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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사목] 가톨릭 의료기관의 가톨릭적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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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28

가톨릭 의료 기관의 가톨릭적 정체성

 

 

1. 머리말

 

최근 의약 분업 실시와 관련한 의료계와 정부 사이의 불화, 그리고 이에 따른 일련의 의료계 집단 시위와 병원, 의원 폐업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매우 차갑기만 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사태의 큰 원인이 낮은 의료 보험 수가와 정부의 일방적인 강압적 의료 정책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환자 진료까지 거부하면서 의사들이 의권 투쟁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비난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의료 기관들 속에 적어도 국민 의료의 10%를 담당하고 있는 우리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이들 가톨릭계 의료 기관 거의 모두가 이번 의료계 시위와 폐업에 참여했고, 일부 가톨릭 의료 기관은 오히려 다른 어느 의료 기관들보다 더 적극적이었다는 평까지 받고 있는 상태다.

 

뒤늦게나마 한국 가톨릭 병원 협회는 국민들에 대한 유감의 말과 함께 정부의 잘못된 의약 분업안의 개선과 의료 보험 수가 인상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지만, 사실 이번 사태에 참여한 가톨릭 의료 기관들로서는 커다란 갈등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가톨릭 의료 기관 모두가 다른 의료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환자 진료를 외면한 셈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며, 이 일이 전통적인 교회 의료 정신에 맞는 일이라고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그 존재 이유와 관련하여 겪고 있는 갈등과 도전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주로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는 일만을 해 오던 과거와는 상황이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의약 분업과 관련한 의료계 사태는 과연 이런 상황에서도 가톨릭 의료 기관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인지, 굳이 그럴 이유가 있다면 그 정체성(identity) 유지를 위해서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가 있다. 

 

 

2. 가톨릭 의료 기관의 존재 이유 - 예수님의 모범과 교회의 전통

 

결론부터 말해서, 가톨릭 교회의 많은 문헌들은 현대 세계의 특성상 교회 병원들이 겪게 되는 많은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윤리적 문제들이 있지만 의료 사업을 충실히 확대,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1)그것은 의료 사업이 여전히 가톨릭 교회 선교 사업의 가장 핵심적인(integral) 부분이며 실제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과 오랜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한마디로 설교(preaching)와 가르침(teaching) 그리고 치유(healing)의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중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설교와 올바른 삶을 위한 가르침이 언어적인 것이라면 치유는 행동적인 것이며 이것은 바로 몸이 성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온전한 정신과 육체로 당신의 설교와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인 사업이었다고 보는 것이다.2)실제로 예수님의 많은 행적들 중에서 치유 행위는 가장 극적인 부분을 차지한다. 나병 환자를 고쳐 주고(마태 8,1-4), 소경의 눈을 뜨게 했으며(마태 9,27-31), 중풍 환자를 걷게 한 기적(루가 5,17-26)들이 바로 그것인데,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 복음 전파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곧 병자들을 고쳐 줌으로써(마태 8,16), 질병이 결코 죄의 형벌이 아니고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인데, 성서적 관점에서 볼 때 건강은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온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치유 행위는 단지 육체적 질병의 치유를 넘어 인간 존재로서 고귀함을 유지토록 하는 전인적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다.3)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전생애를 바친 봉사로 상처받은 인간성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을 구현하는 데 최선을 다하셨던 것이며, 교회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실천하는 전통을 유지해 왔던 것이다. 실제로 가톨릭 교회 의료는 복음 전파 사명 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곧 예수님께서는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 그 동네 병자를 고쳐 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루가 10,8-9)라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며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40)라고 가르치심으로써 병자를 위로하고 도와 주는 사람에게 축복이 있음을 강조하시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을 치유해 주고 이를 통해 인격적 온전성을 회복, 유지시켜 준다면 그것이 곧 예수님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런 믿음을 따라 교회는 처음부터 다양한 형태와 조직을 만들어 의료 활동을 전개해 왔던 것이다. 

