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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미술ㅣ교회건축

성미술 이야기: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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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9-28 ㅣ No.51

[성미술 이야기]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

 

 

베로니카의 땀수건. 베로니카 마이스터, 목판에 템페라. 1410년경. 78x48cm. 뮌헨 고전회화관.

 

 

베로니카의 수고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모습(volto santo)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베라-이콘 곧 「참 그림」은 창세기의 구절 천사와 야곱이 환도뼈를 다친 뒤에 했던 말 『나는 하느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았다. 그리하여 구원을 얻었다』는 구절을 상기시킨다(vidi Deum facie ad faciem et salva facta est anima mea.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내가 여기서 하느님을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라고 옮겼다. 창세기 32, 31).

 

 

지상에 드리운 신성의 그림자

 

면사포는 신부의 상징이다. 가령 『면사포를 못 써 본 게 한이다』라는 표현은 결혼식 안 하고 그냥 살 거냐는 항변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는 풍속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있었다. 감춘 것을 드러내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신부의 아름다움을 포장하려는 속셈에서 그랬다고 한다. 성당에서 식을 올리는 신부들도 면사포를 쓰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세가 증거판을 두 장 얻으러 시나이 산에 올랐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야훼를 뵙고 내려온 모세는 얼굴이 눈부시게 빛났다고 한다. 아론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정도로 빛을 뿜었다고 하니 거의 할로겐 램프 만큼 밝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세가 제 얼굴을 수건으로 씌워서 가렸다는데, 여기서 면사포 전통이 나왔다는 것이다.

 

즉, 새 신부의 면사포는 눈부신 아름다움에 결혼식장 하객들의 눈이 멀까봐 배려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중에 단체사진 찍을 때 면사포 벗은 신부를 보면 차라리 그냥 쓰고 있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더러 들 때도 있다.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모세의 수건 다음으로 유명한 것이 베로니카의 수건이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이 골고타에 오르실 때 동참했던 여인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참혹한 수난의 여정을 지켜보다가 안쓰러운 마음에 피땀을 닦으시라고 수건을 내밀었는데, 그 수건에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예수님의 얼굴이 그대로 베껴져 나온 것이다. 잠시 땀을 훔쳤을 뿐인데, 눈과 코와 입 뿐 아니라 머리카락과 수염까지 모두 찍혀 나왔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마치 3D 스캐너로 훑어낸 것처럼 아날로그 형상정보가 수건에 입력된 것이다.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은 미술의 역사에서 두 가지 큰 논쟁을 정리한다. 하나는 화가가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신성이 직접 흔적을 남겼다는 점에서 모든 그림의 원형이 되는 최초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땀수건 그림(sudarium)은 곧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림 아케이로포이에토스(acheiropoietos)의 개념을 촉발하고, 역사와 신화를 넘나드는 아름다운 전설들이 신앙의 담벼락을 타고 넝쿨처럼 뻗어나간다.

 

또 하나는 베로니카가 수건 그림을 들고 있는 그림이 이른바 「그림 속의 그림」이라는 간접화법의 구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성상논쟁의 화살을 교묘히 피해갈 구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모세의 율법이 우상숭배를 금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림과 조각에 대한 경배를 배척한 구약성서의 금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성상의 미술적 재현을 수용하는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특히 서기 800년께 비잔틴의 성상파괴 운동에서 츠빙글리와 칼뱅에 이르는 신학운동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첨예하게 대립되는 논쟁의 역사는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은 「그림 속의 그림」이라는 「에둘러 말하기」의 수사학으로 무서운 성상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면책특권을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마치 영화속 주인공들이 다시 영화관에 들어간다든지, 트로트 가수 송대관씨가 유행가에 관한 노래를 유행시키는 식으로 저작권법을 피해가는 식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삶의 궤적에 전설을 끼워 넣으려는 노력이 늘 수건 그림의 실증적 정당성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베로니카(veronica)가 지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베로니카의 이름을 풀어보면 베라 이콘(vera-icon), 곧 참 그림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 학자들이 동의하는 견해이다.

 

한편, 「황금전설」에 실린 베로니카의 전설은 줄거리의 배경이 골고타와 다르게 전개된다. 늘 예수님을 흠모하던 베로니카가 초상화라도 한 점 그려두고 싶었는데, 마침 길에서 만난 예수님이 소원을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훗날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깊은 병이 들었을 때 베로니카의 그림을 보고 나았다고 한다.

 

베로니카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기록도 만만치 많다. 열 두 해 동안 하혈병으로 고생하다가 예수님의 옷깃을 붙잡고는 씻은 듯이 나았다는 루가 복음서의 여자나,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의 누이 마르타가 베로니카라는 주장이 서방의 라틴 교회에서 제기되었다. 또 비잔틴 교회에서도 베로니카가 예수님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내기 위해서 파네아스의 입상을 세웠는데, 이것은 교부 에우세비우스가 직접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파네아스의 입상은 막시미노스 황제가 철거해서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베로니카의 땀수건은 역사와 신화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944년 콘스탄티노플에서 확인된다. 그후 13세기 제 4차 십자군 원정 때 로마로 다시 건너와서 바티칸의 보물이 되었으나, 1527년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용병들이 로마 대약탈을 저지르면서 역사의 수면 아래 완전히 가라앉고 말았다. 베로니카의 수건 그림을 유명한 토리노의 수의와 연결시키려는 견해도 있지만, 중간 고리가 빠져 있어서 아직 학계에서도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2일, 노성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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