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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복자 124위 열전60: 이정식, 양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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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5-18 ㅣ No.1482

[복자 124위 열전] (60) 이정식 · 양재현


신앙의 모범 보인 그 대부에 그 대자



대부모와 대자녀 관계는 ‘신친’(神親)에 비유된다. 교회가 오랜 관습으로 영적 친척 관계인 대부모를 정해주는 건 세례나 견진 성사를 받는 신자들의 영적 성숙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대부모 역할은 그래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행히도 대부모와 대자녀의 관계는 인간적 친교를 맺는 계기로 많이 활용돼 본질적 의미를 잃고 있고, 심한 경우엔 이들 관계가 ‘방치’되는 경우도 생겨난다.

복자 이정식 요한


그러나 복자 이정식(요한, 1795∼1868)과 양재현(마르티노, 1827∼1868)은 대부 대자 관계의 모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정식 복자는 그리스도교 교육에 관심을 두고 대자를 돌보는 대부로서의 본질적 역할에 충실했고, 양재현 복자 또한 그 교육을 받고 성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이뿐 아니라 감옥에 갇혀서도 서로를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켰고 1868년 9월 19일 경상좌수영 장대에서 함께 참수돼 순교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처럼 아름다운 대부, 대자 관계를 맺은 이정식과 양재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경상도 동래읍성(현 부산 동래구 복천로 일대) 북문 밖에 살았던 이정식은 젊어서 무과에 급제, 동래도호부의 무관이었다. 특히 활을 잘 쏴 많은 이들에게 활쏘기를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병인치명사적」에 “동래부 내에 인기로 다 일컫더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으로 미뤄 많은 이들의 신망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하급 무관이었지만 소실을 들일 정도로 가세 또한 넉넉했고 자손도 많았으며 다복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가 왜 신앙에 입문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59세에 교리를 배워 입교했고, 신앙을 받아들인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수계생활을 열심히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후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가족을 권면해 입교시키고 자선에 힘쓰며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늘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집안에는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함께 걸어놓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했다. 이같은 열심을 보여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에 임명됐고, 자신의 직분에 늘 충실했다.

복자 양재현 마르티노


하지만 1866년 박해는 그의 삶을 무너뜨렸다. 박해가 일어나자 기장과 경주로 몸을 피했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해 있던 그는 동래 신자들에 대한 문초 과정에서 이름이 알려져 체포됐다. 아들 이월주(프란치스코)와 조카 이삼근(베드로)도 자수해 함께 붙잡혔다.

동래로 압송돼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돼 문초를 받게 되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많은 교우를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했다. 하지만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고, 숱한 문초와 형벌에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부자가 함께 순교의 화관을 쓴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대부 이정식과 함께 순교한 대자 양재현은 본시 좌수(坐首)였다.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기관인 향청의 우두머리로, 같은 동래읍성 북문에 살던 이정식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됐고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868년 동래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그는 태연히 그들을 맞아 관아로 끌려갔다. 이어 관장 앞으로 나아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한,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면서 굴하지 않았다. 일시 옥졸의 꼬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말하고 몰래 옥에서 빠져나와 집으로 되돌아갔다가 잡혀 온 뒤론 더욱 신앙심이 굳건해져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며 신앙을 증거한 뒤 순교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수영 장대에서 순교한 이들 두 복자는 현재 오륜대 순교자 기념관 경내에 함께 묻혀 교리교육은 물론 신앙살이와 옥살이, 마침내는 죽음까지 함께한 대부 대자 관계의 아름다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평화신문, 2015년 5월 17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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