 

 

3. 가톨릭 의료 기관의 새로운 도전(挑戰)들

 

최근까지 가톨릭 교회의 의료 사업 전통은 기본적으로 자선 활동이 대부분이었다. 이 일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선행(루가 10,29-37)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병든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도 부합하는 일일 뿐 아니라 초대 교회 이후 가톨릭 의료 활동을 주도해 온 수도회의 자선 의료 전통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실제로 가톨릭 의료는 전통적으로 영리를 추구하지 않았고 따라서 지역 교회와도 무관하게 수도회를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의료 활동이 이루어져 왔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교회 의료의 이런 특성과 전통은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된다. 역설적으로 이런 도전들은 과학 기술의 발달과 경제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확산으로 의료의 내용과 전달 방식이 크게 발전되면서 생겨난 것들이다.

 

이 시기에 가톨릭 의료가 겪게 되는 가장 두드러진 도전으로는 첫째, 의료 활동을 열심히 해 온 남녀 수도회가 감소하고 실제 이 일에 헌신하던 수도자들이 크게 줄어든 일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이런 사회 변화에 따른 병원의 대형화와 의료 기술의 현대화를 수도회 병원들이 적절히 수용할 수 없게 된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1950년대 이후 많은 자선 의료 사업을 펼쳤던 메리놀 수도회나 골롬반 수도회의 의료 활동이 최근 들어 중단되거나 교구로 이양된 것이 그 좋은 예다.

 

이렇듯 수도회가 운영하던 의료 기관이 문을 닫거나 축소된 것이 교회 의료의 중대한 도전인 것은 무엇보다 이로 말미암아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자선 의료가 그만큼 축소될 수밖에 없게 된 일이다.

 

현대화 과정에서 가톨릭 의료가 겪게 된 두 번째 도전은 교회 의료 기관들의 대형화와 관련한 일이다.

 

첨단 의학 기술의 발달과 전문의 제도 도입 등에 따른 의료 기관의 대형화는 가톨릭 의료 기관들로서도 피할 수 없는 변화이고, 어느 면에서는 이 일이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환자들에게 좀더 높은 수준의 의료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교회 의료 기관의 대형화는 그만큼 병원 문턱을 높임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의료 혜택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게 했을 뿐 아니라 전문 경영인, 전문 의료인들의 역할 증대와 함께 수도자나 성직자들의 상대적 역할 감소를 초래하여 의료 사업 전반에 걸친 교회 의료 정신의 구현을 그만큼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런 일련의 변화는 결국 가톨릭 의료 기관들에서조차 진정한 인간적 의료가 어렵게 되는 상태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4)

 

오늘날 가톨릭 의료가 겪게 되는 세 번째 도전은 의학 기술의 발달, 특히 생식(生殖)과 생명 유지 기술의 발달에 따른 반생명적 의료의 보편화 현상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의학 기술의 발달은 한마디로 경이 그 자체이다. 새로운 의약품 개발과 진단, 치료 기술의 발달은 그 동안 치료가 어려웠던 많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 이를 치료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생명의 시작과 끝에 관련한 의학 기술의 발달은 많은 불임증 부부들과 사망 가능한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의학 기술의 발달은 환자들의 경제 능력에 따라 그 혜택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의료 자원 분배 정의의 문제를 표출시켰을 뿐 아니라 생명의 시작과 끝을 인간이 임의로 조작하는 인공 수정, 인공 임신 중절 그리고 안락사(安樂死)와 같은 의료 기술들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중대한 생명 윤리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이다.5)

 

현대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겪게 된 또 하나의 도전은 정부나 제3자가 이른바 관리 의료(managed care)를 강화함으로써 생기는 경영상의 어려움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지금은 거의 모든 나라가 의료의 내용과 전달 방법에 대해 이를 국가나 사회 기구가 관리하는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의료의 내용과 수준에 따라 그 전달 방법에 차등을 두는 의료 전달 체계나 의료 보험 진료비 심사 제도 그리고 포괄 수가제 같은 제도화한 각종 의료비 지불 제도 등이 그 좋은 예다.

