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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사목] 임종자와 사별가족에 대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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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13 ㅣ No.127

임종자와 사별 가족에 대한 배려

 

 

1. 개인적 체험

 

아버지의 회갑 잔치 때, 평상시와 사뭇 다른 어머니의 모습은 당신을 잘 아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평소 사치라고는 모르는 분이었으며, 비싼 참기름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봐 눈치 주는 분이셨으며, 큰일에 일을 잘하지 못하거나 게으른 사람들은 어머니한테 혼쭐나곤 했다. 그런 어머니가 잔칫상 양 옆으로 꽃을 화려하게 꽂으라시고, 일하는 친척들에게도 물품을 풍족하게 쓰라고 관대한 웃음을 지으셨다. 회갑 때 많은 분들이 오셨다. 예상치 않게 먼 친척들도 오셔서, 당신의 멀미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분들까지 어머니는 모두 만나셨다. 모처럼 집 안에 잔치 분위기가 났다. 맛있고 정갈한 음식, 화려한 꽃, 손님과 친척들과 웃고 떠들고 취하며 함께 나누는 풍요가 집 안에 가득했다. 

 

일주일 후 토요일, 주일 학교 교사들과 소풍을 갔다가 저녁 무렵에 집에 들어갔는데, 마당 한가운데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여동생이 울먹였다. "언니, 엄마가 병원에 가셨어. 오늘 혼자 계셨는데 갑자기 가슴이 아프시다고 해서 옆방 언니가 응급실로 모시고 갔대." 

 

응급실에 누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침에 본 그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고, 팔다리는 제멋대로 늘어져 있고, 산소 마스크가 엄마의 작은 얼굴을 온통 틀어막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의료진도 그냥 왔다갔다만 하는 것 같았다. 조금 후 이미 소생하기에는 늦었다며 산소 마스크를 떼야겠다고 의료진과 집안 어른들이 결정을 했다. 어머니는 다시 당신의 안방에 뉘어졌다.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후두둑하며 이십여 분을 퍼부었다. 대세를 받아 모니카라는 세례명을 얻은 어머니의 얼굴 위에 하얀 홑이불이 씌어졌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을 장식한 행사였다. 아버지 회갑 때 잔칫상에 놓인 핑크 카네이션이 엄마의 관 옆에 놓이고, 잔치 때 장만해 놓은 남은 음식들이 그대로 장례식에 쓰였다. 그리고 잔치 때 오신 친척들이 꼭 일주일 뒤 엄마의 장례식에 다시 문상객으로 왔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모든 사람이 진실해진다. 어머니에게 섭섭하게 했던 분들이 와서 용서를 빌며 많이 울었다. 그리고 어머니만큼만 살아도 훌륭한 삶이라는 이야기들을 했다. 우리와 상관없는 많은 말들이 오갔다. 

 

우리 삼 남매는 모두 장례 미사가 끝나고 삼우제 때까지도 울지 않았다. 아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소풍을 가지 않는 건데', '잔치 치르고 낮잠을 많이 주무실 때 병원에라도 모시고 가서 건강 진단이라도 받게 해 드릴걸.' 온통 후회와 혼동뿐이었다. 어른들이 이야기하신다. "천주교 다니는 애들은 울지도 말래냐?", "곡 좀 해라!" 또 다른 하나의 행사처럼 그렇게 장례식이 끝났다. 

