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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교리 문헌 해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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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12-28 ㅣ No.1453

[사회교리 문헌 해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

 

 

아마 이 책은 교황문헌 가운데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팔린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되기 전부터 외국 언론에서 유명세를 치렀고, 프란치스코 교황님 자신이 착좌 이후 보여주신 파격적인 모습 덕이었지요.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팔린 만큼 많이 읽히진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문헌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2013년 11월 24일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신앙의 해’ 폐막을 기념하며 반포하셨습니다. 이 문헌은 사회 교리를 본격적으로 다루진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 교리를 많이 담고 있어 사실상 사회 회칙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 문헌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

 

저는 앞에서 소개한 열한 개 문헌을 읽지 않더라도 이 문헌만은 꼭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내용이 쉽습니다. 말하신 것을 그대로 글로 옮겨 썼다는 느낌을 줄 정도니까요. 둘째, 신앙인의 삶 전반을 돌아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사회 회칙과 다르게 이 문헌은 우리가 신앙인으로 잘 살아가는지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문헌을 읽으면 변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큰 자극을 받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 역시 그렇게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이 문헌을 통해 교회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제 생애에 이런 교황님과 그분의 이런 글을 만나게 된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일독을 하시면 꼭 다시 읽고 싶어질 것입니다.

 

 

세 가지 핵심 가르침

 

어느 구절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굳이 추리자면 저는 이 문헌의 핵심을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첫째, 복음화의 근본이 ‘복음의 선포(Kerygma)’라는 점입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선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천년 전 처음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처럼 모든 것을 선교에 맞춰 파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EG 3).

 

둘째, 교회 쇄신입니다. 교황님은 낡은 관습에 안주하는 모습, 복음화에 열심이어야 할 일꾼들의 안일한 자세, 적극적으로 파견하는 교회가 아니라 유지 관리에 치중하는 모습은 복음의 본래 정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본당과 신자 각자가 이 변화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당은 공동체들의 공동체이고 길을 가다 목마른 이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지성소이며, 지속적인 선교 활동의 중심지입니다.…본당은 사람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살아 있는 친교와 참여의 장소가 되고 온전히 선교를 지향하여야 합니다.’(28항)

 

셋째, ‘가난한 이들’입니다. 교황님은 교회가 ‘가난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문헌의 상당 분량이 이 주제에 할애되고 있으니 가장 중심적인 가르침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이렇게 강조를 많이 하는 경우는 그만큼 교회 안에 이런 면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이 없다면 ‘그 자체로 훌륭한 사랑의 형태인 복음 선포는 오해를 받거나, 대중 매체에 좌우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날마다 우리를 집어삼키려 하는 말의 홍수에 침몰될 위험이 있습니다.’”(199항) 이 인용구를 다른 구절들과 연결시켜 읽어보면 이런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는 교회는 위선을 한다고 바깥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다.’

 

 

‘하나라도 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헌 뿐 아니라 모든 사회 회칙의 가르침은 우리의 ‘사회적 회개’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회개를 ‘마음의 변화’ 정도로 이해합니다. 물론 회개라 부르려면 삶의 방향이 바뀌는 정도를 넘어 다시는 옛 길로 돌아가지 않는 정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보면 회심 후 성당은 열심히 다니시는 데 다른 이들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적습니다. 그래서 사회적 회개라는 말이 필요해졌습니다.

 

다들 생각해보십시오! 오래 신앙생활 했는데 아직 바뀌지 않은 점 또는 바꾸지 않은 점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제 주변 분들을 보면 제일 바꾸기 어려운 것이 사회를 보는 관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치적 견해라 말씀하십니다. 동족끼리 전쟁을 치른 나라이니 상대방을 용서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 후에도 남북이 체제 경쟁을 하면서 상대방을 빌미로 내부에서 솟구치는 다양한 국민들의 요구들을 탄압하였습니다. 이런 오랜 경험이 ‘사회’하면 거부감부터 먼저 갖게 하였을 터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배우는 사람들 아니냐? 당장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씩 마음을 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적 회개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고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들은 괴물이 아닙니다. 단지 다른 경험에 기초하여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생각을 틀린 생각이라고 봅니다. 당연히 이런 상태에서 이해를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사회적 회개란 상대방을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바라보고, 나와 같은 사정이 있을 것이라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점차 이를 넘어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에 나와 정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는 것이 사회적 회개입니다. 이렇게 가는 것이 사회교리 문헌을 제대로 읽는 방법입니다.

 

[2017년 12월 24일 대림 제4주일 의정부주보 5-6면, 박문수 프란치스코 박사(사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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