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최창현의 삶과 신앙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27 ㅣ No.1137

최창현의 삶과 신앙

 

 

이 글은 초기 한국교회의 지도자인 최창현의 삶과 신앙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최창현은 중인 신분으로 천주교회가 설립된 1784년부터 신유박해가 일어난 1801년 이전까지 조선 교회를 이끈 인물이다. 그는 평신도 신부, 총회장, 《성경직해》 번역, 성직자 영입 등의 활동으로 18세기 말 한국천주교회의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고, 마지막에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하였다. 따라서 최창현의 활동사는 한 개인의 역사이자, 18세기 말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러한 점에서 최창현에 대한 연구의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아울러 이 글은 최창현의 활동을 탐구하는 가운데 가성직제도를 평신도 성직제도로 칭하는 문제,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10명이 누구인지, 그리고 당시 평신도 신부들의 모임 장소가 난동과 반촌이었다는 것, 1787년 정미반회사건과 평신도 신부와의 관련성 등 초기 교회사와 관련된 내용들도 밝혔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Ⅰ. 머리말

 

한국천주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선교사의 전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의 평신도들이 서적을 통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신자들은 1811년 교황에게 올린 ‘서한’(東國敎友上敎皇書)에서 이러한 내용을 언급1)할 정도로 교회 설립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조선의 신자들은 복음의 수용만이 아니라, 교회를 유지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즉 1784년 교회가 설립된 후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까지 10년,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때부터 1833년 말 유 파치피코(여항덕)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32년 등 40년 이상을 성직자 없이 교회를 유지했던 것이다.

 

성직자가 부재하던 시기에, 신자들은 끊임없이 성직자의 영입을 위해 노력하였다. 주문모 신부를 영입할 때는 물론, 신유박해 이후에는 1811년부터 여러 차례 북경을 왕래하며 성직자의 영입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이 지속적으로 입국하면서, 신자들의 오랜 숙원이 해결될 수 있었다.

 

성직자 영입과 함께, 신자들은 교계제도를 설정한다든지,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한다든지, 전교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교회를 유지 발전시켰다. 아울러 신유박해 후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신자들의 활동은 제2의 교회 설립이라고 할 정도로 의미 있는 활동이었다. 만약 이 시기 정하상 등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1784년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이 계속 싹을 틔웠을까는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 특히 초기 교회에 있어 평신도들의 활동은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그들의 활동 하나하나는 곧바로 교회의 발전과 직결되며, 그러한 활동들이 쌓여 한국교회의 역사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박해시대 인물들을 탐구하는 작업은 한국교회사연구에 있어 유용한 방법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자는 1801년에 순교한 최창현(崔昌顯, 1759~1801)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그의 삶과 신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최창현은 총회장, 평신도 신부, 《성경직해》 번역, 성직자 청원 등 초기 한국교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고, 마지막에는 순교로써 신앙을 증거한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3년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최창현을 시복 대상자(하느님의 종)로 선정하여 시복 작업을 진행 중에 있다.

 

이처럼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최창현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 최창현에 대한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약전(略傳) 형태2)거나, 초기 지도층의 활동과 관련해서 최창현을 간략하게 언급한 글3)들이다.4) 그리하여 18세기 후반기를 살았던 최창현이 왜 천주교에 입교했고, 국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위해 살다가 순교한 과정 등이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최창현의 활동에 대한 평가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최창현의 입교에서부터 순교까지 그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의 활동이 한국교회사에서 갖는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특히 최창현이 초기 교회에서 맡았던 역할들을 고려할 때, 그의 활동에 대한 분석은 초기 한국교회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Ⅱ. 입교

 

최창현은 1759년 중인인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초전동(현 중구 초동)에 거주하였으며, 아버지 최용운(崔龍雲)5)이 약국을 경영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도와 약국 일을 하였다.6)

 

최창현은 어릴 때부터 학습에 많은 열의를 나타냈고, 학문에 열중하면서 진지한 학문 연구를 좋아하던 사람들과 친분을 맺고 있었다.7) 당시 최창현이 친분을 맺었다는 ‘진지한 학문 연구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이벽(李蘗)을 중심으로 하는 남인 학자들과 그 주변 인물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그가 1784년 이벽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운 즉시 입교했다는 점에서, 최창현은 평소 이벽과 친분을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벽과의 교류를 통해 이벽의 주변 인물들도 알고 지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벽은 권철신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며, 정약용 형제와 이승훈은 물론, 권철신의 문하에 드나드는 사람들과도 교유하였다. 당시 권철신은 시세(時勢)에 얽매이지 않고 경전을 자주적으로 해석하였으며, 탈주자학적 성향 위에서 실천적인 학문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철학과 과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8) 이러한 권철신의 학문 경향은 이벽을 비롯한 그의 제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최창현 또한 이벽을 통해 이러한 학문 경향을 접하게 되었을 것이다.9)

 

그런 가운데 권철신 계열의 학자들이 상당수 천주교 신앙을 가졌듯이, 최창현도 이벽의 권유로 천주교 서적을 본 후 1784년 겨울에 이벽의 집에서 정약전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10) 결국 최창현이 이처럼 빠른 시간 내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벽과 교류하면서 이벽과 같은 학문적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창현의 학문적 배경과 함께, 그의 신분이 의·역계(醫·譯系) 중인이었던 점도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즉 조선후기 의역계 중인들은 직업과 관련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양반층에 버금가는 학문적 교양과 사회적 식견도 보유하였다. 이들은 직무상이나 가문 배경, 혹은 서적을 통해 해외 정세에 비교적 밝았으며, 경제적인 여유도 있었다. 따라서 의역계 중인들은 신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개방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11) 최창현 역시 비록 과거 입격자(入格者)는 아니지만, 의역계 가문 출신으로 신문화에 대한 의식이 개방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에 비교적 쉽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후기 중인들은 양반의 지위를 누릴 수 없었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쓰임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새로운 사상을 갈망하기도 했는데,12) 최창현도 이러한 신분사회의 한계 속에서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것은 최창현이 어릴 때부터 학문에 열중했다는 점, 이벽과 같이 시세에 얽매이지 않던 남인 학자들과 교류했다는 점, 그리고 입교 후 활발하게 교회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 등에서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최창현은 죄인의 집안이라는 굴레도 함께 쓰고 있었다. 즉 1801년에 반포된 〈討逆頒敎文〉에는 ‘昌顯以禧賊餘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13) 이것은 최창현이 죄인 ‘희(禧)’의 자손임을 말해준다. 비록 ‘희(禧)’라는 인물이 어떠한 죄를 지었고, 최창현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죄인의 자손이라는 점은 최창현의 사회적 진출에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집안의 배경도 최창현이 새로운 사상으로 눈을 돌리게 한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결국 최창현은 자신이 처해있던 학문적 · 신분적 · 시대적 · 가문적인 배경 속에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즉 최창현의 입교는 이벽의 영향하에 ‘천주교의 내용이 도리에 합치된다’고 인식한 결과지만, 그가 처해있던 여러 가지 상황들이 그를 천주교 신앙으로 이끈 배경이 되었다고 하겠다.