 

의사의 진단은 급성 심근 경색이었다. 내가 죄책감에 시달린 것은 최근에 무슨 충격받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의사의 이야기였다. 어른들은 나중에 큰딸이 수녀원에 간다는 말이 아무래도 가장 큰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동생과 함께 흰색 면으로 나비 핀을 만들어 머리에 꽂으면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내 피 속에 흐르고 있는 엄마의 맥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수녀원 입회가 일 년 뒤로 미뤄졌다. 일 년 동안 오빠의 결혼 준비를 도맡아서 해야 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상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일주일 사이에 모든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하루 종일 해도 끝이 없는 살림살이, 아버지와 오빠의 빨랫감, 아버지 얼굴에 가득한 외로움의 그늘, 갑자기 텅 비고 어두워진 집안 구석구석들. 그러던 중 한 후배의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힘내세요.'라고 쓴 엽서를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받아 보는 것이 당시 가장 큰 위로였다. 그것은 그 어떤 말보다 힘있게 내 마음속을 파고들어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오빠의 결혼과 동시에 수녀원에 입회했다. 수련 받으며 힘들었을 때 이제는 볼 수도 달려 가서 안길 수도 없는 어머니의 부재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연피정을 할 때마다 늘 문제로 나오는 것은 어머니와의 관계였다. 내게 어머니는 강한 분이셨다. 군대 간 오빠의 옷이 우편으로 돌아왔을 때에도 목이 쉰 모습을 보고서야 우신 것을 알 정도였다. 당신 생전에 장성한 딸과 겪었던 갈등. 수녀원 입회에 대한 내 결정을 어머니는 아주 강하게 반대하셨다. 비록 순간적인 것이었지만, 어떤 때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텐데.' 하는 흉악한 바람도 있었다.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 모든 것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을 피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의견을 거슬러 내 생각을 주장했던 모든 일들이 살아나서 더욱 옥죄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남기고 죽기에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 병원에 가서 다섯 시간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불행 앞에서 내 슬픔은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책과 회한이 나를 더욱 지치고 고통스럽게 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왜 내게? 

 

어느 날 버스 안에서 어머니와 가까이 지내던 아주머니를 우연히 만났다. "네가 수녀원 간다는 결심을 듣고 나서 엄마는 매일 울었어. 네게 그 동안 못해 주었던 것이 마음에 몹시 걸린다는 거야." 그때는 그렇게 강한 모습으로 반대하기만 하셨는데, 왜 한마디라도 내게 표현하지 못하셨을까?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들은 것은 이미 돌아가신 지 5년이 지났을 때였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었어. 나만 생각했어.' 하고 자책감은 더 굳어졌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이렇게 해결해야 할 것들을 하나도 풀지 못한 채 꼼짝도 할 수 없게 모든 문을 닫아 버리는 무서운 힘이 있다. 

 

그 후 어느 피정 때 나는 죽기까지 딸을 사랑하는 모성애를 체험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오그라든 손을 펴 주신 사건에 대한 묵상이었다. 삼십팔 년 동안 무의식 속에 잠복해 있던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이 마음 한구석에 오므라들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모녀 사이의 사랑을 갈라 놓고, 진정한 자유를 방해하는 그 무엇을...... 갈바리아 산에서 죽어 가는 예수님을 성모님과 함께 지켜보면서, 성모님은 단단하게 오므라든 나의 손을 따뜻하게 하나씩 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죽은 과거의 일들이 하느님과 함께한 순례의 길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견디기에는 슬프지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일이었다. 단지 세월이 흘러서가 아니라, 죽기까지 나를 사랑한 사람에 대한 체험으로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에 대한 진정한 위로와 격려를 받았던 것이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다. 나의 이러한 체험은 이 세상에서 잠시 살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영원한 세계로 출산하는 일을 하는 분은 내가 아니라 바로 성령이심을 믿게 해 주었다. 

 

 

2. 사랑, 그 두려운 고백

 

* 사십대 후반의 진숙 씨

 

소화가 안 되고 입맛이 없어 병원에 갔더니 간이 조금 나쁘단다. 두세 달이 지나도 그런 증상이 계속되어 대학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결과는 담낭암 말기였다. 수술도 불가능하다고 한다. 떨리고 힘없는 몸으로 간신히 병원 복도 난간에 서서 남편을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었다. 남편이 그렇게 눈물이 많은 줄 몰랐다. 믿을 수 없었다. 간이 조금 나쁘다고만 믿었는데...... 불가능한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 몰래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옷가지를 정리하다가 싸 놓은 액자를 풀어 보니 자신의 영정이었다. 황달이 심해지고 숨이 가빠오면서 남편은 방송과 책에서 온갖 방법을 알아봤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었다. 진숙 씨는 이것저것 온통 걱정뿐이었다. 정 떼는 연습으로 냉정하게도 해봤지만 그것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편의 손을 잡고 그 동안 살면서 섭섭하고 속상했던 것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해 보라고 권했다. 서로 슬픔이 더할까 봐 참기만 하면 더욱 큰 침묵이 자리잡게 된다. 

