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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일본 나가사키현 그리스도교 사적지 순례1: 신앙의 섬 쿠로시마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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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10-21 ㅣ No.1064

일본 나가사키현 그리스도교 사적지 순례 (상) '신앙의 섬' 쿠로시마를 가다

200년 이어온 신앙의 발자취, 그 열정 고스란히 남아


배에서 바라본 쿠로시마.


1614년 일본 전역에 금교령이 내려졌다. '동방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us Xaverius, 1506~1552)가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복음을 전파한 지 64년만이었다.

1873년 금교령이 철폐될 때까지 259년 동안 일본의 키리시탄(포르투갈어 크리스타오 christao에서 유래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뜻)들은 끊임없는 박해에 시달리면서도 후손들에게 신앙 유산을 물려주며 믿음을 지켰다.
일본에 천주교가 처음 전파된 나가사키현은 키리시탄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이기에 박해도 가장 혹독했다. 현재 많은 성당과 관련 사적지에서 박해의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일본 나가사키순례센터 초청으로 9월 18~22일 나가사키현 일대에 있는 천주교 사적지 10여 곳을 순례했다. 나가사키현 곳곳에 남아있는 그리스도교 유산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먼저 소개할 곳은 '신앙의 섬' 쿠로시마(黑島)다. 

일본 남서부 사세보시 아이노우라항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바닷길을 달리면 서울 여의도 넓이 두 배가 조금 넘는 섬 쿠로시마가 눈에 들어온다.

1902년 마르만 신부와 쿠로시마 신자들은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쿠로시마성당을 건립했다.


인구 479명 중 400여 명이 가톨릭 신자

바닥이 넓고 납작한 그릇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이 섬에는 검은 빛깔 화강암이 많다. 그래서 쿠로시마(黑島, 흑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인구가 479명에 불과한 이 섬에 400명에 가까운 가톨릭 신자들이 살고 있다. 신자 비율이 무려 80%가 넘는다. 0.35%에 불과한 일본교회 복음화율을 생각하면 좀처럼 믿기지 않는 수치다.

놀라운 것은 신자 비율만이 아니다. 섬 한가운데 500명이 함께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봐도 이 자그마한 섬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당이다. 매일 미사가 봉헌되는 쿠로시마성당에는 주일이면 신자 300여 명이 미사에 참례해 뜨거운 신앙을 고백한다.

넓이 520만㎡에 불과한 외딴 섬이 '신앙의 섬'이 된 사연은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쿠로시마는 나가사키현 북서부 히라도섬의 영주가 소와 말을 방목하던, 무인도와 다름없는 섬이었다.

쿠로시마성당 주일학교들이 그린 마르만 신부 모습.


1803년 영주가 방목을 중단하고 다른 지역 주민들 이주를 허락하면서 소토메와 고토열도 등에 살고 있던 가쿠레키리시탄(잠복 그리스도인) 수백 명이 박해를 피해 쿠로시마로 건너왔다. 쿠로시마는 사람이 살지 않던 곳이라 다른 지역에 비해 그나마 박해가 덜한 편이었다. 키리시탄들을 척박한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살며 70여 년 동안 몰래 신앙을 지켜나갔다.

일본은 키리시탄의 싹을 잘라내기 위해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절에 등록하도록 명령했다. 쿠로시마의 키리시탄들도 절에 등록하고 겉으로는 불교도로 살아갔다. 가쿠레키리시탄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쿠로시마도 박해에 시달릴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쿠로시마는 공식적으로는 불교도의 섬이었지만, 사실은 주민 대부분이 키리시탄인 신앙의 섬이었다.

키리시탄들은 불상 뒤 기둥에 몰래 성모마리아의 형상을 새겼다. 불상에 예를 표하는 것처럼 하면서 성모마리아를 공경한 것이다. 기둥에 새겨진 성모마리아 형상은 금교령이 해제된 뒤 절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다.

신앙을 드러내지 못한 채 숨죽이며 살아온 쿠로시마 키리시탄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865년이다. 1864년 나가사키시에 외국인들을 위한 오우라성당이 세워지자 이듬해 한 신자가 찾아와 신앙을 고백하는 '신도 발견'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쿠로시마 가쿠레키리시탄 교우회장 데구치 다이스케는 신자 20명과 함께 배를 타고 오오우라성당을 찾아가 프티잔 신부에게 "쿠로시마에 키리시탄 600여 명이 있다"고 알렸다.