 

 

Ⅲ. 교회 활동


1) 평신도 신부14)

 

한국 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의 북당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후 이벽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설립되었다. 그러나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조선에는 10년 동안 사제가 없었고, 그런 상태에서 신자들은 스스로 교회를 유지해 나갔다. 그 사이 조선에는 1785년 봄 김범우의 집에서 신앙 집회를 가지던 신자들이 체포된 명례방 사건(을사추조적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여러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형조판서 김화진은 양반 신자들은 석방하고, 중인인 집주인 김범우만 구금하였다.15) 김범우는 형조에서 신앙을 증거하다가 충청도 단양으로 정배(定配)된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16)

 

명례방 사건으로 신생 조선 교회는 일시 위기를 맞이했다. 즉 교회 설립을 주도했던 양반 신자들이 집안의 압력으로 교회와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벽은 부친의 강한 반대 때문에 집안에 갇혀있다가 1785년 여름(혹은 1786년 여름)에 병사하였고,17) 이승훈은 천주교를 배척하는 글과 시를 짓고 신앙생활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18)

 

그러나 얼마 뒤 이승훈은 다시 신자들을 결집하여 신앙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리하여 1786년 봄에는 서로 모여 고해하는 방법을 논의하였고, 같은 해 가을에는 교우들의 권유로 이승훈이 미사를 드리고 견진성사를 거행하도록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승훈은 10명에게 자신과 같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19)

 

이것은 복음의 전파를 더 쉽게 하고, 신입 교우들의 신앙을 굳게 할 목적에서 세운 일종의 교계제도(평신도 성직제도)20)로, 이때 이승훈으로부터 신부의 권한을 받은 사람은 권일신, 이존창, 유항검, 최창현, 홍낙민 등이었다.21) 그리고 후술하는 (자료-b)의 최 야고보와 이승훈이 회장으로 임명했다는 최인길22), 이승훈과 함께 교계제도의 계획을 세운 정약용 · 정약전 형제23) 등도 평신도 신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24)

 

이후 평신도 신부들은 각자 맡은 지역에서 설교를 하고, 세례와 고해성사, 견진성사를 주었으며, 미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영(領)하여 주는 등 각종 성사를 집전하였다.25) 그러나 이것은 교회법상 분명한 위법 행위였다. 그리고 이의 위법성이 신부로 임명된 신자 중의 한 사람인 훤전(Hiuen-chen)에 의해 제기되면서 이들의 성사 집행 행위는 중단되었다.26)

 

그런데 비록 교회법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으나, 평신도들의 성직 수행은 신자들의 열심을 북돋아 주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하여 당시의 신자들은 예절에 참여하고 성사를 받는 데에 거룩한 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27) 그랬기 때문에 성사가 중단되자 신자들은 의지할 데를 잃고 매일같이 고통과 불안 속에서 밤낮으로 구원받기를 갈망했던 것이다.28)

 

평신도들의 성사 집행은 이 시기 교세의 증가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즉 당시 신부로 임명된 이존창이 ‘그의 직무에 최선을 다해 큰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천주교가 내포 지방에 널리 전파되었다.’29)는 다블뤼 주교의 평가는 성사 집행의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교회가 설립된 지 5년 만인 1789년의 신자 수가 1,000명이나 되었다30)는 것도 당시 평신도 신부들의 역할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한편 당시 이승훈으로부터 신부로 임명된 인물들은 모두 조선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참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신부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 내에서 지도적 지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인물 중에 최창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자료상 최창현이 신부로서 행한 역할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신부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신부들이 행했다는 여러 성사 집행을 최창현도 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다른 신부들이 거두었던 성과처럼 최창현도 서울의 교세 확대에 상당히 공헌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시기 최창현의 활동과 관련해서 주목되는 자료가 있다.

 

(자료-a) 서울에서도 규정에 따라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별명이 관천인 최 요한이 신부들을 영접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도록 일부러 집 한 채를 세낸 것을 보았다. 그는 활동적이고 유능한 성격으로 신부들을 영접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고, 교우들을 적절하게 준비시켰고, 귀찮음과 피곤함을 싫어하지 않고, 밤낮으로 신부와 교우들에게 헌신하기에 바빴다.31)

 

위의 기록은 평신도 신부들과 관련된 자료로, 최창현이 신부들의 성사 집전을 돕기 위해 서울에 집 한 채를 세내었고, 그곳에서 신부들을 영접하고 교우들을 준비시키는 등의 일에 헌신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최창현은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자신도 신부인 최창현이 다른 신부들의 성사 집전을 돕기 위해 집을 마련하고 교우들을 준비시켰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즉 당시 신부들은 ‘초인적인 존재요, 천상 사람으로 간주되고 대우받았다’는데,32) 그러한 신분인 최창현이 다른 신부들의 보좌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블뤼 주교는 〈비망기〉에서 “회장직을 맡았던 것이 아닐까?(Ne semble-t-il pas qu'il fut installe catechiste?)”라고 하였고,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교회의 총회장격이었다.(il etait comme le catechiste general de le chretiente)”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부였던 최창현이 왜 회장과 같은 역할까지 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먼저 당시 신분제의 일면을 반영하는 사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즉 최창현이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회장의 역할 같은 실무적인 일까지 담당하지 않았나 생각한다.33) 두 번째는 이승훈 등이 세웠다는 교계제도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는 평신도 신부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자료-b) 이승훈 베드로와 이단원 루도비코는 어쩌면 다른 여러 사람들과 아울러 신부로 임명되었다. (내포 여사울의 최 야고보는 2급의 신부였던 것 같다. 그는 이단원의 지시 하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단원이 주교였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34)

 

(자료-b)에 따르면 당시의 신부 중에는 ‘신부의 지시를 받는 2급의 신부’가 있었다고 한다. 2급의 신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2급의 신부인 최 야고보가 이존창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은, 신부 사이에도 일정한 등급 차이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최창현이 밤낮으로 신부와 교우들에게 헌신했던 것은, 충청도의 최 야고보처럼 2급의 신부로 임명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아울러 최창현의 성격이 활동적이었다는 점에서, 그가 회장과 같은 역할을 자임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신부로서 최창현의 역할과 함께, 그가 신부들을 영접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도록 집 한 채를 세낸 것도 이 시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조선의 신자들은 수표교 공동체에 이어 김범우의 명례방 공동체에서 정기적으로 신앙 집회를 가졌는데,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신앙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일시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평신도 신부들이 교회를 이끌면서 조선 교회는 다시 활기를 띠었는데, 최창현이 마련한 집은 이러한 시기에 신자들이 성사를 받고 신앙 집회를 가지던 공간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최창현이 세낸 집은 교회의 핵심 장소로서 김범우의 집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평신도 신부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신부와 신자들의 모임 장소가 최창현이 마련한 곳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료-c) 지난 모임에서도 나의 의견은 인호를 수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나의 의견을 당신들에게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모두가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의 모임에서 나의 의견을 조금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미사드리는 것을 중단하자는 의견까지 냈었습니다.35)

 

(자료-c)는 평신도 신부의 부당성을 지적한 훤전의 편지인데, 이에 따르면 평신도 신부들은 여러 차례 서울의 ‘란동과 판쿠’에 모여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의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란동과 판쿠가 어디일까? 란동에 대해서는 오늘날 서울 중구 회현동이라고 이미 소개된 바 있다.36) 조선 선조 때 회현동 2가에 생긴 난정이문골을 한자로 난정이문동(蘭亭里門洞) 또는 난정동이라고 하고, 줄여서 난동(蘭洞)이라고 표기했다는 사실에서,37) lan tong은 회현동 2가쪽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그러나 판쿠는 서울의 어느 지역을 가리키는지 알기가 어렵다. 그런데 fan-kou와 비슷한 발음이 되는 마을로 반촌(泮村)이 있다. 반촌은 지금의 성균관이 있는 명륜동 일대로, 조선시대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반촌은 중국어로 pan-cun이라고 읽는데, ‘판쿠’와 ‘판쿤’은 발음과 표기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근사하다. 아마도 이승훈의 편지를 프랑스어로 옮길 때 koun에서 n을 빠트린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것으로 보아, ‘평신도 신부들의 활동기’에 회현동2가와 반촌에 신부들의 모임 장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fan-kou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것이 ‘정미반회사건(丁未泮會事件)’이다. 이 사건은 1787년 겨울에 이승훈과 정약용이 반촌의 김석태 집에서 천주교 서적을 강습한 것이,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진사 강이원(姜履元)에 의해 홍낙안(洪樂安)에게 알려지고 홍낙안이 이 문제를 공론화시킨 것이다.38) 그리고 이를 계기로 척사 운동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39) 그런데 이 시기는 이승훈을 중심으로 아직 ‘평신도 신부’들이 활동하던 시기로 추정된다.40) 이러한 때에 이승훈이 반촌의 김석태 집에서 정약용 등과 서학 모임을 가졌다는 것은, 반촌의 김석태 집이 ‘평신도 신부’들이 모여 교회 일을 의논하던 fan-kou였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추정이 맞는다면, 정미반회사건은 평신도 신부들의 활동과 연속 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 평신도 신부들의 모임 장소가 두 곳만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반촌과 난동은 실제 모임이 개최된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들 중 반촌이 김석태의 집이라면, 난동 즉 회현동에 있던 집은 최창현이 마련한 거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2) 총회장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는 최창현을 총회장이라고 소개하고 있고,41) 다블뤼 주교와 달레 신부도 〈백서〉의 내용을 토대로 〈비망기〉와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최창현을 총회장(le catechiste en chef42))이라고 하였다.