 

* 회갑을 바라보는 요셉 씨

 

어느 날 목이 컬컬하고 삼키는 데 불편해서 만져 보니, 작은 덩어리가 느껴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의사도 예사롭지 않다며 진지하게 검사했다. 일주일 후 결과를 들으러 가는 요셉 씨에게는 이 시간이 다시는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그야말로 'dead man walking'이었다. 

 

암 선고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할 시간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병원비, 직장, 약한 아내, 명랑한 자식들의 얼굴. 그때의 느낌과 물밀듯이 닥쳐오는 걱정들에 대해 하나씩 표현하도록 도와 주었다. 

 

* 40대 초반 바오로 씨 

 

"설마 했더니 6개월 정도 남았다고, 정리할 것이 있으면 정리하란다. 이것이 정말 내 일일까? 오진이나 사진이 바뀐 것은 아닌가? 이 병원 저 병원 다녀 봐도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거울을 보면 내가 아니었다. 병명을 물으면 폐암이라고 말하기가 겁난다. 새벽이나 밤에만 몰래 동네 사람 눈에 안 띄게 외출하였다. 맑은 공기를 쐬면 폐가 좋아질지도 몰라. 기침이 심해도 새벽에 산에 오르자. 중국에 가면 좋은 약이 있다던데...... 양약을 끊고 한약을 먹어 볼까? 암이 원인도 모르게 생겼으니까. 하느님 믿으면 하느님이 그대로 데리고 갈지도 몰라. 아무 약도 먹지 말고 성당에 다녀 볼까? 혹시 마누라 몰래 바람 피운 사건 때문에 벌받는 것일까? 고생시킨 것 투성인데...... 차라리 빨리 죽기나 했으면. 약을 먹지 않으면 빨라질지도 몰라. 그래 먹지 말자. 통증을 달게 받자. 나란 놈은 죽어도 마땅해. 어쩌면 바람 피운 것을 알고 빨리 죽기를 바랄 지도 몰라." 

 

임종 전에 부인한테 "그래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당신이었소. 미안해." 하며 꼭 안아 주라고 했다. 키스도 해 주고. 부인에게는 지금도 남편의 마지막 고백이 큰 힘이 된단다. 

 

* 칠십대 안나 할머니 

 

"글쎄, 몹쓸 병이래. 할아버지는 평생을 성당 일만 했고 그 일을 도왔는데...... 하느님 나라로 갈 때가 됐지 뭐. 할아버지는 착해." 하시면서도 착하게 살아온 자신을 할머니는 인정받고 싶었다. 하느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왔는데 당신 몸에 암 덩어리가 있다는 현실이 그 대가인가 싶어 원망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눈꺼풀마저 올리기가 힘들 정도가 되어서도 오렌지 먹으면 입맛이 돈다며 억지로 드시다가 토하곤 하셨다. 

 

몹쓸 병이라며 옮을까 봐 그릇을 따로 쓰시는 불편함도 심하셨다. 맨손으로 목욕을 해 드리며 함께 오렌지를 까서 먹으니, 옮지 않는 병임을 확인하고 안심하셨다. 

