. 머리말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죄의 보속이라 생각하였으며, 치유는 하느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교회는 병고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질병 치료를 통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교회의 근본정신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는 의료사업을 선교의 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가톨릭은 박해를 경험한 초대 교회부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구호를 시작하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성 헬레나가 세운 성 바실리우스 병원, 성 에프렘이 세운 페스트 병원, 로마 귀족 파비올라가 세운 성 파비올라 병원, 성 엘마가 베들레헴에 세운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중병원 리온, 파리의 호텔 듀, 로마의 성령병원이 대표적인 것이었다.1)

 

이러한 가톨릭의 의료 선교는 한국의 천주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행되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의료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9세기에 크게 만연했던 각종 전염병과 프랑스 신부들의 입국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각종의 자연재해와 더불어 콜레라, 장티푸스,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발생하고 있었다. 1799년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는 128,000명이나 되었으며, 1821년에는 콜레라로 인하여 십여만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2) 이와 같은 전염병은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의 사목활동을 저해함은 물론, 그들의 건강마저도 위협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에 선교사들의 조선의 환경 위생과 보건, 의료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게 되었고, 이러한 것은 의료활동이나 환경개선 활동으로 구체화되었다. 환경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은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는데, ‘조선의 풍토는 건강에 꽤 좋으나 물은 어디엘 가나 맛이 없고, 여러 지방에서는 병의 원인이 된다’3)거나 ‘꽤 넓은 몇줄기의 도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꼬불꼬불한 좁은 길로 되어 있어 공기가 잘 통하지 않고 발에 밟히는 것이라고는 오물뿐이다’4)라고 하여 당시 선교사들이 각종 질병의 원인을 수질과 위생 환경의 불량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선교사들은 수질의 정화와 환경위생정비 방법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데5), 그것이 드러난 것이 최양업신부의 서한이다. 최양업신부는 선교본부에 보내는 서한에서, ‘비위생적인 물에 쓸 약을 청하고 싶습니다. (중략) 불행히도 주민들은 수많은 병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서슴치 않고 이 병들이 거의 다 좋지 못한 수질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6)라고 하였다. 이러한 환경 위생과 의료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심은 각종 의료 활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쁘띠니꼴라(Michel-Alexandre Petitnicolas) 신부의 경우, 그가 준 약을 먹고 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건졌다는 기록이 있으며7), 베르뇌(Siméon Berneux)주교는 1857년 施藥所를 설치하고 빈민이나 산골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약소를 통한 의료 활동은 1866년 병인은 박해로 인해 중단된다.

 

병인박해로 인해 중단되었던 천주교회의 의료활동이 다시 재개되는 것은 1886년 조불수호조약의 체결이다. 조약이 체결되자, 처음에는 고아원과 양로원에 부설된 시약소의 형태로 그리고 다음에는 진료소로 시설이 확대되었는데, 이 의료사업의 시작은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함으로써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8) 이렇게 시작된 의료 활동은 1950년 한국 전쟁의 발발 전까지는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였지만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천주교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무료 진료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의료 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로, 이 시기에는 전체 국민들 대상으로 하면서 특히 영세민이나 의료혜택이 소외된 지역을 중심으로 실시되었다. 특히 한국전쟁은 한국 천주교회가 의료 선교를 확장하는데 커다란 계기로 작용하였는데, 이는 전쟁으로 발생한 戰災民을 긴급히 구호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의 각국 가톨릭 교회 및 단체들이 구호사업의 일환으로 의료 분야에 적극적인 지원활동을 벌인 때문이었다.

 

그동안 가톨릭의 의료 선교에 대한 연구로는 교회에서 설립한 양로원에 대한 연구9)와 한국전쟁 직후 원조의 측면10)이나 가톨릭 병원협의회에서 간략하게 가톨릭 의료기관의 현황보고 및 사례소개11)가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 선교단체가 행한 지역에서의 의료활동에 대해서 살펴본 연구는 없는 상황이다.12)

 

이에 본고에서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가 강원지역에 진출하여 의료활동을 하게 된 과정 및 의료 활동에 대해서, 〈골롬반문서〉13) 및 골롬반선교회의 선교잡지인 《The Far East》14) 등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15) 이를 통해서 선교회의 의료활동이 강원지역에 끼친 영향 및 지역 의료사에 기여한 바는 무엇인지 살펴보고, 가톨릭과 지역사의 접목을 도모하고자 한다.

 

 

Ⅱ.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의 강원도 진출

 

1886년 조불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중단되었던 천주교회의 의료활동도 재개되었는데, 그 시작은 양로원이었다. 블랑주교는 천주교 신자건 아니건 무의탁 노인들을 수용할 수 있는 양로원을 설치하였고, 이들의 건강문제를 전담할 시약소까지 부설하면서 병인박해로 중단되었던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담당하기 위해 파견된 것이 1888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였다. 이렇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파견되어 의료사업을 시작한 것처럼, 한국 천주교회의 경우 선교회에 의한 의료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평양교구의 경우, 1926년에 평양에 진출한 메리놀수녀회에 의해 의주와 영유에 시약소가 설치되었으며, 1928년 비현본당에도 메리놀회 신부에 의해 시약소가 운영되었다. 원산교구 역시 이곳에 진출한 베네딕도회 선교사에 의해 1926년 덕원에 시약소가 설치되어 지역 주민에게 포교와 자선사업을 병행하였다. 대구에서도 1915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이 생김과 동시에 고아원과 시약소가 설치되었다. 이렇게 한국 천주교회는 1930년까지 모두 7개의 간이 진료소를 설치 운영하였으나, 정식 의료기관을 하나도 갖추지 못하는 상황이었다.16)

 

교회 병원이 정식 의료기관으로서 오늘날의 의원규모로 진료활동을 시작한 것은 1930년대로서, 1938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 천주교회에서 운영한 의료기관은 서울, 대구, 원산, 평양, 연길의 5개소였다. 서울의 성모병원은 1936년 개원하였고, 평양의 신의주 병원은 메리놀회 수녀 수녀인 머시(Mercy)에 의해 1936년 시작되었으며, 원산교구는 1927년에 시작된 시약소가 1933년 시설을 확장하였다. 연길교구에서는 1935년 독일에서 평신도인 의사가 옴으로써 의원으로서 진료를 하게 되었다. 대구에서는 1936년 시약소가 수녀원에 부설되어 중앙병원의 부설병원으로 의원의 구실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서울의 성모병원을 제외하고는 선교단체에 의해 설립 운영되었던 것으로, 이러한 활동은 개신교의 선교활동에 비하여 훨씬 뒤떨어진 것이었다.17)

 

하나의 예로, 미국 장로교회가 전라북도 지역에서 일제강점기 동안에만 설치, 운영한 병원은 모두 5개로, 병원의 인력구성은 의사 30명과 간호사 1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서양인으로서 의료 선교 활동을 하였던 것18)과도 대조되는 모습이다.

 

박해시기부터 이어진 한국 천주교회의 의료활동이 본격화되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였다. 전쟁 이후, 정부는 우방국들에게 긴급원조를 요청하였다. 당시 주미 대사였던 장면(張勉) 박사는 미국 가톨릭 교회에 기도와 원조를 요청하였으며, 이에 미국 가톨릭 교회는 국제가톨릭복지협의회를 통해 식량, 의류, 의약품을 보내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에 가장 먼저 설립된 병원은 부산 메리놀 병원이었다. 한국 전쟁 직후 메리놀수녀회에서는 의사 2명을 포함한 7명의 수녀의료진을 파견하여 자선병원으로서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강원지역의 의료선교도 시작되었다.