 

이는 의료가 기본적으로 다른 상품(commodity)과 달리 공공재(goods)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며 최소한의 인력과 경비로 정부가 국민의 건강권을 효율적으로 보호해 주어야 하는 책무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6)

 

이런 의료 제도는 기본적으로 국민 의료비를 줄이기 위한 국가 사회적 노력이기 때문에 의료 기관들에게 흡족한 수입을 보장해 줄 수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수도자들을 중심으로 그 동안 비영리 자선 성격으로 의료 기관을 운영해 오던 대부분 가톨릭 의료 기관들로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최근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부 대기업들이 병원을 설립하고 기업 경영 방식으로 이들 병원을 운영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서 이들과 경쟁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교회 의료 기관들은 상대적으로 더욱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이다. 

 

 

4. 가톨릭 의료 기관의 정체성 유지를 위한 노력

 

오늘날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런 어려운 도전들이 있지만 교회는 여전히 의료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는 교회 의료 사업이 교회 복음화와 이를 위한 사목 활동에서 필수적인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과학화되고 대형화된 현대 의료가 제기한 문제들, 예컨대 생명 경시적인 의료 기술들과 비인격적인 의사-환자 관계, 그리고 현대 의료의 혜택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돌봐주어야 하는 문제까지 이제는 모두 교회 의료 기관이 앞장서 풀어가야 할 일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장차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오히려 진정한 의료를 구현하는 '희망의 증거'(sign of hope)로 그 역할 기대가 더욱더 커질 뿐이라고 할 수가 있다.7)

 

그러면 과연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그들의 가톨릭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로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인간애(humanism)가 최대로 발휘되는 장소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자선적 진료가 어떤 형태로든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의료의 기계화, 대형화, 전문화 과정에서 파생되는 현대 의료의 탈인간화(脫人間化)가 가톨릭 의료 기관에서는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이것은 가톨릭 의료의 본질이 인간성 회복과 그 존엄성의 구현에 있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가톨릭 교회의 의료 사업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온전한 인간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사목적 책임을 다하는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교회 의료 기관의 자선 의료 활동이 가톨릭 의료 기관의 인간애 구현 노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것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더욱 강조되는 일이다.

 

국민 건강에 대한 국가 사회의 책임이 강조되고 실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국가의 노력이 제도화되는 사회 보장 시대에서 교회 의료 기관의 자선 의료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선 의료에 대한 교회 의료 기관의 책임과 노력이 면제될 수는 없는 일이다.8)

 

환자의 인격을 존중하는 노력들, 예컨대 충분한 설명과 친절한 태도, 그리고 의사-환자 관계에 관한 가톨릭 의료 기관의 윤리 지침을 철저히 지키는 일도 가톨릭 의료 기관의 인간애 구현 노력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두말할나위도 없다.9)

 

둘째로 가톨릭 의료 기관은 종사자들에 대한 전문 분야와 교회 의료 정신에 관한 교육과 훈련을 꾸준히 실시해야 한다. 가톨릭 의료 기관들에서의 수준 높은 의료는 단지 다른 의료 기관들과의 기술 경쟁 차원에서가 아닌 가톨릭 의료 기관에 대한 환자들의 신뢰에 부응한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전문 의료직들에 대한 해당 분야 최신 지식과 기술 훈련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최첨단 진료 시설과 인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른바 1차 수준의 의료를 제공하는 적은 규모의 의료 기관에서 완벽한 1차 수준의 환자 관리를 한다든지, 스스로 관리할 수 없는 환자를 적절히 타 의료 기관에 의뢰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의료 수행 능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의료 기관 종사자들에 대한 교회 의료 정신 교육과 훈련은 가톨릭 의료 기관의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가톨릭 의료 기관이 진정 가톨릭적인 것은 의료 기관의 이름이나 건물 안팎에 표시된 교회 상징물보다 그 안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가톨릭적이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복음 전파와 이를 위한 사목적 활동에 헌신하는 의료 전문직 수도자들이 좀더 많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톨릭계 의과 대학이나 간호 대학이 이들을 특별 전형해서 양성하는 일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가톨릭 의료 기관은 인간 생명, 특히 출생 전 생명의 보호와 이를 위한 연구 활동에 노력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인간 생명이 수태시로부터 존중된다는 사실과 이것은 또한 결혼 안에서의 부부 행위(conjugal act)를 통해서만 전수된다는 사실을 일관되게 천명해 왔다.10)