 

조선 교회에서 신유박해 이전 최창현와 같이 회장으로 불리던 사람은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여회장 강완숙(姜完淑, 골롬바), 동정녀 회장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내포의 정산필(鄭山弼, 베드로), 서울의 김승정 ·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 · 손경윤(孫敬允, 제르바시오) 등이 있다. 그리고 성격은 다르지만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도 교리 연구 단체인 명도회의 회장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한 이후에 회장으로 임명되는데, 주문모 신부는 지역 · 단체 · 여성 등 사목상의 필요에 따라 회장을 임명한 후 이들을 통해 조선 교회를 이끌었다. 즉 신부가 1명인 상황에서 다양한 종류의 회장들을 임명하여 신부 대신 신자들을 가르치고 돌보도록 했던 것이다.43)

 

그런데 이들 중 최창현이 맡았던 총회장은 무슨 의미일까? 당시 회장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있어 다른 회장들을 관리하는 상위의 직책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모든 일에 관여한다는 의미의 칭호인가?

 

조선 교회에는 100년의 박해시기 동안 여러 명의 회장들이 존재했지만, 총회장이라고 불린 사람은 최창현이 유일하다. 따라서 이것으로 보아 위계적인 회장제가 박해시대 조선 교회에 있었는지는 의문이다.44) 다만 1880년대 김기호(요한)가 블랑 주교에게 도회장(총회장)으로 임명되었고, ‘모든 공소 회장은 도회장을 통해 주교에게 품달하라’45)고 명령한 점에서, 도회장과 공소 회장 사이에 일정한 위계성을 엿볼 수도 있다.

 

그러나 최창현의 경우 기록상 주문모 신부와 다른 회장 또는 신자들을 매개하는 유일한 인물은 아니었다. 즉 교회 일이 최창현을 통해서만 주문모 신부에게 전달되거나, 회장 등 당시의 지도급 신자들이 최창현을 통해서만 주문모 신부와 접촉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시기에 위계적인 회장제가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최창현이 맡은 총회장직에서 위계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최창현이 했던 활동들이 주목된다. 즉 (자료-a)를 보면 ‘최창현은 모든 일을 처리하고, 교우들을 적절하게 준비시켰으며, 귀찮음과 피곤함을 싫어하지 않고 밤낮으로 신부와 교우들에게 헌신하기에 바빴다.’는 내용이 있다. 박해시대 회장의 중요한 역할이 신자와 신부, 신자와 신자 사이를 연결해 주고, 성사 때 교우들이 모일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라고 할 때, 최창현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료를 통해 최창현이 얼마나 교회 일에 헌신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46)

 

이와 함께 최창현은 교회의 설립 때부터 지도급 지위에 있었고, 을사추조적발사건, 신해박해를 거치면서도 굳건히 교회를 지킨 인물이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키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주문모 신부는 최창현의 이러한 활동들을 고려하여 그에게 총회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즉 최창현에게 있어 총회장직은 위계적인 성격보다는 모든 교회 일을 돌본다는 의미가 더 강한 것으로 생각되며, 최창현이 경향(京鄕)을 막론하고 교회 일에 관여했다는 기록47)은 이러한 총회장의 역할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3) 성직자 청원 및 영입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의 신자들은 1786년에 독자적인 교계제도를 세워 성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이승훈이 사제로 임명한 훤전(Hiuen-chen)이라는 신자가 《Cheng Kiao Iva Yao》48) 등의 책을 열심히 정독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고, 그 결과 모든 성사 집전을 중단하고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여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사람이 윤유일이다. 그는 1789년과 1790년 두 차례에 걸쳐 북경에 파견되어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의 선교사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교사의 파견이 결정되었고, 1791년에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가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레메디오스 신부는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해 입국에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1793년에 지황이 밀사로 북경에 가서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1794년 12월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그런데 주문모 신부의 입국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에 최창현이 있다. 즉 1801년에 체포된 최인철과 김염이의 진술에 따르면, 최창현은 최인길 · 지황 · 강완숙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신부를 영입했다고 한다.49) 물론 윤유일을 밀사로 보낼 때도 최창현은 신부로 임명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정 부분 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주로 이승훈과 권일신이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밀사 윤유일이 권일신의 제자라는 점과 윤유일이 이승훈과 권일신의 편지를 북경에 전달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790년 윤유일이 귀경하여 알려준 조상제사 금지령과 1791년에 발생한 신해박해는 조선 교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즉 조상제사 문제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때 교회를 떠난 사람으로는 이승훈과 정약용 형제 등 양반 출신의 지도급 신자들이 많았다. 권일신은 체포되어 예산으로 귀양가던 중 사망하였다.50)

 

이처럼 당시 교회를 이끌던 양반 지도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와 멀어지면서 이제 조선 교회는 중인 계급의 지도자들이 이끌어가게 되었는데, 중인 계급 중에 열성있고 능력있다고 지목된 사람이 최창현과 최인길이다.51) 특히 최창현은 1791년 이전에 신부로 임명된 인물이며, 또 권일신을 도와 신자들을 지도하고 수를 늘리기에 열성을 다한 사람이었다.52) 따라서 최창현은 이미 교회를 이끌 경험과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랬기 때문에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권일신의 죽음 이후, 최창현이 공동체를 지휘하던 사람들의 선두에 있었다.”53)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 조선 교회를 이끌게 된 최창현은, 신해박해의 위협이 거의 사라진 상황에서 동료들과 함께 선교사를 영입하는 일에 착수하게 되었다.54) 그리하여 1793년에 지황을 밀사로 보내 선교사의 파견을 청원하였고, 그 결과 이듬해 말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설립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성직자를 모시게 되었고, 신자들은 미사를 드리고 성사를 받게 됨으로써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4) 교회서적의 필사와 번역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최창현이 교회 서적을 필사하고 한글로 번역한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자료-d) (최창현은) 천주교에 나온 후로 모든 교회 서적들을 자기 손으로 베껴, 그것으로 크게 봉사를 하였다. 그의 책 베끼는 솜씨가 어떻게나 평판이 높았든지 책을 가지고 싶은 교우들은 그것을 얻기 위하여 그를 찾아갈 정도였다. “주일과 축일 성경의 해석”이라는 한문책을 조선말로 번역한 사람이 그였다고 한다.55)

 

(자료-d)에 따르면, 최창현은 모든 교회 서적을 필사해서 신자들에게 보급했고, 이에 교회 서적을 구하고 싶은 신자들은 최창현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일과 축일 성경의 해석’ 즉 《성경직해》를 한글로 번역한 사람도 최창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책의 필사 · 보급과 관련하여 정인혁(1794년 이후)은 최창현에게 언문으로 번역된 책 5권을 빌렸다고 했고,56) 유관검과 홍정호(1800년 여름)도 천주교 서적을 최창현의 집에서 빌려보았다고 했다.57) 물론 이들만이 최창현에게 책을 빌려본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비록 자료상 세 사람 정도만 나오지만, ‘모든 교회 서적들을 자기 손으로 베꼈고, 책을 가지고 싶은 교우들이 그것을 얻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는 표현에서, 최창현이 많은 교회서적을 필사하여 보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성직자가 없거나 1명인 상황에서 신자들이 신앙을 실천하고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하겠다.