 

강원지역의 경우, 골롬반 선교회에서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춘천을 중심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가 1955년 11월 파견되었다. 하지만 이들 수녀회는 춘천에 파견되기에 앞서 당시 광주대목구장인 현 헤롤드 주교의 요청으로 목포에 먼저 입국하였다. 당시 목포에는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의 수녀원이 있어 이곳에서 몇 개월간의 언어 교육을 받고 11월에 춘천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 과정에 대해서는 골롬반 문서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현 헤롤드 주교가 아일랜드의 골롬반 수녀회의 원장 수녀에게 보낸 문서에는,

 

① 한국인들은 한국인 의사들을 불신하기 때문에 외국인 의료진을 갖춘 병원이면 크게 성공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료환자가 많겠지만, 의료비를 받을 수 있는 1급 병실과 2급 병실을 상당수 마련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에서는 병원을 자립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소녀들을 교육시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나는 원장님에게 비용부담을 주지 않고 한국인 의사 2명을 미국으로 보내 4년간 전문의 실습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수녀 의사 1명은 꼭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교회법상 건물을 포기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수녀회가 병원으로 쓰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수녀회에 건물을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원장님이 마음대로 건물을 개조하고 바꿀 권한을 가지고 건물을 사용해 주기를 제의합니다. 이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1년에 1달러 같은 식으로 원장님이 원하는 햇수 동안 건물을 임대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지목구가 병원을 운영하도록 할 생각이 없습니다. 병원은 건물을 인수하는 수도회의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건물을 제공하고 수도회는 그것을 인수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곧 시작한다면 유엔 한국재건단이 도와 줄 가능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수만 달러 어치의 장비와 의약품을 지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원장님이 국제가톨릭복지협의회(National Catholic Walfare Council)의 전쟁구호국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물을 개조하는 데 들어갈 자재는 군에서 제공할 것입니다. 미군은 수만 달러 어치의 자재를 지금 병원을 짓고 있는 메리놀 수녀회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수녀회는 군에서 제공할 수 없는 자재비와 노무비를 위한 자금을 공급해야 합니다.19)

 

라고 되어 있어서, 골롬반 선교 수녀회가 한국에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수녀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 요청 속에는 병원 운영에 대해서 지목구 즉 교구가 관리하지 않고 수도회가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며, 의료사업에 필요한 자금의 상당 부분은 국제가톨릭복지협의회에서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요청을 받은 골롬반 선교수녀회에서는 광주교구 및 춘천교구에 대한 시찰을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증빙하는 것이 《경향잡지》에 수록되어 있다.

 

애란 성골롬반 전교회 수녀원 총장 마리아 비아니 수녀는 동원 X광선 전문과 래온수녀와 함께 지난 10월말 서울에 들어와 춘천교구를 시찰하고 광주교구를 시찰중인데, 1922년에 창설된 동 수도회는 그동안 중국, 버마, 필리핀 각지에 학교와 병원을 시설하였다는바 한국에 대하여 무슨 설정을 지을지 주목되는 바이다.20)

 

위의 기사를 통해서 볼 때, 골롬반 수녀회에서는 광주와 춘천을 돌아보고 난 이후에 현 주교의 요청에 대해서 “참사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으며, 우선 의사 2명과 최소한 간호사 2명을 보내겠다”고 응답한 것이다.

 

이후 현 헤롤드 주교는 성 골롬반 병원에 대한 계획안을 작성하였으며, 이 사업의 목적은 적당한 병원이 없는 지역에 의료시설을 제공하고 의사와 간호사를 양성하기 위함이며, 이미 홍콩에서 병원을 운영한 경험이 있는 성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의 수녀들이 병원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1955년 3월 당시, 목포에는 4명의 수녀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1명은 의사이고 2명은 간호사였다. 이들은 언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6-7월경에 진료소 운영을 시작할 예정으로 있었다.

 

또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는 1956년말 이전에 12명의 수녀를 한국에 파견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며 이들 12명의 수녀들은 의사, 간호사, 약사, 실험 기술자, X-ray기술자 등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21)

 

이러한 계획 아래 춘천에도 골롬반 수녀들이 파견되어 의료 활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를 다음의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② 나는 춘천에 있는 병원은 골롬반회 수녀들이 맡게 되어 있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골롬반회 수녀들이 맡기로 되어 있는 병원 이외에 다른 병원이 있는지, 만일 그런 건물이 없다면, 어딘가 병원이 있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다며 우리가 한국에서 구호사업과 원조사업을 하는 미국인 관계자들을 설득해주고, 자기네 수사(성 요한 수도회)들이 그 병원 일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나는 내가 알기로는 한국에서 병원을 설립하는 것이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고, 그것은 한국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일이라고 생각되므로 여하튼 그 전망이 어떤지 내가 알아보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22)

 

이 편지 속에서 골롬반회 총장은 춘천에 있는 병원에 대해서 골롬반회 수녀들이 맡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혹 성 요한 수도회가 병원을 맡아 운영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도 질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춘천교구장인 구 토마스 신부는

 

③ 나는 성 요한 수도회 형제들이 강원도 어디에서 병원을 운영하게 된다면 정말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UNKRA(유엔 한국 부흥 위원단)나 AFAK(미군의 한국 원조)가 자재를 공급해 주더라도 병원 건물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임금을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1달러 당 500환인 새 환율로는 임금만도 감당하기 어려운 액수가 될 것입니다. 게다가 약값과 장비를 마련하는 데 드는 비용, 수사들을 위한 집 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수사들이 병원을 운영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를 가지고 우선 의원만으로 일을 시작하여, 몇 년간 말을 배우고 국민의 정서를 알면서 명성을 얻는 것이 현명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골롬반회 수녀들을 위한 의원과 거처는 이제 마련되었습니다. 만일 수녀들이 내년 봄까지 올 수 없다면, 나는 그 대신 수사들을 초청하는 것을 고려하겠습니다.23)

 

라고 하여 이미 골롬반회 수녀들이 춘천에서 파견되어 의원을 운영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구 토마스 신부는 다른 서한에서도 골롬반 수녀회가 춘천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④ 나는 어제 서울 성 골롬반회에서 엔다(Enda) 원장수녀를 만났습니다. 원장수녀는 오늘 춘천으로 가서 설비를 살펴볼 예정입니다. 그녀는 금년에 그곳으로 수녀 두 명을 보내기 위해 총장수녀에게 편지를 써서 허가를 얻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한 군부대는 만일 그곳에 계속 주둔한다면 그들을 위해 큰일을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같은 부대가 목포 병원을 위해 큰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Frank) 신부도 총장수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나는 잠시 한발 물러서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총장수녀가 엔다 원장수녀의 제안에 동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24)

 

⑤ 성 골롬반 수녀회 수녀 2명이 춘천으로 가서 거처를 잡고 다음 달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된 것 같습니다. 나는 그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의료장비를 많이 지원 받을 것입니다. 디트로이트에 그들을 많이 도와줄 부인이 한 사람 있습니다.25)

 

이는 1955년 11월에 춘천에 도착하는 골롬반회 수녀들이 이미 이해 8월에 춘천으로의 파견이 결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수녀들의 파견에 앞서 수녀들이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는 의원이 마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1955년 11월에 춘천에 파견된 골롬반회 수녀는 2명이었으며, 1명인 의사인 다비디 수녀이고 다른 1명은 간호사인 필로미나 수녀였다.

