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6일 (수)
(녹)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4: 초세기 (3)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12-19 ㅣ No.867

[전영준 신부의 가톨릭 영성을 찾아서] (4) 초세기 ③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이성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풀다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 초상화. 위키피디아.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 형성의 실마리는 여전히 초세기 유다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계시 종교’인 유다교는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가 절대 기준이자 신앙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연 종교’에 친숙했던 주변 나라 사람들은 상대적인 가치 기준에서 신을 믿었고, 인간적인 기준에서 신을 설명했습니다. 급기야 이교 철학자들은 계시 진리에 기반을 둔 유다교 하느님에 대해 인간 이성으로 납득 가능한 설명을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다교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계시 종교인 그리스도교도 교회 안팎에서 유사한 요청에 직면했습니다. 중세 중기 스콜라 신학이 출현하면서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그리스 철학 체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신학 체계가 출현했던 것도 이와 관련됩니다. 따라서 먼저 유다교가 세상의 사고방식과 이방 종교의 도전을 극복하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잘 설명하려 시도했던 노력의 결과를 이후 그리스도교가 적극 활용했습니다.

 

 

유다인 철학자 필론

 

팔레스티나 밖에 형성된 유다인 집단 거주지인 디아스포라 출신 유다인들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기원전부터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는 지리적인 요충지로서, 그리스 언어, 사상, 문화,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였습니다. 이곳 사람들도 인간의 희로애락을 반영하여 여러 신들이 활동하는 그리스 신화에 비해 계시 종교로서 유일신 사상을 지닌 유다교가 이성적으로 잘 이해하기 어렵고,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과 동시대 인물이면서도 예수님 및 그리스도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던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다인 철학자 필론(Philo Alexandrinus, B.C.20~A.D.42)은 칠십인역 구약 성경을 친숙하게 사용하는 지역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 문화권에 익숙했지만, 유다인 전통에 따라서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조상들의 전통과 신앙을 익혀 유다교 하느님의 개념을 올바로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론은 유다인으로서 플라톤 철학과 유다교 사상을 잘 조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믿는 이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중기 플라톤 사상

 

중기 플라톤 사상가들은 실재(reality)를 최상의 초월적 원리인 일자(一者, the One)가 있는 ‘초월적 차원’과 관념의 세계인 ‘로고스 차원’, 그리고 감각의 세계인 ‘물질적 차원’으로 구분했습니다. 사실 플라톤 사상에서는 우리를 둘러싼 ‘물질계’인 감각의 세계와 눈에 보이는 것 배후에 있는 ‘이데아계’인 관념의 세계로 이분했습니다. 따라서 플라톤 사상에서는 최상위 차원인 이데아계가 중기 플라톤 사상에서는 두 번째 차원으로서 로고스 차원이라고 불렸고, 첫 번째 차원에 존재하는 초월적 일자에 종속되었습니다.

 

여기서 필론은 세계 외부에 존재하면서 세계 내에 능력을 발휘하는 최상의 원리를 하느님으로 파악했습니다. 또한 필론은 로고스를 세상 안에 들어오는 초월적인 신의 작용을 이해시키고, 하느님과 이 세상을 연결시키는 중개자로 파악했습니다. 즉, 로고스는 신의 맏아들로서, 또 사람들을 위한 신의 통역자로서 천사들과 같은 단계에 있는 실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불가지성

 

중기 플라톤 사상을 따랐던 필론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 육신이 머무는 감각의 세계인 물질적 차원과 유일한 초월자 신이 머무는 초월적 차원은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관념의 세계인 로고스 차원에 속한 로고스를 통해야만 초월적인 하느님의 존재를 알 수 있고, 본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로고스를 통해야만 초월자 신에게 접근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해석한다면, 필론이 파악한 하느님은 우리의 지성으로는 직접 파악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불가지성(不可知性)의 특징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본 것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상급과 처벌」, 39). 그런 까닭에 필론은 처음으로 하느님을 “이름을 붙일 수 없고, 발설할 수 없으며, 그리고 어떤 관념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분”(「꿈」, I,67)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게다가 필론은 하느님에 대해 알기 시작하는 것조차도 자기 부정, 즉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절망하고서야 비로소 ‘계시는 분’을 알기 시작한다.”(「꿈」, I,60) 그러므로 인간 영혼이 하느님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신비스러운 체험의 여정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여정

 

인간 영혼이 하느님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 영혼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면서 차차 그분께 다가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권능을 통해서 하느님을 깨닫기 시작한 인간 영혼은 본격적인 상승의 단계를 거치면서 최상의 단계를 향한 영적 여정을 걷게 됩니다.

 

“첫째 단계는 점성술을 버리는 일이다. … 다음 단계로 정신은 스스로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 셋째 단계는 정신이 스스로에게서 벗어나 추적하기도 해명하기도 어려운 만민의 아버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희망을 향하여 길을 열어 놓으면, 하느님 그분을 인식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정확한 깨달음 또한 동시에 쟁취하게 되는 최정상의 단계일 것이다.”(「아브라함의 이주」, 194~195)

 

결국 상승의 여정을 통해 도착한 곳은 하느님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며, 그마저도 하느님의 은총이 있어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도달한 곳은 결국 인간은 하느님을 헤아릴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 여정을 설명하는 필론의 방법론은 일찍이 그리스도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근세 이전까지 정작 유다인은 필론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리스도교가 필론과 그의 사상을 전했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필론은 고대 교부들 및 중세 신학자들이 다소 추상적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을 플라톤과 그의 후대 사상을 가지고 이해 가능하도록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6년 12월 18일, 전영준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신학 교수)]



1,79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