 

최창현의 활동 중 서적을 필사하여 보급한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의미있는 것은 《성경직해》의 한글 번역이다. 《성경직해》는 디아즈(Diaz, 陽瑪諾, 1574∼1659) 신부가 저술한 일종의 전례용 발췌 성경으로,58) 전례력에 따라 주일과 축일을 배열하고, 해당 주일과 축일에 맞는 성경 말씀을 소개한 후 그에 대한 설명을 붙인 것이다. 성경 말씀은 4복음서에서 발췌한 것으로, 4복음서의 내용 중 30.68%59)가 수록되어 있다. 비록 분량은 적지만, 말씀의 전례 때 반드시 필요한 책이라는 점과 이를 통해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60)에서, 이 책의 한글 번역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최창현이 교회 서적을 필사하여 보급하거나 번역했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 서적을 많이 접하고 익혔다는 의미인데, 이것으로 보아 최창현의 교리 지식은 상당히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 지식을 바탕으로 신자들에 대한 교육 활동도 전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황사영이 〈백서〉에서 “도리와 강론도 자세하고 분명하여 깊은 맛이 있었습니다. 비록 예사롭게 말하며, 듣기 좋게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 즐겨듣고 싫증이 나지 않고 사람의 마음 속 깊이 들어가므로, 듣는 사람에게 신심의 유익함이 아주 많았습니다.”61)라고 평한 것은, 최창현의 교리 지식과 교육 활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그의 활동은 총회장으로서의 활동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5) 교류자

 

최창현은 초기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많은 신자들과 교류하였다. 따라서 최창현이 어떤 인물들과 교류했는지를 살펴보면, 최창현의 활동은 물론 당시 교회의 상황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① 친척

 

박해시대 한국천주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가족 간에 신앙을 전수했다는 점이다. 부부 혹은 부자, 부녀, 모녀, 형제 사이에 신앙의 수수(授受) 관계가 성립되었고, 그 결과 가족 순교자들도 많이 나타났다.

 

최창현이 활동할 당시 그와 혈연적으로 관련된 사람들도 여러 명 존재했다. 그들 중 최창현의 족질(族姪)인 최인길이 있다.62) 최인길은 1784년경 최창현과 함께 이벽으로부터 천주교를 배워 입교하였으며,63) 최창현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신부를 자신의 집에 모셨다. 그리고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던 북산사건이 발생했을 때, 신부를 대신하여 체포되어 순교한 인물이다. 최인길이 최창현의 친척이라면, 최인길의 동생으로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 역시 최창현의 족질이 된다.

 

다음으로 최필공64)과 최필제도 최창현의 친척이다. 즉 최필제는 최창현의 지친(至親)이라고 알려져 있고,65) 최필제는 최필공의 종제(從弟)66)이므로, 최필공 역시 최창현의 지친이 된다. 최필공은 1790년에 최창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으며, 이가환과 이존창이 그를 서울의 사학괴수(邪學魁首)로 일컬을 정도로 유명한 지도급 신자였다.67) 특히 1791년 정조가 최필공을 배교시키려고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던 것은, 교회 내에서 최필공이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최필제는 1790년경 이존창에게 배워 입교했으며,68) 명도회의 회원69)이자 약방을 경영하며 신자들의 모임을 주도한 인물이다. 최필제의 약방에는 최창현도 자주 드나들고 있었던 것 같다.70)

 

이와 함께 최창현은 1801년에 순교한 현계흠과 사돈간이었다. 즉 현계흠의 딸인 현경련 성녀가 최창현의 며느리였다. 물론 이들의 결혼은 현경련의 나이가 17세되던 1810년경, 즉 최창현과 현계흠의 순교 이후에 이루어졌다.71) 그러나 1801년 당시 현경련의 나이가 8세였고, 그로부터 9년 후에 최창현의 아들과 혼인했다는 것은, 1801년 이전에 이미 부모들 사이에 혼담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것은 그만큼 양 집안이 가깝게 지냈음을 말해준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유박해 이전 최창현의 친척으로는 최인길·최인철 형제, 최필공, 최필제가 있었고, 현계흠은 혈당(血黨)으로 장차 사돈이 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초기 교회의 지도급 신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중 최인길은 최창현과 같이 이벽을 통해 입교하였고, 최인철은 형인 최인길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최필공은 최창현의 전교로 입교하였으며, 최필제는 이존창에게 배웠지만, 최창현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최창현과 혈연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최창현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되며, 그런 가운데 이들은 최창현과 함께 초기 교회의 정착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편 신유박해 때는 아니지만, 1839년에 순교한 최창흡(최여칠) 성인은 최창현의 아우이다.72) 그는 1801년 당시 13세였는데, 그 뒤 오랫동안 신앙을 지키지 않고 교우들과도 아주 떨어져 살았다. 그러다가 1821년 경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39년 기해박해가 발생하면서, 부인인 손소벽 성녀와 딸 최영이 성녀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하였다.73) 최영이 성녀의 남편은 성직자 영입을 위해 노력한 조신철 성인인데, 조신철 역시 기해박해 때 순교하였다.

 

최창흡은 1801년 13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전에 형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를 접했다고 생각되며, 비록 신유박해 이후 신앙과는 멀어졌지만, 1821년에 다시 신앙을 찾게 되고 가족이 모두 순교성인이 된 것은, 최창현의 영향이 그의 동생에게까지 미친 결과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② 교우

 

최창현은 친척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는데, 자료상 최창현이 교류한 인물들을 정리해 보면 [표1]과 같다.

 

 

 

최창현이 입교한 1784년부터 순교한 1801년까지 그가 교류한 인물들을 보면, [표1]의 1~6번은 최창현이 세례를 받던 시기에 만난 인물들이며, 홍낙민(7)은 1786년에 함께 평신도 신부로 임명된 신자이다. 평신도 신부로는 11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체로 함께 세례를 받은 그룹과 겹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최인길 · 최필공 · 최필제 등 자신의 친척들을 통한 교류 현상을 볼 수 있다. 즉 김백심(10)은 최필공에게 배운 뒤 최창현에게 세례명을 받았고, 정인혁(13)은 최필공의 이성 친척으로 최창현에게 책을 빌리거나 그의 인도로 김이우 집 첨례에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이국승(16)은 최인길을 통해 천주교를 접한 후 최창현 등과 교류하였고, 손경윤(17)은 최필공에게 배운 후 최창현 등과 혈당(血黨)을 맺고 있다. 아울러 이합규(18)는 최필제와 교리를 논하는 가운데 최창현 등과 동당(同黨)을 형성했다. 따라서 최창현은 자신의 친척들을 매개로 신자들과의 교류 범위를 넓혀갔음을 알 수 있다.

 

친척뿐만 아니라 최창현은 신자 가족과도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윤장(9)은 윤유일의 부친이며, 정약종(11)은 자신의 대부인 정약전의 동생이다. 그리고 홍인(12)은 정약종의 사돈인 홍교만의 아들이며, 황사영(14)은 정약종의 조카사위이다. 홍정호(14번)는 홍문갑의 친척으로, 홍문갑과 그의 모친 강완숙은 최창현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따라서 홍정호는 이들을 통해 최창현과 연결되었고, 최창현에게 책을 빌려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 것으로 생각한다.