 

 

Ⅲ. 춘천과 삼척에서 선교병원 운영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의 강원지역에서의 활동은 춘천의 골롬반병원과 삼척의 성요셉의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가 춘천에 파견된 1955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우방국들에게 긴급 원조를 요청하였다.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 박사는 미국 가톨릭교회에 기도와 원조를 요청하였다. 이에 미국 가톨릭교회는 즉시 호응하여 국제가톨릭복지협의회(NCWC)를 통해 식량, 의류, 의약품을 보내왔다. 당시 NCWC의 보고에 의하면 전 미국 구호 단체로부터 한국에 보내온 280만 달러 중 200만 달러 이상이 이 기구를 통하여 들어왔다고 되어있다. 1952년 3월 통계에 의하면 전쟁으로 집을 잃은 피난민이 2,618,000명, 전쟁으로 물자상실이나 지원수단이 파괴되어 고통을 받는 전쟁 이재민이 3,420,000명, 전쟁과 관계 없는 가난과 인플레이션으로 괴로움을 받는 지방 빈민이 4,368,000명, 합해서 10,406,000명이 구호대상자였다.26)

 

이러한 상황에서 외국의 대규모 원조가 시작되었으며, 전쟁 이후 가장 많은 구호활동을 펼친 단체는 미국 가톨릭복지위원회 산하의 가톨릭구제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와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속한 기독교 세계봉사회(church World Service)였다. 가톨릭구제위원회는 미국 천주교회의 주교회의 산하에 있는 해외원조기관으로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와 빈민을 돕기 위해 1943년에 조직된 후 1950년대 중반에 이미 세계 62개 국가에서 구호 및 복구활동을 전개하였다.27)

 

1953년 골롬반 문서에,

 

⑥ 올해 우리는 2,900벌 이상의 의류와 45톤 이상의 쌀을 배급하였습니다. 이 물품들은 the National Caholic Welfare Conference, War Relief Services 등에서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8,000 이상을 쌀과 집을 사고 전쟁 희생자에게 의료 활동을 하는 등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런 일에 우리는 종교적인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라고 되어 있어, 해외원조를 통한 구호 활동이 전재민에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신자나 비신자를 가리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1953년 구 토마스 신부가 춘천을 비롯한 강원지역을 개관한 글에 의하면,

 

⑦ 가난한 사람들은 적절한 진료를 받기가 어렵다. 병원들은 대체로 넉넉하지 못하고 좀 어렵게 운영되고 있다. 군 단위로 병원이 운영되고 있지만 관리는 국가가 한다. 각 군마다 환자를 50명에서 100명까지 진료할 수 있는 병원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약들도 있지만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에 있다. 이 의심스러운 약을 구하기 위해 들어가는 돈이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의사에게 적당한 수수료를 주면 귀한 약을 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설파제 등과 같은 새로운 항생제를 남용하고 있다. 치료하는 수준 역시 좀 뒤떨어져 있다. 예를 들면, 매일 성체를 모시기도 하는 가톨릭 간호사 한 사람은 환자에게 설파다이아진으로 탈장(脫腸)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폐병은 아마도 가장 흔한 중병일 것이다. 1951년 봄에는 장티푸스가 크게 유행했다. 강원도의 가톨릭신자 10%가 이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이 병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력이 낮다. 보통은 봄에 장티푸스가 발생한다. 말라리아와 이질도 꽤 흔한 병이지만, 말라리아는 매우 심한 것이 아니다. 사제들 중에서 진(Jim McGinn) 신부가 장티푸스를 앓은 적이 있다.28)

 

라고 되어 있어, 전쟁 직후 가난하고 아픈 이들이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지 못함을 명시하고 있고, 전쟁 중인 1951년에는 장티푸스가 유행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인용문에 의하면 군 단위로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모든 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강원지역에 공식으로 세워진 공식적인 최초의 의료기관은 隆熙 3년(1909)년에 내려진 勅令 제75호에 따라 1910년 9월 9일 춘천에 세워진 관립 慈惠醫院(춘천의료원의 전신)이었고, 같은 해에 미국인 의사 메이슨이 원산에서 춘천으로 파견되어 감리교회 내에 소규모 진료소를 개설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춘천에 관립 자혜의원이 세워진 3년 후 강릉에도 자혜의원의 세워졌고, 1925년 전국의 모든 자혜의원은 도립병원으로 승격 개칭한 후, 1940년에는 삼척, 1942년에는 원주, 그리고 1945년에는 영월에 도립병원이 개설되었다. 즉 해방 직후까지 강원지역에는 공식적으로는 5개의 도립병원이 존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1950년 전쟁으로 많은 의사들이 군에 징집되었고, 더욱이 강원지역은 심한 戰禍로 인해 그나마 빈약한 의료시설이 대부분 파괴되거나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어, 수복 후인 1954년 당시 병원은 1시 10개군29)에 5개 도립병원과 광산병원이 있었다.30)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5년 11월 춘천에 도착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 소속의 수녀는 2명으로 의사 1명과 간호사 1명이었다. 이들은 이미 마련된 임시 진료소에서 의료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임시진료소는 지금의 춘천교구 주교좌성당인 죽림동성당 옆에 있었는데 2개의 방으로 되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 집을 골롬반 의원이라 명명하고 진료를 시작하였는데, 몇 백명에 이르는 환자들과 가족들을 수용하기에는 공간이 부족하였다.

 

당시 상황은 골롬반 선교잡지인 《The Far East》에서 볼 수 있다. 《The Far East》에는 골롬반 수녀회의 의료활동에 관련된 사진이나 기사가 여러 번 나온다. 그 중 1959년 4월에 간행된 잡지에는 ‘퀸란 주교의 관할 구역인 춘천에서 골롬반 수녀들이 아픈 이들을 방문’이라는 제목 하에 사진을 수록하고 있으며, 같은 잡지에는 ‘춘천 골롬반수녀원 진료소의 대기실’이라는 대기실을 볼 수 있는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1959년 12월에 간행된 잡지에는 “1955년, 한국에 파견된 첫 수녀들이 되어 광주 병원과 춘천 진료실에서 매일 500명의 외래환자와 100명의 입원환자를 돌보고 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알 수 있다.

 

《The Far East》에는 이외에도 골롬반 수녀들이 퀸란 주교 주교좌 중심지에서 진료소를 운영, 매일 400명 가량의 환자들을 보살펴주고 있다는 기사도 수록되어 있다.