 

* 오십대에 홀로 되신 숙빈 씨 

 

자궁암 말기 진단 받고 화가 나서 죽을 준비한다며 입던 옷을 다 태워 버리고 가구도 정리했다. 증상이 심해지고 인공 항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인생이 한없이 서러웠다. 검사한다고 차디찬 곳에 드러누워야 하는 대학 병원에는 발을 들여놓기도 싫었다. '이제 죽기만 하면 되는데...... 어렸을 때 모진 어머니 밑에서 한 손에는 모시 삼고, 또 한 손에는 장작불 지피고, 등에는 남동생을 업고 밥까지 하며 컸는데, 맨발로 도망쳐 나와 갖은 고생하고 이제 겨우 식구들 모여 재미있게 사는데...... 수술해 보려고 자존심 버리고 여기저기 손을 뻗쳤으나 모두 외면했다. 그냥 죽자. 내 주제에 대학 병원은 무슨, 그나마 번 돈이나 까먹지 말자. 그러나 그 병원 가면 혹시 수술이 잘 될지도 몰라!' 숙빈 씨의 설움이 그날 밤에도 가시지 않고 잠 못 이루게 했다. 다음날 숙빈 씨의 시골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두 달을 함께 지내며 지난 일들을 나누고 지극 정성으로 돌봐 주셨다. 그제야 숙빈 씨 얼굴에는 현실을 견딜 힘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했다. 

 

* 서른셋의 아오스딩 씨 

 

"수녀님 만나기도 괴로워요. 수녀님을 볼 때마다 내가 에이즈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거든요. 수녀님은 내가 에이즈 환자이기 때문에 오시는 거잖아요. 억지로 위로하려고 하지 마세요. 날마다 까매지는 얼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매일 밤 잠들 때 내일이 결코 오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 태어난다면 결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소망뿐이에요. 가족들은 몰라요. 저를 인간 취급도 안 해요. 여기저기 염증이 나고 얼굴은 괴물이 되어가는 내 심정을 이해하기나 하세요? 나는 정말 살고 싶다구요! 하얗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구요! 내가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것은 내 자신이 미워서예요. 어쩌면 나는 살 가치도 없는 놈이에요. 인정받지 못하고 부초처럼 떠돌아 다녔으니까요. 정부에서 약 값과 입원비를 내준다 해도 괜히 비싼 입원실만 차지해 봤자지, 차라리 나을 사람이나 입원실 쓰라고 하지요. 사람들이 도와 준다고 오는데 내가 뭐 동물원 원숭이에요? 봐요, 점점 괴물 같아지는 나를 구경하겠다는 거예요? 이 칼로 차라리 나를 죽여 주세요 (......) 내가 새벽에 신문 배달을 감기 걸렸을 때까지도 빼놓지 않고 일 년 동안 정든 직업처럼 했던 것은 그 곳에 가면 나를 모르는 사람들 뿐이고 묻지도 않아요. 그저 오토바이 타고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일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었어요. 에이즈 환자라고 낙인찍혀서 대학 병원에 가는 것보다는 이 약국 저 약국 돌아다니며 약 사 먹는 것이 좋다구요. 어차피 죽을 건대요. 몸뚱아리보다 마음이 먼저 쓰러지려 해요. 온 마음으로 기도를 해봤어요. 하다 보면 치미는 울화와 절망에 내 기도는 끝내 짜증이 되고 말아요. 그런 기도를 누가 들어주겠어요? 이만큼 살았으면 많이 살았다 싶기도 하고, 아직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도 있긴 해요. 하지만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두 번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 거예요. 어느 날은 추운 새벽에 신문을 돌리고 발길이 성당으로 갔어요. 미사가 시작되었죠. 주님의 기도를 노래하는데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괴로웠어요. 목이 잠겨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어요. 도대체 하느님은 내 속을 어디까지 들여다보고 계실까? 문득 벌거벗고 서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직도 불안하고 매사가 두렵기만 해요. 어디에도 맘을 주지 못하고, 뿌리내리지 못하고, 안식을 얻지 못하고 있어요. 마치 길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오로지 무섭기만 한 일상의 연속일 뿐이에요. 그래도 수녀님 덕분에 내가 참 좋아지고, 너그러워지고 있어요. 화를 내도 다 받아 주시니까요." 