 

한편 최창현의 사돈인 현계흠은 약국을 경영하며 명도회의 하부 조직 중의 하나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현계흠은 당시 교회의 지도급 신자라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자신의 혈당(血黨)으로 지목한 인물이 최창현, 최필공, 정약종, 황사영, 이용겸, 이희영 등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시기 지도급 신자들은 교회 일을 위해 상호 간에 교류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최창현이 명도회장 정약종, 명도회 조직인 6회의 황사영, 현계흠, 강완숙 등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은, 최창현도 총회장으로서 명도회 조직에 일정 부분 관여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75)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최창현은 자신의 친척을 비롯하여 초기 교회의 지도급 신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그들과 교류한 신자들과도 교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교류 관계는 전교 활동의 일환임과 동시에 교회를 조직화해 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며, 명도회 조직은 당시 교회 조직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Ⅳ. 성격과 평판

 

황사영은 〈백서〉에서 “최창현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순수하고, 말은 간단하면서도 사리에 맞아, 누구든지 의혹이 생기거나 환난을 당하여 몹시 근심스럽고 답답할 때에는 그의 얼굴을 한 번만 보아도 자기가 당면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일이 아니요 어려운 일도 아님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76)고 하였고, 또 “그의 순명하고 겸손한 행동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며, 남보다 뛰어나거나 다른 점도 없었고, 또한 흠잡을 행동도 없었다. 덕망(德望)이 교우들 가운데서 제일 높았으므로,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77)라고도 하였다. 그러면서 최창현의 덕망에 대해 정약종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할 정도로 높게 평가하였다.78)

 

황사영의 평가에 따르면, 최창현은 표양이 순수하고, 합당한 말만 하며, 이를 통해 신자들의 걱정과 근심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사람에게 겸손하여, 덕망이 교우 중에 제일 높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고 신뢰한다고 하였다.

 

최창현의 이러한 모습과 관련하여 윤장(尹鏘)의 진술이 주목된다. 윤장은 1797년경 딸이 병이 나서 서울에 있는 최필제의 약국에서 약을 지었다. 그런데 약값이 이상할 정도로 너무 싸서 최창현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최창현은 “하늘에 계신 천주께서 인심의 선악을 살피시는데, 비록 약값일지라도 어찌 함부로 더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79)

 

이것으로 보아 최창현은 당시 하느님의 현존을 굳게 믿었고, 그랬기 때문에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하느님께 벌 받을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최창현의 믿음은, 1784년에 천주교 교리가 모두 도리에 합치된다고 여기고 입교할 때부터 담보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그가 보여준 순수하고 겸손된 행동들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러한 믿음의 산물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한편 정약용은 1801년에 체포되어 신문받을 때, ‘최창현은 도괴수(都魁首)이며, … 최창현이나 황사영 같은 무리는 비록 매일 여러 번 형벌을 가하여도 결코 실토하지 않을 것’80)이라고 하였다. 정약용이 최창현을 괴수 중의 우두머리라고 평가한 것은, 당시 교회 내에서 최창현의 활동과 역할, 그리고 지위를 잘 보여주는 것이며, 아울러 어떠한 형벌에도 실토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평소 최창현의 성품과 믿음의 강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진술을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Ⅴ. 체포와 순교

 

최창현이 체포되어 순교하는 모습을 황사영은 〈백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자료-e) 조화진이 충청도를 염탐하여 최관천이 교인들의 영수임을 알았으나 단지 그의 이름과 있는 곳을 몰라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이르러 (최창현은)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알고 다른 교우의 집으로 피해 있다가 신유년(1801) 1월 5일에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를 하였는데, 9일 밤중에 김여삼이 포도부장을 인도하여 불시에 덮침에 체포되어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0여 일 후에 치도곤 열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을 때는 숨을 쉬지 않고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이 마치 죽은 사람 같더니, 매질이 끝난 다음 관리가 그의 죄목을 헤아리자,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여 밝혔습니다.

 

관리가 말하기를, “네가 부모를 효경(孝敬)한다면 어찌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청컨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맛볼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고 마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관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마침내 명령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 뒤에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정약종과 같은 날 참형을 당했고, 이 때 그의 나이 43세였습니다.81)

 

(자료-e)에 따르면, 최창현은 1801년 이전에 이미 박해가 크게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교우 집으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 최창현이 피신한 것은 1800년 12월 17일과 19일에 최필공과 최필제 등이 체포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이 시기 최필공은 미결로 남아 있던 지난해의 옥안(獄案) 때문에 형조에 체포되었고, 최필제는 그의 약방에서 신앙 모임을 갖다가 투전을 단속하던 관원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끌려갔다. 최필제는 곧이어 포도청으로 이송되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포도청에서는 김여삼 등을 앞세워 신자들을 찾아다녔다.82)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들은 박해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몸을 피했는데, 최창현도 1800년 12월경 다른 교우 집으로 피신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1801년 1월 5일 몸이 불편하여 집으로 돌아왔고, 며칠 뒤인 1월 9일 체포되어 포도청에 수감되었다.

 

최창현은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십계명을 강론하거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등 호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83) 그러다가 1801년 2월 형조로 이송되었고, 2월 11일에 다시 국청(鞫廳)으로 잡혀갔다.84) 그러나 현재 최창현이 포도청과 형조에서 받은 신문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국청으로 이송된 후 2월 11일, 2월 13일, 2월 16일, 2월 17일에 받은 문초 기록만 남아 있다.

 

최창현은 2월 11일 신문에서, 아버지를 따라 약국(藥局)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는 것, 1784년 겨울에 이벽의 권유로 입교한 사실, 그리고 정약전 · 정약용 · 김종순 · 권일신 · 최인길 · 신여권 등과 함께 십계(十戒)를 공부했다는 것, 1798년 정약종을 만났고 정약종이 손경윤 · 손경욱 · 김계완과 왕래한 이야기, 자신이 최고로 존경하는 인물이 권일신 · 정약종 · 이존창이라는 등의 진술을 하였다. 그런 다음 ‘20년 동안 사학에 미혹되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후회막급하다든지, 천주와 예수를 원수로 보며 (천주교를) 이적금수(夷狄禽獸)의 도로 여긴다’는 진술을 하였다.85)

 

그러나 당시 심문관들은 최창현의 배교 진술을 죽음을 면하려는 계책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같은 날 다시 한번 최창현을 신문하였다. 심문관들은 천주교의 여러 소굴이 오랫동안 잘 유지된 것이 최창현의 주선 때문이라고 간주했다. 그리하여 신장(訊杖)을 때리며 집요하게 소굴과 교주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최창현은 끝내 모른다고 답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문관들은 최창현이 천주교의 소굴과 맥락을 모를 리가 없는데, 지엽적인 인물들만 고하고 중요한 인물들은 숨긴다고 하면서, 엄형을 가해서라도 반드시 사실을 알아내고자 하였다.86)

 

최창현에 대한 심문은 2월 13일에 재개되었다. 이날에도 심문관들은 최창현에게 교주와 교우들을 대라고 다그쳤다. 이에 대해 최창현은 ‘정약용이 나를 괴수로 지목했지만, 나는 지목할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오히려 천주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난번 배교했던 것을 깊이 뉘우치며 죽음에 나아갈 따름이라’고 진술하였다.87) 즉 2월 11일에 했던 배교 선언을 번복하고 다시 신앙인으로 죽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2월 16일과 17일의 심문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결과 며칠 동안 옥에 갇혀있던 최창현은 1801년 2월 26일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88)

 

한편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는 ‘최창현이 처형되기 전날, 천주교에 대하여 호교론을 써서 관리들에게 제출하기까지 하였고, 이튿날 자기 피로 그것을 봉인하였다’는 내용이 있다.89) 여기서 최창현이 제출했다는 호교론은, 《벽위편》에 나오는 “逮及鞫廳之嚴 乃反變招 誓以甘心就戮 甚至於書納遲晩”90)에서 “書納遲晩”을 의미하는 듯하다.91) 즉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에 나아가고자 하고, 심지어 심문관들이 자신의 죄라고 지목한 것을 스스로 써서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書納遲晩’ 앞에 ‘심지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이러한 행동이 독특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즉 대부분의 지만은 심문관들이 써서 죄수들에게 보여주고 확인을 받는 형식일텐데, 최창현은 자신의 지만을 본인이 써서 제출했다는 것으로, 그만큼 자신의 삶과 신앙에 대해 자신감이 있고 떳떳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달레 신부가 이것을 ‘호교론’이라고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비록 거짓으로 잠시 배교의 말을 하기는 했지만, 최창현은 도괴수라는 정약용의 평가처럼, ‘최고의 지도자로서의 삶’에 걸맞는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Ⅵ. 맺음말

 

이상에서 최창현의 삶과 신앙에 대해 살펴보았다. 자료상 최창현에 대해서는 교회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교회 활동 이외의 생애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못한 한계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창현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글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그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최창현이 천주교에 입교했던 것은 이벽 등 남인 실학자들과의 학문적인 교류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즉 이들은 탈주자학적인 성향 위에서 실천적인 학문을 중시하고 서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최창현도 이들과 교류하면서 그러한 학문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이벽 등과 같이 서학을 신앙으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외 중인 가문으로서 신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인식을 가졌다는 것, 조선 사회의 신분제적인 한계 및 집안에 죄를 지은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도 최창현이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된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최창현의 교회 활동으로는 평신도 신부와 총회장으로서의 활동, 성직자 영입, 교회서적의 필사 보급과 번역 등이 있다. 