 

1958년 6월 30일에 보고된 골롬반 문서에 춘천에 있는 골롬반 의원의 1년 진료자 수가 58,020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춘천교구 관할 구역내의 전체 인구는 150,000명으로 되어 있어 전체 인구의 30%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골롬반 수녀들은 춘천의 미군 우체국을 통해서 미국의 후원자들과 친구들이 보내주는 의약품을 정기적으로 받았다. 수녀들은 오전에는 진료를 보고 오후에는 의원에서 필요한 약품들을 정리했다. 의약품 샘플들은 미국과 아일랜드에서 의사들이 지속적으로 보내왔다. 의약품들을 질병에 따라 분류하고, 다시 포장하고 보관하는 일은 시간도 많이 들고 손도 많이 가는 일이었다. 미국의 제약회사 화이저31)는 오랜 기간에 걸쳐 한국에 의약품을 제공해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골롬반 병원에서 의료활동을 전개한 노라 수녀32)의 증언33)에 의하면,

 

미국하고 독일에서 약품하고 지원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전에 있던 수녀들 말 들어보니까, 수녀들이 낮에 진료하고 밤에 약품 구별하는 것을 했다. 약이 피부약인지 항생제인지. 그래서 굉장히 고생 많이 했고, 춘천에 그때 다른 병원은 의료원하나 약사동에 있었어요. 또 인성병원 말고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다. 특별히 시골 사람들 아프면 갈 곳이 없었어요. 돈도 없고. 또 그때 통행금지시간 있어서 새벽 4시 통행금지 끝나면 사람들 줄서서 병원에 들어오도록 했데요, 그래서 하루 4-500명 환자 받았다.

 

전쟁 직후였으니까 약 뿐만 아니라 밀가루, 옥수수가루 그런 것도 후원 많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상담하고 나서 먹는 것도 나눠줬어요. 우유, 분유도 많이 받아서 나눠졌어요. 구호물자, 구제품을 병원에서도 나눠졌어요. 옷도 그랬고 주로 먹는 것이 많았어요. 미군부대인 캠페이지를 통해서 도움 많이 받았어요. 캠페이지 통해서 약품도 많이 받았고, 그곳에 파견된 의사들이 와서 특수진료를 하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어요.

 

라고 하고 있다. 또한 약품 지원이 언제까지 이루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전에 들어온 붕대 같은 것들이 현재까지도 남아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춘천에 있던 미군 부대인 캠페이지를 통해서 의약품이 들어오고, 이곳에 파견된 의사들에 의해서도 특수진료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마땅한 진료시설이 없던 전쟁 직후의 상황 속에서 수녀회에서 운영하던 병원은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었다.

 

잡지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들의 활동을 알 수 것으로, 다음의 기사가 있는데 이 기사는 사진과 함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도로 건너편의 언덕에 성 골롬반 수녀원의 수녀원과 진료소가 있습니다. 아프고 비참한 사람들이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아프면 우리에게로 옵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는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저녁 5시에 문을 닫는데 수백명이 우리에게 옵니다. 대다수가 아이들이며, 아이들의 대부분은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이들은 뼈에 관한 질환을 앓거나 감염과 염증으로 손상되었습니다. 어른들 중에는 많은 사람들이 결핵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의 환자들은 걸어서 우리에게 오거나 친구들의 도움으로 옵니다. 흔한 광경은 멀리서 오는 남편과 아내입니다. 오는 길의 피곤함과 도보로 인한 운송의 지연은 많은 환자들이 우리에게 오기 힘든 방법이기도 합니다.

 

현재 춘천 우리에게는 1명의 의사와 3명의 간호사가 있다. 두 번째 의사와 간호사 3명과 함께 두 번째 병원에서 두 번째 클리닉을 열 수 있습니다. 3명의 의사와 9명의 간호사가 있으면 우리에게 3개의 클리닉을 줄 것입니다. 물론 더 많은 간호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34)

 

위의 내용은 당시 골롬반 선교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의원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진료 상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하면 이들은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5시에 문을 닫았는데 하루에 수백명이 오며, 이들의 대다수가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춘천의 골롬반 의원은 1명의 의사와 3명의 간호사에 의해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 만들어진 임시진료소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더 넓은 장소로의 이전이 요구되었다. 이에 수녀회는 1962년 2월 10일에는 골롬반의원을 죽림동 약사리 언덕으로 확장 이전하였는데, 새로운 병원의 설립과 운영에는 각국에서 보내오는 후원금이 주가 되었다.

 

새롭게 병원을 설립하기는 하였으나 운영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수녀회를 춘천으로 오도록 한 것은 교구였으나, 재정에 대한 지원에 있어서는 교구에서의 지원은 많지 않았다.

 

이는 앞의 인용문서 ①의 내용 속에

 

나는 지목구가 병원을 운영하도록 할 생각이 없습니다. 병원은 건물을 인수하는 수도회의 사업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건물을 제공하고 수도회는 그것을 인수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곧 시작한다면 유엔 한국재건단이 도와줄 가능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수만 달러 어치의 장비와 의약품을 지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원장님이 국제가톨릭복지협의회(National Catholic Walfare Council)의 전쟁구호국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건물을 개조하는 데 들어갈 자재는 군에서 제공할 것입니다. 미군은 수만 달러 어치의 자재를 지금 병원을 짓고 있는 메리놀 수녀회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수녀회는 군에서 제공할 수 없는 자재비와 노무비를 위한 자금을 공급해야 합니다.

 

라고 되어 있어, 교구가 직접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것이며 자재비 및 인건비에 대해서는 수녀회에서 지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인용문서 ①이 현 헤롤드 주교가 성 골롬반외방선교 수녀회와 주고받은 문서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나 이는 기본적으로는 수녀회가 파견된 교구에 동일하게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운영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노라 수녀의 증언에 의하면 의료진을 구성하고 운영하는 부분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초기 수녀회에서 의사가 파견되기는 하였으나, 이들 만으로 충족할 수 없어 한국인 의사를 채용하여야 했고 인건비에 대한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운영에 대한 비용 역시 자체적으로 충당해야 하는 경우가 있어서 후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35)

 

자금과 의사를 구하는 부분에서의 어려움 이외에 전문화된 의료 시설을 갖추지 못해 위급하거나 위험한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서울 한미재단’에 의뢰하여 ‘하와이 아동정형외과 병원’과 연계하여 화상 및 심각한 질환으로 고생하는 어린이들이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연계하는 시스템으로 의료 활동을 전개하였다.

 

춘천에서 골롬반병원이 운영되던 시기인 1962년 삼척에도 의료 시설을 개설하고 성요셉 의원이라고 하였다.

 

구 토마스 주교의 1961년 9월 26일자 문서에 의하면,

 

⑧ 십만 달러가 들어가는 의원 사업은 감사하게도 잘 진행되고 있어 성탄 때는 개원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의원은 삼척에 있는데 8월 30일 착공식을 거행하던 날에 흐뭇한 일이 있었습니다. 진(Jim Maginn) 신부가 총살을 당할 때 그곳의 시장이었던 사람은 인정 많은 이교도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공산군이 들어오기 전에 도망쳐서 살아났습니다. 공산군을 몰아냈을 때 돌아온 그는 진 신부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슬퍼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내가 성당과 의원이 자리잡고 있는 좋은 땅을 구입하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의원은 동해안의 사제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여 삼척에 새로운 병원을 개설하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또한 1962년 문서에는 “병원을 위해서는 Ireland에서 $20,000을 모금하였습니다. 보스톤에서 여기로 오면서 다시 $10,000이 늘었습니다”36) 라고 되어 있으며, “병원을 위해 U.S.에서 $30,000을 모금하였습니다”37)라고 되어 있어 병원 설립을 위한 후원금 마련을 위하여 구 토마스 주교가 본국인 아일랜드 및 미국 등지에서 모금 활동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삼척에 3층짜리 병원을 개설하고 1962년 5월 29일 골롬반 수녀들로 하여금 병원을 맡아서 운영하도록 한 것이다. 당시 병원 3층에는 수녀원과 성당이 있었는데, 우선 두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The Far East》의 1962년 12월 기사에는 “Clinic for Korea”라는 제목하에, 구 토마스 주교가 삼척에 새로운 병원을 개설하였으며 두명의 골롬반 수녀가 한국인과 협력하여 진료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기사 속에서, 구 토마스 주교는 이미 1960년 여름부터 병원 설립을 위한 모금을 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성 요셉 의원 역시 환자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병원을 찾아왔고 결핵으로 고통받은 이들이 많았다. 당시 삼척지역의 의료시설은 매우 열악했고 병원도 별로 없었다. 1960년대는 심각한 질병을 가진 환자들이 많았고 그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데도 시간이 부족했기에 예방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 점차 더 많은 골롬반 수녀들이 삼척의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영국의 옥스팸(Oxfam)38)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시골 및 어촌진료와 왕진을 할 수 있었다.