 

아오스딩은 전격성 간염으로 2차 감염이 되어 입원한 지 3주만에 그렇게 원하던 죽음을 맞이하였다. 가족은 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지만 아오스딩의 모습은 자신을 찾은 미소로 평화스러웠다. 영안실과 장례 미사에는 젊은 친구들로 가득 찼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고 시를 쓰던 아오스딩의 유고집을 친구들이 출판해 줄 예정이다. 그 책이 나오면 내 마음이 조금 위로받을 수 있을까? 

 

* 여보, 사랑했어. 

 

대장암으로 9년을 소파에서만 생활했던 형국 씨는 응급 상황이 되어 한밤중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일 죽더라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딱딱한 병원 침대에서가 아닌 정든 소파에 앉아 담배 한 모금 피우며 자신의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가족들은 동의했고, 형국 씨는 집으로 가자 마자 그 맛있는 담배를 피웠다. '이제는 내가 졌어. 안 될 것 같아. 여보 사랑했어. 그런데 두려워. 아, 혼자 가야 돼? 당신은 아직 때가 안 된 것 같아. 아이들은 당신이 잘 맡아 줘.' 하며 신문과 우유를 매일 소파 옆에 놓아주던 딸과 부인에게 키스를 하고 다음날 임종했다. 

 

* 아내의 영양제를 선물한 라파엘 씨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아내가 자신의 췌장암 말기 간호마저 밤낮으로 하는 것을 늘 걱정하던 라파엘 씨는 매일 미사나 성체 조배를 거르지 않는 신앙인이었다. 통증 조절을 받으면서 참을성이 많았기 때문에 전화가 수녀원으로 올 때는 어느 정도의 아픔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찾아가 보면 웃음을 잃지 않고 고마워하는 분이었다. 장미를 사 드리고 부인과 함께 사랑 고백도 하시라고 하자 라파엘 씨는 백만 불짜리 미소를 머금으셨다. 어느 날 그 몸으로 택시를 타고 종로엘 다녀왔노라고 했다. 

 

다음날 "여보,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나 때문에 몸이 많이 상했는데, 어제 종로 약국에 가서 영양제 두통을 사 왔어. 몸 생각하고 꼭 먹어야 해." 하고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두 눈을 감았다. 

 

* 서른한 살의 요한 

 

"수녀님 나이가 몇이에요? 영화 구경도 같이 가고 싶었는데. 하느님이 저를 고쳐 주시면 수녀님 발이 되어 드릴게요. 주일 새벽에도 오셔서 관장도 해 주시고 주사도 놔 주시는 고마움에 보답하고 싶어서요. 오늘도 제발 엄마가 솜씨 좋게 만든 콩국수 좀 같이 드시고 가세요. 지난 번 망가진 의자 고치려고 망치질을 힘있게 하는 친구를 보다가 '나도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인데, 망치 들 힘조차 이제는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어요. 어머니도 연세가 많으신데 고생하시고...... 어버이날 어머니 손을 잡고 '엄마, 나는 이 세상에서 엄마를 제일 사랑해.' 하고 말했어요. 우시더라구요. 수녀님, 매일 오시기 힘드신데 저희 집에서 주무시면 안 돼요? (......)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계속 얹히는 것이 있어요. 부끄러워서 차마 이야기할 수 없었는데요, 내 배가 아플 때 어머니께서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맛사지를 해 주시면 가라앉고는 했는데,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평소에 술을 많이 드시고 어머니를 막 대하기도 하셨는데 암으로 통증이 심하셨어요. 아버지가 좀 주물러 달라고 하셨는데도 아버지가 미워서 한 번도 해 드린 적이 없었거든요. 내가 아프고 보니 온통 후회뿐이에요. '그렇게 아프실 때 한번만이라도 해 드릴 걸' 하구요." 아버지 만날 것이 두려웠을까. 그러나 모두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장가 못 간 막내로서 부모님을 너무 생각한 나머지 그렇게 투사했던 것이라고...... 이층 창가에서 힘은 없으나 평화가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던 모습이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 창피해서 외출도 하지 않고 점점 우울증에 시달렸다. 자녀를 잃은 부모는 미래가 사라지는 것 같은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일 년이 지났는데도 전화하면 울음을 터트렸다. 어떤 말보다도 아들을 알았던 사람으로서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연락하는 일이 그래도 도움이 되었다. 울면 우는 대로 원망하면 원망하는 대로...... 