 

이중 ‘평신도 신부’란 을사추조적발사건 이후 신앙생활을 재개한 이승훈이 신자들과 함께 교계제도를 세웠을 때, 이승훈에게 성사를 집전할 권한을 받은 평신도들을 말한다. 이들은 평신도로서 신부의 역할을 한 것이며, 이때 신부로 활동한 사람은 이승훈, 최창현, 권일신, 이존창, 유항검, 홍낙민, 최 야고보, 최인길, 정약용, 정약전, 전라도 교우 1명 등 11명이었다.

 

평신도 신부로 임명된 최창현은 집을 한 채 세내어 신부들을 영접하고, 교우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등, 신부와 교우들을 위해 밤낮으로 헌신하였다. 당시 평신도 신부들은 난동과 판쿠 등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난동은 오늘날의 회현동 2가이며, 판쿠는 반촌(泮村, 명륜동)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중 최창현이 신부와 신자들을 위해 마련한 집은 난동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정미반회사건(1787년)이 반촌에서 발생한 것은, 이 사건이 평신도 신부들의 활동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최창현은 신해박해 이후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면서 주문모 신부를 입국시켰고, 이후에는 총회장으로서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서적을 필사하고, 《성경직해》를 한글로 번역했는데, 특히 성경의 한글 번역은 하느님의 말씀을 많은 신자들이 직접 접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최창현은 친척이었던 최인길·최인철 형제, 최필공, 최필제 뿐만 아니라, 그 외 많은 신자들과도 교류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는 최창현과 동료 신자들이 초기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셋째, 최창현의 성격은 대단히 순수하고 겸손하며, 덕망은 교우 중에 제일 높다고 평가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순명 정신이 뛰어나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의지가 매우 강하였다. 이와 함께 정약용이 ‘최창현은 여러 번 형벌을 가해도 교우들에 대해 실토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한 진술에서, 최창현이 지닌 성품과 믿음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넷째, 최창현은 1801년에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 그리고 국청에서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국청에서의 신문 첫째 날(2월 11일) 최창현은 배교의 말을 했다. 하지만 천주교의 소굴과 교우들을 대라는 요구에는 모른다는 말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2월 13일 신문에서 배교를 철회하고 신앙을 증거했는데, 그 결과 1801년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1784년부터 1800년까지의 한국교회사에서 최창현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의 활동사는 바로 이 시기 한국천주교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유박해 이전 최창현의 활동과 그 활동이 갖는 의미는 제대로 서술되고 평가될 필요가 있으며, 이 글이 그러한 연구의 시작이 되기를 기대한다.

 

* 이 논문은 2013년 9월 28일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서 개최된 제1회 순교자의 삶과 신앙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으로 한국순교복자수도회의 연구지원비를 받아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고문헌]


1. 자료

 

〈백서〉

《순조실록》

《승정원일기》

《사학징의》, 불함문화사 영인본, 1977.

이기경, 《벽위편》, 서광사 영인, 1977.

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상·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 1980.

이만채 편찬 · 김시준 역주, 《천주교 전교 박해사(벽위편)》, 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기해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이승훈의 첫째 서한〉, 《교회사연구》 8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서종태 · 한건 엮음,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국학자료원, 2004.

최석우 역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교회와 역사》 362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7.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 자료집 제1집 · 제2집》, 2005 · 2006.

《서울지명사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9.

 

2. 연구서

 

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차기진,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조한건, 〈‘셩경직해광익’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3. 논문

 

조화선, 〈셩경직해의 연구〉, 《최석우 신부 화갑기념 한국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이원순, 〈조선후기사회 중인층의 서교 수용〉, 《한국문화》 8집,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7.

조성윤, 〈조선후기 서울지역 중인세력의 성장과 한계〉, 《역사비평》 21호, 역사비평사, 1993.

방상근, 〈초기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이용결, 〈한국 천주교회의 성서 운동〉,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김진소,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의 ‘하느님 말씀’ 살이 - 성경직해광익을 중심으로 -〉, 《이성과 신앙》 제29호, 수원가톨릭대학교, 2005.

방상근, 〈해제 - 한국교회의 회장〉, 《회장》,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서종태, 〈이벽 · 이승훈 · 권철신의 순교 여부에 대한 검토〉,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차기진, 〈권철신 · 이벽 ·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노용필,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다〉, 《한국천주교회사교실》, 순교자현양 천주학당, 2001; 《한국천주교회사의 역사》, 한국사학, 2008 재수록.

 

……………………………………………………………………………………

 

1) 普天下聖敎初入之地 不由司鐸傳敎 只憑文書訪道 惟有我東國.

 

2) 《순교는 믿음의 씨앗이 되고》(한국교회사연구소, 2001)와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 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2003)에 최창현의 약전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교계 잡지와 신문에도 최창현의 약전이 실린 적이 있다.

 

3) 조광 교수는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에서 당시 조선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층들을 분석 고찰하는 가운데 최창현을 언급했고, 이원순 교수는 〈조선후기사회 중인층의 서교 수용〉(《한국문화》 8집,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7)에서 중인 출신 지도층들의 활동을 언급하는 가운데 최창현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4) 다만 2005년에 시복시성 작업의 일환으로 최창현과 관련된 원자료들을 수집하여 간행한 것은, ‘최창현 연구’와 관련해서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 시복 자료집 제1집》, 2005. 이하에서는 《시복 자료집 제1집》으로 약칭한다).

 

5) 그의 아버지는 비록 천주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으나, 집에서 행해지는 많은 집회를 반대하지 않았고, 할 수 있는대로 그것을 보호했다고 한다(달레 저, 안응렬 ·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325쪽).

 

6) 서종태 · 한건 엮음,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국학자료원, 2004, 87쪽. 황사영의 〈백서〉(33행)에 의하면, 집이 입정동(중구)에 있었기 때문에 교우들이 관천(冠泉)이라 불렀다고 한다. 입정동과 초전동은 근처라는 점에서 같은 곳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최창현이 초전동에 살다가 나중에 입정동으로 이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7) 다블뤼,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시복자료집 제1집》, 317쪽.

 

8) 차기진, 〈권철신 · 이벽 · 이승훈의 가문과 천주교 수용〉,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34~40쪽.

 

9) “이벽은 성호 이익의 학을 배우고자 했던 인물이었으며, … 이벽 등을 통하여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최창현의 학문적 성향을 굳이 논하자면, 이 역시 성호좌파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조광, 《조선후기 천주교사 연구》, 76쪽)

 

10)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88, 127~128쪽.

11) 이원순, 〈조선후기 사회 중인층의 서교수용〉, 63~64쪽.

12) 조성윤, 〈조선후기 서울지역 중인세력의 성장과 한계〉, 《역사비평》 21호, 역사비평사, 1993, 246쪽.

 

13) 달레 신부는 ‘희’를 옥천희로 보았지만, 옥천희라기보다는 최창현의 집안 사람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한국천주교회사》 상, 593쪽 각주 9). 이와 관련해서 1783년 12월 초 최창현(崔昌顯)이 격쟁(擊錚)한 기록이 주목된다. 물론 격쟁한 최창현이 신자 최창현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격쟁의 내용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討逆頒敎文〉의 내용과 격쟁한 시점이 교회의 설립 1년 전인 1783년이라는 점에서, 정황상 격쟁한 사람은 신자 최창현일 가능성이 크며, 그럴 경우 격쟁은 ‘희’라는 인물에 대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승정원일기》 정조7년(1783) 12월 1일, 5일, 6일).