 

춘천과 삼척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골롬반외방선교 수녀회의 의료활동 중 중요하게 여긴 부분은 무의촌진료였다.

 

골롬반 수녀들은 1966년부터 춘천 이외의 지역으로 무의촌진료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무의촌 진료를 통해서 산골 등 오지에서 병원에 올 수 없는 노인들이나 어린이들, 여성들을 직접 만나 진료하고, 어린이 예방 접종 등 질병 예방을 위해서도 힘썼다.

 

노라 수녀는 증언에서, 춘천 주변의 가평뿐만 아니라 철원, 화천 등지까지도 무의촌 진료를 나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주로 무의촌 진료를 하는 곳은 당시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이 부임하고 있는 지역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는 신부들이 있는 곳에서 환자들을 모으는 것이 수월하였기 때문이었다.

 

골롬반 수녀회가 의료 활동에서 무의촌 진료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의촌 진료를 통해서 예방접종을 하였기 때문이다. 1966년 당시 춘천에는 보건소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예방 접종 같이 현재 보건소에서 행하는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수녀회가 직접 방문하여 행하는 예방접종은 당시 질병예방에 유일한 방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삼척도 마찬가지로, 이동 진료소를 만들어 마을을 방문했고, 백일해, 디프테리아, 홍역 등 법정 전염병 예방에 주력했다. 아이들의 예방 접종과 면역력 회복이 의료사도직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또한 수녀들은 골롬반 신부들이 일하는 임원, 호산, 도계, 황지, 묵호 본당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본당에서 신자들과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부모 교육과 질병 예방 교육을 실시했다.

 

춘천의 경우, 1966년 12월에는 보건소가 설립39)되었으므로, 보건소 설립 이전의 역할을 골롬반 병원에서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성 골롬반 병원의 거의 모든 수녀들이 조산사 자격을 갖추고 있었는데, 골롬반병원은 1970년대 말 조산사 교육을 도입해서 간호사들에게 교육을 시켰다. 조산사는 1914년에 정식으로 산파제도가 제정되어 간호사와는 별개의 직종으로 산파의 일을 해 왔으나, 1962년부터 간호사 자격증이 있어야 될 수 있도록 간호사의 한 영역으로 합쳐졌다. 1960년대까지 강원에는 83개소의 조산소가 있었으나 1990년대에는 8개소만이 남았다.40)

 

1970년대 초부터 한국 정부는 두 자녀 갖기 운동을 벌이면서 정책적으로 가족계획 캠페인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모든 의료 기관들은 정부의 가족계획 정책에 참여해야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유교적 인습으로 남아 선호사상이 강한 터라 아들을 낳기 위해 낙태수술과 여성의 불임 수술이 가족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암묵적으로 허용되고 있었다. 특별히 조산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수녀들에게 이 정책은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개인 병원 등은 앞다퉈 3개월 된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는 기구들을 갖추었고, 이는 성별 감지 후 곧 낙태로 이어지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이에 골롬반 병원에서는 아기들을 위한 병동과 가족계획센터를 설치하기 위해 병원을 증축했고, 1973년 마침내 가족계획센터가 문을 열었다.

 

1989년 골롬반 수녀들은 골롬반 의원 내에 호스피스과를 신설하고 가정 호스피스(당시 방문 호스피스로 불림)를 시작하였다. 호스피스의 발족에 대해서 노라 수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거의 저절로 된 것 같아요. 시대에 따라서도 된 것 같아요. 제가 66년부터 70년까지 간호학교 다닐 때 거의 암환자들 없었어요, 아일랜드에. 3년 반동안 3-4명밖에 못봤어요. 세계적으로 암에 대해서 몰랐는지 잘 안나타났는지 모르겠는데 10년 후에 완전히 달라졌죠. 그래서 우리 본회에서 계속 가정방문했어요. 물론 처음에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계속 했어요. 그때 대세41)를 주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래서 춘천에 왔을 때 가정간호하기 시작했는데, 제가 온 다음에 골롬반수녀회에서 호스피스 교육하기 위해 팀을 영국에서 초대했고, 병원에 같이 근무하는 의사수녀님도 받았고 저도 받았고 몇사람 더 받았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암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으니까 병원에 암 환자들 더 많이 오게 되었어요. 우리 나름대로 가정 호스피스하게 되었어요. 그때 교육받았고 4년간 아일랜드에 있는 동안에도 조금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전에 가정방문했던 것을 어떤 면에서 호스피스로 조금 방향을 돌리는 것이었어요. 진짜 그때 호스피스 도움 필요로 하는 사람 많았어요. 왜냐하면 병원에 마약 쓰는 것 익숙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 특별히 시골에 많았고 그래서 그것 할 때 보람을 느꼈죠.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 아주 좋은 도구이기도 했어요. 20년 전에 방문했던 집의 보호자들이 만나면 아직까지도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안잊어버려져요.

 

호스피스의 발족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증가하는 암환자 및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형식으로 전개되었고, 이는 의료 선교라는 말과 어울리게 복음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들 병원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폐원을 결정하게 된다. 삼척의 성요셉의원은 1983년에 철수하였다. 21년간 삼척과 주변의 농어촌 등을 방문하며 지역 주민들과 함께 했지만, 수녀들이 의료사목에 헌신하는 동안 삼척시에도 차츰 병원이 생기기 시작했고, 한국 정부도 어린이 예방 접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와 함께 의료보험이 실시되고, 보건소 등이 문을 열면서 지역 주민들이 받을 수 있는 의료 혜택도 늘어났다. 이에 골롬반 수녀들은 처음 삼척에 왔던 이유를 되돌아보고 다시 새로운 곳,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옮길 때가 되었음을 지각한 것이다. 이에 골롬반 수녀들은 회의를 통해 삼척병원을 원주교구에 넘기기로 결정하고 그곳에서 철수했다.

 

1955년에 개원한 춘천의 골롬반 병원은 2011년 11월 폐원하였는데, 폐원의 계기로는 선교회의 선교방침과 필요성의 부재였다. 1955년 처음 병원이 생길 당시에는 병원이 없어,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들어오는 의약품으로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춘천에 개인병원 뿐만 아니라 종합병원도 많이 생기고, 보건소에서 예방접종 및 가정 방문에 대한 일을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두 병원 모두 한국 사회의 성장 속에서 많은 의료시설이 증가하면서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이들의 선교방침인 더 어렵고 가난한, 소외된 사람들의 곁에 있기 위한 것과도 맞물며 병원을 폐원한 것이다. 골롬반 선교 수녀회가 먼저 파견되어 의료 활동을 하였던 목포의 경우도 춘천해서 했던 활동과 다르지는 않다.