따라서 교회는 인간 생명체를 부부 생활 밖에서 인위적으로 만드는 인공 수정이나 일단 수태된 생명체를 기계적으로 중단하는 인공 임신 중절 행위 등을 적극적으로 배격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부부들의 가족 계획이나 불임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가톨릭 교회는 인간의 생명과 관련된 분야에 종사하는 의사나 과학자들이 좀더 과학적인 연구를 하여 이들 부부에게 희망을 주는 기술 개발에 노력해 줄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다.11)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이런 교회의 요청에 따라 이들 생명 관련 기술 개발 연구에 노력해야 하며 이미 개발된 기술들, 예컨대 피임을 원하는 부부들을 대상으로 한 자연적 가족 계획 방법이나 여러 가지 전통적 불임 치료 기술을 적극적으로 보급해야 한다.

 

넷째로 가톨릭 의료 기관은 말기 임종 환자에 대한 특별한 의학적 봉사에 충실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에서, 인간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교회는 죽음이 슬픔의 대상이 아니고 새로운 삶과 부활에 대한 희망의 대상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많은 환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병원은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장소여야 한다.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자체 내 원목 활동을 활성화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가톨릭 의료 기관은 원칙에 입각한(principled) 기업 경영에 노력해야 한다. 최근 들어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경영 압박을 받고 있다. 그 하나는 전적으로 기업 이윤을 극대화하는 경영 체제로 병원을 운영하는 이른바 기업형(investor-owned) 병원들의 출현과 병원 진료 내용을 감시, 감독하는 국가나 보험자 단체의 관리 의료 체제 강화다.

 

비영리를 기본 원칙으로 신앙에 바탕을 둔(faith-based) 의료를 수행하는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환자 진료를 수단으로 하여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는 기업형 병원들과 수입 면에서 경쟁이 될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여기다 낮은 의료 보험 수가와 진료비 심사 같은 관리 의료 체제는 가톨릭 의료 기관의 운영을 더욱더 힘들게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톨릭 의료 기관은 언제까지나 비영리 기관으로 남아야 하며, 따라서 모든 가톨릭 의료 기관들은 앞서 언급한 가톨릭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비가톨릭 의료 기관보다 훨씬 힘든 노력을 추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12)

 

이를 위해 가톨릭 의료 기관은 무엇보다 교회 의료 정신에 투철하고 경영 능력이 뛰어난 병원 관리자를 확보해야 한다.13)

 

그리고 가능한 한 다른 가톨릭 의료 기관들과 협력 체계를 구축하여 병원 경영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물품을 공동 구매하는 등 규모 경영을 위한 노력을 하는 한편 직원이나 관리자 교육 등 교회 의료 정신 구현에도 공동 노력을 하도록 해야 한다.

 

최근 미국의 여러 가톨릭계 병원들이 하나의 경영 체제로 융합하는 현상이 이런 노력의 예에 속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가톨릭 병원 협회가 회원 의료 기관들간에 어느 정도 협력 체제를 갖추고 있기는 하나 이를 진정한 의미의 경영 합리화를 위한 공동체로 볼 수는 없다.

 

때에 따라서 가톨릭 의료 기관이 비(非)가톨릭 의료 기관과도 협력하고 공동 경영체를 구성할 수 있으나 이 경우 그 공동체나 협력 체제는 반드시 가톨릭적 윤리(Catholic morality), 도덕률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

 

점차 어려워지는 가톨릭 의료 기관들의 경영 문제와 관련해서 한 가지 중요한 대안적 노력으로는 지역 교회와의 협력을 들 수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최근까지 가톨릭 의료 기관은 주로 수도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지역 교회와는 특별한 관계를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교회 의료 사업에서 수도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감소하고 교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 교회의 참여가 두드러지면서 교회는 의료 사업의 사실상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지역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가톨릭 의료 기관들의 운영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14)

 

지역 내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교회의 의료 사목적 기능을 잘 하는지도 감독하는 일은 물론, 이들 의료 기관의 재정적 어려움도 함께 해결해야 하며 정부의 보건 의료 정책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거나 의료 자원의 분배 정의를 그르친다고 판단될 때에는 이에 대해 그 시정을 요구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최근 우리 나라 주교회의가 보건 의료 사목 담당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가톨릭 의료 사업을 교회적 차원에서 발전시키도록 한 것은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5. 맺는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느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에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라고 기록되어 있는 성서 말씀은 가톨릭적 정체성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가톨릭 의료 기관이 가톨릭 정신에 따라 운영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가톨릭 기관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말이 된다.