 

14) ‘평신도 신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교회사에는 평신도들이 교계제도를 세워 신부 역할을 한 시기가 있었는데, 당시 신부로 임명된 신자들은 ‘평신도 신분으로 신부 역할을 한 것’이므로, ‘평신도 신부’라고 칭하고자 한다.

 

15) 이만채 편찬 · 김시준 역주, 《천주교 전교 박해사(벽위편)》, 국제고전교육협회, 1984, 95~97쪽.

 

16) 김범우의 정배지에 대해서는 단양과 밀양 두 가지 설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방상근, 〈김범우의 정배지에 대한 재검토〉,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한국교회사연구소, 2011 참조.

 

17) 《한국천주교회사》 상, 320~321쪽; 서종태, 〈이벽 · 이승훈 · 권철신의 순교 여부에 대한 검토〉,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 연구》, 양업교회사연구소, 2007, 50쪽.

 

18) 乙巳年聞有秋曹査 之事 矣父聚會族人 火其書于庭 矣父又作焚書之七律貳首 矣身則作闢異端之文及詩矣.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80쪽); 〈이승훈의 첫째 서한〉, 《교회사연구》 8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2, 172쪽.

 

19) 〈이승훈의 첫째 서한〉, 《교회사연구》 8집, 173쪽. 이러한 행위들이 이루어진 시점에 대해, 이승훈은 자신의 편지에 1786년이라고 쓴 반면, 달레 신부와 다블뤼 주교의 글에는 1787년으로 나온다. (《한국천주교회사》 상, 322쪽; 최석우 역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교회와 역사》 362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7, 5쪽)

 

20) 지금까지 이승훈 등이 세운 교계제도를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고 칭해 왔다. 그런데 이 용어에는 ‘가짜’, ‘거짓’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용어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런 가운데 ‘신자교계제도’(노용필,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우다〉, 《한국천주교회사교실》, 순교자현양 천주학당, 2001; 《한국천주교회사의 역사》, 한국사학, 2008 재수록), ‘모방 성직제도’(차기진, 〈이존창의 생애와 신앙〉, 《교회사연구》 1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174쪽), 교계제도라고 쓰고 부연 설명을 하자는 의견(장동하, 〈‘한국천주교회 창설 주역의 생애와 순교 사실과 그 평판에 관한 연구’ 논평〉, 《한국 천주교회 창설주역의 천주신앙 - 창설주역의 순교와 그 평판》, 천주교 수원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10, 267쪽) 등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평신도 교회운영제’라는 제안도 있었다. (조광,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주최, 제1회 순교자의 삶과 신앙 심포지엄 종합토론’, 2013. 9. 28)

가성직제도와 관련해서, 필자는 이것이 평신도들에 의해 설립 · 운영된 교계제도라는 점에서 ‘평신도 성직제도’라고 칭하고자 한다. 이 용어에는 ‘가(假)’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특징인 평신도들의 활동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1) 《한국천주교회사》 상, 322~323쪽; 承薰 … 與樂敏日身等 自稱以神父 互相傳敎(《사학징의》, 불함문화사 영인본, 1977, 231쪽). 한편 달레의 저서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는 권일신이 주교로 임명되었다고 하는데, 1789년 이승훈이 북경에 보낸 서한에 의하면 권일신도 이승훈이 임명한 10명의 신부 중 1인이었다. (《한국천주교회사》 상, 323쪽 주23)

 

22) 1797년 8월 15일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가 사천 교구장 생 마르탱(Saint-Martin) 주교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① 많은 사람들이 이 베드로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된 신입교우들로부터 세례를 받았으며, 그리하여 5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신자 수가 약 4천명에 이르렀다는 내용과 ② 최인길이 그리스도교의 전파를 위해 이승훈에 의해 간택된 최초의 회장 중의 한 명이었다는 내용이 있다(《교회사연구》 8집, 189·200쪽). 여기서 회장은 이승훈이 임명한 신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최인길도 평신도 신부 중의 1명으로 간주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23) 《한국천주교회사》 상, 323쪽.

 

24) 10명 중 나머지 1명은, (자료-b)에서 내포의 최 야고보가 2급의 신부로 이존창의 지시를 받았고, 서울의 최창현도 2급의 신부로 추정되듯이, 지역적으로 전라도 지방에 유항검의 지시를 받는 2급의 신부가 1명 더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25) 《한국천주교회사》 상, 324쪽.

 

26) 훤전(Hiuen-chen)이라는 신자가 이승훈에게 편지를 보내 印號가 없는 사람은 사제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면서 즉시 성사집전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였다. (〈유항검의 서한〉, 《교회사연구》 8집, 174~177쪽) 훤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유항검 · 이가환 · 권일신 · 정약전 등이 거론되고 있으며, 유항검이라는 설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27) 《한국천주교회사》 상, 324쪽.

28) 〈이승훈의 첫째 서한〉, 《교회사연구》 8집, 74쪽.

29) 최석우 역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6쪽.

30) 〈이승훈의 첫째 서한〉, 《교회사연구》 8집, 171쪽.

 

31) A la Capitale aussi les se faisaient bien en et nous voyons T’soi Jean surnomme Koan t’sien i louer une maison expres pour pouvoir y recevoir les pretres et faire conferer les sacrements aux fideles. Avec son caractere actif et capable il disposait toutes choses, preparait les chretiens convenablement et etait alors occupe jour et nuit pour le service des pretres des chretiens, sans redouter l’embarras et les fatigues (최석우 역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8쪽; 《한국천주교회사》 상, 325쪽).

 

32) 최석우 역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8쪽.

33)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214~215쪽.

 

34) Ni Pierre dit Seng houn i et Ni Louis dit Tan ouen i furent nommes pretre avec plusieurs autres peut-etre : (Tsoi Jacques de Ye sa ol au Nai p'o semble avoir ete pretre de 2d ordre. Il etait sous les ordres de Tan ouen i que q.q. uns pretendent avoir ete Eveque. Nous ne le pensons pas.) (최석우 역주,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7쪽).

 

35) 〈유항검의 서한〉, 《교회사연구》 8집, 175쪽.

36) 윤민구 역주, 《한국 초기 교회에 관한 교황청 자료 모음집》, 가톨릭출판사, 2000, 24쪽 각주 10.

37) 《서울지명사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9.

38) 《천주교전교박해사 - 벽위편》, 102~103쪽.

39) 차기진, 《조선후기의 서학과 척사론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2, 264~265쪽.

 

40) 평신도 신부들의 활동 기간에 대해, 이승훈은 1789년 말에 쓴 편지에서 1786년 가을부터 1787년 봄까지로 설명하고 있다. 즉 1787년 봄 독성죄임이 제기되었을 때, 곧바로 성사의 집전을 중단시켰다고 하였다(〈이승훈의 첫째 서한〉, 《교회사연구》 8집, 173쪽). 그러나 이승훈이 동봉한 훤전의 편지를 보면, 훤전은 여러 차례 평신도 신부의 성사 집전이 부당함을 제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신도 신부들은, 잘못임을 알면서도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에 훤전은 다시 한번 서한을 보내 자신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유항검의 서한〉, 《교회사연구》 8집, 174~177쪽). 따라서 훤전의 서한을 보면 평신도 신부들의 활동은 1787년 봄 이후에도 상당 기간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승훈의 서한대로 평신도 신부들의 활동이 1787년 봄으로 끝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라도, 이승훈과 정약용의 반촌 모임은 ‘평신도 성직제도’ 이후에도 신부들의 모임 장소가 계속 신자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41) 〈백서〉 24행, 32행.

42) 《한불자전》(요코하마 레비 출판사, 1880, 485쪽)에는 都會長을 ‘catechiste en chef’로 설명하고 있다.

43) 박해시대 회장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방상근, 〈해제 - 한국교회의 회장〉, 《회장》,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참조.

