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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7: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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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24 ㅣ No.671

[가르멜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7) 십자가 성 요한의 생애 ⑤


하느님 향해 나아가는 ‘완덕의 길’ 밝힌 큰 빛



세고비아 가르멜 수도원 내 경당에 있는 십자가 성 요한의 무덤.


바에사, 그라나다, 세고비아 시절

톨레도 감옥에서 탈출 후 2년간 갈바리오에서 지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스페인 남부의 대학 도시인 바에사로 가게 됩니다. 그곳은 그라나다와 갈바리오 중간에 있는 도시로 16세기 스페인에선 꽤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거기에는 스페인이 자랑하던 바에사대학이 있었는데, 맨발 가르멜 회원들은 이곳에 학생 수사들을 위한 수도원을 창립하기로 하고 십자가의 요한을 그곳의 초대 원장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1579년 여름 이곳으로 오게 됩니다.

여기에서의 생활 역시 성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이 일상을 통해서 그분은 더욱 깊이 성성에 나아갔습니다. 지극한 청빈의 정신을 살았지만, 공동체 형제들에게는 관대했고 형제애를 베풀었으며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늘 희사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손수 집안을 돌보고 수리했으며 자주 밤마다 2~3시간만 자면서 깊은 기도에 빠지곤 했습니다. 간혹 틈이 나면 갈바리오에서 집필을 시작한 「가르멜의 산길」과 「영혼의 노래」에 대한 해설을 계속 써나갔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영적 지도에 바쳤는데, 학생들은 물론 그곳의 평신도들이 성인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1581년에는 알칼라에서 처음으로 맨발 가르멜 회원들의 총회가 열렸습니다. 당시 이 총회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독립된 맨발 가르멜 관구의 참사로 선출되어 약 8년 동안 장상으로서 수도회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1582년 십자가의 성 요한은 스페인 남부의 대표적인 도시 가운데 하나인 그라나다에 신설된 수도원의 원장으로 부임해서 약 6년간 활동하면서 상당히 많은 일을 하게 됩니다. 아마도 그라나다 시절이야말로 성인의 생 애에서 가장 많은 결실을 본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인은 이곳에서 「영혼의 노래」 시(詩)에 대한 해설서 집필을 완전히 끝내고 「사랑의 산 불꽃」 해설서도 썼습니다. 그리고 갈바리오 수도원 시절에 시작한 「가르멜의 산길」과 「어두운 밤」 해설서도 완성했습니다. 쉽게 말해,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성인의 책 대부분은 그라나다에서 다 완성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 후, 성인은 1588년 스페인 중부의 세고비아 수도원의 원장으로 부임해 수도원 신축 공사에 직접 참여했으며 틈틈이 도시의 신자들과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영적 지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갈바리오 수도원 시절에 영적 지도를 했던 베아스 가르멜 수녀들을 계속해서 편지로 지도해 주었습니다.


수도회 장상들로부터의 박해

1590년 수도회 부총장 회의가 열렸을 때 십자가의 성 요한은 당시 수도회의 총장 신부와 몇 가지 사안에 대해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개혁 정신을 잘 알고 있던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 수녀들의 자율권을 침해하는 일련의 조치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성인은 수도회 내에서 탄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성인은 부총장직을 사임해야 했고 세고비아 수도원 원장직에서도 해임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에 오지나 다름없던 멕시코로 강제적으로 선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병으로 인해 당시 성인의 건강은 많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특히 오른쪽 다리에 염증이 생겨 많이 곪았다고 합니다.

수도회 장상들은 치료를 위해 성인에게 우베다와 바에사 두 수도원 가운데 한 군데를 선택할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은 우베다보다는 예전에 사목 활동을 했고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이 많고 다른 곳보다는 좋은 의약품을 구할 수 있는 바에사로 가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반면, 우베다 수도원에는 성인이 예전에 장상으로 있던 수도원에서 평수사로 지내며 성인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적이 있던 수사가 원장으로 있었고 그 신부는 평소에 성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우베다 수도원은 신설 수도원이라 상당히 가난해서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위해 이런 상황을 알면서도 우베다로 가기를 자청했습니다.


우베다 수도원에서의 임종

예상대로 성인은 우베다 수도원에서 죽기 전까지 병고에 시달리면서 그곳 원장 신부로부터 많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거처했던 병실은 아주 허술하고 작은 쪽방이었으며 병이 심했지만 헐한 음식이 주어졌고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중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시간에서 어떠한 예외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당한 처사를 지켜보다 못한 젊은 간호 수사가 당시 그 지역 관구장이자 초창기에 두루엘로에서 성인과 함께 개혁 운동을 시작한 안토니오 신부에게 편지를 보내 사태를 수습하게 됩니다. 그때가 1591년 11월 하순으로 당시 성인은 이미 죽어가던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성인은 1591년 12월 14일 우베다 수도원에서 수사들에게 둘러싸인 가운데 임종을 맞았습니다.

메디나 델 캄포의 병원에서 병자들을 정성스레 간호했던 착한 청년이었고 맨발 가르멜의 첫 수사였으며 톨레도에서는 죄수로 갇히기도 했고 후에 맨발 가르멜의 부총장이기도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 십자가의 요한 수사는 이렇게 해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분의 영적 가르침은 「가르멜의 산길」 「어두운 밤」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에 담겨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느님을 향해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에게 큰 빛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성인은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26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교회박사로 선포되었습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24일, 
윤주현 신부(대구가르멜수도원장, 대전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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