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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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2-15 ㅣ No.1416

[124위 시복 특집] 이성례 마리아(1801~1840년)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오기를 기다려라.”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 마리아는 17세에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에서 살면서, 후일 두 번째 방인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를 낳았습니다. 얼마 뒤에 이성례는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했는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로 이주했습니다. 그동안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습니다. 신앙을 위해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하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아 내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댈 때면, 요셉과 마리아께서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격려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최경환이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이성례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습니다. 그러던 중에 포졸들이 수리산 교우촌에도 들이닥쳤습니다.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남편 일행을 따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했습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녀는 다음 날부터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했습니다. 곤장이나 칼에도 용맹했던 이성례였지만 자식에 대한 모정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젖이 나오지 않아 한 살배기 막둥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막내아들이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이성례는 결국 박해자들에게 굴복하고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최양업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굽어보셨습니다. 형조에 이르자 이성례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친 그녀는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했습니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 냈으며, 막내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했습니다.

이성례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39세였습니다.

서울대교구 홍보국 엮음 | 그림 박지훈, 124위 약전 ⓒ CBCK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순교영성연구소


[2014년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서울주보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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