 

광주교구의 교구장이던 헤롤드 헨리(Harold Henry)신부의 초청으로 1955년 1월 17일 목포에 도착한 성 골롬반 수녀회는 6개월간의 한국어 교육을 받으면서 간이 진료소를 설치하고 외래환자를 진료하기 시작하였다. 헨리 신부는 목포에 있던 자신의 숙소인 3층 벽돌 건물을 진료소로 개조한 다음 수녀회에 기증하여 후일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골롬반 수녀회는 1955년 7월 5일 ‘성 골롬반 병원’을 개설하고 본격적인 환자 진료를 시작하였다. 전쟁 직후라 여러 가지로 의료시설이 빈약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매일매일 증가하여 1960년 3월 1일에는 병원을 증축하였다. 병원의 규모가 커지자 간호 인력의 필요가 대두되어 간호학교의 설립을 준비하였고, 1966년 1월 ‘성 골롬반 간호학교’의 설립을 인가받고 1967년 3월 3일 간호학생을 받아들였다. 간호대학을 통해서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간직한 간호원, 조산원, 양호 교사로서 실무에 최대한 헌신적으로 공헌할 수 있는 여성을 양성하고자 하였으며, 졸업 이후 다수의 간호사들이 성 골롬반 병원에서 함께 일하기도 하였다. 골롬반 수녀회는 성신간호전문대학을 1990년 3월 광주 대교구에 이양하였다.42) 즉 병원을 개설하고 방문 진료를 하고 그들의 소임을 다한 후에는, 그들을 더 필요로 하는 곳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었다. 의료활동에 있어서 춘천과 목포의 경우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의 차이는 없는데 이는 처음 병원을 개설하고 활동하는 것이 선교회에 의해서 중점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Ⅳ. ‘행복한 가정운동’을 통한 피임법 교육

 

1960년대 초기부터 한국 정부는 가족계획 정책을 강력히 추진해 왔다. 1972년 모자보건법을 제정하여 인공 유산을 조건부로 합법화하면서, 그 이후 모든 사회홍보 수단이 낙태와 산아제한을 촉진하는 일에 이용되었다. 이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할 만큼 실시되면서, 많은 기혼 부부들이 2명 이상의 자녀를 갖지 않기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족계획사업 속에는 目標量事業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보건사회부각 부서에서 계획하여 하달된 사업으로, 크게 구분하여 가족보건사업, 전염병 관리 및 예방접종사업, 결핵환자관리사업이 있다. 이중에서 가족보건사업 내에는 가족 계획사업과 모자보건 사업을 포함한다. 우리나라의 가족계획사업은 인구정책의 사전 조절정책의 하나인 출산 조절을 주축으로 전개해왔고, 이 방식은 인구증가율을 둔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강원도에서는 1965년도에 全可姙女性의 66%가 각종 방법(불임시술, 자궁내 장치, 콘돔, 피임액, 월경조절술)의 피임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전 가임여성의 20-25%가 실천하여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는데 이는 국가 가족계획 정책의 변화에 따라 목표량이 변화되고 그에 따른 실적 또한 줄게 된 결과이다. 따라서 보건소에서 파악할 수 있는 피임 실천률이 자연히 낮아지게 되어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1개 군 자료를 통해 유배우 가임여성의 가족계획 실천률을 보면 76-89%로 높은 실천 양상을 보였으며, 영구피임실천자가 37%나 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43)

 

이에 당시 한국천주교회는 우려할 만한 사태가 일어날 것임과 이로 인해, 교회가 행하는 사업들 즉 신앙의 전파와 신자들의 성화사업이라는 부분들이 심각한 방해를 받을 것을 걱정하였다. 이는 당시 가톨릭 의사들도 점증하는 낙태풍조와 피임의 부작용을 우려하면서, 가능하면 도덕적이고 안전하며 이해하기 쉽고 비교적 실행하기 쉬운 가족계획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주교회의와 가톨릭의사협회가 촉구하게 된 것이다.

 

교회에서는 이러한 사태를 염려하고 성가정의 보호를 위해 교회법에 위배되지 않는 가족 계획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는데,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자연 가족계획의 방법으로서 점액 관찰법인 빌링스법을 보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자연 가족계획의 지도와 보급을 교구 차원의 사목 활동으로 시작한 것이 춘천교구였다.

 

1975년 박 토마스 주교는, ‘한국 행복한 가정운동’을 하나의 사목운동으로 강조하고, 부모 교육과 대화방법 등 가족간의 가치를 되새기고 배우게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특별히 ‘자연피임법을 통한 가족 계획’ 방법을 홍보하였는데, 골롬반 수녀들은 가족 상담을 위한 상담사(당시 가족계획 지도원) 교육을 비롯하여 기본 상담 기술, 영적 · 의료적 · 사회학적인 측면을 고려한 가족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박 토마스 주교는, “한국의 행복한 가정운동 그리고 필요한 대응”이라는 문서44)를 통해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였다. 

 

“제가 볼 때는, 세계적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는 낙태와 피임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교회의 사명에 대한 단연 가장 중대한 사목적 도전이며 단연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낙태는 이제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합법화되었습니다. 무구하고 방어력이 없는 수백만 명의 아기들이 매년 살해되고 있습니다. 비교해보면 어느 세계대전에서 살육된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전 세계 기혼부부 대다수가 인공적인 피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간에 품위를 떨어뜨리고 가정생활의 신성함을 훼손하며 창조주가 계획하여 마련해주신 자연적인 질서를 어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 세계에 걸쳐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낙태와 산아제한 때문에 신앙생활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겉으로는 그들이 신앙을 지키고 있지만 가족의 규범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의 분명하고 변함 없는 가르침을 거부해온 사람이 많습니다. 선교지역마다 가톨릭신자가 되고 싶어하는 젊은 부부들이 있지만 이 같은 악습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사업이 정체되고 있고, 가정의 신성이 훼손되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고결한 크리스천 생활의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세계 많은 곳에서 인권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년 수백만 아기들은 모든 인권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있는데 교회가 빈둥거리며 방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성소가 부족하다고 걱정합니다. 가정생활의 신성이 회복되지 않고 성소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많은 젊은이들이 신앙과 그리스도교의 도덕률을 거부한다고 걱정합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부모가 서로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는 것을 본다면 그들이 순결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부모가 그들의 형제자매의 생명권 자체를 박탈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해주길 바랄 수 있겠습니까? 교회와 사회 전체의 미래는 가정의 안정과 신성에 달려 있습니다. 가정이 돌아가는 대로 교회도 돌아가고 사회도 돌아갑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세계에서 행복하고 신성한 가정생활의 가장 큰 장애물은 낙태와 피임의 유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중략 -

 