프티잔 신부는 "그 곳 신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묻자 데구치는 "불교신자로 등록하고 몰래 신앙을 이어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데구치는 프티잔 신부에게 정식으로 세례를 받고 여러가지 기도문을 배웠다. 그동안 가쿠레키리시탄들은 200여 년 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엉터리 기도문을 외우고 있었다.

데구치는 쿠로시마로 돌아와 다른 키리시탄들에게 제대로 된 기도문과 전례예식을 가르쳐줬다. 그는 히라도까지 건너가서 그곳 가쿠레키리시탄들에게 보편교회의 기도와 신앙을 전파했다. 금교령이 해제되기 1년 전인 1872년에는 포아에리 신부를 쿠로시마로 데리고 와 데구치의 집에서 역사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다.

일행을 안내한 쿠로시마지구 공민관장 야마우치 카즈나리(요셉, 56)씨는 "데구치 다이스케의 노력이 없었다면 쿠로시마에는 지금도 보편교회에 흡수되지 못한 가쿠레키리시탄이 많았을 것"이라며 "그는 쿠로시마에서 신앙이 부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데구치가 살던 집 앞에는 쿠로시마의 신앙 부활을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쿠로시마의 상징과 같은 쿠로시마성당은 1897년 이 섬에 온 프랑스 출신 마르만(1849~1912) 신부가 신자들과 힘을 모아 지은 성당이다. 당시 신자 수는 600명이 넘었는데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곳은 작은 경당뿐이었다. 성당 신축 필요성을 느낀 마르만 신부는 신자들에게 성당 건립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신자들은 "모두 함께 미사를 드릴 수 있는 큰 교회를 세우자"고 입을 모았다. 마르만 신부는 고국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해 건축비를 마련했고, 신자들도 한 푼 두 푼 아낀 돈을 내놓았다. 가난한 신자들은 노동으로 힘을 보탰다.

쿠로시마에서 캐낸 화강암으로 기초를 놓고 벽돌 40만 장을 쌓아 마침내 1902년 성당을 완공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웅장한 성당이었다. 마르만 신부는 손수 강론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무인도나 다름없던 작은 섬에 성당이 들어서게 됐다. 성당은 주일마다 신자들로 넘쳐났다.

지금도 성당 곳곳에 마르만 신부 흔적이 남아있다. 제단 앞에는 초ㆍ중등부 학생들이 그린 마르만 신부 얼굴이 널빤지에 가득 붙어있고, 한 편에는 마르만 신부에게 쓴 감사편지가 걸려있다. 신자들은 이 성당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구는 줄어도 신앙심은 굳건해

쿠로시마에 천주교가 전파된 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신자들의 신앙심은 굳건하다. 인구가 많이 줄었지만 주일이면 성당이 반 이상 차고 목요일에는 주일학교도 열린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초등학생이 17명, 중학생이 12명이나 된다.

이곳 신자들에게 천주교는 종교라기보다 삶의 일부다. 아기가 태어나면 늦어도 1주일 안에 유아세례를 받는 게 전통이다. 7대째 신앙을 이어오고 있는 야마우치씨는 "나는 태어난 지 3일 만에 세례를 받았고 아들과 딸도 일주일이 되기 전 세례를 받았다"고 말했다.

쿠로시마는 일본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신앙의 섬'이지만 20~30년 후에 쿠로시마성당은 신자들이 없는 '유적지'로 남을 수 있다는 안타까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인구가 지속적으로 줄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는 20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479명에 그치고 있다. 2년 전에 비해 100여 명이 줄었다. 게다가 70살 이상 어르신이 절반이 넘는다. 그야말로 초고령화 섬이다. 올해 어르신 20명이 세상을 떠났는데 새로 태어난 아기는 없다.

야마우치씨는 "쿠로시마는 오랫동안 신앙을 지켜 온 가쿠레키리시탄들의 숨결이 스며있는 섬"이라며 "나라와 교회에서 쿠로시마에 좀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희망을 밝혔다.

[평화신문, 2012년 10월 14일, 나가사키=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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