 

* 레지오 단장 데레사 씨 

 

기도 생활에 열심이었던 레지오 단장 데레사 씨는 임종을 앞두고 불안해 하였다. 걱정이 있느냐고 하자 "남편과 두 아들은 걱정 안 해요. 걱정되는 것은 바로 나예요. 수녀님,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두려워요. 예수님도 이렇게 아프고 두려우셨을까요?" 그 느낌 그대로를 그분께 이야기하자고 했다. 쓴잔을 거두어 달라 하시고 목마르다고 하신 그분의 외침을 그대로 느껴 보자고 했다. 십자가의 고통 중인 예수님을 데레사 씨가 지금 위로해 드리고 있다고 격려했다. 데레사 씨는 임종하는 날 아름다운 꿈 이야기 나눠 주고 갔다. 

 

* 마흔 살 명길 씨는 위암 말기로 아픈 배를 감싸고 중국까지 20여 일을 다녀왔지만, 효과가 전혀 없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기로 하였다. 침대에 누워 일어날 수조차 없는 몸이 되었다. 우리를 처음 만났을 때는 심한 통증에 비해 비교적 평화로운 모습이었으며, 오히려 이뇨제 '알닥톤'을 알사탕이라고 하며 유머를 아끼지 않던 분이었다. 다섯 살 된 아들 요한, 일곱 살 된 딸 로사는 고사리 손으로 아빠의 등을 맛사지 해 주었다. 명길씨는 남아 있는 날들을 의미 있게 쓰고 싶다며 성서를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냉담하고 있는 남은 형제들과 친척들에게는 성서를 읽는 것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며 성서를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가훈을 사랑과 자비로 정하고 아이들과 사랑하는 부인에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임종 때 옆에 있겠다고 했는데 비가 억수같이 내려 조금 늦게 도착했더니 이미 평화스럽게 임종한 뒤였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보며 "아빠, 몸이 차가워져요. 차가워지면 죽는 거예요? 아빠 얼굴을 보고 싶어요. 열어 주세요. 아빠를 다시 한 번 안아 보고 싶어요. 안아 봐도 돼요? 우리 아빠도 십자가에 못박혔어요? 그러면 아직도 아파요? 이제 아빠랑 소풍도 못 가요? 아빠!" 하며 그 어린것이 홑이불로 덮어 놓은 아빠를 끌어안고 엉엉 우는 것이었다. 

 

아빠 옆에서 머뭇거리는 이런 아이들을 혼을 내서 나가게 하거나, 울지 말라고 달래기보다는 손을 함께 잡고 홑이불을 열고 고인의 모습을 보여 주며 평화롭게 하늘 나라 가셨고 아빠의 고통은 끝나서 이제 아프지 않고, 아빠를 안아 보고 이제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리고 우는 아이들을 안아 주고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말해 준다. 또한 아빠가 아팠을 때 해 준 맛사지를 아빠는 얼마나 시원해 했는지 모른다고 말해 준다. 흔히 장남 장녀한테 울지 말라고 하거나, 부모 없는 자식이란 소리 듣지 않게 살라는 말을 하는데, 그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받아 주기 전에 하는 그런 말들은 압박감만 안겨 줄 뿐이다. 점점 더 말이 없어지고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진다. 또한 신앙심이 깊다고 하여 눈물을 감추며 하느님 나라로 가셨다고만 이야기하면 본인의 슬픔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후에라도 표현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3. 죽는 순간까지는 살아 있다