지금 우리는 자연적인 가족계획에서 이 막중한 문제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제 자신의 경험과 세계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보고들은 자연적인 가족계획인 빌링스법이 최소한 어느 인공적인 방법에 못지 않게 안전한 방법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인공적인 피임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저는 자신 있게 단언합니다. 저는 낙태하기를 좋아해서 낙태를 했다는 사람이나, 자궁내 피임장치(IUD)를 몹시 좋아해서 그 장치를 삽입했다는 여자나, 혹은 씨 없는 남자가 되는 것이 좋아서 정관절제 수술을 했다는 남자는 한 사람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병을 고치기 위해서 마지못해 알약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해치기 위해서 알약을 즐겨 먹지는 않을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질외 사정으로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결과를 회피하면서 쾌락을 가질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런 행위들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과를 회피하는 조건 때문에 반감된 쾌락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가족계획의 안전성, 특히 빌링스법의 효과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은 적절한 동기를 부여받아야 하며, 그 동기를 지속적으로 부여받아야 합니다. 의료진들이 그런 동기를 많이 부여하겠지만 부부의 친구들도 아마 부여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 많은 부분은 - 특히 영적인 동기는 - 교회의 목자들이 부여해야 합니다. 목자들 자신이 교회의 분명하고 변함 없는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신자들의 영원한 구원과 성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들의 마음이 신자들의 어려움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면, 그들은 그러한 영적 동기를 부여할 것입니다. 영적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과 그 효과를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8년 동안 수만 명의 부부들을 다뤄본 결과, 저는 빌링스법이 가족계획의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피임법이 아니며 피임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피임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면, 그들의 첫 번째 목적이 자녀를 가지지 않으려는 것이라면, 그들은 인공적인 방법과 낙태에도 눈을 돌릴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2명의 자녀를 가지고 더 이상은 절대로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낙태까지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녀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가장 위대한 자연적인 선물이며, 남자와 여자가 새로운 인간을 출산하기 위해 하느님과 협조하고 서로가 협조하는 것이 숭고한 사명이며 소중히 간직해야 할 특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부부는 사랑의 대화로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자녀를 가질 것을 결정해야 하고,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도덕적인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하느님이 그들에게 그들이 계획한 것보다 더 많은 자녀를 베풀어 주신다면, 그 자녀를 하느님의 귀중한 선물로 받아들여 다른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빌링스법은 무엇보다 먼저 자녀를 가지는 위대한 특권을 깨우쳐 줍니다. 둘째로 그것은 생식력을 하느님의 귀중한 선물이라고 주장합니다. 셋째로 그것은 또한 주기적인 불임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고마워해야 하고 하느님의 계획과 그들의 양심에 따라 이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춘천과 삼척의 병원에서는 자연적인 가족 계획에 대한 교육을 시행하였다. 춘천과 삼척의 병원에서는 수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신자들을 상대로 자연적인 가족계획을 위한 방법(점액관찰법, 빌링스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교구내에서 가족계획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참석시키면서, 골롬반 선교회 수녀들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 중에서 활동할 수 있는 이들 30명에게 교육을 하였다. 이 교육은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으므로, 일반 사람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이 교육에 골롬반 수녀회의 중심이 되었다.

 

1970년대 초기부터 자연적인 가족계획이 서울의 성모병원과 골롬반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3개 의원,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에서 경영하는 2개 의원 및 춘천교구 전역에서 시행되었다.

 

1975년 6월에는 한국의 행복한 가정운동이 주교회의에 의해 창설되어, 전국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였고, 각 교구에는 교구 가정사목부와 전국적인 운동을 위해 주교회의에 가정사목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주교들은 혼인과 가정생활에 관한 훌륭한 지침서는 물론 낙태와 산아제한의 해악 및 다른 여러 가지 측면의 가정생활에 관한 사목교서를 여러 번 발표하였고, 150여명의 가정 상담원들이 자연적인 가족계획의 점액 관찰법을 포함한 가정생활의 모든 측면에 대한 교육을 받고 현장에서 활동하도록 교육하였다.

 

박 토마스 주교를 중심으로 춘천교구에서 활동하는 골롬반 선교 수녀회가 중심이 되어 행해진 이 운동은, 1976년에는 전국에 있는 61개의 가톨릭 관련 의원에서도 시행되었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의 의료활동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한국 전쟁 이후 외국의 원조를 중심으로 한 구호물자가 이루어지는 1955년 춘천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수녀회는 2011년 골롬반 병원이 폐원될 때까지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춘천 진출은 당시 광주교구장이던 현 헤롤드 주교가 이미 홍콩에서 병원을 운영한 경험이 있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수녀회를 목포에 진출시킨 것과 관련되어 시작되었다. 처음 춘천에 온 수녀는 의사 1명과 간호사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전쟁 이후 병원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던 상황 속에서 임시 진료소에서 진료를 시작하였다. 미국과 독일에서 의약품을 지원받은 이들은, 하루에 4-5백명에 달하는 환자들을 돌보았고, 낮에는 진료를 밤에는 지원받은 의약품을 분류하는 작업을 병행하였다.

 

진료소에서 시작한 이들이 병원을 확장한 이후에 골롬반 수녀들이 중점을 둔 것은 1966년부터 시작된 무의촌진료였으며, 이를 통해서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진료와 예방 접종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보건소가 설립되기 이전 질병 예방의 차원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춘천에서 뿐만 아니라 삼척에서도 의원을 개설하였는데, 1962년에 삼척에 개설된 의원 역시 열악한 의료시설과 결핵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들 병원은 한국사회의 흐름 속에서 1970년대 정부의 가족 계획 캠페인 당시에는 행복한 가정운동이라는 교육으로 자연적인 가족계획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고, 1990년대에는 골롬반 의원 내에 호스피스과를 신설하고 가정 호스피스를 시작하였다. 이는 수녀회에서 행한 의료활동이 비단 선교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과 함께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춘천과 삼척의 병원은 시기를 달리하여 폐원하였는데, 폐원의 계기는 많아지는 의료시설과 운영에 대한 어려움도 있었지만, 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선교방침 속에서 더 가난한 이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폐원을 결정한 것이다.

 

이들의 의료 활동은 종래의 골롬반 병원이나 성 요셉 의원이라는 정식 명칭보다는 ‘수녀병원’, 또는 ‘성당병원’으로 불리면서 의료선교라는 말과 어울리게 복음을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또한 전쟁 직후 병원이 전무하던 강원지역에서 의료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강원지역에서의 빈민구제 및 무의촌 진료를 통해 보건소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질병예방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이다. 이는 당시 의료가 열악한 강원지역에 의료의 씨앗 즉 기초를 다치는 계기가 되었으며 종교가 지역사회와 접목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1차 사료

 

〈골롬반문서〉

《Articles on Korea in the Irish Far East》 Volume 1, Volume2

《경향잡지》

 

2. 단행본

 

노길명, 《가톨릭과 조선후기 사회변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샤를로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조규상, 《세계 의료사와 한국 가톨릭 의료사 개관》, 한국가톨릭의료협회, 2008

《춘천백년사》

《광주교구50년사》

《강원도사》

 

3. 논문

 

김재호, 〈가톨릭중앙의료원의 과거와 오늘〉,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11, 1980

김중호, 〈소규모 가톨릭의료사업의 현황과 문제점〉,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16, 1986

김흥수,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한국 기독교와 역사〉 23, 2005.