 

소금의 짠맛은 그 외적 모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맛보는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이 된다. 마찬가지로, 가톨릭 의료 기관의 가톨릭적 정체성은 그들 스스로가 붙이는 가톨릭 기관이라는 명칭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의료 기관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이들 가톨릭 의료 기관에서 가톨릭적인 분위기를 느낄 때에만 인정이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가톨릭 의료 사업은 가난한 환자들에 대한 자선 의료가 전부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가톨릭 의료 기관은 자선 의료 혜택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환자들에 의해서 그 가톨릭적 정체성이 확연하게 인정되고 그것이 손쉽게 전통으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자선 의료만을 수행할 수 없는 대부분 가톨릭 의료 기관들의 경우 적어도 외형적인 의료 활동에서는 가톨릭 기관이 아닌 다른 의료 기관과 크게 차별화할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은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더욱더 가톨릭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다른 어느 때보다 많아지고 절실해진 상태라고 할 수가 있다.

 

의료의 고급화와 병원의 대형화로 의료 소외 계층이 늘고 있으며, 서로간의 신뢰와 인간적인 터치가 크게 배제된 비인격적 의사 - 환자 관계가 점차 관행화되어 가고 있을 뿐 아니라 반생명적 의료 기술이 기술적 명예심과 병원 수익을 위해 나날이 늘고 있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그 가톨릭적 정체성 확보와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바로 짠 맛을 잃은 소금이 더 이상 소금이 아니듯 가톨릭 의료 기관들이 이 일을 포기할 때 그것은 더 이상 가톨릭 의료 기관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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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Bernardin, What Makes a Hospital Catholic-A Response. In Celebrating the Ministry of Healing, The Catholic Health Association of the United States, 1996년, 94-101면.

2) G. Henriques, Healing Ministry in the Church Today, Paper presented at the 12th Congress of the Asian Federation of Catholic Medical Associations,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2000년 7월 12-15일.

3) U. S. Catholic Conference, A Pastoral Letter of the American Catholic Bishops-Health and Health Care. U. S. Catholic Conference, Washington D. C., 1981년.

4) 맹광호, "한국 의료의 현황과 교회 의료의 위상", [한국 가톨릭 병원 협회지] 21호, 1990년, 37-40면.

5) 맹광호, "생명 과학 기술의 발달과 크리스챤 윤리", 유봉준 신부 회갑 기념 논집 [동서 윤리와 그 사상과의 만남], 가톨릭 대학교, 1991년, 89-94면.

6) M. F. Collins, "The Role of Catholic Hospitals in the New Millenium", Dolentium Hominum 37호(1998년), 85-89면.

7) J. Bernardin, "A Sign of Hope. The Role of Catholic Hospitals in the New Millenium", 앞의 책, 102-112면.

8) 맹광호, "사회 보장 제도 하에서 가톨릭 의료 기관의 역할", [한국 가톨릭 병원 협회지] 17호(1,2), 1986년, 9-12면.

9) National Conference of Catholic Bishops, Ethical and Religeous Directives for Catholic Health Facilities, 1971년.

10) 요한 바오로 2세, [인간 생명], 1968년.

11) Pontifical Council for Pastoral Assistance to Health Care Workers, Charter for Health Care Workers, Vatican, 1995년.

12) J. Bernardin, "Making the Care for Non-For-Profit Health Care". 앞의 책, 1999년, 83-93면.

13) L. Marchesi, "The Ethics and Management of a Catholic Hospital", Dolentium Hominum 41호(1999년), 67-72면.

14) J. Bernardin, "The Right to Healthcare-A Test and Opportunity for the Catholic Community", 앞의 책, 64-69면.

 

[사목, 2000년 9월호, 맹광호(가톨릭대학교 교수, 예방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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