 

44) 최창현을 총회장이라고 언급한 자료는 황사영의 〈백서〉이다. 반면 1811년 조선 신자들이 북경주교에게 보낸 〈신미년 서한〉에는 최창현을 ‘회장’이라고만 표기하고 있다.

 

45) 白主敎來臨 傳敎各公所 差定會長 而分付曰爾等如有稟達於主敎事 當先告於都會長知之 都會長稟於主敎爲可 西洋名曰總會長 其權最高 中國名曰堂會長 而朝鮮則以都會長名 這金若翰差定云矣.(김기호, 〈봉교자술〉, 《만남과 믿음의 골목에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89, 261쪽 참조)

 

46) 최창현은 비단으로 된 휘장을 만들어 정약종의 집으로 보내는 등, 첨례 때 필요한 휘장과 성화도 준비하였다(天主畵像 緞縇帳具 無非渠家之拮据,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105쪽; 崔昌顯則粧飾繪像 無不主張, 《순조실록》 원년 2월 25일; 휘장의 사용처에 대해 최창현은 “瞻禮天主之日 設此帳掛天主像 坐誦書 思天主之恩矣”라고 하였다.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88~89쪽).

 

47) 諸窩窟之積年綢繆者矣身也 凡係邪學脈絡 無論京鄕 矣身無日不參涉(《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103쪽).

48) 《성교?요》라고 판독되고, 《성교절요》등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현재까지 어떤 책인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49) 《사학징의》 80~81쪽; 《사학징의》 363~364쪽. 《사학징의》의 내용 중 192쪽 이전의 내용에 대해서는, 《역주 사학징의Ⅰ》(조광 역주,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도 함께 참조하였다. 지황의 파견과 관련해서 비용은 강완숙이 부담했다고 한다(〈백서〉 67행; 《사학징의》 363~364쪽).

 

50) 《한국천주교회사》 상, 359쪽.

51) 《한국천주교회사》 상, 372쪽.

52) 《한국천주교회사》 상, 331쪽.

53) 《시복자료집 제1집》, 317쪽.

54) 《한국천주교회사》 상, 373쪽; 《시복자료집 제1집》, 317쪽.

55) 《한국천주교회사》 상, 315쪽.

56) 《사학징의》, 77~78쪽.

57) 《사학징의》, 13·87쪽.

 

58) 이용결, 〈한국 천주교회의 성서 운동〉, 《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379쪽; 한편 김진소 신부는 《성경직해》를 미사전례를 위한 발췌성서가 아니라, 주일과 축일의 복음을 묵상하여 생활화하도록 하느님 말씀살이를 위한 묵상 안내서라고 보았고, 조한건 신부는 천주교 전례인 미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준-복음독서집으로 보았다(김진소, 〈초대교회 신앙공동체의 ‘하느님 말씀’ 살이 - 성경직해광익을 중심으로 -〉, 《이성과 신앙》 제29호, 수원가톨릭대학교, 2005, 12쪽; 조한건, 〈‘셩경직해광익’ 연구〉, 서강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9쪽).

 

59) 조화선, 〈셩경직해의 연구〉, 《최석우 신부 화갑기념 한국교회사 논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255쪽.

60) 이용결, 앞의 논문, 379~380쪽.

61) 講道詳明有味 雖談說天然 不圖悅聽 而人皆樂聞 不知厭倦 入人深 聽之者大有神益 (〈백서〉 33행).

62) 〈백서〉 32행.

63) 《한국천주교회사》 상, 308쪽.

64) 정인혁의 5촌 고모의 아들(《승정원일기》 정조15년(1791) 11월 11일).

65) 刑推問目 汝矣身本以昌顯必恭之至親 (《사학징의》, 74쪽)

66) 《사학징의》, 74쪽.

 

67)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시복자료집 제2집), 2006, 139·161쪽; 한편 《사학징의》(170쪽)에는 김범우에게 천주교를 배웠다고 되어 있다.

 

68) 《시복자료집 제2집》, 271쪽.

69) 《사학징의》, 157쪽.

 

70) (尹鏘) 與罪人昌顯相知事殷 四年前 因女息之病 上京製藥於昌顯之族人 名不知崔哥藥局之際 藥價太歇故矣身 問其由 則昌顯言內 天主在天 察人心內之善惡 故雖於藥價 豈可濫捧乎云. (《사학징의》, 251쪽)

 

71) 《한국천주교회사》 중, 518쪽.

72) 《기해일기》, 성·황석두루가서원, 1986, 106쪽; 《한국천주교회사》 중, 515쪽.

73) 《한국천주교회사》 중, 515~518쪽.

74) 《추안급국안》, 《사학징의》, 《벽위편》을 토대로 작성함.

 

75) 명도회에 대해서는, 방상근, 〈초기교회에 있어서 명도회의 구성과 성격〉, 《교회사연구》 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참조.

 

76) 表樣純粹 言辭簡當 人或疑或遇患 心甚憂(32행)悶 一見其面 則自覺所遭之不大不難 (〈백서〉, 32~33행).

77) 順命謙遜 出於自然 旣無卓異之表 亦無瑕之行 德望爲敎中第一人 人無不愛信 (〈백서〉, 33행).

78) 雖德望不及冠泉 明理過之(〈백서〉, 38행)

 

79) 與罪人昌顯相知事殷 四年前 因女息之病 上京製藥於昌顯之族人名不知崔哥藥局之際 藥價太歇 故矣身 問其由 則昌顯言內 天主在天 察人心內之善惡 故雖於藥價 豈可濫捧乎云. (《사학징의》, 251쪽)

 

80) 崔昌顯則爲都魁首…崔昌顯黃嗣永輩 雖日日屢刑決 不吐實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122~123쪽).

 

81) 趙和鎭之廉聞湖中也 已知崔冠泉爲敎中(33행)領袖 但不知其名與居住 故不能捕獲 至是見窘難將大 避住敎友家 辛酉正月初五日 體氣不平 不得已還家調攝 初九日夜半 金汝三導捕盜部將 到家掩捕 囚之捕盜廳 十餘日後 受治盜棍十三度 杖時屛氣伏地 如死人一樣 杖後 官數罪 蹶然而起 講明聖敎十誡 官曰汝 旣孝敬父母 胡不行祭 答曰請審思之 就寢之(34행)時 雖有旨味 必不能嘗 已死之人 安能享飮食乎 官不能答 遂命下獄 自後無所聞 與丁奧斯定 同日被斬 時年四十三歲 (〈백서〉, 33~35행)

 

82) 〈백서〉, 22~23행; 《사학징의》, 74·171쪽.

 

83) 그러나 최창현이 2월 13일 국청(鞫廳)에서 한 진술 중에, “入於捕廳 直招反敎”(《조선후기 천주교신자 재판기록(上)》, 126쪽)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창현은 〈백서〉의 내용과는 달리, 포도청의 심문에서부터 배교한다는 표현을 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상, 449쪽)에도 “포도청에서 신문을 당하는 중에 그는 마음이 약해졌었으나 … 금부에 이르자마자 그는 용감하게 자기의 모호한 말을 취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이기경의 《벽위편》(서광사 영인, 1977, 310쪽)에도 “及至捕廳之杖問 詐稱開悟”했다고 되어 있다.

 

84) 《사학징의》, 172쪽. 

85)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87~89쪽.

86)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105~104쪽.

87) 《조선후기 천주교신자재판기록(上)》, 126~127쪽.

88) 《한국천주교회사》 상, 447쪽.

89) 《한국천주교회사》 상, 449~450쪽.

90) 《벽위편》, 310쪽; 《순조실록》(원년 2월 26일)에는 “自甘就戮 書納結案”이라고 되어 있다.

91) 《한국천주교회사》 상, 450쪽 각주 69.

 

[학술지 교회사학 vol 10, 2013년 12월(수원교회사연구소 발행), 방상근(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원본 : http://www.casky.or.kr/html/sub3_01.html?pageNm=article&code=212799&Page=10&year=&issue=&searchType=&searchValue=&journal=1



파일첨부

1,077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