노길명, 〈근현대, 개화기의 한국천주교회와 사회개발〉, 《한국교회사논문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메리엑네스살벨, 〈대구지역 가톨릭 의료기관의 조직과 활동현황 〉,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11, 1980

송현강, 〈미국 남장로교의 전북지역 의료선교(1896-1940)〉,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35호, 2011

유홍렬, 〈한국 천주교 보육원의 유래〉,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을유문화사, 1962

윤선자, 〈한말,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의 양로원 설립과 운영〉, 《한국학논총》 31, 2009

장정란, 〈한국전쟁과 외국 가톨릭교회의 전재 복구 활동〉,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

정태옥, 〈농어촌 가톨릭 의료기관의 의료사업 현황보고〉,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7, 1976

조광, 〈19세기 民亂의 社會的 背景〉, 《19세기 韓國 傳統社會의 變貌와 民衆意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조광, 〈한국교회와 의료사업의 전개〉,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26, 1996

조규상, 〈교회병원에 있어서의 외원의 필요성〉,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4, 1973

한국가톨릭의료협회, 〈농어촌 가톨릭 의료기관의 의료사업 현황보고〉,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7, 1976

 

……………………………………………………………………………………………

 

1) 조규상, 《세계 의료사와 한국 가톨릭 의료사 개관》, 한국가톨릭의료협회, 2008, 51-53쪽 참조.

 

2) 조광, 〈19세기 民亂의 社會的 背景〉, 《19세기 韓國 傳統社會의 變貌와 民衆意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200-201쪽 참조.

 

3)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34쪽.

4) 앞의 책, 68쪽.

5) 노길명, 〈근현대, 개화기의 한국천주교회와 사회개발〉, 《한국교회사논문집》 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174-175쪽 참조.

6)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하권, 170-171쪽

7) 위의 책, 416-417쪽

8)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 《한국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125년사》, 분도출판사, 2014

 

9) 한국 최초의 양로원에 대한 교회사적 측면에서의 연구로는 유홍렬, 〈한국 천주교 보육원의 유래〉, 《고종치하 서학수난의 연구》, 을유문화사, 1962 ; 노길명, 《가톨릭과 조선후기 사회변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윤선자는 〈한말, 일제강점기 천주교회의 양로원 설립과 운영〉, 《한국학논총》 31, 2009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양로원을 설립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특히 일제강점기 양로원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였으며 일제는 양로원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10) 전쟁 직후 원조의 측면에서 다른 연구로는 장정란, 〈한국전쟁과 외국 가톨릭교회의 전재 복구 활동〉,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1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조규상, 〈교회병원에 있어서의 외원의 필요성〉,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4, 1973이 있다. 조규상의 글은 가톨릭 병원교회의 현재와 장래 그리고 의원 활동에 도움을 준 外援의 역할을 중심으로 하여 1970년대 한국 가톨릭 의료기관에 대해서 간략히 소개하고 있다.

 

11) 김재호, 〈가톨릭중앙의료원의 과거와 오늘〉,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11, 1980 ; 김중호, 〈소규모 가톨릭의료사업의 현황과 문제점 〉,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16, 1986년 ; 메리엑네스살벨, 〈대구지역 가톨릭 의료기관의 조직과 활동현황〉,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11, 1980 ; 한국가톨릭의료협회, 〈농어촌 가톨릭 의료기관의 의료사업 현황보고〉,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7, 1976 ; 정태옥, 〈농어촌 가톨릭 의료기관의 의료사업 현황보고〉,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7, 1976 ; 조광, 〈한국교회와 의료사업의 전개〉, 《한국가톨릭병원협회지》 v.26, 1996이 있다. 이 현황 보고 및 사례소개는 2-3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설립 목적이나 사업현황, 그리고 소규모 병원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 등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2) 지역에서의 가톨릭 의료활동에 대해서는 의료기관이 있었던 교구의 교구사 및 본당사에서 아주 간략하게 명시되어 있는 정도로, 《광주교구 50년사》, 《원주교구 30년사》, 《춘천교구 50년사》, 《정선본당 50년사》, 《성내동본당 30년사》 등이 있다.

 

13) 골롬반 문서는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활용하였다.

14) 골롬반 외방선교회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한 《Articles on Korea in the Irish Far East》 Volume 1과 Volume 2를 참고하였다.

 

15) 본고에서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한정하였으나, 향후 강원지역에서 활동했던 다른 선교회의 의료활동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16) 조규상, 《세계 의료사와 한국 가톨릭 의료사 개관》, 한국가톨릭의료협회, 2008, 167-172쪽 참조.

17) 위와 같음

18) 송현강, 〈미국 남장로교의 전북지역 의료선교(1896-1940)〉,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35호, 2011년 48쪽 참조.

19) 1954년 6월 23일자 골롬반문서

20) 1954년 12월자 경향잡지

21) 1955년 3월 6일자 골롬반 문서

22) 1955년 8월 5일 골롬반회 총장인 T. 코널리 신부가 구 토마스 신부에게 보낸 문서

23) 1955년 8월 18일자 골롬반문서

24) 1955년 9월 8일자 골롬반문서

25) 1955년 10월 22일자 골롬반문서

26) 김흥수, 〈한국전쟁 시기 기독교 외원단체의 구호활동〉, 《한국 기독교와 역사〉 23, 97쪽 2005.

27) 위의 책 99쪽 참조.

28) 1953년 6월 골롬반문서, 구인란주교의 춘천지목구 개관

 

29) 이 통계는 의사회에 등록한 의사의 숫자이며 춘천시(17명), 춘성군(3명), 홍천군(4명), 횡성군(3명), 원주군(15명), 평창군(3명), 영월군(14명), 정선군(2명), 강릉군(20명), 삼척군(12명), 울진군(7명이며 철원, 화천, 인제, 양양 등 38선 이북 수복지역은 빠져있다. 또한 의사회에 미가입한 의사 약 60명도 포함하고 있다.

 

30) 《강원도사》, 964쪽.

 

31) 화이저(Pfizer) : 미국의 대형제약회사로 1942년 설립되어 의약품, 병원용품, 특수 화학 제품을 생산 판매한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오랜 기간 의약품을 보내주었다.

 

32) 노라수녀는 1973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목포의 병원에서 9년 근무하였고, 본국으로 돌아가 4년간 호스피스에 관한 공부를 하고 난 이후인 1985년 춘천으로 와서 2011년 골롬반 병원이 폐원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골롬반 병원 폐원 이후인 현재는 골롬반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인 골롬반의 집에서 근무하고 있다.

 

33) 노라 수녀의 증언은 2016년 3월 필자와 춘천시 거두리 골롬반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34) 《The Far East》 1960년 1월호의 ‘Some Mission Mathematics’

 

35) 노라 수녀는 증언에서, “처음에는 한국의사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의사들 계속 썼어요. 처음에 우리 수녀의사 가끔 한번씩 있었고 춘천에 3분 한번은 4분까지 한국 의사선생님 있었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의사 월급 주는게 보통이 아니었어요. 또, 이런 병원에는 별로 오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에 있고 싶어하고 그래서 의사 구하는 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었어요.”라고 하였다.

 

36) 1962년 4월 18일자 골롬반 문서

37) 1962년 6월 4일자 골롬반 문서

38) 1942년 영국 옥스퍼드에 본부를 두고 발족한 극빈자 구제기관이다.

39) 《춘천백년사》, 593쪽.

40) 《강원도사》, 969쪽.

41) 한국 가톨릭에서는 임종 직전에 행하는 세례를 대세라고 한다. 

42) 《광주교구 50년사》, 1990년, 143쪽.

43) 《강원도사》, 955-956쪽

44) 1976년 3월 16일자 골롬반 문서

 

[학술지 교회사학 vol 14, 2017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원희(강원대학교 강사) · 김대기(교신저자, 강원대학교 교수)]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322365&Page=4&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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