 

죽음 앞에서는 내 몸에 뱄던 가치관, 신앙, 관계, 인식들이 뒤바뀌고 산산히 무너지고 벼랑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된다. 두렵다. 이제는 정말 혼자서 가야 하는 사실이 두렵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로의 여행. 그러나 우리는 죽어갈지언정 죽는 그 순간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몇 시간, 며칠이 될지는 몰라도 결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떨며 사랑했었노라고, 나랑 살아 줘서 고마웠노라고, 훌륭한 삶이었다고, 함께한 추억들을 기억하겠노라고 하는 고백들과 뜨거운 포옹은 남은 가족들이 이제는 텅 빈 공간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큰 힘이 된다. 서로서로 인정해 주는 확인이다. 

 

 

4. 남은 가족들에 대한 위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부대끼며 살 때 가려 있었던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서로 슬퍼함을 감추고 쌓아 가기만 했던 비통함들이 시작될 때 그 감정이 표현되도록 반드시 도와 주어야 한다. 임종할 때까지 밤낮으로 환자 옆에서 시달리는 가족들을 불러내어 숨 좀 쉬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얼마나 힘드냐고 격려해 주어야 한다. 남편 잃고 일 년을 넘게 새벽까지 불 켜 놓고 잠 못 이루는 미망인의 심정이 자녀들에게 투사되어도 그 외로움을 받아 주어야 한다. 부끄러워서 표현하지 못했던 죄스런 설움들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인간이기에 느끼는 충격, 고통, 죽음, 애도 등 이러한 모든 감정 안에서 우리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같은 고통을 겪으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섬세한 사랑을 또한 느낀다.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자 하시는 그분과의 일치를 느낀다. 우리는 환자를 방문할 때마다 손을 꼭 잡으며 만남에 대해 감사한다. 그러다 돌아가시면 가족들이 애쓰셨다고 마주 안기도 하고 말없이 손을 잡기도 한다. 영안실이나 장례 미사는 될 수 있는 한 꼭 참석한다. 장례 미사와 고별식은 우리의 고해를 승화시켜 준다. 그리고 삼우제 후 방문을 하고 슬픔이 너무 깊어 헤어나지 못하면 따로 계속 방문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그리고 사별 가족 정기 모임에 안내한다. 

 

나는 나의 감정만이 아니다. 나는 그보다도 더 심오한 존재다. 성령으로 지어진 하느님의 성전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부조리와 한계, 허무에 몸부림치는 것은 아마도 영원을 향한 갈망 때문일 것이다. 지극히 순간적 사건인 죽음의 문, 이 세상의 여정을 마치고 영원한 세계를 향해 들어가려고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인도하시기 위해 성령께서 마중 나와 계신다. 

다달이 모이는 사별 가족 모임에서 오 년이 지난 과부들에게는 이제 우리가 중매쟁이가 되어야겠다. 새로운 성령의 바람으로 더욱 삶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말이다. 

 

2년 동안 이렇게 이별한 이백여 명의 죽음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 산을 오를 때마다 산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그분들을 그리워하며 수녀원이 마치 친정처럼 슬픔과 고생을 함께 나누었던 가족들과 이 시를 나누고 싶다. 

 

기 다 림 -- 이현주

 

나 당신을 기다릴 수만 있다면

당신을 기다리는 기다림으로 살 수만 있다면

당신 마침내 오지 않아도 좋다.

기다리는 것은 바라는 것

기다리는 것은 견디는 것

기다리는 것은 끝내 믿는 것

태어나면서 나의 삶은 이미 당신을 기다렸고

죽을 때까지 나의 세월은 당신만을 바라리니

오, 내가 당신을 기다릴 수만 있다면

당신을 기다리며 죽어 갈 수만 있다면

당신 마침내 오지 않아도 좋다.

 

[사목, 1998년 11월호, 권오숙(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수녀, 모현 호스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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